소설리스트

6화 (6/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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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축분을 만들어 놓기 위해 연재를 멈추었었나? 하는 리플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비축분이 있다면, 탈락이라 공지 되어 있더군요.

어제까지, 그러니까 금, 토 양일간 제가 속해있는 밴드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비록 공연팀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만, 사운드 맞추는 것과, 시스템 보는 것 때문에 이리 저리 신경쓰다보니, 글에는 손도 대지 못했네요.

공연 끝나고, 밤 새 뒤풀이 하다가, 일요일 오후 3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축분이 완전히 바닥난 지금, 매일 매일 일 하면서 글 써내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무당마검 때 처럼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죽을 맛입니다.

이번 주, 그리고 다음 다음 주가 고비이니, 넘기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듯 하네요.

응원해 주시면, 해 주시는 만큼, 달려 보겠습니다. 

그럼, 주목해 주십시오.

  

짧은 시간. 

첫 살인의 강렬함을 삭히고 있는 청풍.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위, 불길은 은선대를 타 넘어 연화봉 꼭대기를 붉게 밝히고 있는 중이다. 

걸음이 달리기가 되고, 자하진기가 일으키는 신법이 되어 산길을 나아가는 그의 앞에 하나의 갈림길부터, 제자들의 시신 대신 흑의 무인들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쪽에서부터 누군가 올라 온 모양이다.’

아래쪽으로 이어진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다.

산 밑까지 뻗어 있는 산로(山路)는 오행진인이 올라 왔던 방향. 청풍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 변고를 보고 산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그 혼자만은 아닌 것이다.  

심호흡을 한 번 더 하며, 진득하게 눌러오는 마음의 부담을 털어냈다.

넓어지는 산길을 지나, 곧게 만들어진 화강석 계단에 이른다.

화산 경내로 향하는 계단, 드디어 난장판이 된 장운대가 눈에 들어왔다.

‘심하구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괴롭히는 가운데, 막 ‘우지끈’ 하고 무너지는 정진묘 전각 한 귀퉁이가 보이고 있다.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늦은 밤. 맑은 공기가 적막한 연무장을 누비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타오르는 불길과 피냄새로 가득하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화르르륵!

번져 나오는 불길이 기세를 올렸다가 사그라 들었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다는 듯, 넘실 넘실 줄어들고 있는 화광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새삼, 가슴을 쳤다. 

‘어찌하여.......!’

장운대 안으로 들어온 청풍은 딱히 뭔가를 찾는 것도 아니면서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곳 저곳, 살아있는 제자들이 있다. 거동이 가능한 자들이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또 다른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 불길을 막아 보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타탓!

청풍은 곧장 장운대를 가로질러 은선대 쪽으로 향했다.

옳은 선택인가.

모른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챙기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습격자들.

이렇게 놀랍고도 무서운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그 흉악함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니, 그 흉험함은 실제로도 맞닥뜨려 보지 않았던가.

사방 천지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들만 보아도 질릴 지경이다. 다짜고짜 살초(殺招)들을 날려 왔던 자들, 그런 자들이 이리도 많다니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하지만 가야 한다.

저 안 쪽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들이 그의 망설임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기 위해 애썼다.

‘이왕 마음을 먹었다면.......!’ 

죽음을 모르고 뛰어드는 한 마디 부나방이라도 된 양, 청풍은 달리는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신음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며 달리는 그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오만가지 복잡한생각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파팍!

은선대 초입. 청풍은 한 사람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계단 한 쪽 구석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 때문이다.

가슴에 길게 그려진 상처에선 더운 피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중, 익숙한 얼굴이다. 보무제자들의 무공과 일과를 감독하곤 했던 매화검수, 유자서였다.

“보무.......제자........인가?”

“예.”

작은 목소리. 죽어가고 있다. 저만큼이나 깊은 상처, 아무것도 모르는 청풍이 봐도,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리로, 와서 나를.......부축해라. 나는 싸워야........돼.”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만한 상처를 입고서도 싸울 생각을 한다.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잃지 않는 긍지다.

‘매화.......검수.......!’ 

이것이 바로 화산파의 자랑, 매화검수다.

굽히지 않는 강인함이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화산의 고고한 기상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순백의 매화였다.

청풍이 다가갔다.

손을 들어오는 유자서. 흔들리는 그 팔에는 이미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검 한 자루 들어올리기도 힘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일까. 유자서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오행진인께서.......오셨다. 일부러........부르지 않았어. 나는 잘 한 것이다. 이런 부상자에게 시간을 지체하면.......안 되니까.” 

자부심이 어려 있는 표정이다. 

유자서의 손을 잡은 청풍, 눈이 부시다. 그 표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피워 올리는 기개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보무.......제자로는 어렵겠지. 나와 함께 가자. 그리고 싸워. 너도. 화산의 힘을........보여 주는.........것이야........”

뚝 뚝, 끊기는 말이 잦아든다. 

잦아드는 말소리가 손에 잡힌 힘까지 앗아 가는 듯, 유자서의 팔이 축 쳐지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부여잡은 매화검수의 손은 천근처럼 무겁기만 했다. 

툭.

유자서가 죽었다. 

계단을 울리는 그 팔의 무게가 억장으로 쏟아진다.

이 싸움은 생각보다 더욱 위험하다.

드높은 매화검수마저도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 청풍은 두려움에 질려 있음에도, 돌아가는 대신 평검수가 떨군 진검하나를 주워들었다.

유자서의 매화검은 손대지 않았다. 어찌 감히 그 고고한 영혼의 동반자를 건드리겠는가.

꺾여 버린 매화의 그림자에 한 번 더 눈길을 준 청풍은 이제,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매화검수. 

그런 사람들을 선배로 두었다. 그런 사람들을 목표로 생각했었다.

물러날 수는 없다. 

설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일개 보무 제자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야 한다. 여기까지 그 장대한 그늘 속에서 그를 키워 준 화산파다.

사부님의 화산파.

어떻게든 나서야 할 때다. 두려워 할 때가 아니었다.

챙! 채챙!

은선대를 지나, 저 멀리 상궁이 보였다.

병장기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온다.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선검수들과 평검수들이 흑의 무인들을 맞아 혼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 화산파 제자들 쪽이나 흑의 무인들이나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가......아니야.’

기이한 예감이다.

청풍이 거들어야 하는 싸움은 이곳의 싸움이 아니라는 느낌. 

그가 맞닥뜨려야 할 싸움은 더 안에 있다.

상궁. 

그토록 오랜 시간 화산파에서 살아왔음에도, 한번도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아 보지 못했던 장문인의 거처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달려가던 청풍.

그가 몸을 띄워 상궁을 둘러친 담벼락 위에 올랐다.

밖에서 볼 때와는 또다른 광경이 그 안에 있다. 하늘을 날 듯 움직이는 흑포 괴인 하나, 떼로 몰려드는 흑의무인들과, 놀라운 무공을 뽐내는 세 명의 권사(拳士)들이 거기에 있었다.

‘매화권사!’

도복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문양. 그럼에도 검을 들지 않았으니, 곧 매화권사들이다. 

펼쳐내는 권격에 날카로운 발경이 함께한다. 

예측할 수 없는 흑포 괴인의 움직임도 놀랍지만, 처음 보는 매화권사들의 진신 무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태을미리장!’

한 매화권사가 펼쳐내는 무공. 익숙했다. 

유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장법은 청풍의 그것과는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능숙하다는 것.

한 순간 자하진기의 도움을 얻어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상대의 손속에 맞춰 하나 하나 대응하는 정교함이었다.

‘그 보다.......!’

매화권사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은, 배우고 싶은 것이었으나, 자꾸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상궁의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기이한 기운이다.

마치 그를 찾고 있기라도 하듯, 넘실대는 공기. 

청풍은 담벼락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흑의 무인들이 막아섰지만, 청풍의 신형은 전에 없이 세밀했으며, 또한 전에 없이 빨랐다.

“되었다.”

상궁의 내부가 보일 때.

청풍은 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사라진다.

양쪽으로 길게 뻗은 양날겸을 든 작은 여자 하나.

흑포괴인들이 상궁 내에 있는 기둥들로부터 색색의 길다란 목갑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타앗!”

강렬한 기합 소리와 몰아치는 경력이 청풍을 한 발 물러나게 만들었다.

흑포괴인 셋에 맞서 싸우고 있는 이. 

오행진인이다. 

매화권사들을 통괄한다는 이 강력한 장로에 대해서는 청풍으로서도 익히 알고 있는 바다. 사부님께서도 수차례에 걸쳐 그 무예를 칭찬하신 바 있었던 강자. 그의 무공은 뒤 쪽 매화권사들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평검수! 저것을 막아!”

경황 중이니, 착각을 한 모양이다.

흰색 수실. 평검수의 진검을 들고 있기 때문이었을지.

평검수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으면서도 재촉을 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큭!”

너무나 다급했기 때문일까.

무리를 하며 흑포 괴인들을 뿌리치려던 오행진인이 결국 일장을 얻어맞고 만다. 

비틀거리는 오행진인.

“어서!”

청풍은 이를 악물며, 목갑들을 들쳐 올리고 있는 흑의무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 목갑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문에 중요한 물건인 것쯤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위잉!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지.

상궁 내부를 날듯이 가로질러 검을 휘둘러보는 청풍이다. 

항상 지니고 있었던 목검보다 훨씬 더 묵직한 진검이 매화삼릉검의 기세를 받아, 장쾌한 속도로 뻗어 나갔다.    

쩡!

단숨에 튕겨나가는 검.

‘너무 빠르다!’

안 된다. 이것은.

이 흑포괴인들은 앞서 싸웠던 흑의무인들과 전혀 다른 자들이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청풍 정도로 맞설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콰쾅!

일격을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요행이다.

땅을 친 장력. 상궁의 단단한 화강석 바닥에 금이 가 있었다.

‘상대할 수 없어.’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다.

자살행위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다.

기다란 목갑을 어깨에 둘러메고들 있다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아닐 것이다. 한 팔만으로 상대한다 해도 청풍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인께서도 굉장히 급하셨군요. 이런 애송이에게 바란다고 될 일이었던가요.” 

요녀의 목소리가 상궁을 울릴 때.

청풍은 오싹한 공포를 느꼈다.

당장 괴이한 모습들 때문에 흑포괴인들에게만 신경을 썼었는데, 그럴 것이 아니었다.

이 요녀는 흑포괴인보다 훨씬 더 강하다.

무시무시한 힘.

요녀 작은 몸집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만 저희는 가봐야겠습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거든요.”

팡! 파파팡!

어떻게든 돌파해 보려 애쓰지만, 흑포괴인 셋은 도무지 틈을 보이지 않았다.

백중세.

삼 대 일로 동수다. 답답한 상황.

그 때다.

청풍의 눈길이 한 흑포 괴인에게 닿은 것은.

세 흑포 괴인들이 네 개의 목갑을 운반하려니, 한 놈은 양 어깨 모두에 목갑을 걸쳐 들고 있는 상태다.

청색의 목갑과, 백색의 목갑.

두 팔을 다 못쓴다는 뜻. 어쩌면 통할 수도 있었다. 

‘가능할까.’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박차고 나간 청풍의 눈빛과, 이 쪽을 보고 있던 오행진인의 눈빛이 한 순간 빠르게 교차되었다. 요녀에게서 그토록 큰 두려움을 느꼈음에도, 어떻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 몸을 숙이며 달려든 청풍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날이 바람을 갈랐다.

쩡!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휘두른 흑포괴인의 발목에는 강철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튕겨 나가는 검자루를 억지로 쥐고 있는 청풍의 몸으로 무서운 경력들이 집중된다.

흑포 괴인 둘.

양영귀의 요녀까지.

‘끝인가!’

죽는다.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몸을 띄우며 뒤 쪽으로 회전했다.

간발 차로 첫 번째 공격을 피해낸 후, 그 다음 일권이 날아들던 순간.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와 청풍의 위기를 구해낸다.

매화오품지(梅花五品指). 

화산 제일의 지법(指法), 오행진인이 날린 일격이었다.

피잉!

또 한번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요녀를 향해서. 휘두르는 양영귀에 부딪친 지공(指功)이 ‘땅!’하고 경쾌한 금속음을 울렸다.

퍼벅! 파팡!

청풍을 구해낸 대가로 두 흑포 괴인의 육장을 허용하고 만 오행진인이다.

비틀거리는 오행진인.

그의 손에서 마지막 매화오품지가 펼쳐지고, 청풍의 발도 착지함과 동시에 다시 땅을 튕겨냈다.

목표는 하나다.

양팔에 목갑 두개를 걸쳐 맨 흑포 괴인.

청풍의 검이 흑포괴인의 움직임을 멈칫하게 만들었을 때.

매화오품지의 경력이 날아가, 흑포괴인의 오른쪽 어깨, 백색의 목갑을 관통했다.

파삭!

한 귀퉁이가 부서진 그 백색 목갑.

보무제자 한 명과 장로 한 명이 성공해 낸 조그만 공격이 빚어낸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뭉클 뭉클.     

큰 구멍이 난 백색 목갑의 안으로부터, 아지랑이와 같은 백색 기운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마침내 눈에 뚜렷이 보일 정도로 솟아나온 기운에 흑포 괴인의 입에서 기이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키이이이엑!” 

텅.     

고통을 느끼는 듯 몸부림치던 흑포 괴인이 백색의 목갑이 땅으로 던져 버렸다.

양영귀의 요녀가 눈을 굳히고, 흔들 흔들 쓰러지는 오행진인의 얼굴에 득의의 표정이 떠올랐다.

  

“이 놈!”

양영귀의 요녀가 커다란 호통을 내질렀지만, 청풍을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날아든 것은 백색의 목갑 방향.

기이한 주문을 발하면서 양영귀를 가져다 댄다. 하얀 기운이 살아있는 듯 양영귀의 접근을 막아내니, 신비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죽이겠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을 발하는 요녀다.

그녀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위귀. 묘귀. 필귀! 신검을 들고 내려가라! 백호검은 포기한다!”

양영귀의 요녀가 청풍을 노려보았다.

극도의 살기(殺氣).

하지만 청풍은 살을 저며 오는 살기에도, 오직 하나, 백색의 목갑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무엇일까.’ 

백색의 목갑에서 한 움큼씩 흰색의 기운이 흘러내릴 때 마다, 거기에 맞추어 심장이 한 번씩 뛰고 있음을 느낀다.

두렵다.

두려우면서도 친근하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었다.

오행진인을 쓰러뜨린 세 흑포괴인들이 날아들고 있고, 앞에서는 무시무시한 요녀의 일격이 다가온다.

단숨에 목숨이 날아갈 순간임에도, 급박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느릿 느릿 보이는 힘의 흐름.

바닥에 가라앉은 하얀 기운이 그의 발을 휘감고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우웅!

청풍의 본신 수준으로는 절대로 피해낼 수 없었던 일격이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요녀의 공격임에도 상승 영역의 회피를 보여 준 청풍이었다.

몸을 숙이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하다.

그토록 강하게 느껴졌던 흑포 괴인들의 쇄도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몸을 젖히고, 옆으로 빼는 움직임에 흑포괴인들의 공격들이 무산되고 말았다. 

퀴융!

뒤에서 짓쳐오는 양영귀의 일격은 파공음부터가 달랐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날린 청풍이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난다.

그의 눈은 이미 그 자신의 눈이 아니다. 

다른 무엇인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몸.

쳐내 오는 양영귀를 막은 것은 청풍이 팔을 뻗어 땅에서 들어올린 백색의 목갑이었다.

살벌한 겸신(鎌身)에 부딪친 목갑이 한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파앙!

비산하는 나무 조각 사이.

드러나는 형상이 있다.

휘황한 백색 검날을 지닌 한 자루 검!   

폭이 손가락 하나의 길이를 넘어갈 만큼 넓었으며, 넓은 검신에는 포효하는 백호의 전신 문양이 새겨져 있어, 그 압도적인 자태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한다. 

검신에 길이는 이척 가량.

검병(劍柄)은 한자에 달하여 긴 편으로 강호에 흔히 통용되는 날렵한 모양의 검이 아닌, 고대의 검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꽈악.

청풍의 손이 검병을 쥐었다.

하얗게 요동치던 기운이 빨려들 듯, 그 손을 통하여 청풍의 온 몸에 머물었고 먼 시간을 건너 뛴 전설이 청풍의 혈맥을 타고 흘러 심장에 이르렀다.

“이얍!” 

쩡!

청풍의 손에서 첫 포효를 발하는 백호검의 기세는 말 그대로 도약하는 한 마리 범과 같았다.

양영귀의 날을 쳐 내며 앞으로 곧장 내질러 나간다.

뒤집어 회전시킨 두 번째 겸신(鎌身)이 백호검의 전진을 막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소용없다. 상체를 뒤로 재껴 피해낸 요녀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악!

옆으로 물러나는 그녀의 뒤로부터 흑포괴인들이 날아들었다.

찍어내듯 내리 꽂는 흑포괴인의 손바닥.

청풍은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백호검을 위로 뻗어 올렸다.

쩡! 쓰걱!

강철 족쇄가 단숨에 부서지며 흑포괴인의 손목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그 오랜 시간 봉인된 채, 한번도 손질하지 않았을 터인데도, 백호검의 날은 천하명검의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에에엑!”

잘려진 손목과 팔뚝이 하얗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돌덩이처럼 딱딱해 지고 있는 느낌.

괴인의 마기에 반응한 서방 백호, 금신(金身)의 힘인 모양이었다.

“백호 금신! 이런 애송이가 서방 백제(白帝)의 진력을 끌어내다니!”   

양영귀, 요녀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와 당혹감을 쏟아내고 있는 그녀. 그녀를 앞에 둔 청풍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흐려졌던 눈에 빛을 되돌리고 있었다.

‘이것이........검(劍)?’

정작 청풍은 그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 하다.

손에 든 것에서 전해지고 있는 힘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맥동하는 진기.

스스로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무슨 무공이든 전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하진기도 삼단공의 벽을 넘어 사단공의 초입까지 나아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우웅!

검명(劍鳴). 

검이 울부짖는다.

그 진중한 울림, 청풍의 발이 앞으로 내딛어지며, 그 팔로 검의 의지를 행한다. 강렬하고도 날카롭게 흘러드는 그 검날에 흑포 괴인들의 몸이 휩쓸려 든다.

파카캉!

강철 족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격에 부서지는 팔.

뻗어내는 검에, 흑포괴인 하나의 어깨가 통째로 날아갔다.

‘도대체!’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매화삼릉검이 아니다. 

펼쳐 본 적이 한번도 없는 무공이다. 그러면서도 강하다. 공격 칠할에 방어 삼할. 호쾌하고, 장중한 검도(劍道)였다.

퍼억!

흑포괴인 하나의 머리가 부서졌다.

잔인한 손속이라는 것도 별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을 뿐.

“거기까지다!”

순식간에 두 흑포 괴인을 잃은 요녀가 앙칼진 외침을 발하며 달려 든다.

신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백호, 맞이하는 귀병(鬼兵)의 이빨들이 춤을 추었다.

쩡! 쩌저정!

검이 곧 무공을 만들어 낸다.

이해할 수 없는 기사(奇事)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청풍이다. 믿을 수 없는 일, 백색의 진기가 온 몸을 타고 흐르며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치칭! 쩌엉!

이십 여 합.

청풍은 점차 숨이 막힘을 느꼈다. 위험하다. 알 수 없는 공능이 그의 검격을 이끌고 있지만, 이제 한계다. 익숙하지 않은, 모르는 무공이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그 진기는 점차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헐거워져 갔다.  

“합!”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떨쳐 보았다. 더 강한 검격이 나간다. 하지만, 요녀의 응수는 현란하면서도 정교했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청풍이, 아니, 백호검이 펼쳐내는 무공도 강했지만, 진신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양영귀의 요녀는 고강하기 짝이 없었다. 

이기지 못한다.

청풍의 본신 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무공의 힘을, 그 깊이를 청풍의 신체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익숙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일격 일격에 쑥쑥 빠져나가는 진기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청풍의 기해(氣海)가 충분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꽝!

시간이 갈수록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백호검에서 전해지는 기운도 점차 그 양이 적어진다. 마치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가, 점차 그 흐름이 줄어드는 형세와도 같았다.

촤악!

도포 자락이 길게 찢겨 나갔다.

호방하게 이어졌던 미지의 검도가 더 이상 발동하지 않고 있다. 청풍이 펼치고 있는 검도는 이제 매화삼릉검. 어찌 된 것인지 불가해한 현상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것이었군!”

왜 그런 것인가.

어찌하여 신비의 검기가 매화삼릉검으로 바뀌었는가.

청풍은 영문을 몰라도, 양영귀의 요녀는 내막을 알아챈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내쳐오던 일격에 고삐를 풀고, 사납게 쳐 들어오는 요녀다. 쏟아지는 살기어린 공격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나다가 남아있는 흑포괴인의 일격을 맞이했다.

요녀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양 쪽에서의 공격이라니, 감당할 수가 없다. 손속이 어지러워지면서, 그렇게도 유장하게 흐르던 자하진기까지 바닥을 드러내 버렸다.

쩡!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은 오로지 신검 덕분이다.

휘두르고 있는 백호검만큼은 가히 신검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하고 있다. 진기가 실리지 않더라도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이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흑포괴인은 이 백호검에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듯, 아까와 같이 흉폭한 기세로는 달려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공격을 해 오더라도, 간헐적일 뿐. 지닌 바 사기(邪氣)가 검이 내뿜는 정기(正氣)에 반응하여,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 틀림 없었다. 

취링! 슈각!

양영귀가 한 마리 영사(靈蛇)와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백호검을 타고 올라와 청풍의 팔뚝을 베어냈다.

핏줄기가 길게 솟았지만, 청풍은 검을 놓지 않았다. 검을 놓치는 순간 죽는다. 자하진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쩡! 쩌정!

몇 합이련가.

기진한 상태에서도 무아지경에 빠져 들며, 근근이 요녀의 살의를 버텨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무슨.......!’

한 순간, 백호검이 새롭게 일으키는 변화가 있다.

예상 밖의 그 변화.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빨려 들어간다.......!’

이미 쥐어 짤 만큼 쥐어 짠 진기다. 

하지만, 어디에 그런 진기가 남아 있었는지.

청풍에게 힘을 주고 있는 백호검이 이제는 반대로 그의 진기를 빼앗아 가기 시작한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 터이지만, 이대로라면 원정까지 손상당할 수 밖에 ???다. 제어할 수 없는 병기(兵器)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크윽!”

아찔해지는 기분과 함께 코 언저리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코피가 쏟아졌다. 

혈맥을 타고 있었던 백색의 금기(金氣) 역시 갑작스레 요동을 치며 전신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선사했다.

위이이잉!

망가지는 몸.

힘의 대가(對價)라고 해야 하는가.

일순간, 다시금 강해진 면모를 보이는 청풍이다. 붉게 충혈된 눈과, 피를 쏟아내는 얼굴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드러내면서도, 양영귀를 상대하는 손속이 더 빨라져 있었다.

‘안 돼........’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대로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놓으면, 죽는다......!’

죽음의 순간을 느낀 것이 오늘 하루에만도 벌써 몇 번째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또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정말로 죽는다. 

매화검수 유자서의 의연한 죽음을 떠올렸다.

백호검이 얼마만큼 그의 힘을 빨아먹더라도. 

전신을 괴롭히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버텨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

청풍에게 구원의 손길이 온 것은 죽을 듯 죽을 듯, 쓰러지기 직전의 일이었다.   

몰아치던 요녀의 공격이 딱 멈춘다.

한 쪽으로 돌아가는 몸. 언제 그렇게 악독한 손속을 보였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오시고 말았군요. 무광검께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이른 곳, 상궁의 담 아래, 깡마른 도사 한 명이 나타나 있었다. 

“네가 이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렸다.”

뽑아드는 것은 칙칙한 빛깔의 나무 막대기다.

한 자루 목검에 천하를 건다는 초절정고수, 목영진인.

막강한 기도가 넘실넘실 일어난다. 

거의 의식을 잃어가는 청풍으로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조금 늦었네요. 무광검의 경공은 그 목검만도 못한 모양입니다.”

“건방지구나. 꼬마 계집.”

절도 있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사다. 그가 목검을 들어 요녀를 겨누었다.

“오시면서 보셨을 텐데요. 그것들이 더 급하지 않던가요?”

“쓰지도 못하는 보검(寶劍) 나부랭이들, 내 알 바 아니다.”     

일대 파격. 

파격적인 언행이다.

무광검, 병기의 날카로움을 찾는 것은 진정한 검도가 아니다. 

오직 목검만을 사용하는 장로로서 온갖 신병이기를 눈 아래로 여긴다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화산파가 그리도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던 사방신검마저 신경 쓰지 않을 줄이야. 

“굉장하군요. 사문의 물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시끄럽다!”

신경을 긁으며 기이한 섭혼의 묘를 발휘하던 요녀의 화술(話術)이 전혀 먹히질 않는다.

화산 장로로서 상상조차 힘든 억센 말투다. 당황한 요녀. 목영진인은 쓸데없는 대화로 심력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 이 흉사를 벌려 놓은 요녀를 징계하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어린 제자야! 그깟 보검 따위, 버리든 아니면 이 요사한 계집에게 죽든, 걸리적거리지 말고 어서 비켜나라!”

청풍을 향한 호통이다.

온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린 청풍이 백호검을 고쳐 잡았다.

방해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해도, 어찌 물러나겠는가. 

안간힘을 쓰는 청풍의 모습에 목영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양영귀의 요녀가 청풍을 돌아보더니, 입을 연다. 

“대단해요. 대단해. 이 녀석은 제가 죽여 드리지요.” 

위잉!

무서운 기세로 몸을 날리는 요녀다. 

양영귀의 흉폭한 날이 허공을 가를 때.

말은 냉정하게 했어도, 가만 둘 수 없었는지 목영진인도 몸을 날렸다.

쒜에엑.

두 사람.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

그리고 한 사람.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

청풍.

삼엄하고도 사나운 공격을 맞이하여 청풍은 한 발작 앞으로 나선다.

온 힘을 다해 떨쳐낸 백호검에서 하이얀 빛무리가 일어났다.

쩌어엉!

백색의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양영귀의 요녀가 튕겨 나간다. 달려들던 목영진인의 목검이 그녀를 겨누는 것을 보며, 청풍은 마침내 온 하늘이,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털썩.

힘이 풀린 다리,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청풍.

목검과 양영귀가 부딪치며 발하는 충돌음이 그의 위로 내려앉는다. 

감기는 눈에 담아둘 수 없는 광경, 백호검과 함께 한 첫 싸움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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