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툭........
백호검으로 땅을 쳤다. 흙먼지가 묻었지만, 그 휘황한 백색은 지저분해 진다고 줄어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백호신검.
그리고 금강호보.
‘과분한 것을 바라다니........신검을 쓰는 자격이 그리도 높은 것이었나?’
대책이 서질 않는다.
자신이 가진 무(武)의 그릇. 그리 대단한 그릇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하진기가 대단한 심법이란 것은 알고 있었어도, 어쩌면 그는 스스로 그것조차 제대로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동년배 매화검수들에 비하여 당연히 아래일 것이라는 한계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격이 높다.......그렇다면, 나는 그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는 고민이었다.
당장 을지백이 백호검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보면, 그에게도 가능성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자신이 생기질 않는다.
‘나약하다. 내력에 미치지 못하는 정신상태.’
을지백은 올바로 본 것 같다.
분명, 청풍 자신은 정신적인 면이 많이 부족하다.
과단성과 냉정함, 승부욕과 자신감 같은, 고수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들이 튼튼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매화검수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것이리라.
“휴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 쉬며 일어났다.
화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숲 저편 멀리 보이는 관도에 시선을 주었다.
흘러가는 바람과 길.
멀리 멀리 길게 뻗어있는 그 관도는 그 끝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
‘계속 이렇게 있어서야........’
여기서 하염없이 금강호보와 씨름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을지백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실지로 그의 진실한 임무는 무공 수련이 아니다.
사방신검의 나머지.
다른 세 신검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리로 다시 와 금강호보를 연마하게 되더라도, 일단 안가보까지는 가 보자.’
금강호보를 완성해 놓으라고 했다. 그것이 이곳에서 계속 연련만을 하고 있으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무공의 완성이란, 결국 그것을 실전에 써 보면서만 얻을 수 있다. 홀로 하는 수련은 결국 투로의 반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행낭과 피풍의를 챙기고, 백호검을 목갑에 넣었다. 그러고 보면 검집도 필요하다. 언제까지든 이렇게 커다란 목갑으로 챙겨 다닐 수만은 없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땅을 딛고 걸어가는 이.
광활한 하늘이 펼쳐지고, 삼월의 태양이 내리쬔다.
아직은 천하를 모르는, 그러면서 천하로 나아가는, 젊은 범의 한 발자국이었다.
* * *
섬서 남단. 인하(因河).
비옥한 지대, 꽤나 오래 된 도시다.
한수(漢水) 줄기 따라 서 있는 고풍스런 전각들이 지난 세월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허기진 것도 허기진 것이지만, 먼저 옷부터 마련해야 하겠다.’
청풍이 이 도시에 이른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여기서 남동으로 몇 십리만 더 가면, 화산 속가 제자 안리평이 운영하는 안가보가 있다. 지저분한 몰골로 갈 수야 없으니, 옷도 새로 챙기고, 가면서 필요한 식량도 사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금강호보를 익히려 며칠 동안 굴러먹다 보니, 화산의 황색도복이 무척이나 더러워진 상태다. 심지어 찢어진 곳까지 있을 정도. 화산 도사란 언제나 정갈하고 절도 있게 행동해야 하는 신분, 엉망인 모습으로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바였다.
지저분한 것을 가리기 위해 피풍의를 둘러친 채 걷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제법 따뜻한 날씨, 경장을 입고 다녀도 될 판에 두꺼운 피풍의를 걸치고 있자, 답답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야야, 저기.......”
“와아.........”
포목상을 찾기 위해 걷고 있던 청풍은 문득,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이유가 피풍의 때문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풍의가 아니라 청풍의 얼굴을 보고 있다.
긴 머리, 아무렇게나 묶어 머리 뒤에 늘어뜨리고서 우수에 찬 듯한 눈빛으로 걷고 있자니, 모두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머쓱해진 심정으로 들어간 포목점에서 황색 도복을 두 벌을 샀다. 여전히 따라붙는 시선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요기거리를 구하러 마을에 갔었을 때에도 다소 그러한 것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그 때야, 화산 도복을 보고 그러는 것으로 생각 했었지.’
반 쯤은 도망치는 심정이 되어 두리번 두리번 객잔을 찾았다. 어디에나 있는 객잔이 오늘 따라 왜 이리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잣거리를 걷다가 이른 곳, 저 멀리 풍류객잔이란 간판이 보였다.
잘 되었다는 심정으로 걸음을 빨리 하던 중이다.
문득 한 켠에 있는 노상(路上) 점술가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만사통달(萬事通達). 운수형통(運數亨通).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구다. 별반 대단할 것이 없는 것이었지만, 묘하게 시선을 끌고 있었다.
‘고수(高手).......!’
눈이 가는 이유는 깃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 깃발 아래, 멍석을 깔고 앉아 있는 추레한 노인 때문.
점점 가까워지는 그 점쟁이 노인이 한 순간 청풍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젊은이.”
청풍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미세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내력이 실려 있었다. 누구라도 불러 세울 수 있을 만큼 기이한 울림이 들어있다. 예사 점쟁이가 아니었다.
“이리 와 보게.”
허름한 마의(麻衣)에 삐죽 삐죽 제대로 손질조차 안 한 머리카락이다만, 청풍을 곧게 쳐다보는 눈빛만은 마치 화산 산속의 도문(道門) 도인(道人)들처럼 맑기만 했다.
그 목소리에, 그리고 그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발을 옮긴 청풍.
점쟁이 노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기수난도(氣數難逃)라, 천기와 운수는 벗어나려 해도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정해진 운명은 고쳐지기 어렵다는 것, 젊은이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될 운명을 타고 났구나.”
이 역시, 어떤 점술가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노인은 그렇게 가볍게 넘겨버릴 인물이 아닌 듯 하다. 전해지는 기도가 그야말로 범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 발하는 말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찾고 있는 물건이 보통 물건이 아니다. 머나먼 시대의 성물(聖物)이 세상으로 나왔으니,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늘과 땅은 결코 인자하지 않은 법이다. 네 개의 신물에 많은 시련이 따를 것이다.”
마치 청풍의 행보를 그 두 눈으로 본 것과 같다. 실로 예사롭지 않은 능력이었다.
놀라움을 느끼는 청풍, 그의 눈을 꿰뚫어 볼 듯, 깊이 살피는 노안(老眼)이 번뜩 기광을 발했다.
“오른쪽 광대뼈에 금기(金氣)가 왕하니, 백호(白虎)가 젊은이의 천운에 자리한다. 백호는 경신(庚申)의 금신(金神)으로 추(秋) 삼월에 오는 흉장(兇將)일지니, 색정음행을 좋아하고 교행불해하는 신이라 지실응(知失應) 하면 세력이 약해지고 난조된다. 흉기와 유혈을 조심하고 수해를 경계하라.”
“그렇다면........백호는.......흉신(凶神)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흉사를 말하니, 노상의 점술일지언정, 신경이 아니 쓰일 수 없다. 물어보는 청풍의 목소리엔 그 마음의 동요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흉신(凶神)과 길신(吉神)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백호는 중원 서방의 흉장임에 분명하나, 백호에 지득하면 그 기세가 융대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닌바 무용을 뽐내게 되니, 길운을 뽑아낼 수 있다. 천운을 받아들여 인명으로 이끌어 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의 몫.......’
“자네의 천기(天氣)에는 흉과 길이 함께 하고 있다. 사람을 만나겠다. 좋은 인연으로 만나 많은 일을 이어가게 되리라. 그 길에 창대한 광명이 있길 기원하겠다.”
“아, 감사합니다.”
복락을 빌어주니, 어찌 고맙지 않을진가.
세상사를 초탈한 노인의 표정이건만, 청풍은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깊이 포권을 취했다.
“그 순한 마음이 기껍다. 다만, 이 강호에서 그와 같이 순탄한 마음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드리라. 나는 강호에서 만통자로 불리는 이다. 자네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으니, 다음에는 어떤 천운을 짊어지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만통(萬通)의 별호를 쓰고 계셨군요. 화산 제자 청풍이라 합니다.”
“화산의 제자임은 그 웅대한 서악의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청풍, 좋은 이름이다. 지니고 있는 그 뜻만큼, 한 줄기 바람처럼 살아보는 것도 해 볼만한 일이리라.”
만통자라 칭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섬주섬 깃발을 챙겼다. 마치 이 청풍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한 인상이었다.
“아직은 모자르나, 잘만 닦으면 그의 마음에도 들지 모르겠다. 복채(卜債)는 사절이다. 자네에게는 받고 싶지 않다.”
깃발을 둘러메고 깔려있던 짚단 멍석을 말아 등에 진다.
떠돌이 점술사의 모습 그대로.
그 겉모습만큼은, 왜소한 체격 저 안으로부터 느껴지는 강력한 내기(內氣)가 착각처럼 생각될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다.
“명부마도(冥府魔道) 명왕신기(冥王神器) 역시 세상에 나왔다지만, 그 주인을 볼 기회는 아직 멀었구나. 나는 이만, 그가 말한 세 번째를 구경하러 가야겠다.”
휘적 휘적, 알아듯지 못할 말을 하며 사라지는 뒤에 청풍은 다시 한번 포권을 취했다.
‘이것이 강호. 강호인이라는 것인가.’
강호 무림.
기인이사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곳이다.
저 만통자 역시 그러한 기인이사들 중 하나일 터, 산중과 들판의 자연이 말하는 강호가 아니라, 얽이고 설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곳이 여기에 있었다.
스스로 강호에 나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청풍.
하지만, 그가 오늘 만나게 될 기인은 만통자 하나만이 아니었다. 바로 눈 앞, 풍류객잔에 또 다른 강호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풍류객잔.
만통자가 걸어 놓았던 깃발 어구처럼 너무나도 흔한 이름.
일층을 식당으로 쓰고 이층과 삼층을 객잔으로 쓰고 있는, 그야말로 평범한 객잔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의 외침을 목례로 받으며 들어간 내부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넓고 깨끗했다.
사람도 몇 없어 더욱 널찍해 보이는 일 층이다.
게다가 문 저편 안 쪽으로는 벽 한 면이 탁 트여 있어, 지척에 흐르는 한수(漢水) 줄기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멋지게 생기신 공자님이십니다. 식사, 방, 어느 쪽으로 하시겠습니까? 이 풍류객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강에 접하여 있어 최고의 흥취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인하의 명물인 매화교가 한 눈에 보이는 유일무이의 객잔이기도 하지요.”
‘매화교?’
매화의 이름을 들으니 반갑다. 멀리 본 강변 한 쪽에는, 과연 몇 그루의 매화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조그만 돌다리를 감싸고 있는 중이다. 이미 질 시기가 다 되었는데에도 몇 송이 피워 올린 분홍빛 매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손님?”
강한 섬서 억양에 호들갑스럽게 보이는 점소이다. 말없이 창쪽만으로 바라보자, 청풍을 다시 한번 재촉했다.
“손님, 방을 드릴까요?”
“아, 그렇게 하지요. 방을 일단 내 주시고. 씻을 물도 좀 올려 주시오.”
“다섯 냥 되겠습니다.”
“여기 있소.”
동전 삼십 문이라면 그리 비싼 가격도 아니다. 열 문짜리 동전 세 개를 내려 놓고 방으로 올라가 옷부터 갈아입었다.
물을 가져 왔기에 문을 열어주자,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변했다.
“히익! 화산 도사님이셨군요! 워낙에 미남이시기에 몰라보았습니다. 미리 말씀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
무슨 반응을 보여 줘야 할지 청풍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용 사현에 강호 전반의 지식이 거진 다 있다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 까지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말없이 바라보는 청풍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점소이가 머리를 굽실 굽실 조아리며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얼굴을 씻고, 요기를 하기 위해 내려가려니, 백호검 목갑에 생각이 닿았다.
제법 큰 목갑, 항상 가지고 다니기엔 역시나 거추장스러운 까닭이었다.
‘확실히, 검집이 필요하겠어.’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하나 장만해야 할 모양이다. 행여나 어디서 싸움이라도 생긴다면, 그때 가서 목갑을 열고 검을 꺼내는 것 또한 웃기는 일이었다.
내친 김에 해결하는 편이 좋다.
청풍은 바로 백호검 목갑을 둘러멘 채,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딩. 디딩.
귓가에 흘러드는 소리.
들려온 것은 아래층, 식당에서부터 조그맣게 퍼져 올라오는 금음(琴音)이었다.
딩.
넓게 뚫려있는 창가, 황적색으로 칠해진 나무 기둥에 기대어 선 한 남자가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몸체가 하얀색인 육현금을 들고 있다.
긴 머리카락에 곱상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악사(樂士)가 아니로군.’
딩. 딩. 딩.
슬쩍 슬쩍 뜯는 듯한데, 깊고도 부드러운 소리가 우러난다. 발걸음을 잡아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촤륵. 촤르륵.
주렴을 걷고 하나 둘. 들어오는 사람들. 수근대며 기웃 기웃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자하진기 예민한 청각에 이 악사의 이름이 섞여 들어왔다.
“백현옥룡이래.”
“그, 오명인(五名人) 중 하나라는?”
“그래, 그 백현옥룡. 왜 얼마 전에 이 근처에 왔다고 했잖아.”
꽤나 유명한 이름인 모양이다. 무작정 밀려드는 사람들의 눈에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디디딩. 턱.
세 개의 줄을 스르르 울려내더니, 딱 멈추는 백현옥룡이다.
기대고 있던 기둥에서 몸을 바로 세우며 창 바깥 쪽 난간에 손을 올렸다.
퉁!
잠시 후.
강변 쪽에서 한 줄기 북소리가 들려왔다. 각자 탁자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한 명의 풍채 좋은 남자가 삿갓을 눌러 쓴 채, 소고(小鼓)를 어깨에 메고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텅!
땅에 내려놓는 통나무 둥지 소리는 소고(小鼓) 대신이다.
터텅, 하나 더 내려놓는 통나무에 한 사람의 신형이 더 나타났다.
지이이잉.
묵현금이다. 짧은 머리, 얼핏 파계승이라 생각될 정도로 짧게 깎은 머리였다.
“백현옥룡 상운, 맞소?”
묵현금을 지닌 남자가 객잔 쪽을 향해 물었다. 백색의 육현금을 지닌 곱상한 얼굴의 남자가 부드러운 신법으로 난간을 타 넘으며 고개를 입을 연다.
“제가 상운입니다. 칠절신금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당신을 보자고 청한 칠절신금이요. 이쪽은 내 의형, 강호에서는 건곤고라 불리고 있소.”
공손한 말투와 평대.
그냥 보기에도 백현옥룡의 연배는 칠절신금이라는 남자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강호인들의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다지만, 실지로도 칠절신금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백현옥룡보다 수 년 이상 앞서 있었다.
“신금과 건곤고.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너무 거창하게 말하지 마시오.”
세 사람이 서로를 향하여 포권을 취했다. 큰 미소를 짓는 칠절신금이 호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뵈었으니, 솜씨를 아니 볼 수 없소. 한 곡 청해도 되겠소?”
“미진한 솜씨, 보여드리기 부끄럽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백현의 향기는 천하를 취하게 만든다 하였소. 지나친 겸손은 도리어 화가 되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도무지 어쩔 수가 없군요. 귀를 더럽힐까 저어됩니다만, 한 곡 연주해 보겠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결 속에 기민함이 함께 한다. 정통에 입각한 탄법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변칙적인 느낌을 주는 연주였다.
딩! 디이잉! 딩! 디딩!
강변을 울리는 청아한 금음. 그 백현금의 몸체처럼 하얀 음색이다. 아주 짧은 구절만으로도 힘을 받는 그 솜씨. 청풍은 자신도 몰래 스르르 창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