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팟.
사위가 어둑 어둑 해질 무렵이다.
비로소 안가보의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堡)라 함은 작은 성(城)을 이야기 한다.
흙을 쌓아 적을 방비하는 요새로서 큰 장원이나 작은 무파(武派)의 근거지의 의미로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었다.
‘완전히.......당했구나.’
널리 둘러 친 돌담.
일부는 무너져 있고, 일부는 불에 그슬려 있었다.
조사 차 와 있는 듯, 관병 몇 명이 보였다.
청풍을 발견하고 몇 마디 서로가 수군거리지만, 그의 접근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황색 도복, 화산파임을 알아본 것 같았다.
‘심하다.’
화산본산도 심했지만, 이 곳도 만만치 않다.
피해 상태가 막심했다.
거적 데기에 둘둘 말린 뭉치 수십 개가 한 곳에 쌓아져 있다. 하나 하나가 사람크기만하고,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겨 온다.
인명 피해, 시체들이었다.
무너진 담벼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관병들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린다. 일부러 외면하는 느낌, 강호의 일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았다.
불에 타버린 정원과, 까맣게 골자만 남은 건물들이 그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 저곳을 한참이나 둘러보았지만, 별무 소용이다.
그저 격한 싸움이 있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청풍으로서는 더 이상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 왜 왔는지, 회의감이 들려고 할 때.
미세한 파공음과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터벅.
발에 밟힌 나무 기둥 잿더미에서 회색 먼지가 살짝 피어오른다.
왼쪽 문설주에 한 명.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담벼락 위에 각각 한 명씩.
세 사람의 신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들은.......!’
세 사람 모두 같은 복장. 도사들이다. 그것도 화산파. 같은 산의 인물들이었다.
‘집법원!’
도복이되 특별한 도복이다.
이런 옷을 입은 화산 문하는 오직 집법원 도사들 뿐.
왼쪽 어깨 어림에 검(劍) 문양, 흑색인 바, 화산 문규를 수호하는 집법원 무인들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임무를 담당하는 정검대(正劍隊) 검사(劍士)들이었다.
‘정검대가 왜 여기에.......?’
안가보.
집법원이 올 이유가 없다.
안가보가 무너진 것, 외부의 공격에 대한 사항이라면 매화검수들이나 서천각이 움직인다. 집법원 정검대는 내부의 일, 그것도 기밀 사안에 대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이기 때문에, 청풍으로서도 그 흑색 정검(正劍) 문양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이었던 것이다.
“화산파. 신분을 밝혀라.”
냉랭한 눈빛, 서릿발 같은 기도다.
저절로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말투, 청풍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보무.......제자. 청풍입니다.”
그의 대답.
정검대 검수들끼리 기이한 눈빛을 교환한다.
“찾았군.”
정검대 검수 한 명의 목소리.
기이한 감각이 느껴진다.
자하진기.
‘위험하다. 무엇 때문에?’
청풍은 불쑥, 머릿속에서 발해지는 경계심에, 한 발을 뒤 쪽으로 끌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검사들.
같은 문파, 화산의 선배들이다.
그럼에도 빠져나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온 몸을 지배한다. 사냥터, 큰 덫에 걸렸다면 바로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보무제자 청풍 송환(送還). 백매화 원로원 도문영부 회수. 소지한 보검(寶劍) 회수. 장문인의 명이시다.”
한 마디 한 마디. 얼음장과도 같은 어투다.
비로소 깨닫는다.
이들은 청풍을 잡으러 왔다. 가장 큰 이유는 백호검일진저.
그저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저는 원로원, 검신께서 명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위압감을 억지로 버텨내며, 입을 열었다.
순간, 양 쪽에서 조여 오는 날카로운 기운!
싸아악.
어느새 집법원 정검대 검사 두 명의 손이 검자루에 올라가 있다.
“순순히 따라오라. 저항 시, 제압한다.”
청풍의 항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서서히 다가오는 세 명의 고수들.
여태, 철기맹을 생각하고 있었더니, 사문의 집법원에서 위협을 가해온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따라가야 되는가.
화산으로 돌아가면, 해결이 될 것인가.
모른다.
아니, 해결되지 않는다. 강호에 대하여,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하진기가 주는 느낌만은 믿는다.
이들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습격자들의 추적은 검문에서 따로 이루어지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세 신검의 회수를 해 내길 바라신다는 지시가 있었다. 신검 회수의 목적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비밀리에 하라는 당부도 계셨지.”
“강호가 어떤 곳인지, 그것은 어차피 혼자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저 길을 보여주면, 찾아 낼 것이라 하시니, 너에 대한 신검께서의 기대가 크신 듯 하다. 또 다른 안배가 있을 수도 있겠고........”
오행진인의 말씀이 생각났다.
홀로 걸어가라는 말.
그에게는 그가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 집법원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매화신검, 옥허진인의 명을 따르는 것이었다.
“저는, 받은 명을 행해야만 합니다.”
텅!
금강호보.
뒤로 뛰는 청풍의 발끝에서 먼지가 일었다.
호쾌하게 움직이는 신형, 정검대 검사들이 얼굴을 굳히며 제각각 몸을 날려왔다.
창! 차창!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살벌했다.
정면에 둘.
다가오는 속도가 엄청나다.
화산에서 싸웠던 흑의 무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터엉!
청풍의 발이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몸을 돌려 담을 넘고, 다 무너져 가는 지붕을 가로질렀다.
쐐액!
검이 날아든다. 집법원 검사들은 하나 같이 매화검수 급의 무공을 지녔다더니, 과연 그럴 만 하다. 암향표 신법은 최적의 속도를 내고 있으며 내쳐오는 검에 실린 기세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왼쪽!’
망설임 없이 몸을 기울였다.
자하진기가 금강호보에 감응하여 활발히 움직인다.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청풍의 신형,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은 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화악!
“!!”
뒤에서 뿐 아니라, 옆에서도 전개해 온다.
양측, 속도를 내며 거리를 좁혀 오는 가운데, 두개의 검이 번뜩 빛을 발했다. 살기(殺氣)가 느껴질 정도로 삼엄한 검력.
화산파 십이 계율, 제 육계. 화산문도는 다수가 한 명을 핍박하지 아니한다는 규율조차 벗어난 것이 이들, 집법원 정검대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피할 수 없어.’
도망가기 어렵다.
이들은 하나 하나가 청풍 이상의 고수였고, 쫓아오는 암향표 신법 역시 여타의 제자들과 격이 달랐다.
텅! 우지끈!
다 부서져 가던 지붕이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휘청, 균형을 상실한 청풍이다. 그가 측면으로 떨어져 내리다 뒤에서 짓쳐오는 기파를 느끼고,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쒝!
어깨 어림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 검격은 진짜다. 몸에다 구멍 한두 개는 뚫어버리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큿!”
경험 부족이다.
세 방향에서 몰아치는 검, 흑의무인들과 싸웠을 때도 세 명이었지만, 이들은 그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촤악!
팔뚝을 스쳐가는 검날. 순식간에 피가 배어 나왔다.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는 아픔이다.
속수무책.
이쪽에서도 공격을 들어가지 않고서는 큰 부상을 당할 판이었다.
“타앗!”
기합성을 내질러 두려움을 쫓아내고, 등 뒤에 걸친 목갑을 통째로 들어 휘둘렀다.
동작이 크니, 그새 틈을 찾아 검격이 쏟아진다. 정신을 집중하고 호보를 밟아, 어렵사리 피해냈다.
팡!
민활하게 움직인 청풍의 몸, 손바닥이 목갑의 뚜껑을 밀어냈다. 날려 보낸 목갑 뚜껑을 피하며 달려드는 정검대 검사 앞으로, 무릎을 써 목갑 아래쪽을 쳐 올렸다.
터엉! 치이잉!
탄력과 받아 치솟는 백호검!
공중에서 검병을 잡아 비틀며 뛰어 오른 청풍이다.
쩌엉!
날아드는 검격을 쳐 내고, 그 반탄력을 이용해 더 높이 몸을 띄웠다.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밤하늘, 백호검의 백광이 이제 뜨는 달빛을 받아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피해야.......!’
검을 마주쳐 보고 확실히 알았다.
정심한 내력과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전 경험.
백호검의 힘을 빌려,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도 이들 중 한 명 조차 이기기 힘들 것이다. 죽을 각오라면 곧, 이쪽에서도 살수를 뿌려야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상대는 집법원 무인들이다. 제아무리 지은 죄가 없다 한들, 함부로 검을 들이대는 것조차 꺼려지는 이들이었다.
‘틈을.......!’
틈을 만들어 몸을 뺀다 한들, 따라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지.
금강호보는 훌륭한 신법이다만, 장거리로 달리는 데에도 그 위력을 발휘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쩡! 쩌정!
끊임없이 움직이며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것이 실전이다.
일대 일 산타라면 아무런 사심 없이 싸울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싸움이란, 주변 상황을 함께 받아들이며 치러지기 마련이다.
무공을 펼치는 와중에도, 계산을 해야 한다. 이처럼 여럿을 상대로 제약이 많은 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금강호보, 전력으로 일격을 가하고, 물러난다.’
순간 순간이 곧 배움이자 습득이다.
능력 이상의 상대들을 만나며 빠르게 성장한다. 실전이란 무공 수위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법. 무공 외의 것들이 숙달되지 않으면, 고수라 불릴 수 없었다.
“탓!”
텅! 터터텅!
찍어내는 호보의 진각에 땅이 울렸다.
뒤로만 움직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청풍. 강렬한 기파가 일어났다.
“이얍!”
매화삼릉검, 일격을 내 뻗었다.
백호의 금기가 타고 흘러, 수비를 무력화 시키는 검격이 만들어졌다. 갑작스레 상승하는 기세, 그렇다. 금강호보는 공격형 보법이다. 회피와 방어를 위한 신법이 아니었다.
“헛!”
집법원 정검대 검사가 안색을 굳히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삼선검(三仙劍)에 이은 송풍검(松風劍)을 연환으로 펼쳐내며 청풍의 검격을 막아냈다.
정검대 검사.
여유롭게 내치던 검법이 일변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만든다.
그러나 청풍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텅!
몸을 돌려 쾌속하게 달려 나가는 청풍이다.
옆에서 짓쳐드는 또 하나의 검격에 청풍은 다시 한번 금강호보의 진각을 밟았다. 백호검을 휘돌려, 횡으로 내 긋는다. 부딪치는 정검대 검사의 검이 불꽃을 튀기며 튕겨나갔다.
‘위험!’
하나 더 있다.
왼쪽으로 따라 붙은 정검대 검사가 정교한 일검을 뻗어 온다. 장로님 한 분이 시범삼아 보여준 적 있었던 배운신검(徘雲神劍)이었다.
‘이것만 막으면.......!’
청풍의 검이 매화삼릉검의 검결을 타고 단호하게 맞서 나갔다. 초식의 운용에서 부족한 것은 금강호보로 거드니, 허점을 비집고 들어오던 검격을 용케 뿌리칠 수 있었다.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청풍이다.
하지만.
한 두수로 완전히 돌파하려 했다면, 그것은 다시 없는 오산이다.
집법원 정검대라는 이름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금 거리가 벌어졌다고 했지만, 암향표만이 화산 신법이련가.
근거리를 순식간에 압축하는 비류표를 펼치며 따라 붙으니, 청풍의 양 옆과 뒤에는 금새 위협적인 공격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런.......!’
너무 빠르다.
조금은 앞서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정검대의 행사에 저항하려 했던 선택 자체가 실수였던 모양이었다.
텅! 쩌정!
두 번 더 어찌 어찌 검격을 막아내고, 속도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무너진 안가보 담벼락을 지나쳐 관도로 접어든다. 때 아닌, 추격전,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질 않았다.
‘싸워야 하나.......?’
어차피 잡힐 것이라면, 조용히 잡혀 주는 것이 나을련지도 모른다. 적도들도 아니요, 같은 화산파의 선배들이다. 끌려간다 한들, 큰일을 겪겠는가. 기껏 백호검을 빼앗기거나, 폐관수련을 명령받을 것이었다.
‘여기서 포기할 바엔, 처음부터 순순히 따라갔어야지.’
순간 순간 드는 망설임.
버려야 한다.
오용 사현. 전술이다. 한 번 내린 선택이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무에 그리 어렵겠냐고 생각했건만, 실제로 닥치니 자꾸만 마음에 틈새가 생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
마음을 굳게 먹기로 하고, 극성으로 끌어 올린 자하진기에 힘을 더했다.
‘내력이 부족해.......’
텅!
기(氣)가 따라주질 않았다. 화산에서 흑포괴인들과 요녀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요행이다. 무공도 있고, 신병도 있는데 그것을 충분히 활용할만한 기력이 없다. 모든 문제가 자신 안에 있는 바. 많은 것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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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처음으로 유조아에 연재를 시작해 보았습니다.
시스템이 이곳과 좀 달라, 어색한 감이 있네요.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면, 독자 성향도 이곳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듯 하고요.
유조아에 연재을 시작했다해서, 고무림에 소홀해질 일은 절대 없을 테니.....
끊임없는 연참만을.....^^
유조아까지 와주셔서 응원을 해 주시는 분들 계시다면, 그것또한 무한히 감사드려야 할 일이겠네요.^^
아 그리고.....
혹, 1번 글 청풍 이미지 파일을 예쁘게 색칠 해 주실 수 있는 분 없을지.....
대문 사진 달아보려 그렸던 것인데, 색깔이 없으니 약간 허전하네요.^^
(페인터나 포토샾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서요.-_-a)
한가위 새벽, 여러분 모두, 행복한 한가위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