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되는 데 까지 해 보자.’
굳건하게 잡은 마음. 오기가 솟아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강호에 나온 그다. 짧은 시간 많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두고 보면 딱히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합!”
쩌엉!
몸을 휘돌리며 백호검을 뒤로 내질렀다. 검과 검이 얽혀들고, 큰 소리, 충돌음을 남겼다. 힘이 벅차다고 느끼지만, 어쩔 수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뒤에서 들어오는 검격을 막아낼 수밖에.
터엉! 파아아아.
마음을 단호하게 붙잡으니, 검의 움직임도 한결 좋아지는 듯 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은 청풍. 또 다른 도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른쪽에서 들려 온 낭랑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저편 숲 쪽, 객잔에서 만났던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
‘왜 여기까지!’
설마하니 청풍 자신을 쫓아오기라도 한 것일까.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당장 급한 상황.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여인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가까워지는 여인의 모습.
이쪽을 향하여 손을 뻗는 것이 보인다.
‘무슨!’
파앙!
여인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이어지는 파공음.
피이이잉!
하얀 빛을 내는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와 힘을 품고서 청풍의 뒤편, 정검대 검사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따앙!
검에 맞는 충돌음이다.
멈칫, 한 검사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다음.
여인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다른 표적을 조준하는 모양이었다.
파앙! 피이이이잉!
또 하나.
이번에는 보았다.
하얀색의 구슬 형 물체가 여인의 손에서 튕겨 나오고 있는 것. 지법(指法)에 실어 보이는 일종의 암기술(暗器術)이었다.
땅! 위잉!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그것이 다른 한 검사의 검과 부딪쳤다.
역시나 줄어드는 속도.
삼엄한 기세가 줄어드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다.
‘고수(高手).......!’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했지만, 지푸라기도 보통 지푸라기가 아니다.
이 여인은 고수다.
이 거리, 지법으로 화산 집법원 정검대 검사를 방해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놀랄만한 실력이었다.
“어서!”
외침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달리기 시작한다. 한 마리 비상하는 학(鶴)처럼, 우아한 신법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숲 속으로 얽혀드는 다섯 개의 그림자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교묘하게 몸을 피하며 앞장서는 여인. 청풍은 느껴지는 물 냄새에 먼 전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수(漢水)!’
찰랑이는 강물이 보인다. 한수 강물의 지류로 깊이가 꽤 되어 보이는 강이었다.
“이쯤에 있을 텐데!”
다소 당황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한 목적지가 있던 것이 아니었나. 무턱대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계속 달려가는 청풍과 여인.
이제 제법 요령이 생긴 것일까.
정검대 검사의 검격을 한 번 더 막고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았다.
“아! 저기!”
다행한 일. 막무가내로 청풍을 이끌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 강변에 한 척의 꽃배가 떠 있다. 색이 바래고 허름하여 꽃배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소선(小船)이었지만, 당장 도주할 수단이 생기니 마냥 반갑기만 했다.
촤아악!
앞 쪽에서 달려가던 여인이 땅을 스쳐 미끄러지면서 몸을 돌렸다.
파앙! 파앙! 파앙! 파아앙!
양 손에 두 발씩.
네 개의 백색 구슬이 장쾌한 파공음을 울리며 정검대 검사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피잉! 따당!
짧은 순간.
막고 피하며 자세가 흐트러진 사이, 거리를 조금 더 벌었다.
그대로 도약하는 여인, 삼장이 한참이나 넘는 거리를 단번에 뛰어 넘으며 꽃 배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혀를 내두를만한 경공이었다.
“뛰어요!”
한번에 넘어갈 수 있을지.
텅!
강하게 박찬 땅거죽이 푹 패이고, 청풍의 몸이 강 위를 날았다. 정점에 올라 떨어지기 시작하는 몸, 모자란다. 금강호보의 약점, 이런 것에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첨벙!
소선에 이르기 겨우 몇 치를 남긴 채 물에 빠지고 만다.
꼴사나운 일, 곧바로 번쩍 치솟아 소선 위에 올랐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니, 정검대 검사 두 명이 비류표 신법으로 강물을 넘어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청풍의 그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빠른 도약이다. 그러나 그렇게 강물을 건너오는 그들의 시도는 그야말로 정검대 검사들답지 않은 실수라 할 수 있었다.
파앙! 피이잉!
완전한 조준.
여인의 손에서 나아간 지탄(指彈)이다.
두발, 연이어 한 발 더 쏘아내자, 내력을 최대한 실은 그 강력한 암기에, 공중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정검대 검사들이 뚝 떨어져 내렸다.
처엄벙!
“아하! 꼴좋구나!”
물에 빠진 검사들을 본 여인이 한 없이 밝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뜻밖이다.
화산 정검대 검사들을 물에 빠뜨렸다는 것. 그녀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스스로 알기는 할까.
그처럼 자유분방한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청풍. 이에 여인이 흠칫, 입을 다물며 청풍을 외면했다.
“앗!”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그녀다. 정검대 검사들 쪽을 본 그녀가 깜짝 놀라며 경호성을 발했다.
촤악! 촤아악!
쫓아오고 있다.
화산파 집법원 검사로서의 체면은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다. 물에 빠진 그대로 헤엄을 쳐 따라붙는다.
고수들답지 않은 면모.
아니다. 고수들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이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집요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뭐해요! 어서 노를 저어요!”
파앙!
헤엄쳐 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또 다시 지법을 날린 여인이다. 한 검사는 숫제 그 암기를 피하여 잠수해 들어가고, 한 명은 절묘하게 몸을 뒤집으며 다시 헤엄을 쳐 왔다. 순식간에 지척에 이른 그들. 당장이라도 배 위로 올라갈 것 같은 조급함에 여인이 다시 한번 청풍을 재촉했다.
“빨리! 노를 저으라니까요!”
허나,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황급히 청풍을 돌아 본 그녀. 청풍이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노가.......없는데........”
입이 딱 벌어질 것 같은 마음을 눌러 참는 여인이다.
‘실수다!’
노가 없는 것. 그렇다. 그녀의 실수였다.
이 배는 십중팔구 버려진 배다.
이 배. 청풍을 따라 안가보로 오는 도중, 석양이 내리쬐고 있던 이 강변을 달리면서 발견했던 것일 뿐이다. 그저 주인 없이 흘러가던 꽃배였지, 따로 준비해 놓았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당혹스럽기 그지 없는 이 사태에서도 순식간에 정신을 수습한 그녀다.
뱃전으로 몸을 날리고는 큰 소리로 기합성를 발했다.
“이얍!”
촤아아아악!
장력이다.
물 위를 때린 장력에 조그만 소선이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발휘한 기지, 청풍도 그녀처럼 수면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파아앙!
물방울이 비산한다. 조금 더 속도가 붙는 소선, 하지만 멈추었던 그 잠깐 사이, 지척에 이른 검사 하나가 물 위에서 치솟아 오르며 검을 전개해 왔다.
촤아악!
“막아요!”
온통 끼얹어지는 물에 젖으면서도 수면 위를 향해 장력을 날리는 여인이다.
백호검 휘둘러 정검대 검사의 검격을 차단했다.
쩌정!
마주치는 검에서 막대한 분노가 전해져 온다. 화가 날만도 할 터, 그러나, 청풍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정검대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이다.
채앵!
공중에서 다시 부딪치는 검, 청풍은 휘두르는 힘을 배가시키며 상대를 튕겨내는 데에 주력했다. 다시 물로 떨어뜨릴 심산, 이 배 위로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촤악!
“큭!”
어깨에 일검을 맞았다. 하지만 손해를 본 만큼, 얻은 것도 있었다. 밀어내는 청풍의 일격에, 결국 물 쪽으로 몸을 피하는 정검대 검사다. 첨벙, 튀어 오르는 물방울. 떨어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인지, 물에 빠진 검사는 냉랭하기 그지없는 얼굴만을 수면 위로 내 놓은 채,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순간이다.
소선 바로 옆으로 불쑥 올라온 손이 난간을 꽉 잡아 쥐는 것이 보였다.
“이런!”
확! 기우뚱!
잠수해 들어갔던 정검대 검사다. 물 속에서 잡아 댕기는 그 서슬에 배가 뒤집어질 듯, 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위로!”
외침과 함께 뛰어 오르는 그녀다.
청풍 역시 하늘로 몸을 날리니, 한 순간에 뒤집어져 버린 소선 바닥 위로 다시 착지하게 되었다.
“화산에서는 수공(水攻)도 이렇게 가르치나요!”
다급한 외침 속에는 왠지 장난기가 어려 있는 듯 하다. 대답을 굳이 바라지 않고 한 질문 인 것 같았으나, 청풍은 또 꼬박 응수를 해 주었다.
“배울 겁니다.”
수공(水攻).
물론 가르친다. 화산 검수에게 무슨 수공이겠냐만은, 평검수 이상 되는 제자들에겐 수공도 어느 정도까지는 반드시 익혀 두어야 하는 기예였다. 최소한 교전이 가능한 정도까지. 또는 상대를 육전으로 끌어낼 수 있을 정도까지. 언제 어떤 장소에서든 싸울 수 있도록 모든 방식의 싸움을 훈련받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나 배우죠?”
“예?”
“수준 말이에요.”
“싸움이 가능할 정도는 될 겁니다.”
“그런가요? 아주 높지는 않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렇다면.......”
그녀가 아래 쪽 물 속을 주시한다. 당장이라도 검 한자루가 물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 그녀가 결심한 듯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 젖었으니 할 수 없네요. 기다려요.”
무슨 말일까.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 청풍.
해답은 금새 나왔다. 한번 심호흡을 한 그녀가 그대로 물 속에 뛰어들어 버린 것이다.
“!?”
촤악!
물살을 가르는 소리.
물 속에서 기포들이 마구 올라오는가 싶더니, 잠잠해진다. 다시 올라오는 기포들. 반복되는 변화다. 물 깊은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또, 오는군!’
한편, 수면 위, 방금 물에 빠져 멈추어 있던 검사도 이쪽을 향하여 헤엄쳐 오는 중이다.
순식간에 지척에 이른 검사, 뒤집혀져 흔들리는 배를 향해 물을 박찼다.
쩌엉! 휘청.
아까는 그나마 바로였지만 지금은 뒤집혀 있으니, 균형을 잡는데 더욱 힘이 든다.
반면, 한번 저지당한 것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종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정교하게 검을 날려 오는 정검대 검사다.
전면을 내 주었다. 밀리는 검격. 결국 넘실대는 배 위에 착지를 허용하고 만다.
“예상 외로. 귀찮게 하는구나.”
정검대 검사가 냉랭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한 채, 다 잡았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다가드는 검 끝에 청풍의 눈이 흔들린다.
상대하기 힘든 무공, 금강호보를 펼치기엔 발밑이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그 때였다.
촤아아악!
물살이 치솟으며 한 마리 물새와 같은 민활함으로 뛰어 오르는 신형이 있었다.
그녀다.
검사의 뒤편으로 가볍게 착지하는 그녀, 그녀가 물 위를 가리켰다.
“저기, 그냥 놔두면 익사할 것 같은데요.”
정검대 검사가 그 쪽을 바라보았다.
뻣뻣하니,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수면에 떠 있는 검사가 거기에 있었다. 마혈이라도 제압당한 듯한 모습이다. 출렁이는 물결에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놀라운 일.
굉장한 수공(水攻)을 일신에 지니고 있다. 강력한 지법을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할 일인데, 또 이런 굉장한 기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니 그 실체가 궁금하다.
아무리 물 속이라지만, 이만큼 짧은 시간에 화산파 집법원 정검대 검사를 제압했다는 것은 그녀의 무공 화후가 보이는 것 훨씬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 예상 밖의 일에, 미간을 좁히며 분노의 표정을 짓는 검사다.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여인을 돌아본 그가, 들끓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한 마디를 내 뱉었다.
“백학신법(白鶴身法). 이지선(二指線). 이 책임, 대협께 반드시 묻도록 하겠다.”
“아버님과는 관계없어요. 아실 텐데요.”
정검대 검사는 대꾸하지 않은 채, 곧바로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제압당한 검사를 챙기기 무섭게, 청풍과 여인 쪽을 주시하며, 혹시나 있을 공격에 대비한다. 지공이라도 뻗어 올까봐 크게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빨리 해법을 찾아 풀지 않으면, 큰 후유증이 남을 것이에요.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 쫓아오다가는 크게 후회하게 되겠죠.”
그녀의 말, 정검대 검사가 살기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이는 얼굴.
그녀가 몸을 숙여 배를 움직여 보더니, 잘 되지 않음을 알고, 청풍에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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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매일 연참 약속을 지켰습니다.
두편을.......비축해 두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 같았는지.......
하지만,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히 실망시켜 드릴 수가 없어서 결국, 이렇게 올리게 되었네요.
그런 만큼, 선작도 팍팍 해 주시고, 빨리 빨리 들어와 읽어 주시면......
그 보다 바랄 일은 없겠지요.^^
로그인이 귀찮기는 해도......선호작 등록해 놓으면 편하기는 하더랍니다.
저도 선작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