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배를 들어 올린다. 어차피 한 번 빠졌던 것, 청풍도 물로 들어와 같이 힘을 썼다.
낡은 배 위, 발목까지 물이 찼지만, 용케 뜨기는 뜬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배 위에 오른 두 사람, 저편으로 검사들 쪽을 바라보았다.
정검대 검사가 마혈이 짚힌 검사 하나를 둘러잡고 저 편을 향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 방향 저쪽에 비쳐드는 그림자, 한참이나 저 멀리, 조그만 소선이 물살을 가르며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력을 집중하여 그 소선 위에 타고 있는 자를 확인했다.
세 명의 검사들 중, 강변에 남았던 한 명이다. 왜 두 명만 쫓아오나 했더니, 한 명은 그새 어디선가 배를 구해 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쉴 틈이 없네요.”
그녀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기색이다.
온통 젖어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도, 하나 불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파앙!
촤아아아.
장력을 후려갈기니, 다시금 배가 앞으로 나아간다. 몇 번 더 장력을 발출한 그녀. 그녀가 청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체력 소모가 상당해요. 그걸로 라도 저어야 겠어요.”
“?!”
무엇을 이야기함인가. 청풍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낡은 배 위, 노로 쓸 만한 것은 아까부터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딜 봐요. 그거 말이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
백호검이다.
“이것?”
“예. 그거요. 검신도 넓고 노로 쓰기에 딱 좋아 보이는데요.”
농담일까. 아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더욱 어이가 없다. 급박하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상황, 그럼에도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서요. 무한정 이렇게 장력으로 갈 수는 없어요. 강을 건너자마자 다시 경공을 펼치려면요.”
맞기는 맞는 이야기다.
아직 완전히 따돌린 것이 아니니까.
‘할 수 없구나.......!’
청풍은 눈을 딱 감고 백호검을 물에 담갔다. 신검(神劍)의 위용에는 부끄러운 일이겠다만, 일단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봐야 한다. 화산파 계율 제 칠계, 화산파 제자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적도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강요, 청풍은 마음의 부담을 달래고 힘차게 백호검을 움직였다.
힘을 받아 앞으로 더 나아가는 낡은 꽃배.
달빛을 받아, 묘한 흥취를 자아낸다.
청풍과 여인.
두 사람의 첫번째 동행.
그렇게, 일장의 활극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 *
어두워지는 틈을 타, 갈대가 우거진 강변으로 흘러든 꽃배다.
능수능란하게 물길을 잡아 몰아 온 배. 그녀가 먼저 소리 없이 물 속으로 몸을 내렸다.
“여기서 가는 것이 좋겠어요.”
속삭이는 말에 청풍도 조심조심 배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물 속, 그녀가 강변 옆으로 배를 쭉 밀어내자, 낡은 꽃배 조용히 흐르는 물살을 타고 강 아래쪽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내려간다.
“어디 걸리지만 않는다면, 하구(河口)에는 가야 멈출 것이에요. 그전에 눈치를 채겠지만, 시간은 벌 수 있겠죠.”
갈대에 몸을 숨겨 뭍 위로 올라갔다.
옆에 있는 버들나무 그늘이 깊게 져 있어 움직임을 분간할 수 없는 가운데로 두 사람의 신형이 빨려 들어간다.
절묘한 방향과 각도.
추적을 피하기 쉬운 경로를 잘 파악하여 청풍을 이끈다. 이런 도주가 무척 익숙하기라도 한 듯한 기색이었다.
“관도로 가야 되요. 마차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 노출되기도 쉽지만, 흔적을 지우려면 그것이 최상이지요.”
추적술을 염두에 둔 움직임이다.
관도를 만나 잠시 경공을 펼치다가는, 논밭에 대어진 수로(水路)를 향해 몸을 날렸다.
“대단하군요. 이러면 분명 추격이 어렵겠습니다.”
감탄스럽다. 기본적인 술수지만, 제대로만 행해지면 추적하기에 무척이나 까다롭게 된다.
다시 한번 관도에 올랐지만,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혼돈을 줄 딱, 그만큼만.
청풍은 확신한다.
이 여인은 추격전의 경험이 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이.
‘잘하면.......따돌릴 수 있겠어.’
추적을 뿌리치는 데 있어서는 가히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조금 더 간다 싶더니 이제는 산길로 접어든다. 새벽이 가까워 오는 야심한 밤. 그녀가 숲 한 쪽을 가리켰다.
“버려진 사당(祠堂)이에요. 옷도 말려야 되니, 저기서 쉬어 가는 것이 좋겠네요.”
달리느라 상당 부분 말랐다지만, 아직도 움직이는데 거슬릴 정도의 물기는 남아있었다.
또한 쉬기도 쉬어야 하는 바, 두 사람이라고 체력이 무한정인 것은 아니었으니.
끼이익.
낡은 문.
열고 들어가자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내부가 보인다. 무슨 신을 모셔놓았는지 모를 곳에,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지 있는 것이라고는 제단(祭壇)으로 쓰였음직한 탁자와 다 부서져 가는 목장(木欌) 몇 개가 전부였다.
“불을 피워야 되겠어요.”
대담한 발상이다.
품속에서 피혁낭(皮革囊)에 싸여 있는 화섭자를 꺼내는 그녀.
위험할 것 같다는 청풍의 표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목장 하나를 부수어 불을 붙여 버린다.
“점혈 당한 이도 있으니까, 마을로 갔을 것이에요. 우리도 근처 마을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요. 아마 지금쯤은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녀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다.
그렇다고 화산 집법원을 가볍게 보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말에 다소의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내일 아침까지겠죠. 여기서 오래 쉬고 있을 수는 없어요. 기껏 몇 시진, 금새 거슬러 와, 종적을 쫓을 것이에요. 화산의 인맥으로 사람들을 풀을 수도 있고요. 그 전에 최대한 거리를 벌려 놓아야죠.”
“예.......”
“흐음.”
청풍의 얼굴을 슬쩍 살핀 그녀.
그녀가 갑자기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헌데, 말을 좀 편히 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어요? 자꾸만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네요.”
“그렇습니까.”
“예. 그래요.”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의 이름도 모릅니다.”
“아! 그랬나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름을 가르쳐 줄 생각은 없는 듯, 품속의 주머니 하나를 꺼내며 짐짓 딴청을 부린다.
“이런! 백강환(白鋼丸)을 아홉 개나 써 버렸네! 당 노대가 알면 날 죽이려 할 거야!”
고개를 마구 흔들던 그녀.
그녀가 불쑥 손을 내밀고는 청풍의 행낭을 가리켰다.
“이.......피풍의나 꺼내 줘요.”
“예?”
“어서요.”
영문을 모른 채, 꾹꾹 말려 있는 피풍의를 집어 빼어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흥. 다행히 속까지 젖지는 않았네요.”
파앙! 파아앙!
내력을 실어 털어내는 피풍의가 뽀얀 물방울을 만들었다. 한 번 돌려 본 그녀가 그것으로 온 몸을 둘둘 감싸고는 그 속에서 주섬 주섬 움직인다.
“저쪽을 좀 보아 줄래요?”
청풍이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았다. 피풍의 사이로 나오는 옷. 그녀의 경장 상의(上衣)다. 부서진 목장 길다란 나무 조각 하나를 땅에 박고 이제 타오르는 불가에 그대로 걸쳐 놓았다.
“지, 지금........뭐하시는 겁니까.”
“벗어서 말리는 편이 빠르죠.”
“.......!!”
대담해도 이렇게 대담할 줄이야.
지나치다고 느낀다. 화산파의 추격을 받게 되었으면서도 여유롭게 구는 것. 그것보다 더하다. 아무리 강호의 여인이라지만, 강호 여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그렇다면, 그러니까, 그 피풍의처럼 털어서 말리면 되지 않습니까.”
“옷이 망가져요.”
대뜸 대답하며, 경장 바지 하의까지 벗어다가 불 근처에 걸쳐 놓았다. 청풍으로서는 식은 땀이 흐를 정도.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같이 말리는 것이 좋을 텐데요. 나도 그 쪽은 안 볼게요.”
“아,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로서도 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아니 될 말이다. 이렇게 아녀자 하나와 늦은 밤, 빈 사당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옷은 벗지 않는 대신, 품속에 든 소지품들을 확인했다.
동전이 든 피낭은 그대로 잘 있다. 혹시 몰라 피혁 주머니에 넣어 둔 자하진기 비급도 문제없다. 물이 조금 스며 든 것 같지만, 사부가 쓰던 종이와 묵필(墨筆)은 물에 닿는다고 번지는 종류가 아니었었다.
백매화 새겨진 원로원 은패 역시 그대로였다. 장문인이 보낸 정검대 검사들, 왠지 이 은패는 앞으로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실로 모를 일이었다.
딸깡.
물건들을 집어 빼면서 흘러나온 것일까.
품속에서부터 하나의 조그만 물체가 떨어져 나왔다.
‘이것은........!’
“아!”
이쪽을 본 것인가. 그녀가 일순 탄성을 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진 것은 목걸이.
우윳빛 옥석이 매달려 있는 아기자기한 목걸이다. 연선하가 준 것, 아니, 다른 ‘누군가’가 연선하를 통해서 준 물건이다.
그리고.
청풍은 깨닫는다.
이 목걸이다.
주홍색 바위를 타고 부는 바람, 황석곡.
적색기와에 분홍장식과 한 쪽으로 보이는 연화봉과 운대봉.
매화정.
구름이 쉬어가는 곳에 한 여인과 한 소녀가 보인다.
한 여인은 연선하. 그리고 한 영명한 소녀는 이제 뛰어난 미녀가 되어 있을 게다.
청풍이 고개를 돌려 본 여인.
피풍의를 둘러친 그녀의 아름다운 목선 밑으로 한 개의 목걸이 줄이 걸려 있다.
“서.......영령.......?”
“........”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언니에게 누가 준 것인지 이야기하지 말라 그랬었는데요.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연선하는 서영령이 주었다고 말 한 적이 없다.
그저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이름일 뿐이다.
그저 한 번 본 것이지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용케 가지고 있었군요. 용케 이름도 기억하고 있고요.”
신기하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만나려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청풍은 가슴 속에서 뭔가가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렇든, 저렇든, 오늘은 정말 일이 많았어요.”
“.........”
“다시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요. 낮에는 훌륭한 악곡을 듣고, 저녁 때는 난데없는 추격전을 벌이고요. 화산 도사들도 생각보다 궁색하죠? 거기서 헤엄을 쳐 쫓아올 줄이야 얼마나 놀랐던지요. 그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어요. 당하는 입장이었으니 망정이지, 구경하는 입장이었으면 웃음을 터뜨렸을 거에요.”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많은 단어들을 꺼내 놓는다.
불빛에 비쳐 상기된 얼굴, 피풍의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어깨선이 곱기만 했다.
“또 한 도사는 어떻고요. 다른 두 명이 죽어라 헤엄치고 잠수하는 사이, 강변을 돌아다니면서 배를 찾고 있었잖아요. 웃기지 않아요? 하기사 다른 방법도 없겠지만, 구파 일방 고수들 쯤 되면 더 근사한 것이 기대되죠. 게다가.......그 대단해 보이는 보검(寶劍)으로 노를 저었던 것,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나도 평생 있지 못할 겁니다.”
청풍이 그녀의 눈을 직시했다. 멈추는 목소리. 청풍이 다시 한번 물었다.
“서영령. 이름이 맞습니까.”
그녀가 청풍이 집어 든 백옥 목걸이를 보았다.
“예. 제가 서영령이에요. 화산 보무제자, 청풍.”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마주 받는 청풍의 얼굴.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의 표정은 그저 밝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