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의 길목으로 가는 깨달음은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구결 안에 있기 마련이다.
아직은 완전히 깨우치지 못하더라도, 실마리를 잡아 가는 것을 느낀다. 을지백이 무엇을 주문하든, 못할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검을 똑같이 다룰 수 있도록 만들어라. 방향의 설정과 근력의 상승에 도움을 줄 것이다. 뛰어난 검사(劍士)가 되려면, 양팔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어야 됨은 기본이다. 싸움 도중, 한 팔이 날아간다면? 익숙하지 않은 팔이라고, 거저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한다. 적을 상대하는 것은 검을 들고 있는 한 팔만이 아니다. 검을 들지 않은 팔도 중요하며, 다른 모든 신체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네 신체뿐이 아니다. 네 몸 바깥의 모든 기운들, 흐름을 알고 이용해라. 검이 어디 있는지, 네 손가락 끝이 하나 하나 어디에 있는지, 완전하게 파악하고 싸워라. 그러한 것쯤은 가볍게 할 줄 알아야 돼.”
과한 요구다?
아니다. 그것까지도 받아들인다. 무슨 일이든 해 보고, 실패하는 것과,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단순한 이치. 전에는 몰랐다.
그저 어렵다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서영령을 만나고 함께 했던 며칠.
그리고 다시 만난 을지백.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의지가, 청풍에게 작지만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채앵! 치리링!
오른손으로 발검한 후, 검격, 그리고 왼손 발검.
동시에 환검.
순식간에 이어지는 동작이 능숙해지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일에 한 번 씩.
청풍이 마을에 내려가는 주기다. 또한, 을지백이 사라지는 주기를 의미함이다.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는지.
대체 어디 출신에 정체가 무엇인지.
을지백에 대한 궁금증이 하나 둘 쌓여갈 무렵이다.
“검집을 네 개 더 구해 와. 양 옆구리에 둘, 등 뒤에 둘, 옆구리에 둘, 총 여섯 군데로 바꿔가면서 환집한다. 능숙해지면, 그 다음에 백야참이야.”
하나가 되면, 그 다음은 더 어렵다.
수 없이 많은 궤도.
등 뒤에서 움직이는 검집의 입구를 정확하게 맞추려면, 어지간한 감각으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자하진기에 비중을 두고, 오감을 일깨웠다. 손가락 하나, 몸 바깥의 기운까지도 다 파악하라는 것. 금강탄의 검결만으로는 안 된다. 이것의 해답은 내력, 자하진기에 있었다.
자하진기의 수련에도 힘을 쏟았다.
환검은 그것만으로도 무공이자 수련이다. 아니, 실전에서 직접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검결의 활용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같다. 폭발적인 기세에 정교함을 더하는 작업이련지.
‘알겠어. 이렇게다.’
을지백이 지적해주는 것에 더하여, 스스로도 일깨워가는 무공이다. 점점 더 빨라지는 무공 습득, 마침내 을지백의 입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조금은 모양새가 나는군.”
귀를 다 의심할 지경.
등 뒤로 꽂아 넣던 검을 놓칠 뻔 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도 망설임이 있다. 거침없이 전개해라. 나아지고 있다지만 여전해. 그런 성격으로, 그 처자나 제대로 넘어뜨릴 수 있겠나.”
더욱 더 놀랍다.
별반 들어줄 만한 농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을지백이 수련 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 마음속에 놀라움이 가득 찬다.
‘이것.......’
인간적인 관심이라 할 수 있을까.
청풍이 짐짓 검을 휘두르면서 기회를 잡은 듯, 입을 열었다.
“처자라면........보셨습니까.”
“물론이다. 완전히 정신이 빠져 있더군. 그러니까 그 정도밖에 못하는 것이다. 장부로 태어난 이상,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단숨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 법! 하루 만에 해치울 수 있어야 된다.”
“하루.......”
이것까지 하루라니.
뭔가, 이상하다.
이런 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을지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이 크게 달라짐을 느꼈다.
“천하에 이르는 그릇이란 무릇 그런 것이다. 가만 보니, 네 놈이 그나마 나아진 것도, 그 처자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인데, 그것이야말로 천하의 대기(大器)와는 거리가 먼 짓일지니! 그래서야 안 되는 일이다. 다음에 보게 되면, 네 여자로 만들어라. 함께 술 마시고, 입 맞추면 그것으로 끝인 게야. 끝을 보는 것이지.”
황당한 이야기다.
뜻밖의 말. 하지만 을지백의 어투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다. 이 을지백의 또 다른 면모, 지금까지 겪어왔던 을지백과는 무척이나 달라,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한다. 유약(柔弱)함이란 곧 죄악이다. 천하를 도모하려면 여인 따위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일.”
엄격한 스승에서, 거칠기 짝이 없는 남자까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청풍은 이 을지백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제 멋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란 뜻이다. 네 놈이 벽에 부딪치는 이유는 네 놈의 심력(心力) 때문! 과단성이 필요하다. 겨우, 한 발작 나아가려 하지만, 부족해. 그 상태로는 항상 그럴 것이다. 강하고 단단하게 마음을 연련해라. 백호검은 금(金)이다. 거기에 합당한 자만이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 터.”
“.........”
두 자루 검을 늘어뜨리는 청풍이다.
을지백에게서도 인간적인 면을 발견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들을 쉽게 쉽게 하고 있으나, 두고 보면 언제나처럼 틀린 말은 없다.
서영령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걸러 들어야 하겠지만, 어쩌면 그것도 청풍의 모자란 부분을 딱 잡아 말한 것일 수 있었다.
“육검집의 환검이 형(形)을 갖추었다면, 백야참의 바탕을 닦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일 부터는 백호검을 쓴다. 백야참은 쉽지 않다. 삼년을 기약해야 할 무공인 바, 너로서는 평생이 걸리겠구나.”
* * *
“무림맹이 소집되었다고 합니다.”
“들었다.”
“벌 써 몇 차례 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철기맹의 저항이 예상 외로 거세어서, 전투가 가능한 화산 무인들 전원에게 참전 명령이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들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따로이 정보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한 번씩 사라질 때면, 또한 어디를 갔다 오는 것일까.
갈수록 늘어가는 의문들이다. 서영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이후로 청풍은 간간히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지만, 을지백은 청풍의 말을 받아 주면서도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 결코 말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악양이라는데, 가 보아야 할까요?”
물어보는 청풍.
대답하는 을지백은 여전하다.
“........아직도 그렇게 망설이나? 그런 선택쯤은 스스로 해라.”
“제 무공,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인데, 조언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핀잔을 들었건만, 이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필요한 것을 부탁할 줄 안다. 고민을 하더라도, 전처럼 끙끙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딪쳐 해결하려는 자세를 지니게 된 것이었다.
“미숙하다. 미숙해. 언제쯤이나, 제대로 자격을 갖출까.”
“언젠가는 되겠지요.”
곧바로 나오는 대답.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말, 예전에는 하염없이 먼 훗날처럼 말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언제가 되었든, 앞당기겠다는 의지가 전해져 온다.
백호검의 검법을 익히면서, 그 성정도 조금은 강인해진 것인지. 비로소 눈을 뜨며 발전하고 있는 젊은 범이 여기에 있었다.
“악양이라 했느냐?”
“예.”
“악양이라.......간수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게다가 청룡검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복마전, 아직 네 수준으로는 무리다.”
“처.......청룡검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렇다면.......청룡검이 어디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물론이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나오는 대답, 도이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놀라움으로 크게 뜨여진 눈.
청풍은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아니, 그럼, 나머지 두 신검은 어디에 있지요?”
다른 두 검의 위치.
을지백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또한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주작검은........잘 모른다. 종적이 묘연해. 현무검은 청룡검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에 있기에, 네 능력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으니, 일단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홀로 강호에 나서면, 길이 열릴 것이라 하였다.
설마, 그것이 을지백에게 있을 줄이야.
진즉에 물어 봤다면 나아갈 방향을 잡기가 조금은 더 쉬웠을련지도 몰랐다.
“악양이라........”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청풍을 그대로 둔 채, 을지백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뜨여지는 눈.
“네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악양에 당도하면, 당장 화산 내부에서 제약을 가해 오겠지. 하지만 그것도 그리 걱정할 것은 안 된다. 어차피 그들은 대놓고서 너를 잡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화산 문인들 사이에 섞여 버린다면, 그들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이다.”
을지백의 지적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집법원 검사들이 청풍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화산파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서 청풍을 잡으려 했다면, 그리 깊지도 않은 산속에 숨어있는 청풍 쯤이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청풍에 관한 사안을 맡은 이들이 몇 명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어쩌면 집법원 중에서도 소수일 수 있었다. 평상시라면 모르되, 철기맹과의 싸움이 격해지고 있는 지금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도 없으리라.
“그곳에 간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싸우기 위해서지. 너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실전(實戰)이다. 검사는 무릇, 살을 에는 예기(銳氣)를 내뿜을 수 있어야 하는 바, 너는 그것이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 적들을 베고, 죽음을 느끼는 싸움을 겪어 보아야 한다. 금강탄이든 백야참이든, 이렇게 연련만을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을지백의 말뜻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청풍으로서도 이 대(對) 철기맹전(鐵騎盟戰)에 참전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럼.......악양으로 가겠습니다. 청룡검을 얻기에 부족하다 하였으니.......싸움이 끝난 후, 때가 될 때,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든, 저렇든.
다른 것은 전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을지백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고, 먼저 말해주지 않는 것 또한,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것, 지금까지 네가 한 말들 중, 가장 들을 만 한 말이구나.”
을지백의 말.
청풍의 입가에도 미소가 깃든다.
아직은 조언을 얻어야만 마음을 굳힐 수 있으나, 언젠가는 그러한 조언 없이도, 굳건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아니, 오도록 만드리라.
‘악양........!’
다음 행선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저 알 수 없는 앞날이다만, 이전과 다르게도, 구체적인 목적을 지닌 채, 떠나는 길이다.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발걸음.
양광이 내리쬐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강호는 온통 철기맹과 화산파의 싸움으로 들끓고 있었다.
산속에 틀어박혀 검법을 연마하는 동안.
중원 각지의 군웅들이 악양으로 몰려드는 가운데, 벌써부터 강소성 곳곳에서는 철기맹과 화산파의 싸움이 일곱 차례나 벌어진 상태였다.
기마도 없이 며칠 동안 경공을 펼쳐, 악양의 근역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따로 움직인다. 싸움은 홀로 하는 것, 기회가 되면 지켜보겠다만, 도와주지는 않겠다.”
“알겠습니다.”
을지백과 헤어진 후, 악양에 당도했다.
중원 무림맹지. 악양.
동정호의 물이 장강으로 흘러가는 입구, 수많은 영웅들의 만남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인연들을 엮어낸, 전란의 고도(古都)가 바로 이곳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는 그것만으로도 오랜 영혼들이 살아 숨쉬는 듯,
화산의 장엄한 풍광과는 또 다른 특별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무림맹이라면 악양루를 둘러싼 열군루(閱軍樓)들에서 항상 열려 왔던 역사가 있지요. 대체 이게 몇 년 만인지.......”
강호인들이 숱하게 눈에 띈다. 강호인들 뿐인가. 민초들까지도 무림맹이 열린다는 것에 무척이나 들뜬 분위기였다.
어딜가나 무림맹 이야기.
정작 피비린내가 나는 싸움이 있을 것이란 것 보다, 그저 무림맹이 열리고 이름 높은 고수들이 몰려든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철기맹이 만만치 않다던데......”
평범한 민초들.
그저 이 일을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싸움이 돌아가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철기맹.
비록 화산파도 총 공세를 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철기맹의 힘은 상상 이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잘 버텨내고 있다는 것.
심지어는 일곱 차례의 싸움 중, 한 번은 화산파 무인들이 철기들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전대의 거마들을 영입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처음 보는 고수가 있다던데?”
“이러다가 화산이 지는 것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않겠어.”
전대의 거마들이 철기맹에 함께한다는 이야기부터, 알려지지 않은 효웅의 출현까지.
온갖 소문이 난무하고, 성급한 예측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철기맹의 분전은 그처럼,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자, 또한 모두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일인 것이었다.
‘문제다.......’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함을 피부로 느끼며, 청풍은 무림맹지 악양의 중심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무림맹이 열린다는 열군루에 이르러,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장관이라.
가운데, 군계 일학으로 버텨선 악양루가 있고, 그 옆에 삼취정과 선매정, 두보정 등이 늘어서 있다.
수많은 누각들이 제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물에 접해 있는 곳, 심란한 소문과 고조되는 긴장감만 아니었다면, 두고 두고 보아 둘 경관이었다.
“보무 제자 출신이라. 용감하기도 하군. 자네는 어디보자, 신여(新余) 공격대로 가거라.”
소속을 배정시켜 준 것은 화산 출신으로 큰 표국업을 일군 천문표국의 국주, 정사원이었다.
보무제자라기에, 나이가 많아져서 어쩔 수 없이 속가로 나온, 평범한 제자쯤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도복이 아닌 낡은 마의를 입고 있는 것도 그런 판단에 한 몫 했을 터.
청풍으로서도 더 귀찮게 하고픈 마음이 없었으니, 출전이 이틀 후라는 말만 들어 둔 채, 곧바로 화산의 일반 무인들이 머문다는 서쪽 화진루(華津樓)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굉장하다.......!’
동정호 주변을 따라 서 있는 열군루들은 고래로 수군(水軍)들의 진용을 정비하기 위해 쓰였다고 전해진다.
화진루.
화진루는 그들 중에서도 무척이나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수백명이 들어서도 될 듯한 장내. 그 넓이가 무색하도록 들어 찬 무인들의 숫자가 그야말로 대단했다.
곳곳, 본산에서 익히 보아 왔던 매화검수들이 눈에 띈다.
평검수들은 거진 다 몰려든 듯 했고, 선검수들 중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이들은 모두 동원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만으로도 백 명을 넘는 바다.
나머지는 화산출신이되 환속하여 강호에 기반을 잡은 무인들, 그들의 숫자는 수백을 헤아리고 있어, 그 들끓는 위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 사저도 이곳에 있을까.’
매화검수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절로 눈이 갈 만큼, 그 기도가 돋보인다.
그렇게 출중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연선하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종남으로 떠난 후, 한번도 보지 못한 연선하다.
비무는 어떠했는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온 무인들은 이쪽으로 가도록.”
끊어지는 생각.
누군가의 안내에 따라, 간 곳은 다닥 다닥 방이 붙어 있는 일종의 숙소였다. 좁디 좁은 방이다. 본산 제자들은 좀 더 괜찮은 곳에 행낭을 풀겠지만, 청풍은 일부러 속가 무인들 사이에 섞여 들기로 하였다.
집법원 검사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의도다.
하기사, 이 악양까지 도착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시야가 넓지 않다는 추측이 들어맞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조심한다고 나쁠 이유가 있을까. 그들이 청풍을 노리고 있다면, 지금 청풍의 형세는 그야말로 범에 아가리에 고개를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다. 집법원이 없더라도, 그 위, 화산 장문인인 천화진인이 지금 이 악양에 있었으니, 백번 신중을 기한다 해도 모자란다 할 수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눈에 띄지 않도록 꾸며놓은 백호검을 등에 메고, 쓸만한 검 하나를 허리에 찼다. 금강탄과 백야참을 연마하면서 낡아버린 검들은 모두 그 방에 두고, 아래로 내려와 돌아가는 모양새를 살폈다.
하는 일 없이 오후가 되고 태양이 중천에 이르렀다.
둥, 둥, 둥 세 번의 북소리.
역시 화산이다.
사람이 그렇게나 많이 모여 있는 가운데에도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한 곳을 주목한다. 문파의 구성 체계 상, 대부분이 속가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임에도, 화산이 강조하는 절도와 극기는 버리지 않은 것.
모두가 들끓던 분위기를 가라앉힌 가운데, 장로들 중 하나인 무현진인이 루대(樓臺)에 올라 내력이 담긴 목소리로 앞으로의 일을 알렸다.
“네 개의 공격대는 이틀 후 곧바로 출전한다. 첫 공격은 철기맹의 분타가 있는 의춘(宜春), 안복(安福), 상고(上高), 신여(新余) 네 개 현에 대하여 이루어지며, 그 후, 본거지인 천기보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이 이어지게 된다. 네 개 현에 대한 선발 공격은 도합 백 이십 명으로 구성되며, 이에 해당되는 이는 천문 표국 국주에게 그 소속을 확인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소속을 백선대(白線隊)로 들은 이들은, 무림맹과 개방의 연락선을 지원하며, 보급 관련 일을 맡게 된다. 일섬대, 진풍대, 검풍대, 삼개 공격대는 악양에 대기,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이상!”
질문도, 이의도 받지 않는다.
일방적인 명령임에도 누구하나 의문을 가지는 이 없다. 그것이 화산파. 청풍은 당당한 무인들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바가 무척이나 많았다.
저녁 무렵, 화산파 신여 공격대의 소집이 있었다.
따라 간 그곳, 사람들의 면면을 본 청풍은 두 가지 면에서 다소의 놀라움을 느꼈다.
먼저, 하나.
생각보다 숫자가 적다.
전부 합해, 이십 이명.
매화검수 두 명에 이십 명의 화산 무인들이 더해진다.
한 현에 자리 잡은 분타.
네 개 현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에 인원수를 조절했다고는 하나, 이 숫자로 공격해 들어가기에는 무리라는 느낌이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겠지만, 당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절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운........!’
그리고, 두 번째.
너무나도 유명한 매화검수가 여기에 있다.
하운.
보무제자들의 꿈이자, 여 제자들의 우상이었던 매화검수 하운이었다. 그가 이곳, 신여 공격대에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자 동시에, 큰 힘이다. 이름값만으로도 적은 숫자의 불안감을 희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하구나.......!’
군계일학이었다.
숫자가 적은 것은 이 남자를 믿기 때문일까.
매화검수 두 명. 다른 매화검수 단효(段曉)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출중한 기파를 내뿜고 있다. 천재, 천재 하더니, 과연 이러한 것을 천재라 부르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이틀 후. 우리는 신여를 향해 움직인다. 이 스무 명 중에는 평검수도 있고, 선검수도 있으며, 보무제자도 있다. 본산 제자가 아니더라도, 사문에 힘을 더하기 위해 달려온 젊은 동문들이 또한 함께한다. 같은 싸움에 나서는 이상, 본산과 속가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모두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승리만을 생각하도록 한다.”
각진 얼굴에 자신감이 충만해있다.
형형한 눈빛, 선이 굵은 남자다. 출중한 기도가 더해져 실제보다 그 외모가 빛나 보였다.
“이 숫자가 적다고 느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잠시 말을 끊은 하운이다.
이십 이명.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하운의 말은 청풍이 처음 지녔던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철기맹 무리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거기에 우리만으로 나서는 것은 분명 무리지. 그렇기에, 강호 동도들이 함께 한다. 무당파와 구양세가, 그리고 남궁가에서 지원이 올 것이다. 무림맹까지 나서게 된 일전이라는 뜻, 하지만, 이 싸움은 분명 화산파의 싸움이다. 선봉에 나서는 것도 우리가 되어야 하며, 적들을 섬멸하는 것도 우리다. 이들만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도록 해라.”
저절로 힘이 날 듯한 말솜씨다. 자긍심이 과하다 느껴질 만큼, 어조에 깃든 힘이 대단했다.
“전투에 나서 우리를 지휘하시는 분은 상원진인이 되실 것이다. 경동하지 말고 일전을 준비하도록.”
말을 마친 매화검수 하운.
조용하게 타오르는 패기가 느껴진다.
모두의 마음에 지피는 불, 역시나 매화검수는 다르다.
화산 제자들의 중심이며, 정신적 지주다. 무공을 넘어선 인품. 굉장하다. 따라 잡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대단해. 하지만.’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기도도 계속 보고 있자니, 그 힘을 가늠해 볼 만 했다.
아주 범접하지 못할 벽은 아니다.
높긴 높되, 끝이 보이는 벽.
그 동안의 무공 수련이 얼마만큼의 자신감을 가져다 준 것인지.
넘어서기가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이르러야 할 목표가 이제 저 앞에 있다.
거기까지 이르고 나면?
그러면 그 다음이다.
매화검수 이상의 경지.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나, 이제는 눈을 넓힐 때다. 거기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은 그저 나아가야 할 때였던 것이다.
이튿날.
방에 틀어박혀 운기에 전념하던 청풍은 창문으로 날아든 돌맹이 하나에, 반갑고도 반가운 손님을 맞이한다.
“어서 나와!”
조그만 목소리. 뒤뜰로 이어진 이 층 창 밖 아래,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 했던, 바로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연 사저!”
급히 백호검을 둘러메고, 창틀을 넘어 아래로 사뿐 내려선다.
이어지는 연선하의 다그침.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랜만에 보는 연선하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이 함께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 본 연선하, 그녀가 청풍의 옷깃을 잡아 이끌었다.
“정말.......이 쪽으로 와라. 어서!”
화진루 담장까지 넘어, 동정호 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주변을 재차 삼차 살핀 연선하가 청풍을 향해 쏘아 붙이듯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미쳐. 화산 본산이 습격당한 후, 종남에서 떨어진 조사 명령에 겨우 겨우 임무를 끝마치고 화산에 귀환했더니, 네가 없더라고! 도대체가! 처음에는 죽어 버린 줄 알았다. 이 녀석아.”
“아......아니......”
“그랬더니! 웬걸, 집법원에서 너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뭐냐! 뭘 가지고 내려갔다며? 원로원과 도문이 얽혀 들었다는데,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너!”
“연 사저. 그게.......”
“어제 밤, 평검수 여 제자들 사이에 네 이름이 들리는 지라, 설마 설마 했더니, 나 참! 여기서 멀쩡하게 어슬렁거리는 것은 또 뭐고? 게다가, 신여 공격대에 배정까지 받았다며! 집법원이 움직인다는 것은 장문인께서 명을 내렸다는 뜻이고, 지금 장문인은 여기 악양에 계시는데, 그 일이 해결 되기라도 한 거냐? 이렇게 있어도 돼?”
“사저.......그러니까.......”
딱히 할 말이 없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똑바로 쳐다보는 연선하의 시선에 청풍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기가 복잡해요. 그리고 그 일은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렇게 있어도 되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연선하가 입을 딱, 벌렸다.
“대책 없네.”
손을 올려 눈 가를 문지르더니, 짧은 시간 생각을 정리한다.
슬쩍, 위 아래로 청풍을 훑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 한번 묻기나 하자. 집법원이 널 찾고 있는 것. 단순히 찾는 것이냐, 아니면 추격하는 것이냐?”
“추격입니다. 아마도.”
“추격이라면, 너, 그들을 만나긴 만난 것이겠지?”
“예. 정검대 검사들이었죠.”
“하! 정검대! 어떻게 뿌리쳤지? 아니, 아니다. 너, 정말로 정검대까지 나설만한 죄를 저지르긴 한 거야? 뭔가 착오가 있는 것 아냐?”
“죄는.......저지르지 않았지만, 쫓을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청풍이다.
찬찬히 청풍의 얼굴을 살펴보는 연선하.
긴장감이 엿보이지만, 그 안에 그것을 감내할 힘이 느껴진다.
전에는 없었던 것. 연선하가 두 눈에 이채를 띄었다.
“........너, 조금, 변했군.”
미간을 좁히는 연선하를 보며, 청풍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스스로도 변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매번 사람을 놀래키다니. 걱정했었는데, 괜한 짓이었나 보구나. 여하간 쫓기고 있다니....... 잡히면 안 되는 것이겠지?”
“예.”
“이유를 말해 줄 수는 없나?”
“이유는.......조금 말하기 어렵습니다.”
“역시 그런가......”
연선하가 말 끝을 흐렸다. 분명 변했다. 감추고 있는 비밀. 원로원과 관련된 무엇인가에 얽혀 들었고, 그것을 책임지려하는 의지가 묻어난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가 아니라,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무인인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집법원의 추적. 늦춰 줄게.”
“예?”
늦춘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나.
괴이한 농담을 내뱉곤 하는 연선하이다만, 이것은 그런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사항이 아니다. 실제로 보이는 연선하의 얼굴. 농담이 아니다. 연선하의 얼굴에는 그저 진지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놀라지 마. 평소라면 말도 안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서천각(西天閣).”
“서천각이요?”
“그래. 서천각이 정보를 담당하는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모를 리가 없다.
원로원 백매화 영패 역시 서천각의 지원을 받으라고 얻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처럼 큰 싸움이 있을 때, 그러니까 전시(戰時) 체제로 들어가면, 서천각의 운영도 변화하도록 되어 있어. 평소와는 다르게 무공이 강한 제자들이 대거 투입되지. 정보를 얻어내는 것, 취합하는 것, 서로 간에 소통을 할 때에도, 무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렇게 투입되는 제자들은 거진 모두가 다 여(女).......제자 들이지.”
말을 끊는 연선하의 얼굴에 불만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여성 제자와 남성 제자.
운용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리라.
“이런 싸움에서 여제자들은 주로 서천각의 정보 활동이나, 후방과의 연락, 그리고 보급 관련 일을 맡게 된다는 것이야. 전방에서 험한 꼴을 안 보게 했으면 하는 의도인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나나 추영이나, 얼빠진 평검수 몇 몇 녀석들 보다는 수십 배 전력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 우스울 정도야. 여하튼, 지금 나는 여기서 무림맹 관련 서천각 사안들에 꽤나 깊이 관여하고 있어. 매화검수의 자격으로 말이지.”
“그렇다면........”
“그래. 조금은 손을 쓸 수 있을거야. 어차피 집법원의 검사들도 예외 없이 서천각의 정보망을 이용하기 때문에, 너에 관한 것을 조금만 손보면 돼. 물론 네가 여기에 버젓이 있으니, 얼마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며칠 정도는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겠지.”
“그러나.......그래도.......되는 것인가요?”
“물론 안 되지.”
즉각적인 대답이다.
화산 문규의 엄정함, 그것도 전시에. 함부로 그래서야 큰일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웃는다.
연선하는 그것을 어기면서도 도움을 주겠다는 뜻일게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이야. 집법원 무인들이 마음에 걸릴 텐데도 여기에 왔다는 것은, 너로서도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 내가 도와 줘야지. 다른 누구에게 기댈 곳도 없잖아.”
“........”
청풍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에 전해지는 마음.
항상 고맙기만 한 사람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명심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벌써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면, 어차피 앞으로는 내 도움도 필요 없겠지만.”
“고맙.......습니다.”
“괜찮아. 살아 있었으니 그것으로 되었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런 인연도 얻기 힘들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베풀어 주는 것. 받기만 하고 보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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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참여 해 주시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벤트 part-1은 금요일인 10월 8일까지 진행됩니다.
많이들 관심 가져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이번 이벤트는 말 그대로 "정답이 없는" 순수한 설문조사이니, 무당마검을 보셨든 안 보셨든, 도리어 화산질풍검을 보시고 계시든 안 보시고 계시든(우연히 이번 편만 클릭했다던지, 쿨럭) 그냥 막 쓰시면 됩니다.
소신껏, 좋아하셨던 사람들, 기억에 남는 사람들 막 쓰시면 되는 것이니, 재미있게들 참가해 주십시오.
......
유조아에서도 연재 중인데, 생각보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신기한 곳이더군요.^^
순수하게 글 만으로 승부하려 했더니, 잘 안 되는 것인지, 어떤지......
뭐, 아직은 연재한지 며칠 안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겠지만서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네요.^^
화산질풍검을 살려 주세요.ㅠ_ㅠ ㅎㅎㅎ
여하튼, 변함 없는 관심 가져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ps. 선작에 관해서 문의들이 들어 오는데, 선작을 하시고, 로그인 한 후, 작가 이름을 클릭하면 편하다고 합니다.^^
날씨가 갈수록 쌀쌀해지는데, 모두들 건강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