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실없는 말이나마 걸어 볼 수밖에.
“그럼.......그 동안.......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어떻게 지냈냐고? 으이그. 바쁘게 살았지. 서천각 일을 손보려면 지금도 급해. 아, 이건 말해야겠네. 종남산에서 일!”
언제나처럼 활달한 표정으로 돌아온 연선하다.
역시나 이것이 좋다.
변함없는 것. 가장 어울리고, 가장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종남산에서는 정말 대단했어. 무당 장문인 현양진인은.......아아, 정말 명불허전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더군! 게다가 거기엔 말이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무당 진무각 제자가 한명 와 있었거든? 세상에! 그런 남자는 정말 처음이었어! 이름이 석조경이라고 했던가.......그 기도, 그 눈빛. 여튼 굉장했지. 기껏 우리 연배로 보였는데 말이야!”
“그렇게나.......대단한가요?”
“그래. 그 사람도 지금 여기에 와 있을 거야. 게다가, 서천각 일을 맡으면서 알게 된 건데, 무당 진무각 제자들은 정말 엄청나대. 왜, 그 무당도 습격을 당했다잖아. 알지? 그래서 그런지, 그들도 진짜 실세라 할 만한 무인들을 내 놓았다더라구. 숫자는 얼마 안 되어도, 하나 하나가 그 무위를 추측할 수가 없다나봐.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우리 매화검수 이상들이라는 분석도 있어.”
“매화검수.......이상........”
“뭐, 매화검수도 매화검수 나름이니까 또 모르지만. 어차피 너도 내일이면 보게 될 거야. 무당 진무각 제자들도 이번 공격에 참가한다고 그랬거든. 정말 그렇게 강한지는 네가 두 눈으로 보고, 꼭 가르쳐 줘. 서천각에서도 보고를 받겠지만, 직접 듣는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니까.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봐. 나도 서둘러야겠어.”
“예. 사저. 고마워요.”
“고마울 것 없어. 무운을 빌게.”
“사저도요.”
화진루 쪽으로 먼저 달려가는 연선하다.
익숙한 암향표 신법에 소리 없이 바람을 가르는 모습. 보고 있으려니, 과연 연선하도 매화검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나 활달하고, 인간적이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연선하는 더 강할 것 같다. 자하진기에 감지되는 연선하의 내력. 어제의 하운도 그랬지만, 매화검수들은 하나같이 출중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 * *
출전 날이 되었다.
무겁고도 장렬한 공기가 온 악양을 뒤 덮은 가운데.
청풍은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르며, 철기맹 신여 분타로 진격하는 공격대의 소집에 화진루를 나섰다.
네 개의 공격대가 모인 곳은 악양루 앞이다.
화산 장로 무현진인이 단상에 올라, 철기맹의 만행을 성토하며 공격 의지를 촉구하니, 비로소, 싸움에 임한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제, 진짜로군.’
지금까지 몇 번의 실전을 겪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뜻에 의해 싸워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피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었을 뿐, 진정 그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할만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은 다르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악양에 왔으며, 전투를 위해 여기 서 있다.
전투, 그리고 살인.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또는 누군가를 죽이게 될 터,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단상 위를 올려다 보았다.
무현진인의 목소리. 쭉 시선을 돌려 아래쪽에 정렬한 화산 제자들을 보았다.
빽빽이 들어찬 군웅들과 얽혀드는 사람들 속, 연선하가 이쪽을 보고 서 있으리라.
눈을 움직여 연선하를 찾았다. 어디에 있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 곳, 시선이 고정된다. 을지백. 그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와 계시는구나.’
청풍과 을지백의 눈이 마주쳤다.
청풍의 만면에 떠오르는 반가운 표정, 그러나 을지백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그저 그
반가움을 받는 대신, 손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청풍 쪽을 가리켰다.
‘?’
순간적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의아한 얼굴, 을지백의 눈빛에 답답함이 떠올랐다.
손가락의 움직임.
뒤 쪽이다.
청풍의 뒤, 어느 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보았다.
화산파 제자들, 매화검수들. 그리고 그 옆쪽으로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정렬해 있는 중이다.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청풍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을지백 쪽을 바라보았다.
‘!!’
을지백이 없다.
그 새, 인파들 사이로 사라졌는지. 사람들 저편으로 언뜻 백의 장포가 보인 듯 했지만 확실하지 않다. 한 쪽. 군웅들 중간에 긴 머리 백관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을지백인 듯, 그러나, 돌려 세울 방도가 없다. 쫓아갈 수도 없는 상황. 청풍은 을지백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뭘 보라는 거였지?’
훑어 나가는 시선.
구양세가,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역시나 헌앙한 모습이다.
구양, 남궁, 모용, 황보, 팽가, 당문의 쟁쟁한 여섯 가문을 통틀어 육대 세가라 하는 바, 천하 무림 세가들의 정점을 달리는 육가(六家)의 정영들인 만큼, 그 기도가 분명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응?!’
조금 더 옆 쪽, 서 있는 무인들. 의아함이 절로 생긴다. 어디의 무인들일지. 앞의 두 세가의 무인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파락호와 같은 느낌. 앞섬을 방만하게 풀어 헤친 자도 있고, 제 멋 대로인 무복에 창을 든 남자도 있다. 다섯 명. 구대 문파나 세가의 무인들로는 도무지 봐 줄 수가 없는 이들이었다.
‘어떤 이들이길래.’
무공은 어느 정도일지. 자하진기를 조금 더 휘돌리며 오감을 열었다. 예민해지는 감각, 서 있는 자들의 기도를 가늠해 보았다.
‘강하구나.’
거칠긴 해도, 강한 자들이다. 그 옆, 세가의 무인들 이상의 무력이 느껴지고 있다. 사람이란, 확실히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법.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고수들이었다.
‘후우.’
강한 이들이 함께 한다는 것에 조금은 든든해진 마음이다. 거기에 자하진기를 돋구어 올려서인지, 긴장이 다소 풀어지며 평상심이 돌아왔다.
‘진작에......’
고요하고 잔잔한 심동(心動), 마음 밭, 중단전을 어루만지는 자하진기다. 일찍부터 자하진기를 끌어올려 놓았더라면 조금은 덜 불안했을 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더 둘러볼 여유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 여유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었다.
“!!”
다섯 무인의 바로 뒤.
한 남자.
자하진기로 되찾았던 평상심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지녔으나 피부색은 중원의 그것이다.
큰 키, 완벽하게 짜여진 기도.
충격이었다.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도리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상상했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자다. 무시무시한 내력에, 막강한 무력. 무적자(無敵者)의 위용이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 저런.......다른 이들은 모르는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태연히 있을 수가 있지?’
무신(武神)을 옆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다.
알아챈 것은 오직 그 뿐인 모양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단상에서 벌어지는 일장 연설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윽.
‘헉!’
그가 이쪽을 돌아본다.
타오르는 푸른 겁화, 두 눈에 담긴 바다빛은 심연의 어둠이라, 감히 맞받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읽히고 있다........’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지니고 있는 자하진기를 알아보았고, 청풍의 수준도 파악해 버렸다. 알 수 있다. 단숨에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마안(魔眼). 이번에는 백호검에 머문다.
‘신검(神劍), 알아보았어.’
청풍 자신의 무공 뿐 아니라, 백호검의 정체도 들켰다.
뽑아야 한다.
뽑아야 한다.
백호검을 뽑아 쳐들어가든지, 아니면, 도망쳐야 한다.
‘흐읍.......’
썰물이 빠져 나가 듯.
시선이 거두어 지고, 옥죄어 오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무섭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순수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니, 생전에 다시없는 경험이었다.
‘.........’
슬쩍 훔쳐 본 청안의 고수.
이제 청풍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장포 안에 도복(道服). 무당파!’
그 광대한 힘에 질려 이제야 알아보았다.
무당파의 무인이다.
연선하의 말.
매화검수 이상이라더니, 그 정도가 아니다. 천재라고 느꼈던 하운.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선인(仙人), 매화검신께서나 느낄 수 있었던 것, 아니, 매화검신께도 느낄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그에게 있었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바깥의 하늘이라. 이런 자는 다시없을 것이었다.
‘이 싸움.......’
철기맹이 어떤 패를 지니고 있든,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이 신여 공격대에 함께 하는 것은 무신(武神)이니까.
‘철기맹. 신여. 질 수가 없는 싸움이구나.’
싸움에 임하는 첫 출전.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백호검 검자루를 잡아 본다.
백호검.
천으로 감아 놓은 손잡이임에도, 손바닥에 느껴지는 백호검 금속의 감촉은 그저 차갑기만 할 뿐이다.
화산의 젊은 검사. 청풍.
일생의 두고두고 기억할 무당의 마검(魔劍), 명경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일대 충격으로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 * *
이동은 기마로.
화산 제자들은 십 육세가 되면, 일괄적으로 기마술을 배운다.
화산 중턱, 화산파가 운영하는 마장(馬場)에서 건마(健馬)들을 타며 익히는데, 워낙 짧은 시간 배우는데다가 기본만을 가르치는 고로, 이동하게 된 처음 하루 동안은 영 익숙치가 않았다.
배운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까마득한 기억이다. 그나마 떨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자하진기 덕분, 그 감각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할 만 하였다.
둘 째 날이 되니, 어느 정도 해 볼만 하다.
속도를 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고, 방향을 바꾸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금새 숙달되는 기마술, 이젠 어떤 것이든 순식간에 배워내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두.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동안 한편,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격을 시작한 무림맹.
순식간에 강서성 서북쪽 경계를 지나쳤고, 이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춘 지역에 다다라, 마침내 첫 번째 교전이 발발했다.
공격 결정에서부터 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무림맹이 얼마나 전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었다.
그처럼 빠른 공격.
그럼에도 무림맹은 예상 밖의 사태에 직면한다.
철기맹 의춘 분타가, 예상 밖의 견고함을 보였던 까닭이다.
의춘 외곽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전투는 의외로 팽팽한 국면을 보였고, 반나절을 예상했던 공격은 하루를 훌쩍 넘기며 이튿날까지 이어져 버렸다.
그렇게 지리 한 싸움을 하면서 피어오는 동녘 태양을 맞이할 때.
다른 두 곳에서도 격전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철기맹 안복 분타와 상고 분타 역시 무림맹의 거센 공격을 맞이한 것이다.
철기맹의 수성.
치고 빠지는 철기(鐵騎)의 운용으로 무림맹의 접근을 다소 더디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구파와 세가의 무인들은 그런 잔재주로 상대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용케 버티고 있다.
단숨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또 다시 반나절이 지났다.
마침내 청풍이 속한 공격대도 네 곳 중 마지막인 신여의 외곽에 이르렀다.
?의춘은 아직인가.?
신여 공격대 전체를 통괄하는 이는 상원진인이었다. 그 연배. 높은 품격과 뛰어난 무공. 그리고 철기맹을 눈 아래로 보는 오연함까지, 거파의 장로가 가질만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고수였다.
?철기맹 따위에.......?
아직까지도 의춘 분타에서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 상원진인이 보기에 의춘이 함락되는 것은 벌써 한참 전이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정원 사제........?
의춘 공격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화산 장로 정원 진인이었다. 거기에도 화산파 매화검수 이인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각파의 정예가 함께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태 연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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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불끈 쥐고. 계속 갑시다.-_-
의춘 공격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화산 장로 정원 진인이었다. 거기에도 화산파 매화검수 이인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각파의 정예가 함께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태 연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간단하지 않을 수 있겠군. 그러나.......!’
이 싸움이 예상보다 어려워 질 것이라 느끼는 상원진인이다. 근거라고는 단순히 의춘에서의 승전보가 늦어진다는 것 하나 뿐, 하지만 강호를 헤치며 수많은 경험을 쌓아온 대 화산파의 장로로서의 감각은 그에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매화검수 하운(夏雲). 제자 열 명과 함께 척후를 맡는다. 신여는 저 앞이지만, 시가전(市街戰)이 벌어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 벌어져서도 안 되고. 이미 이쪽은 적들에게 노출되었을 터이니, 먼저 앞으로 나아가 적들의 반응을 보아라.”
“예.”
신여는 멀지 않다. 구릉 아래 넓게 펼쳐진 송림(松林)을 지나면, 곧바로 신여의 서문(西門)이 이어진다. 강서성 특유의 조용함이 깃들어 있는 곳, 강호를 들끓게 만드는 철기맹의 영역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렇게 폭풍전야의 고요가 자리한 이 지형.
문제는 역시 눈앞에 있는 송림이다.
격전지라고 한다면 인적이 뜸한 이 송림이거나 신여 서북으로 이어진 산 속에서다.
제 아무리 철기맹이 도를 벗어난 채 날뛴다 해도, 백주(白晝)에 민초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서 살육전을 전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철기맹 입장으로도 마찬가지. 치법(治法)이 불가능한 무림문파의 싸움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관부(官府)의 제제로 인해 큰 타격을 입기 마련이었다.
“화산검수에게 물러섬이란 없다. 화산의 힘을 보여주어라.”
상원진인의 냉엄한 목소리.
청풍은 상원진인을 한 번 보고, 하운을 바라보았다.
‘가자.’
지원자 열명. 먼저 나서는 사람이 곧 척후대다. 청풍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타고 있는 말을 움직여 하운의 뒤로 따라 붙었다. 금새 결정되는 열 명. 강한 의지가 모두의 눈 안에 반짝이고 있었다.
하운이 손을 내 저어 전진을 명령했다.
나아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기마들이다.
눈앞에 송림은 그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 이 척후대를 결코 환영하지 않는 듯 하다.
‘위험하겠지. 하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살의. 이것은 단순한 임무가 아니다.
적들의 동향을 살피는 척후조라 하지만, 실상은 그 자체로도 전투조나 다름없는 것.
이쪽은 탁 트인 관도에 있는 반면, 적들은 숲 속에 있다.
상대가 모르게 정황을 파악하는 것이 정찰의 기본이라 한다면, 지금 그들은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었으니.
결국, 적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노출 된 상태로 다가오는 척후조를 가만히 놔 둘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송림에 진입한 직후, 하운이 손짓을 하여 기마에서 내릴 것을 명령했다.
기마를 타고 움직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형일뿐더러, 기마를 운용한다는 것은 필시 말발굽 소리를 동반하는 바, 척후와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 다경 후, 뒤따른다. 준비해 두도록.”
멀리 저 위에서 상원진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지금 들어온 이 열명이 적들의 공격을 받으면, 이제 남은 무인들은 그 양상을 보면서 적들의 방어진과 수성 전략을 예측해 내리라.
일 다경은 확실하게 버텨내야 한다는 이야기. 또한 일 다경 동안 최대로 깊숙이 전진하여, 적들의 동향을 바깥쪽에 보여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을 것이다.’
순간 생각이 미치는 것, 그것은 대기하고 있는 무인들의 무력이다.
각파와 세가의 정예들. 그리고 무당파.
그들을 생각하면 이 싸움의 승산이 보인다. 그저 맡은 바 임무만 잘 끌어가면 될 뿐이다. 결정짓는 것은 후방의 공격대,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명경(明鏡).......이라고 하였지.’
명경.
기마를 타고 오며, 줄곧 그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청풍에게, 옆에서 함께 오던 평검수인 청료가 가르쳐 준 이름이다.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검(魔劍)이라는 명칭이 조심스럽게 떠돌고 있다 하였다.
‘마검(魔劍).’
어울리는 명칭이라 생각했다. 확실히, 그 모습은 인간이라 하기엔 거리감이 있다. 매화검신에게서도 인간 이상의 선기(仙氣)를 느꼈었지만, 그 남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자체가 무(武)로 이루어진 화신(化身)이라 할 만 했다.
‘그 무공을 볼 수 있다면.’
직접 견식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압감을 느끼는데, 실제 무공은 어떨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집중하라. 온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하운의 목소리가, 청풍의 상념을 깨 놓았다.
그렇다.
지금은 이 일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할 때다. 자꾸만 생각이 닿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이만 접어놓고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사사삭!
다가드는 살기. 사방에서 조여든다.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흉험하고 강한 살기였다.
‘이런.......!’
너무 안이했었는지.
자꾸만 흐트러진다. 금강탄과 백야참을 익히고서, 자만과 방심이 찾아오기라도 한 듯, 자하진기의 여일한 운용이 어긋나고 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었다.
촤아악!
마침내 진짜 시작이다.
풀숲을 가르고 나타나는 병장기. 험한 생김새의 낭아봉이었다.
파팟.
선두에 있는 하운이 손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방어 대형의 수신호, 육력 중 전술 편에서 배우는 암호다. 보무제자 때부터 익히는 화산 공통의 언어(言語)였다.
사삭! 사사삭!
재빨리 움직이는 화산 제자들이다. 엄격한 배움에 따라 숙련된 움직임이다. 지위가 다르고 본산 속가의 구분이 있음에도, 본래부터 손발을 맞춰 온 것처럼 짜임새가 있었다.
챙! 슈가각!
낭아봉을 맞받는 매화검(梅花劍).
하운의 검이 섬광을 발하더니, 단숨에 내질러져 첫 습격자를 베어 놓았다.
‘대단하다!’
명경을 본 후, 그 압도적인 기도 때문에 한 동안 잊고 있었다.
매화검수의 위력.
단 일 검에 상대 무인을 쓰러뜨렸다.
강하다.
명경을 보고 감탄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올라갈 나무를 눈앞에 둔 채, 높이 솟은 먼 산만 쳐다본 꼴이다. 눈앞에도 이리 강한 고수가 있거늘, 먼저 따라잡아야 하는 것은 매화검수였던 것이다.
하나 둘.
점차 다가오는 기척들이 있다.
미세한 움직임,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철기맹 무인들이 그들을 노려온다.
파악!
나무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흑의 무인. 가슴에는 비천마(飛天馬)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천마는 철기맹의 상징으로서 최근 들어 널리 알려지고 있는 바. 구환도(九環刀)를 찍어 오는 철기맹 문도의 급습에 선두의 선 하운의 검이 재차, 빛을 발했다.
차라라랑! 채앵!
얽히는 병장기 끝에, 구환도가 갈 곳을 잃고 튕겨 나간다. 앞으로 휘어 쳐, 목을 갈라내는 손속. 하운의 검은 정교하고도 빠르기 그지없어, 철기맹 무인으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선연하게 흩뿌려지는 피를 비껴내면서 앞으로 전진한다. 두 명의 목숨을 빼앗고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단호하게 나아가는 뒷모습에 모두가 용기백배하여 땅을 박차고 있었다.
한 참을 더 거침없이 달려 나갔을 때.
하운의 손놀림이 일순간 급박해졌다. 위험하다는 수신호다. 이미 검을 빼 든 이들이나,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이들이나 경계 태세를 단단히 했다.
풀숲이 갈라지며 짓쳐드는 자들.
십여 명에 이른다. 이제는 조직적으로 대응해 오려는 의도, 흉흉한 공기가 온 송림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채앵!
“크윽!”
신음 소리. 비천마를 새긴 흑의무인들이 화산 제자들의 검공을 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백호검을 함부로 꺼내지 않은 채, 금강호보와 태을미리장을 섞어 쓰면서 적들을 막아내는 중, 청풍은 이들을 상대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다르다. 본산에 쳐들어 왔던 자들이 아니야.’
흑의 무복(武服)은 같은 색이건만, 가슴에 달려있는 비천마는 그들에게서 보지 못했다. 그 뿐이 아니다. 복장의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쓰는 무공이 다르다. 게다가, 신음소리와 비명소리. 이들은 그때 본산을 습격했던 자들보다 숙련되지 못한 자들이 틀림없었다.
채챙!
으악!
한 명이 더 쓰러졌다. 역시나 하운이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전적인 무공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고수, 청풍은 하운의 손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세명, 네명. 철기맹 문도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을 때. 청풍은 자하진기가 발하는 경고에 흠칫 놀라, 한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화아악!
무엇인가가 다가온다.
송림 저편으로부터 전해오는 음울한 기운.
‘이것은 도대체.......!’
엄청난 살기다.
새로운 적(敵).
꿈틀 꿈틀, 사위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지만, 다른 제자들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고수!’
하운을 불러보려 했다. 하지만 그에겐 미처 여유가 없어 보였다.
매화검수 하운.
뛰쳐 든 세 명의 철기맹 문도들을 맞이하여 검공을 전개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위험하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다가오는 이는 이들 철기맹 문도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시무시한 기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심! 방어를!”
어쩔 수 없이 발한 외침이다. 싸움의 와중에서도 느껴지는 누군가의 눈초리.
나설 때와 나서지 않을 때를 분간하라는 눈빛이다. 이 척후의 지휘자는 어디까지나 하운이니, 청풍이 나설 입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어.’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품었든 상관 없다.
급하기만 한 청풍의 마음. 백호검 검자루를 꽉 쥐고는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이쪽으로! 시야를 확보하고 습격을 대비해야 합니다!”
청풍의 낭랑한 경호성.
막 철기맹 문도들을 쓰러뜨린 하운이 청풍을 돌아본다.
일개 보무제자이니, 주제넘은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일지.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질책하는 한마디를 던졌다.
“조용! 경동할 때가 아니다!”
청풍과 하운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을 튀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청풍. 하운의 시선을 피한 것이 아니다. 다급함이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왔다.......!’
촤아악!
풀숲을 가르며 나타난 자.
청풍이 바라본 방향.
강맹한 검격이 잔인하고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흡!”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
치잉! 카가각!
귀신처럼 다가드는 그 신형에 화산 제자가 뒤로 물러난다. 선연한 핏물이 하늘로 튀어 오르고, 휘청거리는 화산제자.
스각! 퍼벅!
검광이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가슴을 꿰뚫으며 빠져나갔다.
털썩.
쓰러지는 화산 제자의 몸 위, 이제 망자(亡者)가 되어 버린 그 시체를 오연하게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다.
냉막한 인상이다.
백발을 늘어뜨리고, 주름진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지녔다.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열리는 입. 진득한 살기가 그 목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누군지 궁금한가. 내가 백검천마, 종리굉이다.”
“!!”
압도적인 기도.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 누구하나 미동할 수 없게 만드는 힘 앞에 매화검수 하운조차도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백검천마.
그도 그럴 만하다. 백검천마의 이름은 그야말로 무겁기 그지없었으니.
사해에 떨쳤던 악명(惡名), 전대의 거마(巨魔)로서 그 잔혹한 손속과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자비함에 무림 공적으로 선포된 지 수십 년이다.
하운이나 청풍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강호에 자자했던 고수로 백검문(白劍門)이라는 좌도문파를 이끌면서 수많은 살업을 쌓았다. 게다가 그 무공도 고절하기 짝이 없어 구파의 장로들을 훨씬 상회 한다고 알려져 있는 자였다.
‘이런 자가.......!’
백검천마, 종리굉이 매화검수 하운을 비롯하여 제자들을 하나 씩 쳐다보았다.
무시무시한 시선.
죽음의 환상을 보여줄 것 같은 막강한 살의(殺意) 앞에 누구도 나서지 못한다.
촤악, 하고 자전검을 휘둘러, 묻어있던 화산제자의 선혈(鮮血)을 뿌려낸 종리굉.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하나다. 다음은 누굴까. 기다려라. 한 놈씩 죽여주마.”
한 마디를 남기더니, 그대로 몸을 돌린다.
등을 보인다?
사라질 요량인가.
그렇다.
순식간에 푹 꺼지듯, 풀숲 사이로 없어져 버린다.
“무슨.......!”
한 사람씩 죽인다고 했다.
다시 오겠다는 이야기.
충격적인 첫 공격과 당혹스런 퇴장.
이 경악스런 사태를 믿기 어렵다. 그러나, 처참하게 죽은 제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분명한 실재(實在)였다.
이글이글 끓고 있는 마음에, 하운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명령을 내렸다.
“전진........추격한다.”
추격.
누구를 쫓나.
물론, 백검천마 종리굉이다.
하운의 얼굴에는 이제 경악어린 표정이 굳어져, 상대의 기세에 나서지도 못했던 자괴감이 드러나고 있는 중인 바, 그 다음에 그의 얼굴을 채우는 것은 매섭기 짝이 없는 분노였다.
“전진한다. 화산제자에게는 물러섬이라고는 없다.”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모두를 재촉하는 그다.
먼저 나아가 죽은 제자의 눈을 감겨 주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뒤따르는 제자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아갈 수밖에. 그것이 화산의 제자고, 그것이 화산의 방식이다.
암향표 신법을 펼치며 열한 명에서 열 명이 된 그들의 전진 속에 이미 두려움은 사라지고 단호함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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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아직 설문조사 참가 안하신 700명 께서는 어서 어서 참여 해 주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