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56)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침중한 마음들.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청풍으로서도 매한가지였다.

금강탄과 백야참을 쓰면서 비로소 배운 바 무공을 실전에 적용해 보았고, 그 위력이 뛰어남도 알았다. 

그 뿐인가.

하운과 함께 백검천마를 상대할 때에는 꽤나 큰 가능성을 발견한 느낌도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스로의 힘이 미미함을 실감했다.

백검천마를 제압하던 광경. 

모든 것은 무당의 그 남자, 명경 때문이다.

그 무적의 검도가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져 가슴을 짓누른다.

스스로의 힘을 믿는 만큼 강해질 것이라던 사부의 말씀도 희미해져 버렸고, 검법과 내공에 대한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금세 괜찮아 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이 가중될 뿐.

만사가 어지러우니,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집법원의 검사들도, 다른 사방신검을 찾는 것도 이제는 어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화진루에 도착한 날, 날이 어두워져 동정호변 야조들이 조용한 울음을 울리는 새벽이다.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복잡한 상념으로 지새우는 중.

툭.

창밖에서 날아온 돌맹이 하나에 퍼뜩 몸을 일으켰다.

‘사저.’

내다본 바깥에 있는 것은 짐작한 대로 연선하다.

나오라는 손짓.

신여로 공격을 나가 돌아온 지금까지 기껏 십 여일 밖에 되지 않았건만, 다시 보는 연선하는 꼭 몇 년 만에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상자가 많다고 들었는데, 별 탈 없어 보이는구나.”

쏴아아아.

그 때 대화를 나누었던 호변. 여름의 공기를 담은 무거운 바람이 달빛 아래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너는 두 번째 부류인가보다.”

“........두 번째.........”

되묻고 있지만, 큰 궁금함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는 아니다.

생기가 없는 청풍의 눈빛.

연선하가 한 번 눈살을 찌푸리더니,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려운 싸움이 있을 때, 그것을 접하는 무인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어.”

손가락 두개. 

연선하가 첫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뛰어난 무공을 닦았음에도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이들이 있지. 아무리 실력이 있더라도, 도검이 난무하는 싸움터에서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법이거든. 이것이 첫 번째야.”

마저 접은 또 하나의 손가락. 

청풍을 쳐다보는 연선하의 눈이 더욱 더 밝게 빛난다.

“반면, 험한 싸움을 행해가는 가운데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어.이들이 두 번째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구분은 어렵지 않아, 처음 싸움 한 두 번 내에 결정 나 버리지. 일단 살아남기 시작했으면 앞으로도 그럴거야. 운(運)이 함께 한다는 뜻이니까.”

청풍의 심경을 짐작하고, 위로를 해 주는가.

고마운 마음이다.

그러나.

전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운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자신인 바.

무당파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위로가 또 하나의 칼이 되어 그의 마음을 찌르고 있을 만큼, 청풍은 연선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만한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제대로 듣지 않고 있군. 또 변했어.”

금세 알아챈다.

청풍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한다는 것. 허나 연선하는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고개를 한번 갸웃 하더니, 주변을 휘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살아 돌아온 것. 큰 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싸움이었지.”

청풍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연선하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청풍의 심경을. 고맙고도 고마운 이였지만, 그녀는 분명 타인(他人)이니, 그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짓는구나. 하지만, 나는 말이야, 이 싸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아. 네 상각 보다는 더. 기실, 너에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일일텐데. 어쩔 수가 없네. 너라면 알아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연선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가 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감각을 열고 주변을 검토하고 있다. 신중을 기하는 연선하. 무슨 이야기길래 그 정도까지 조심하는지. 제대로 들어먹지 못하고 있는 청풍이나, 이번만큼은 제대로 들어둬야 할 것 같았다.

“백검천마. 신여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지?”

물론이다. 

알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싸웠겠는가.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기에 무턱대고 나아갔다. 함정에까지 빠져들 정도로 방심하고 있었던 것, 그런 고수가 있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상원진인으로서도 그 때와 같이 척후대를 운용하지 않았으리라.

“다시 한번 명심해. 이것은 기밀이야. 백검천마의 존재, 서천각에서는 알고 있었어.”

“?!”

무슨 말인가. 

그냥 감정으로 들을 말이 아니다. 기밀이라더니, 정말 놀랍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야. 안복, 탈명마군. 그것도 물론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비밀로 했지.”

“그것이 대체........”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랬는가. 피해를 입고, 체면을 구겼다고 했는데,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더도 되었던 것이 아닌가.

“나도 공격대가 출발한 후에야 들을 수 있었어. 그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더군다나 네가 갔던 신여에는 백검천마까지 있다고 하니 기절초풍할 일이었지.”

“........”

말문이 막힌다.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알려주지 않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들리지? 맞는 말이야. 화산은 이번 전투로 가지를 쳐 냈어.”    

“가지를.......쳐 내다니......”

“장문령. 장문인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더군. 극비의 보안까지. 진실로 무서운 분. 이번만큼 통감한 적은 나로서도 없었어.”

“대체 이유가.......”

“정확한 이유는 그 분만 아시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야. 이를 테면, 지나치게 비대화 된 화산 문호의 정리라든지.”

연선하가 한숨을 내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삭월(朔月). 삐쭉한 끝이 하늘의 검이라, 화산 장문 천검진인의 속내는 이 어두운 밤처럼 진의(眞意)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진짜 싸움이 시작되면 적당한 무인들은 필요가 없으니까. 이번 네 현에 대한 공격에 투입된 매화검수가 몇 명이었지? 두 명씩 여덟 명. 기껏 매화검수 여덟에 나머지는 내세울 것 없는 평검수 수준의 무인들이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실제적인 전투력이 약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매화검수와 평검수의 격차가 크다지만, 그렇다고 약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아닐지. 기본만큼은 충분하고도 남도록 갖춘 이들이 평검수 아니었던가.

“평검수 몇 명에 속가제자들, 선검수들까지. 골고루도 보냈더군. 평검수들만 해도 훌륭한 무인들이다? 그 평검수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알아? 매화검수가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명된 이들이야. 본산제자들, 서천각과 내당, 연무원까지 합친 평가를 종합하여 버려도 될 만한 이들만 모아서 구성했어. 반 정도의 속가 무인들은 천문표국주가 맡았지. 대충 형식적인 것만 갖춘 걸 거야. 어차피 속가란, 대부분의 경우 이미 천화관이나 소요관에서 가망성이 없다고 판정받은 이들이니까.”

버려도 될 만한 이들.

필요 없는 무인들은 죽음으로 걸러내겠다는 듯 들린다.

어릴 적부터 보무제자, 선검수, 평검수를 구분하고 재인들을 추려내는 화산파였지만, 죽음으로 내 몰면서까지 걸러낸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화산파는 확장할 만큼 확장하여, 뻗어있는 세력이나, 축적한 금력, 보유하고 있는 무공까지 최고조로 넓혀 놓은 상태야. 그것을 집약시킨 첫 시도가 매화검수라면, 이제 다른 것들에서도 최적화를 시키겠단 의도겠지. 화진루를 봐. 화산의 이름을 걸고 모였지만, 그들 중에서 진짜 강자는 얼마나 될 것 같아?  겉보기에 그 위용은 실로 대단하지. 많으니까. 그러나 정말로 강한 이들은 악양에 오지도 않았어. 화산의 진짜 실세들이 이곳에 없다는 말이야. 우리들 매화검수들조차도 전원 모이지는 않았잖아.”

“그러면 이 싸움은........”

“강호의 평판이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니, 당장 제자들이 죽어 나간다고 해서, 결말이 변하는 일은 없어. 제자들이 죽어 나가면, 싸움에는 강한 구실이 생기게 되고 제자들은 더 큰 힘으로 뭉치게 되는 법. 본산 수련에서 보인 성취는 별반 대단할 것이 없었어도, 실전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재들을 가려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내실을 다지다가 결국은 이길 거야. 역시 화산파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 그러니 어쩌면 장문인께서는 이러한 철기맹의 도발을 반갑게 생각하고 계실지도 몰라.”

무서운 이야기였다.

내칠 것은 내치고, 옥석만을 가려내어 문파의 부흥을 꾀한다.

장기판의 졸처럼 쓰여 지는 제자들.

죽으면 끝이고, 살아남으면 중용된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발상, 청풍은 새삼 연선하의 눈을 살펴보며 또 한번의 충격을 경험한다.

밟고 밟히며 올라가는 경쟁의 사슬. 연선하는 거기에서 살아남은 자다. 그녀가 말한 두 번째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나. 살아남고 살아남아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졸(卒)에서 잃어서는 안 되는 차(車), 포(包)가 되라는 말이다. 

“여하튼 고약한 싸움이 되어 버렸어. 그 이야기는 거기까지하고, 일단 네 이야기를 좀 하자.”

“제.......이야기라면.”

“집법원.”

“아.”

“집법원이 너의 존재를 알아챘어. 네가 가진 물건, 절세의 보검(寶劍)이라 하더군.”

“........!!”

“은연중에 소문이 나고 있어. 싸움에 관한 풍문은 요란하고 넓게 퍼지지만, 보물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고 깊게 퍼져 나가는 법이야. 무당파의 마검이 지닌, 흑요의 검과 신마(神馬) 흑풍에 관한 것은 이미 이번 싸움 이전부터 이야기 되고 있었다고 해. 거기에 화산의 젊은 제자가 정체 모를 보검(寶劍)을 지니고 있다는 풍문이 서천각에 닿은 것도 벌써 이틀 전이지.”   

“정검대........”

“그 쯤 되니 나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어. 집법원 정검대 무인 다섯 명, 네가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잡아들일 기세더군. 헌데, 바로 어제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겨나 버렸지.” 

“변수?!”

“원로원의 압력이 들어왔어. 전대 집법원주를 지내셨던 옥함진인(玉函眞人)께서 직접 이곳에 오셨지. 새 무공을 전수한다는 명목 하에, 다섯 정검대 무인들을 모조리 붙잡아 놓고 서북쪽 상황루에서 한 발작도 못나가게 하는 중이야. 원로원과 장문인의 신경전이 대단해.” 

“원로원에서.......”

“네가 지닌 보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기는 한가봐. 도문과 검문의 뜻이 다른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처음 봤어. 어쩌다 그런 일이 얽혀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몸 간수 잘 해. 내가 뒤를 봐 줄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버렸으니까.” 

“.......”

청풍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연선하에게 도움을 받고, 위로를 받아야 하며, 걱정까지 끼쳐야 하는 지금의 자신이 초라했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연선하를 만나면 항상 반갑고 기꺼웠던 기분이, 이번에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이 자리를 뜨고 싶을 뿐이었다.

“내 생각인데, 너, 이 악양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물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 알려지지 않았다면 모르되, 앞으로는 너를 노리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야. 그럴바엔, 화산의 그늘에 있는 것이 좋겠지. 집법원이 너를 찾고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한 식구거든. 잘 생각해. 경동하지 말고. 알았지?”

“.........”

“왜 대답이 없어?”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대답. 

잠시 머뭇 거리다가, 몸을 돌리는 연선하의 뒷모습에 청풍의 시선이 남았다.

“가 볼게. 당분간은 못 볼 거야.”

타탓.

쏴아아아아.

달빛 머금은 바람이 다시 한번 청풍의 곁을 머물다 사라진다. 

멀어지는 연선하. 

결국은 타인이다. 이제 보면 결국 백호검만 들었지, 어디에도 불필요하다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에, 연선하는 이 여름 바람처럼 그저 스쳐가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한 없이 작아지는 마음에, 백호검 검자루를 잡아본다.

금강탄을 내질러 볼까.

힘을 주려다 그만 둔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봐야 오르지 못할 산(山)이 있음에.

터벅 터벅, 화진루로 발길을 옮기는 청풍.

빠르게도 찾아온 좌절의 무게는 천근의 답답함을 지녔다. 그 어느 때 보다 큰 짐, 마음의 짐을 져버린 젊은 청풍에게 닥쳐온 질풍은 그처럼 살을 에는 날카로움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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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승리를 기원합니다.

바빠서 이만..... 

  

화진루에서 보낸 시간.

청풍은 십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자하진기의 운용까지 멈추어 버린 채, 무릎 위에 올린 백호검만을 내려보며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며칠 동안을 복 잡한 상념과 씨름하며 보낸 끝에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라, 만사 뒤틀린 듯한 느낌에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바보 같은 짓이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야.’

해답이 없는 고민이다. 아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청풍이다, 갑갑한 마음만 더해져 가는 지금 이 곳에만 쳐 박혀 있다가는 그대로 이 생이 끝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서게 된 바깥은, 끌어올라 터지기 직전의 무림처럼, 온통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정처 없이 나온 악양의 거리는 며칠 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을 최소화하고 관가의 움직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공격 재개시기를 노리고 있는 무림맹이다. 외부와 단절되어 버린 청풍의 마음을 농락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전한 모습인 것이었다.

터벅 터벅.

힘없이 걸어가는 청풍은 문득, 한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저잣거리.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뇌리를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방금 전 하고 싶었던 말을 잊어 먹은 것처럼. 왠지 모르게 신경이 거슬리는 기분이다.

만사통달(萬事通達). 운수형통(運數亨通).     

마침내 알아챈다.

노상 한 쪽에 앉아 있는 늙은이. 점술가의 깃발이 익숙하다. 

같은 장면의 재현. 보았던 것을 또 보는 그 경험은 그야말로 기이하기만 했다.

“젊은이.”

같은 목소리. 같은 노인이다.

홀린 듯 걸어가 그 앞에 섰다.

“내 말했지. 기수난도(氣數難逃)라, 천기와 운수는 벗어나려 해도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큭큭큭.”

멍석 자락 위에 산반을 놓고, 괴이한 웃음을 던져 놓았다.

번쩍, 하는 기광이 노점술가, 만통자의 눈에 깃들었다.

“오른쪽 광대뼈, 금기(金氣)가 쇠락한다. 지실응(知失應)하면 세력이 약해지고 난조되니, 흉기와 유혈을 조심하고 수해를 경계하라 했거늘. 결국 운수(運數)가 살(殺)이 되어 심신을 해치고 말았다. 교행불해에 색정음행이라 아직도 그 화가 남았구나.”

“.........!”

“백호는 추(秋). 웅대함과 무용을 살릴 수 있었으나,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 뿐인가. 사람이 모자라다. 준비를 안 했다는 말! 지금보다 더 흉(凶)하기도 어려우리라.”

청풍의 안색이 굳었다.

점복(占卜)이란 것은 본디 뭉뚱그려 해석하면 어디에나 들어맞기 마련이다. 허나 만통자의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면에서 최악인 나날들이지 않던가. 실로 이보다 나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산반을 굴려 본 만통자가 딱, 고개를 들더니 청풍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단호한 목소리, 힘을 실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것이 더 있다. 왼쪽 광대뼈, 목기(木氣)가 엿보인다. 목기(木氣)는 곧 청룡. 갑인(甲寅)의 목신(木神)으로 춘삼월에 왕하는 길장(吉將)이다. 지득을 하면 보물을 얻게 되나, 지실응하면 물건을 잃게 된다. 서적과 재물에 운이 따르노니, 밝음 속에 정진하여 태음(太陰)을 몰아내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야.”

현기(眩氣)가 담겨지는 말이다.

이해할 수 있을 듯, 없을 듯. 

아직까지도 늘어져 있는 청풍이 결국 고개를 흔들고 만다.  

‘운수(運數). 흉사(凶事).......’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다. 할 말도, 물어볼 말도 찾을 수가 없다. 

복잡한 마음. 그대로 서 있던 청풍이 고개를 떨구며 침중한 얼굴에 어두움을 더했다. 

그 때였다.

다가오는 기척.

나직하고 풍부한 목소리.

“부불통지(無不通知) 만통 어르신께서, 또 무슨 바람이 부신 겝니까.”

심상치 않은 내력이 깃들어 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청풍은 거기에 한 명의 헌앙한 젊은이를 발견한다. 이십 대 후반. 짙은 눈썹에 하얀 얼굴,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어린 거지 따위가 어찌 그 큰 뜻을 알리.”

거지라.

그러고 보니, 기워 입은 누더기다. 발도 맨발에 허리에 짤막한 몽둥이 하나. 옷차림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뻗어 나오는 기세가 훌륭했다.

“어리다니요. 내일 모레면 이립(而立)입니다.”

“이립? 논어(論語)의 위정(爲政) 편이라. 거지가 공맹(孔孟)을 들먹여 보았자 그 천품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처럼 말씀만큼은 기막히게 하시는군요. 그래 봤자 노선배도 기껏 사람 구경하러 다니시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어디 보자, 이번에는 누군가요. 흐음. 화산(華山) 보검(寶劍)의 주인이라........어라? 그가 화산에도 손을 뻗쳤답니까?”

자신을 안다?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 사람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훑어 내리는 시선, 무례한 태도에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도 별반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경계심이든 분노든, 가질만한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아직 그의 눈이 닿을만한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 어린 거지야. 너도 그의 관심 밖인 것은 매한가지야.”  

“하하, 그도 그렇군요.”

호탕하게 웃어넘기고는 몸을 돌려 청풍을 바라본다. 

포권을 취하는 모습, 차림새야 어떻든 거지라고 봐 주기가 힘들었다. 

“순서가 좀 바뀌었는데, 제 소개를 드리지요. 개방의 장현걸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방주 은퇴만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방의 입담은 험하기로 유명하다.

방주를 마구 거론 하는 것도 별반 놀랄 일은 아닌 바, 청풍은 마지못한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 청풍입니다.”

 “기운이 없어 보이시는군요. 백호보검이 손에 안 맞으시기라도 하는 겁니까.”

“.........”

점 점 더.  

“그래서는 안 되죠. 나는 거기에 흥미가 많습니다. 네 개 전부.” 

감았다 뜨는 청풍의 눈에 비로소 한 줄기 빛이 번뜩였다.

사방신검.

전부 알고 있는가.

이 젊은 개방도(?幇道)는 확실히 비범하다. 개방의 정보력이야 알아주는 바이지만, 이 정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개방도에 보물, 고리정분(藁履丁粉)이라 짚신에 분(粉)을 바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보물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어찌 이리도 무도할까. 쯧쯔쯔.”

“하하, 만통 어르신께서 무불통지에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거지는 공짜를 좋아합니다. 세상 천지에 임자 없는 물건이란 모두 다 자기 것처럼 생각하지요. 마땅한 주인이 없다면 거저 가져다 쓰는 것이 거지입니다. 암, 그럼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고서 청풍을 바라본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마음.

이 남자에겐 알 수 없는 위험이 있다. 당장 검을 펼쳐 내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을 듯한 기분. 흐려졌던 판단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청풍. 화산파 본산 혈사 이후 출도. 아직까지 화산파 보무제자이나 무공은 평검수 이상. 사부는 선현진인으로 십 년 전 비검맹(比劍盟) 발호 때 사망함. 맞습니까?”

정신이 번쩍 난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괜찮다. 수천, 수만 방도 최고의 정보력을 지닌 개방이니까. 

그러나 사부의 이야기는 다르다.

이제 와서. 

다시 듣는 사부의 도호는 생소하면서도 무서운 울림을 품고 있었다. 

“비검맹.........발호........?!”

사부의 등선. 

항상 잊지 않고 있던 분이기에 오히려 간과하고 있었던 그 이유.

“몰랐습니까? 하기사 그렇겠군요. 직전 제자에게까지 알릴 이야기는 아니었겠죠.”

“무슨.......!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죽어 있었던 듯한 청풍의 목소리에 생기(生氣)가 돌아온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한 발 다가서는 몸짓에 장현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얼굴.

장현걸이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내막을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타파의 일이니,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장문인께 여쭤보거나 비무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지요.”

아니다.

장현걸은 다 알고 있다.

읽을 수 있었다. 그 눈빛. 

그러나,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

당사자. 상대 무인을 말함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사부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그 상대 무인이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왜 여태 알려고 조차 안 했는가.

‘그것은.......’

품안에 묵직한 자하진기의 비급. 

사부님, 아직까지도. 아직까지도. 

‘살아있으시길.’

역시나 그런 것이다.

스스로 모르길 바란 것.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이었다.

사부님의 비무 상대자.

그가 있음이 곳 사부님의 죽음을 말해주는 것이기에.

언젠가 마음 한 곳에 가두어 두었던 그 의문이 비로소 굳은 빗장을 풀고서 뛰쳐나오려는 것이었다.

“당사자. 복수를 생각하시는지요. 무리입니다. 그 자는........강해요.”

장현걸의 말.

청풍의 눈에 타오르는 바람이 깃들었다.

무리라........ 

언제는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사부님의 이름 앞에서까지,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제는.    

“말씀해 주십시오.”

알아야 할 때였다.

장현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흘끔 만통자를 살핀 그. 외면하는 만통자다. 스스로 뱉기 시작한 말은 스스로 책임지라는 기색이었다.

“파검존(破劍尊), 육극신(陸克愼). 그의 이름입니다.”

장현걸이 어깨 어림을 긁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꺼낸 말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청풍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장강 수로의 구 할을 장악하고 있는 비검맹. 그곳에 속한 괴수들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괴물이지요. 비검맹주와 한 판 붙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로 알려져 있으며......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끊고서, 돌리는 시선. 

장현걸의 눈이 청풍의 허리춤에 닿았다.

“검(劍)을 탐합니다.”

“........?!”

“보검(寶劍). 천하가 좁다하고 돌아다니는 자(者)임에, 그 검의 이야기 또한 들었을련지도 모르지요. 앞으로는 어찌 되었든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장현걸이 청풍이 차고 있는 백호검을 가리켰다.

조심하라는 말, 경고다. 거물들까지도 눈독을 들일 수 있는 것. 거기에는 장현걸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청풍이 포권을 취했다.

만통자를 돌아보는 청풍, 만통자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린 거지. 바람직하지 않은 인연이다. 하지만 또 예전과 같은 만남이 기다리겠구나. 복채는 이번에도 받지 않겠어. 내 좋은 이야기만 해 줄 수 있을 때, 그 때 받도록 하겠다.”

주섬주섬. 

멍석을 챙기는 품이 그 때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이런 식의 엮어짐. 기연(奇緣)이다. 몇 번이나 더 만나게 될 것인가. 확신에 가까운 느낌, 적어도 이번 것이 끝은 아닐 것 같았다. 깃발마저 거두어들인 만통자, 청풍이 포권을 취했으나 그냥 손을 내저을 뿐이다.

“어린 거지야. 이리오라. 내 할 말이 있다.”

몸을 돌려 장현걸을 붙잡고, 성큼 성큼 걸어간다.

“아, 좀 놓고 가요. 이거.” 

엄청난 사실 하나를 떨구어 놓은 채.

못내 못내 끌려가는 장현걸. 

새로 만난 사람과, 다시 만난 사람이다.

땅에 박힌 듯, 그대로 서 있는 청풍의 두 눈에 복잡한 마음이 깃들고.

끝나지 않은 오늘의 인연에,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 하나가 더 있어, 그의 뒤편으로 다가온다.

편해 보이는 경장에, 호리호리한 체구.

“이제야 찾았네요.”

천천히 돌아보는 그의 눈에, 맑은 목소리의 주인이 비쳐든다.

서영령.

청명한 여름날 햇살 아래,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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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머리가 터지도록 바빠서,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네요.

어떤 분께서, 육대세가가 구파일방에 꿀릴 것이 무엇이냐.......라 질문을 해 오셨습니다. 

남궁가에.......남궁연신이 있었다고 하였지요. 

남궁연신은 남궁가 최고 연배에 강호에서 검성 칭호를 받은지 수십 년입니다. 헌데, 명경이 근소한 차이로 졌었지요. 이때 명경의 나이가 기껏 삼십대 중반입니다. 

무당마검 말미의 명경이었다면, 남궁연신에게도 이겼을 것 같은데.......아닌가요? ㅋㅋㅋ

그리고.....

사천 당가 가주, 팽가 가주는 연이어 명경에게 패했었지요? 

육대 세가 가주들 중, 명경과 상대할 만한 이는, 구양가주 하나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육대세가의 입장에서는 힘의 열세를 느낄 만도 하지요. 말하자면 신진 고수, 나이도 얼마 많지 않은 이가, 가주에 맞먹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구파입니다. 물론 구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질문 하시는 것 일일이 다 답변 못해 드리는 것 정말 죄송합니다.

대체로 질문 댓글들은 바로 뒤에 답글을 해 드리지 못하면, 다시 안 읽으실까 싶어, 잘 답변을 못 해 드리게 되더군요.

이런 자리를 빌어나마 자주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음, 언젠가 댓글 중에, 명경의 아버지에 대해 내기를 하셨다고 하신 분이 계셨는데요.

명경의 아버지는 삼안마군입니다. 무적진가의 가신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가주보다 더 강했지요. 삼안마군도 짤막하게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요. 어딘가 있을 겁니다. 무당마검 어딘가에요.-_-a

낭인왕전 주인공의 사부 역시, 무적진가의 가신입니다.

전대 낭인왕이 아니었죠.

훗날 연재가 시작하면 하시게 되겠지만, 낭인들의 체계는 약간 다를 겁니다. 아마 화산질풍검보다는 훨씬 속 시원한 글이 아닐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주인공 성격이 명경에 비슷하고, 훨씬 싸가지가 없거든요.

비슷한 주인공을 두 번 연속으로 쓰다가는 욕을 얻어먹기가 십상이라서요.......^^;;;

청풍 같은 주인공을 묘사해 보고 싶기도 했고요.^^

아, 그리고, 금세는 ‘금세’가 맞습니다.

저도 금새라 쓰다가 한 분께 지적 받고서야 알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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