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오른 손이 잡혔으니 왼손으로 백호검을 옮겨 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 순간. 득달처럼 달려드는 다른 유성이괴의 공격이 있었으므로 생각처럼 검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잘려버려 얼마 되지 않는 쇠사슬을 채찍처럼 휘둘러 오는 자.
그 기세가 온전한 유성추 못지않았다. 장단(長短)을 가리지 않는 기예다. 확실히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콰악!
갑작스레.
오른팔에 감겨있는 쇠사슬로 강한 힘이 전해졌다.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이었음에, 다른 자의 쇠사슬을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머리 한 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쇠사슬이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위기. 경험 부족이 빗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처음 상대해보는 기병(奇兵)의 모용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한 까닭이었다.
“큿!”
자하진기를 끌어 올리면서 팔을 휘둘렀다.
내공 대 내공, 힘겨루기라면 지지는 않을 것이라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짧은 생각이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까.
유성추라는 병장기를 쓰는 자들은 본디, 쇠사슬을 타고 도는 이러한 힘겨루기를 다반사로 겪어 보기 마련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힘을 지녔어도 기술로서 넘겨내는 자들이다. 청풍처럼 그저 강하게 휘둘러본다고, 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얍!”
청풍의 고전.
낭랑한 기합성이 들려왔다.
서영령의 목소리다.
청풍을 도와주기 위해서 달려든 모양이었지만, 앞에 둘러친 벽은 그야말로 두터울 따름이었다.
유성이괴 이외의 다른 무인들.
앞을 막아서고 서영령의 전진을 방해한다.
나중에 다시 쟁탈전을 벌이더라도, 원 주인인 청풍에게서 일단 빼앗아 놓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백철선을 꺼내어 휘두르고, 현란한 무공을 선보이는 서영령이지만 일시에 뚫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조력을 당장 기대하기는 힘들다. 청풍 홀로 이 상황을 타계해야만 했다.
촤륵! 파팡!
백호검을 옮겨 잡지 못하도록 계속하여 몰아쳐 오는 공격이다.
한쪽을 봉쇄당한지라, 운신이 무척이나 어렵다.
그 뿐인가.
짧게 끊어 치는 쇠사슬에는 제법 강맹한 경력이 어려 있어, 맨손으로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금강호보의 강인함과 자하진기의 정심한 내력으로 버티고 있을 뿐, 해결책을 찾아내기가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런.......!’
꾸욱.
최악이다.
오른 팔에 감긴 쇠사슬이 점점 조여들고 있었다. 슬슬 고통이 전해 온다. 팔 위쪽에서 압박을 가하니 백호검 쥐고 있는 손아귀에도 힘이 빠지고 있었다.
진실로 위험하다.
이래서야 검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위기.
내력을 끌어 모아, 승부를 걸어보려 할 때였다.
쐐애액!
갑작스레 한 쪽에서 달려드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순식간에 뛰어들며 청풍에게 날아드는 굉장했다. 은밀하고도 빠르다.
절정에 오른 신법(身法)이었다.
파앙! 투툭.
인영의 목표은 오직 하나였다.
잡혀서 고정되어 있는 오른손.
아차 하는 순간에 손목이 비틀어지고, 이어, 손아귀가 허전해졌다.
“!!”
백호검을 강탈당해 버린 것.
공수입백인(空手入白引), 상대방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는 수법. 절묘한 한 수였다.
“귀수무영(鬼手無影)!”
유성이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귀수무영이라 불린 자.
비쩍 마른 몸에 걍팍한 인상이다. 그가 괴소(怪笑)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크. 남 좋은 일만 시키는 바보들이로구나!”
어부지리도 이런 어부지리가 없다.
백호검을 잡은 귀수무영의 두 눈에는 탐욕이 충만하여 희열의 빛까지 번뜩인다. 땅을 박차는 그의 몸놀림. 모두의 목표가 일순간에 바뀌는 순간이다.
청풍을 압박하던 유성이괴의 일인이 먼저 몸을 날리고, 이어 서영령과 얽혀지던 무인들이 상황를 알아채고, 방향을 바꾼다.
어이없는 사태.
귀수무영은 그 별호처럼 굉장한 신법을 발휘하며, 사람들을 뛰어넘고, 벌써 저 만치에 가 있었다.
“제길!! 이런 개 같은!”
청풍과 힘겨루기를 하던 유성이괴의 일인 또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욕설을 내 뱉는다.
느슨해진 쇠사슬.
단숨에 풀어헤치고, 신법을 전개했다.
당장이라도 유성이괴들을 때려 눕히고 싶었지만, 지금은 백호검이 먼저다.
서영령 또한 다급하게 뒤를 따르고.
인생만사 언제 바뀔지 모르는 법.
이제까지 쫓기기만 하던 그들 이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쐐액!
별호에 무영(無影). 이니 귀영(鬼影)이니 하는 어구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경공 실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멀어지는 귀수무영이다.
귀수(鬼手).
공수탈백(空手奪白), 공수입백인으로 대변되는 수법(手法)이 귀신처럼 뛰어나다는 것을 뜻함이었다. 좋게 말하면 연성하기 어려운 기예(技藝)요, 나쁘게 말하면 저잣거리 배수(背?:소매치기)들의 기술이다.
청풍의 손에서 백호검을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귀수의 수공(手功)과, 무영의 경공이 뛰어났기 때문, 보물을 지닌 사람으로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의 인물이었다.
“게 섯거라!”
그 말이 쓸 데 없는 외침인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경공 실력에 따라 쭉 늘어서는 무인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는 이들이 관도 변을 따라 진풍경을 만들었다.
쐐애액!
귀수무영이 빠르다지만, 제법 경공 실력이 되는 자들이 또 있었던 모양이다. 귀수무영의 옆을 따라 붙으면서 병장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있었다.
탄력 있게 몸을 띄우며 공격을 피해내고, 다시 땅을 박차는 귀수무영은 그 별호가 무색할 만큼의 몸놀림을 보여 주었다.
파팡.
전환되는 움직임에 속도가 줄어들만도 하건만, 느려지기는커녕, 되려 빨라지는 귀수무영이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거리.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은.......’
달리고 있는 무인들 사이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은 역시나 청풍 그리고 서영령이다.
이런 경우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곧, 내력의 차이.
안정적이고 정심한 내력을 지니고 있을수록, 경공술도 그에 비례하여 뛰어나지기 마련이었다.
‘설마........힘을 얻고 있는가.’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다. 청풍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백호검.
백호신검.
내력에 따라 경공이 빨라진다?
백호검을 쥐면, 그 검안에 가진 금기(金氣)에 내력이 다소 불어나는 것을 느낀다. 같은 현상이 귀수무영에게서도 일어나고 있다면, 귀수무영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귀수무영의 신형이 멀리 작아지면 작아져 보일수록 급박해지는 추격전이다.
다들 자신의 물건이 아님에도 필사적이기까지 한 인간 군상에 추악함이 절로 느껴져 왔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귀수무영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은 끝내 네 명으로 압축되어졌다.
청풍, 서영령.
그리고 이름모를 무인 두 명.
억지로 힘을 쥐어짜는 것이 눈에 보이는 두 무인들이다. 청풍과 서영령도 전력을 다 하기는 매한가지. 결국, 청풍과 서영령이 두 무인들을 앞지르며, 추격자들의 선두로 나서기 시작했다.
“쏠 테니, 가서 잡아요!”
서영령의 외침이다.
소매를 털어 귀수무영의 등을 향해 겨누는 그녀.
이렇게 먼 거리, 그녀의 눈에 신중함이 깃들고, 그녀의 손에 정심한 내력이 머물렀다.
파아앙!
어떤 때보다도 커다란 파공음이다.
청풍도 전개하던 신법에 진기(眞氣)를 배가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러 있던 속도를 더 끌어 올렸다.
쐐애애애애액! 퍼억!
하얀 빛 나는 빛줄기가 길게 길게 뻗어나가, 마침내 귀수무영의 등허리를 강타했다. 휘청, 흔들리는 귀수무영이었으나, 머지않아 자세를 바로잡았다. 묘하게 반응이 느린 듯한 느낌, 뻣뻣해 보이는 움직임에 위화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텅!
청풍의 신형이 쭉 앞으로 뻗어 나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
확실히 느려져 있는 귀수무영이다. 뭔가 이상했다. 서영령의 백강환을 맞은 것 이외에도 속도를 저하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큿!”
탁한 신음소리가 앞 쪽에서 들려왔다.
빠르게 나아가던 귀수무영의 신법이 한 순간 흐트러지는 듯 하더니, 이내 땅을 박차고는 관도 변에 있는 잡목 숲으로 뛰어들어 버렸다.
파사사삭! 사사삭!
귀수무영을 따라 곧바로 풀숲으로 뛰어든 청풍이다.
수풀을 헤집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오는 중.
시야는 가려졌지만, 소리가 있으니, 방향을 가늠하는 것만큼은 어렵지 않다. 귀수무영이 움직이는 내고 있는 기척을 향해 재빨리 풀숲을 헤쳐 나갔다.
파삭! 파사삭! 사삭!
숲에서 행하는 추격.
이내, 뒤 쪽에서도 풀 숲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쫓아오던 다른 무인들이다.
숲 속으로 뛰어 든 그들, 그 중에는 백강탄을 내 쏘느라 속도가 늦어졌던 서영령도 있을 것이었다.
사사사사삭!
숲 저 쪽.
방향이 바뀐다.
귀수무영의 동선(動線)이 변화하고 있다.
도리어 이 쪽을 향해서다. 무슨 이유인가. 이래서는 오히려 곤란했다. 이쪽의 기척과 섞여 버리면, 목표 포착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파삿!
멈추었다.
귀수무영의 움직임.
기다리는 것일까. 여태까지 도망만 치던 자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고 이동을 중지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바짝 귀수무영의 뒤를 쫓던 청풍, 그 역시도 일단 멈추어 서고는 감각을 열어 귀수무영의 존재를 확인했다.
‘있다. 그러나........이상해.’
후우. 후우. 후우.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헐떡이는 소리. 심상치 않다. 그저 먼 거리를 뛰어 왔다고 몰아쉬는 숨소리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양상이었다.
사사삭! 파팟!
풀줄기와 나뭇잎을 날리면서 여기까지 이른 무인 하나가 청풍을 흘끔 쳐다보고는, 먼저 귀수무영을 향해 달려 나갔다.
뒤이어 나타난 이.
서영령이다.
그녀가 멈춰 있는 청풍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안 가요?”
다급한 기색과 함께 의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안 가냐는 그녀의 질문.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발을 옮기려던 청풍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백호검을 휘두르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서두른다?’
굳이 이렇게 황급히 뒤 따라 왔어야만 했나.
무엇인가 어긋나 있다. 이렇게 급박한 마음을 지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어서!”
한 번 더 청풍을 부르고는 그대로 풀숲을 향해 뛰어든 서영령이다.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그녀. 그렇게 다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청풍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히면서, 그 예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비로소 몸을 날렸다.
쩡! 스가각!
그 때였다.
충돌음에 이어 들린 것은 피륙이 갈라지는 섬찟한 소리다.
눈앞에 드러난 광경.
귀수무영이 백호검을 겨누고 서 있는 아래로, 앞서 달려 나갔던 무인이 커다란 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아름드리 고목(枯木) 밑에서, 풀 숲 사이 드러난 귀수무영의 눈빛.
두 눈 한 가득 기묘한 번들거림을 품고 있는 상태다. 도무지 정상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한번 씩 흠칫거리는 경련에 온 얼굴에는 난데없는 광기가 잔뜩 떠올라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후우.
몰아쉬는 숨소리. 검 끝이 떨린다.
검 끝만 떨리는 것이 아니라, 팔 전체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희미하게 감지되는 기운. 청풍은 익히 알고 있는 기운이다. 날카로우면서 경직되어 있는 그 기운. 다름 아닌 백호검의 금기(金氣)였다.
“카아아.”
고개를 요상하게 꺾던 귀수무영이 갑작스레 괴이한 소리를 발하며, 서영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핏발이 서 있는 두 눈에 알 수 없는 욕망이 일렁이는 중, 그것은 놀랍게도 물건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여인을 향한 육욕(肉慾)인 듯 했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 괴사(怪事)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파라라락.
사납게 휘둘러 오는 백호검을 미처 맞받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면서, 백철선(白鐵扇) 부채를 꺼내 든 서영령이다.
위잉! 위이잉!
귀수무영. 초식도 투로도 없이 마구잡이로 백호검을 휘두른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 하지만 휘두르는 검세에 실린 기세만큼은 만만치 않다. 허점투성이로 보이지만, 도검을 잘라내는 백호검의 날카로움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쉽게 받아낼 수 있는 공격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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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하군요.
일이 바쁘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