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에 빛나는 별.
천도(天道)는 사람이 헤아리지 못하는 조화를 발하여 수많은 운명을 만들고 바꾸어 나간다.
아무도 모르는 새.
서방 백제, 일곱 개의 호성(虎星)이 하늘을 가로질러 두 사람 머무른 산 위를 비출 때.
깊어가는 밤.
곤한 잠에 빠져들어 있던 청풍은 문득, 한 줄기 숨결이 얼굴 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다.
곱고 고운 손길이 청풍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꿈인가......’
어깨.
가슴.
허리 쪽으로 돌아든 그 손이 왼편에 묶여 있는 검자루에 다가간다.
백호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막혀 조용하게 요동치는 손이다. 청풍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훅.
입술로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이 있다.
그녀의 입술.
놀랍도록 부드러운 감촉에 한 줄기 전율이 등줄기를 스치고 올라갔다.
“!!”
비로소 깨닫는 청풍.
이것은 꿈이 아니다.
꿈인 것으로만 알았던 아련함과 실제로 느껴지는 놀라움에 눈을 뜨니,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는 그녀의 맑은 얼굴이 앞에 있었다.
뭉클.
입술을 타고 넘어온 혀가, 청풍의 이빨을 간지럽혔다. 온 몸의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입맞춤은 정신을 온통 허물어뜨릴 정도로 강렬했다.
“.......!?”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청풍.
시선을 둘 곳을 찾다가 결국,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 순간.
스르르 감았다 뜨는 서영령의 눈빛이 그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것은.......!’
언제나 총명하게 반짝이던 그녀의 두 눈이 기이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일렁이는 눈빛.
본 적이 있다. 이 것.
그 까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묘한 열기가 솟아 나오고 있다.
마치 귀수무영이 제 정신을 잃었을 때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꽈악.
그녀의 왼손이 청풍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점점 더 청풍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그녀, 손아귀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안돼.......!’
그녀의 손이 이르고자 하는 곳을 알아챘다.
백호검을 향해 뻗고 있는 손, 백호검의 검자루를 잡으려 한다.
탐낸다는 느낌이 아니다.
무엇인가 그녀의 행동을 조종하기라도 하는 듯.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갈구하는 몸짓이 었다.
“이.......!”
정신을 차리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다.
청풍을 확 밀친 그녀가 그 도톰한 입술로 청풍의 입을 덮어 버렸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이대로 몸을 맡겨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그의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백호검.......백호.........’
불쑥 떠오르는 한 마디.
만통자가 말했던 백호신의 명운이 생각났다.
“백호는 경신(庚申)의 금신(金神)으로 추(秋) 삼월에 오는 흉장(兇將)일지니, 색정음행을 좋아하고 교행불해하는 신이라 지실응(知失應) 하면 세력이 약해지고 난조된다.”
“교행불해에 색정음행이라 아직도 그 화가 남았구나.”
색정음행(色情淫行).
흉신의 기운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서영령은 좋은 여인이다.
이렇게 무너지게 놔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생각대로만 될 지언가.
꾸욱.
뒤로 밀쳐져 엉켜있던 그녀의 손이 일순간 청풍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더니, 결국 백호검에 닿고 말았다.
“!!”
스르릉.
백호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
급하게 손을 움직여 검자루를 잡아 힘을 주었다.
화아악.
손을 타고 올라오는 기운.
무작정 잡아넣으려 했던 것이 실수였을 줄이야.
처음 접해보는 기운이다. 순식간에 팔을 타고 단전을 거쳐 백회로 치닫는 이 힘.
청풍은 직감했다.
빼앗긴다. 서영령과 같은 상태로 변하는 것.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마침내 하얗게 탈색되어 온전한 사고를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스르릉.
두 사람이 동시에 잡고 있는 백호검이 검집 안에서 빠져 나온다.
산 속의 밤공기를 마시러 동굴 밖으로 나오는 한 마리 백호처럼.
두 남녀.
달빛 받아 살아 움직이는 듯한 백호검.
한 팔씩 뻗어 땅으로 늘어뜨린 그 검날 위로, 이제 이성을 잃어버린 젊은 육신들이 서로에게 엉켜 든다. 목덜미에서 쇄골로 이어지는 곡선 위에 청풍의 입술이 머물다 스쳐가고, 서로를 거칠게 탐하는 움직임에 한 꺼풀씩 옷가지가 벗겨지고 있었다.
서로가 한 손밖에 쓸 수 없음에도 용케 서로의 육신을 드러내는 손길이다.
서영령을 덮쳐누른 청풍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배어 물었다.
“하아........!”
들뜬 신음소리.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다.
서영령.
무공으로 다듬어진 유연하고도 탄탄한 육신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표현 할 수밖에 없다.
허나, 청풍의 눈은 이미 그 아름다움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 색정(色情)에 취하여 그 끝을 찾아가는 몸짓에는 어떤 부드러움도, 어떠한 애정도 없어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찢어내듯 벗겨내는 고의(袴衣).
결국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오직 합일(合一)의 본능에 따라 밀어 내는 청풍의 몸에 서영령의 숨이 일순간 멈추었다.
“흐읍.”
고통을 느끼기는 하는가.
풍랑의 흔들리는 돗단배가 되어버린 서영령의 몸은 처음으로 느끼는 그 아픔을 감내하기라고 하듯, 더욱 더 힘을 주어 청풍의 몸을 휘감는다.
끝 갈 데 모르고 올라가는 두 사람의 행위.
어느 순간, 하얀 검신에 비치던 달빛이 뛰쳐나오기라도 하듯, 백호검의 검날로부터 아지랑이 같은 금기(金氣)를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샘물처럼 솟아나온 백기(白氣)가 두 사람의 몸을 한꺼번에 휘감아 들어가고........
물감이 번지듯 혈맥을 따라 스며드는 진기(眞氣)의 색깔이 어느 때보다 짙어졌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의 움직임도 최고조에 이른다.
“아아아아!”
마침내 절정에 올라 가쁜 숨을 내 쉬는 두 사람의 몸.
히끄무레하게 일렁이던 하얀 기운이 잦아든다.
챙강.
그토록 꽉 잡고 있던 백호검.
두 사람의 손에 머물러 있던 힘이 동시에 빠져나간 듯, 땅으로 떨구어 지는 신검(神劍)이다. 아직도 어스름하게 번져 나오는 백색의 기운은 마치 제 할일을 다한 신물(神物)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물건임에도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의지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스르르.
서로의 몸을 껴 안은 채, 누워있는 두 사람이다.
백호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과 왼손도 서로가 있을 곳을 찾듯이, 부드럽게 움직여 서로의 목을 휘감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들이다.
다음날 깨고 보면, 이 일을 믿을 수 없겠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임에.
그저 여름밤, 산 향기를 머금은 달빛만이 그들의 위를 내리 쬘 뿐이었다.
비검맹(比劍盟)의 파검존(破劍尊), 육극신(陸克愼)의 무공은 그의 거침없는 성정만큼이나, 막강함을 자랑한다고 전해진다.
장강을 아우르는 비검맹의 영역 구축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맹주도 제어할 수 없는 이인자라 일컬어지면서, 그 무공을 사해에 떨친 남자다.
칠십 이채라고까지 불려지던 장강의 수많은 수로채(水路寨)들 중 그 홀로 박살 낸 것들만도 열 군데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가 펼치는 대력투형보(大力鬪形步) 육식과 파검공진격(破劍空震擊) 오초식은 장강의 물을 뒤엎을 정도이며, 대천마진벽(大天魔振壁) 사초식과 무적을 칭하는 파검마탄포(破劍魔彈砲) 삼초식은 가히 천하를 논해볼 무공이라 일컬어진다.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나, 이미 그와 얽혔기에, 팔황의 권속에는 접근할 수 없는 입장이 된 몸인 바.
청홍무적, 대협과의 일전을 놓친 것은 천추의 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로다.
한백무림서 초안
한백의 일기 중에서
청풍과 서영령.
아침 햇살이 비쳐들기도 전,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간밤의 일과 마주한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경악 속에 어떠한 말조차 꺼내 볼 수가 없었다.
“아.....!”
몸을 일으키던 서영령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웅크리고, 밤새 벌어졌던 일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널찍한 흰 바위 위에, 얼룩진 핏자국.
흐트러진 옷가지를 주워 입는 그녀의 두 눈에 참담한 눈물이 차올랐다.
주르륵.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
고개를 돌리고 청풍에게 보이지 않는다.
망연자실한 것은 청풍으로서도 매한가지.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정신을 잃기 전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남녀지사에 대해 무지한 청풍이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지금의 상황으로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백호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매끄러운 검신(劍身)이 보였다.
원흉이다.
신검(神劍)이 아니라 마검(魔劍)이었다.
이런 일을 초래할 줄이야.
그렇게 휘두르고 있었음에도, 감춰진 미지(未知)가 있었다는 것. 충격이라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서영령의 목소리.
화들짝 놀란 청풍이 서영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되었죠.......?”
잠겨있는 음성이다.
뒷모습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흐르고 있는 눈물만큼은 저절로 알 수가 있다.
그처럼 진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럴 수는 없다.
백호검이 원흉이다?
아니다.
모든 것의 원흉은 청풍 자신이다.
처음부터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서영령이 이와 같은 일을 겪었을 리 없다. 죄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
코를 훌쩍이는 소리.
개울가로 걸어간 그녀가 그대로 물 속에 발을 담구었다.
한 발, 한 발.
허리 깊이의 물 까지. 옷 젖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더니, 손에 물을 담구어 눈물을 닦아냈다.
씻어내고 싶은 흔적이리라.
맑은 개울물에 어제의 일을 흘려보내려는 그녀였다.
“후우........”
물에 젖어드는 그녀.
엉거주춤 일어난 청풍이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못한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쩌겠어요.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잖아요.......”
다시 입을 여는 그녀의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함께한다.
어쩌겠나. 어쩔 수 없다.........
그것은 그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여인의 입으로 말하는 그 심정이 얼마나 암담할지, 청풍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받으며 같은 아픔에 젖어 들었다.
“개의치 마세요. 어제 일은 없던 것으로 해요.”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뜻하지 않는 불상사일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없었던 일이 아닙니다.”
어렵게 한 말.
남녀 사이에 그와 같은 일을 겪고도, 없었던 일로 넘기자는 것.
도리에 어긋난다. 청풍으로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없었던 일이 아니면요? 혼인이라도 하자고요?”
날카로운 감정이 드러나는 말투다.
그럴 수밖에 없을 터.
어떤 심정일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 혼인이라도 해야 하겠지요.”
“!!”
청풍은 항상 그렇다.
진심 어린 눈빛.
그녀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없다니.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요? 그래서야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일 뿐이에요.”
“아닙니다........나는. 당신이 좋습니다.”
“.........”
서영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청풍.
그 말뜻을 제대로 알고나 하는 이야기일까.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혼인의 의미, 그저 벌어진 일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아니요. 당신이 좋아한다 해도, 내가 싫어요. 그런 혼인.”
그런 것이라면 이쪽에서 사양이다.
몸은 몸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처녀성을 잃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슬픈 노릇이지만, 그것 하나로 인생을 책임지라고 말하는 것은, 서영령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엉뚱한 놈이 아니라, 좋아지고 있던 남자에게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야 한다. 미련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서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늘의 장난에 어처구니 없이 얽혀, 서로에게 부담만을 주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악연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그와 그녀 사이에는 또 따로 이루어지기 힘든 장벽이 존재하고 있는 바,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