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56)

  

“혼인이 싫다면, 다른 것이라도. 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역시나 당신은 모르고 있군요. 나는 그것이 싫다는 말이에요.”

강한 어조로 말하는 서영령이나, 그 목소리 안에는 아픔이 있었다.

차라리 청풍의 이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한 방울 맺혀 있던 눈물이 얼굴을 훔쳐냈던 계곡물에 섞여, 속 눈썹에 맺힌 이슬이 되었다. 

“나는 강호인이에요. 보통의 규수처럼 생각하면 곤란하죠. 책임지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런 말을 해야겠다면, 나를 사랑하게 된 후에 하세요. 어제 밤의 일은 사고였고, 거기에는 누구의 잘못도 없는 것이에요.”

청풍의 눈에 한 줄기 빛이 깃들었다.

그제서야 알아챘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

책임을 운운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여인이다.

상처가 되었을지언정, 불행으로 생각지 않는다. 밝은 쪽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감내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도. 분명, 내 탓입니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큰 도움도 받고 있지요. 나는 당신에게 해 줘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청풍.

자꾸만 비슷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짜증이 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밉게 들리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말에 언제나 깃들어 있는 진실됨과 순수함 때문이리라.

“끝까지 그러네요.”

서영령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정녕 그렇다면.......”

짐짓 어제처럼 장난스런 눈빛을 떠올리는 그녀. 

“한 가지만 부탁을 할 게요.”

청풍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하게 느껴지던 아픔이 다소나마 사라져 있었다.

“앞으로는 더 친근하게 대하는 거에요. 의남매처럼요. 어차피, 혼인은 안 한다해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죠.”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서영령이다.

벌써 마음을 수습해 버린 것일까.

청천벽력이 따로 없을 일임에도, 순식간에 떨쳐냈다.

서영령.

진실로 놀라운 여인이다.

청풍 자신은 어땠던가.

무당파 명경을 보고 무공의 한계를 실감한 후, 침잠되는 좌절에 한참 동안이나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녀는 다르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농담 같은 말까지 꺼내 놓는다.

그릇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새벽을 제치고 밝아오는 동녘 하늘 빛무리가, 유독 그녀의 주변에만 머무는 것 같을 정도.

아름다운 것은 둘째 치고, 그녀는 실로 대단하다. 아니, 그 대단하다 느끼는 성정이 그녀의 주변에 후광을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고민을 하고, 실망을 겪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겠지만, 그것을 얼마나 잘 조절하고 극복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순전히 그 사람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분수를 모르고 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공이야 어쩐지 몰라도, 청풍은 그녀를 책임질만한 그릇이 못 된다.

‘아직은.’

을지백이 말했던 천하와 또 다른 의미의 천하.

그는 더 강해져야 했다.

무공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잠시의 눈물로 많은 것을 털어낼 수 있는 대범함을 지닌 그녀다.

배워야 한다. 

오늘의 일. 그리고 그 전의 일.

되 갚는 것 그 이상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마음에 강인함의 칼날을 더해가고 있는 지금,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욱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                      *                        *

“이상하죠? 내력이.......강해진 것 같아요. 풍랑(風郞)도 그런가요?”

풍랑.

연인들이나 쓰는 호칭임에도 어딘지 어색함이 없다.

그녀가 하는 일은 그처럼 항상 익숙하게 느껴지고, 당연한 듯 생각되었다.

“운기 할 때의 느낌이 확실히 달라요. 흡기할 때 들어오는 진기가 훨씬 더 안정되어 있네요. 폐장에 머무르는 양상을 보면 오행 중 금기(金氣)인 것이 틀림없는데.......외기임에도 본신 진기와 상충되는 것이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죠?”

그녀의 말처럼.

청풍 역시 운기를 해 부면서 내력이 증가되어 있음을 느꼈다. 몸이 훨씬 더 가벼워진 기분이다. 항상 외기(外氣)로만 느껴졌던 백호검의 기운이 녹아들어 도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본신진기에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다는 것일진데, 무슨 조화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그로서도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던 모양이지만.......” 

무슨 일이 있어났긴 했다는 것.

말을 해 놓고 보니, 이상하다.

문득, 그녀와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더 입을 열지 못하는 청풍. 

서영령이 그를 돌아보았다가, 그녀 역시 그 일이 생각난 듯, 얼굴을 붉히고는 곱게 눈을 흘겼다. 

떠올리기 싫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지워야만 하는 기억은 또 아닐련지 모른다. 몸서리치도록 불쾌한 상대도 아니요, 본래부터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던 그들이었으니. 생각해보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은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알고 보면 엉큼한 사람인 것 아니에요? 엉뚱한 말 하지 말고, 좀 생각해 봐요. 그 날 밤 저같은 경우........잠이 잘 오지 않아서 운기를 하던 도중, 이질적인 금기(金氣)를 느꼈었어요. 아마도, 그날 백호검을 쥐었었기 때문이었겠죠........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한 순간 정신을 잃었었어요........그......다음엔........”

결국 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가 없다. 한숨을 쉬고, 입술을 한번 깨물은 서영령이 재차 말을 이어 나갔다.

“.......여하튼 그런데.......지금은 금기(金氣)가 이토록 많이 들어와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이질적인 느낌이 안 들어요. 또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리면 정말 곤란하겠지만.......다시 그럴 것 같지는 않거든요. 원래의 심법에 융화되어 버린 것 같아요.”

“나 역시 같은 느낌이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청풍이다.

편하게 말하라고 몇 번이 핀잔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어려웠다. 

원래의 말투가 있고, 해 오던 태도가 있을진데 일시에 바꾸려니 무척이나 힘이 드는 것이었다.

“같은 느낌이라고요? 풍랑도 금기, 그러니까 백호검의 기운을 얻었단 말이죠?”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둘 다 백호기(白虎氣)를 받아들였다는 것인데요.......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네요.”

그녀가 청풍을 돌아보고, 이어 백호검을 가리켰다.

“풍랑은 쭉 백호검을 써 왔잖아요. 귀수무영이나 나는 그 검에 휩쓸려 정신을 잃게 되었지만, 풍랑은 괜찮았었죠.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그것은......글쎄.......”

처음부터.

백호검을 처음 지니게 되었을 때부터 생겼던 의문이다.

청풍으로서도 정확히 모르는 일.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그래요. 뭐 주인을 선택하는 신검(神劍)의 공능이라 치죠. 그렇다면 다시 또 하나. 풍랑은 그토록 문제없이 잘 써 왔었는데, 어제는 왜 그 검에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죠? 설마하니.......정신이 멀쩡했던 것 아니에요?”

“그럴 리가! 절대로 아니 될 말!” 

청풍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흥! 안 될 것은 또 뭐죠?”

청풍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 곤란하다. 

서영령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파격이라 도무지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농담이에요. 그렇게 놀라는 것도 재미있네요. 여하튼.......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네요. 내공이 강해지고도 걱정을 해 보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요.”

그것만큼은 동감이다.

아직도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청풍.

자신도 모르게 운기를 하면서 몸 속에 휘돌고 있는 금기(金氣), 백호기를 점검해 보았다.

‘괜찮겠지. 아니, 괜찮아야지.’

통제 불가의 상황을 한번 겪고 나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본신 진기에 완전히 섞여 들어 유장한 흐름을 이루어 내고 있기는 해도, 분명 그 기운은 백호검에서 나온 기운이다. 

미지의 힘을 감추고 있는 신검. 또는 마검(魔劍). 

백호검을 줄곧 써 오던 청풍으로서도 일순간에 휩쓸려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던 바, 청풍도 그러할진데, 누구라도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 또 그런 일이 발생할지는 그야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결론은 하나네요. 진기를 다루는 데에 더 신경 써야 되겠어요. 이 기묘한 백호기가 엉뚱한 곳으로 튀지 않도록 내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심법 수련이 필요하겠어요.”

맞는 이야기다. 

진기가 불어났더라도,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진기라면, 없으니만 못하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그 기운이 함부로 정신을 범접하지 못할 만큼, 견고한 내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다시 처음으로.

금강 호보, 백호검 금강탄과 백야참에 전념했었다.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와야 한다.

청풍이 지닌바 무공의 근간.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기(氣).

자하진기로의 회귀였다.

*                             *                          *

삼일 째.

함녕(咸寧)을 지나 동호(東湖)까지 산길로만 움직였다.

추적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뒤를 쫓고 있겠지만, 사람과의 접촉을 절대적으로 피하고 있으니, 꽤나 애들을 먹고 있으리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상태이니, 한층 여유로운 행보다.

경공술을 펼치면서 때때로, 자하진기를 점검했다.

“사부님이 남긴 심법이라고요? 기공을 창안해 내다니, 대단하신 분인가 봐요.”

“처음부터 창안한 것은 아니라고 하시지만.......대단하긴 대단하신 분이지.”  

이제야 편하게 말을 하게 된 청풍이다.

세 살 차이. 진즉에 찾았어야 할 말투였지만, 늦었다.

누구에게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청풍이었음에 더더욱 오래 걸린 것인지도 모른다.

“저는 무공을 전부 다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내공은 천지일기공이고, 선법은 백학선법이라 부르죠. 백강환을 내 쏘는 지법은 이지선(二指線)이라 하는데, 제가 지닌 무공 중 가장 자신 있는 무공이에요.”

“그랬군.”

과연 자신이 있을 만 하다고 느끼며 서영령을 돌아보았다.

총명한 눈빛에 아름답기만 한 얼굴.

그날 밤의 일이 다시 한번 떠오르는 것은, 젊은 혈기로 어쩔 수 없는 일일지.

피차 잊기로 하였지만, 그것이 그리 쉽게 될 리가 없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어느 이상의 선을 넘어선 남녀들만이 지닐 수 있는, 묘한 친근감이 함께하고 있었으니.

그 뿐인가.

종일 붙어있는 두 사람이라 점점 더 친해지고,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우연한 인연에 이어, 단순한 끌림을 겪었고 우발적인 관계까지 맺은 두 사람.

어긋난 순서지만 비로소 하나 씩 분명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서로에 대해 나누는 대화 하나 하나가 한 줄기 연정(戀情)을 자연스럽게 키워내는 중이었다.

“자하진기말고, 또 배운 것 있어요?”

“사부님께 배운 것이라면.......그것 하나뿐이라.......”

“그것 하나요?”

“그래. 자하진기 하나.”

서영령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오직 하나다.

사부님이 주신 것.

백호검을 얻고서, 점점 더 소홀해졌었던 그것이다. 어찌하여 그럴 수 있었는지. 단 하나 자하진기만이 그의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음인데.

“그러면.......그 백호검으로 펼치는 무공은 뭐에요? 화산파에 그런 무공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화산파의 무공인지 아닌지.......사실은 나도 잘 몰라.”

“에?”

“하산한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였어.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지. 그 분이 가르쳐 주었어. 금강호보, 금강탄, 백야참. 세 가지 무공이었지.”   

“금강호보.......처음 들어 보는 무공인데요. 나머지 두 이름도요.”

“아무래도 화산파 무공은 아닌 것 같아.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고 있어.”

“그럼.......누구죠? 그 가르쳐 준 사람은?”

“을지백. 이름밖에 몰라.”

“이름밖에 모른다........강하죠?”

“그렇겠지.”

“신비한 사람이네요. 사부로 모시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내 사부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 을지백 그 분도 개의치 않더군. 처음에는 거의 억지로 배우다시피 한 무공이라. 배사지례(拜師之禮)를 갖출 겨를도 없었지.”

“그렇군요. 절학(絶學)이던데........그런 경우는 또 처음 봐요.”

여태껏 간과했던 또 한 가지 사항이다.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절학을 전수한다.

세상에 드문 일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곧이곧대로 배웠던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었던 청풍이었다. 

“혹시........그러니까........지금.......풍랑을 쫓고 있는 자들이, 집법원 검사들이라고 했었죠?”

“그랬지.”

“백호검을 가지고 하산을 하게 만든 곳은.......원로원이라고 했고요.”

“그래.”

“원로원은.......도문이랑 맞닿아 있지요? 화산은 검문과 도문으로 나뉘어져 은연 중 갈등이 있다고 들었는데.......맞아요?”

“아마도, 맞을 거야.”

“그러면.......도문(道門)의 무공들은 어때요? 그러니까, 도문에도 도문만의 무공들이 있나요?”

“음.......도문에도 비전의 무공들이 있다고는 하지. 사부님의 자하진기도 도문의 심법 어딘가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셨어. 그러나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국 거의 다 한 뿌리이기 때문에 검문의 무공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는 하더군. 원로원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 검문의 노 장로님들로 이루어진 곳이라 하니까.”

“잠깐. 그렇다면, 분명 검문과 다른 무공도 있다는 이야기죠?”

“그렇기야 하겠지.”

“그러면 풍랑이 배운 검법은 그 도문의 무공인 것 아니에요? 백호검을 쓰면서 문제없는 것도 자하진기가 도문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인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고. 하지만, 도문의 무공이 열쇠라면, 굳이 백호검을 비롯한 사방신검들을 모두 다 봉인해 놓았을까 싶어. 아, 이야기 했지? 사방신검은 전부 오랜 시간동안 봉인되어 있었다고.”

“여하튼요.”

“그래 어찌 되었든 금방도 말했지만, 백호검의 검법과, 화산의 무공은.......다르다고 느껴. 아마도.......틀림없이, 자하진기 덕분만은 아닐 거야. 백호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런가요.”

“근본적으로 틀려. 서로 부딪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한데, 같은 근본은 결코 아니야. 구결이나 운용의 문제가 아니라........근원적인 실체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거든.”

무학(武學)의 깊은 곳.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 있지만, 확실하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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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리 나아가야 할 텐데요. 

명경의 등장 이후로 생긴 후유증을 빨리 털어내고, 탄력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ps. 이 시간에 올릴 줄은 모르셨을 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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