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아아.
청풍과 서영령은 전속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피하기로 했으면 철저하게 피한다.
정검대 무인들이라면 쓰러진 흑의인들을 보고 청풍과 서영령의 흔적을 쫓아 순식간에 따라붙을 터.
한번 따돌려 본 전적이 있었다지만, 이번에도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었다.
“몇 명이죠?”
“넷......다섯. 확실하지 않아.”
청풍의 대답.
서영령의 미간이 곱게 좁혀진다. 확실하지 않다라. 청풍의 감각으로도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곧, 그만큼 추격해 오는 이들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토록 강해진 청풍임에도, 만면에 긴장감을 떠올리고 있을 정도.
아무래도 지금 쫓아오는 자들은 그 때의 그 정검대 검사들이 아닌 모양이다. 그들 이상의 고수들, 맞서 싸우기가 곤란한 상대들임에 틀림이 없었다.
“따라 오지 않는 것.......같은데요?”
한참을 달리던 서영령의 한 마디다.
앞서 나아가는 청풍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아니야. 오고 있어. 기척을 감추었다. 굉장히 빨라. 무슨 수를 내야 해.”
청풍의 굳은 얼굴.
완연한 무인(武人)의 얼굴이다.
다급하게 발해지는 그의 말에 달리는 와중에도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는 서영령이다.
“강을 건널 수 있으면.......!”
한수에서의 추격전을 떠올린다.
물을 통해 도주하는 것은 이쪽이 훤히 노출되는 일이기는 해도, 먼저 건너는 만큼의 시간을 확실히 벌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이쪽에는 서영령이 펼치는 이지선이 있다.
백강환으로 내 쏘는 중장거리 공격을 시도할 수 있으니, 추격의 견제에도 유리한 면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건너냐는 것.
좁게 굽이쳐도 장강(長江) 줄기다.
전설 속 달마대사는 일위도강을 이야기하며 넓은 장강을 단숨에 날아서 건넜다지만, 청풍과 서영령으로서는 그런 것이 될 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 때였다.
“저기!”
서영령의 눈이 반짝 빛났다.
거짓말처럼 나타난 한 척의 배.
강변을 따라 유유자적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나룻배가 보였다.
“태워 달라고 부탁해요!”
서영령이 먼저 방향을 틀었다.
쫓기고 있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기는 할까. 억지로라도 얻어 탈 기세, 그러나 분명 지금은 그 방법이 최선인 듯 하다. 옆으로 발을 돌려 서영령을 쫓았다.
파라락.
강바람에 흩날리는 옷깃 소리가 시원하다.
점점 더 확대되는 나룻배.
두 사람이 타고 있다.
죽립을 눌러 쓴 자와 백의 무복을 입은 젊은 남자다.
강변에 가깝게 흘러가고 있어, 얼굴이 보이는 거리까지 왔다.
순간.
청풍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령매(玲妹), 잠깐!”
‘위험해!’
서영령을 잡아 세우는 청풍.
배 위의 두 사람은 이미 청풍과 서영령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중이다. 이 두 남자. 어쩌면 그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배를 가까이 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 그것도 엄청난.......!’
영준하게 생긴 백의 무복의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청풍이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오직 죽립의 남자.
잘 갈무리 되어 있으나, 그 안에 감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굉장한 무공, 무당파의 명경 이후, 다시금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어쩐 일이신가?”
백의 무복의 남자가 나룻배의 난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오며, 입을 열었다.
웃음기가 깃든 눈.
무공은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두 눈에 깃든 빛이 범상치 않다. 놀라운 자들이었다.
“저....... 장강 저 편 까지만 태워 주실 수 있겠어요? 좀 곤란한 상황이거든요.”
서영령 또한 배 위의 두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눈치챈 상태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대담하다.
두 사람의 진의(眞意)를 알 수 없음에도 부딪치고 본다. 사람과 사건을 마주하는 방법, 청풍이 지니지 못한 과감함이었다.
“곤란하다? 그래 보이긴 하는군.”
백의 무복의 남자.
즐거움이 함께하는 목소리다.
그가 손을 들어 청풍과 서영령의 뒤 쪽을 가리켰다.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정검대 검사들이 있다.
여섯 명.
하나 같이 엄중한 기세를 뽐내며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후후. 사해는 동도라 하였소. 어서 넘어 오시오. 괜찮겠죠, 두목?”
백의 무인이 죽립을 쓴 남자에게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다.
서영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럼. 신세를 좀 지겠어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몸을 날려, 가뿐하게 배 위로 내려앉았다.
막무가네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언제라도 출수 할 수 있도록 오른 손을 소매 안에 감춘 그녀다. 그녀가 청풍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뭐해요. 서둘러요.”
어쩌겠는가.
이미 그녀는 배 위에 있다.
뒤를 한 번 돌아본 청풍이 백의무인과 죽립사내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결국 몸을 띄워 나룻 배 위에 올라섰다.
“슬슬 가죠.”
죽립을 눌러쓴 고수(高手)는 한 마디 말이 없다.
촤악.
백의 무인이 먼저 널따란 노(櫓)를 물 위에 드리우니, 죽립의 고수 역시 물 속의 노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빠르게 나아가는 나룻배다.
그 사이, 암향표의 쾌속한 신법으로 강변에 이른 정검대 검사들이 있다. 검사 두 명이 달려오던 기세 그래도 땅을 박찼다.
파라라락!
강물을 뛰어 넘어 날아드는 도약력이 굉장했다.
눈으로 보고 있자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바, 이들은 무척이나 강하다.
저번에 보았던 정검대 검사들이 아니다. 아니, 저번에 보았던 얼굴도 있기는 하다.
같은 사람이되 무공이 다르다는 말. 연선하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집법원의 원로께서 무공 전수를 핑계로 붙잡아 두고 있었다더니, 정말로 무공을 다듬어 주었던 듯, 먼 거리 강물을 뛰어 넘으며 검을 뽑는 기세가 진실로 대단했다.
“이크! 바로 뽑아? 에누리가 없구만!”
백의 무인이 경호성을 발하며 몸을 낮추었다.
난간 아래쪽으로 몸을 숨기는 모양새, 싸움에 끼어들기 싫다는 몸짓이 어딘지 희극적이었다.
치리링! 퀴융!
백의무인이야 싸움이 싫겠지만, 청풍은 그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난간을 밟으며 금강탄을 쏘아낸 그다. 검 끝으로 마주 받는 검격에 휘청, 몸이 뒤로 쏠렸다. 상대가 펼치는 검법은 천류신화검법, 얽히는 검날에서 정검대 검사의 정심한 내력 수준이 전해져 왔다.
‘역시!’
상상했던 대로다.
뛰어난 무공.
악양에서 지금까지 손속을 나누었던 어떤 추격자들보다도 높은 무공을 지녔다. 사문의 추격자들이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할지, 아니면 곤란함을 느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쩌정!
휘리릭. 턱.
청풍의 검에서 떨어져 나온 정검대 검사 하나가 몸을 휘돌려 나룻배의 난간 위에 섰다.
훌륭한 균형 감각이었다.
서영령과 공방을 치룬 정검대 검사도 순식간에 나룻배 위로 안착한다. 저번처럼 물에 빠지는 추태는 없다. 검을 겨누는 한 명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집법원의 행사로부터 도주, 장문인의 귀환 명령에 대한 불복. 이미 중죄인(重罪人)이다. 본산으로 돌아간다. 따르지 않겠다면 즉참(卽斬), 집법원의 재량대로 처리하겠다.”
저번보다 훨씬 강경한 태도다.
싸워야 하는가.
청풍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그 때였다.
“어이쿠, 무서워라.”
싸늘한 공기, 그 엄중한 분위기를 여지없이 깨뜨리는 목소리가 좁은 나룻배 한 켠에서 흘러 나왔다.
“거기 두 사람. 여 보라구, 배 위에 오르려면 배 주인의 허락을 맡아야지. 당신들은 초대받지 못했어.”
이 삼엄한 기도가 보이지도 않는가.
정검대 검사 두 명의 살벌한 눈빛이 백의 무인을 향하여 박혀 들었다.
“어라? 뭘 쳐다봐.”
점입가경.
정검대 검사 한 명의 검이 쭈욱 움직여, 백의 무인에게 겨누어진다.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허허. 이제 검까지 들이대네. 뒈질라고. 두목, 그냥 놔둘 겁니까?”
엄청난 언사다.
백의 무인이 말하는 두목.
죽립을 눌러쓴 남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냥 놔둘 수야 없지, 무례함이 과하군.”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다.
그저 평범하게 말하는 음성에도 충만한 내공이 엿보인다.
죽립을 슬쩍 치켜드는 밑으로 검상(劍傷)이 새겨져 있는 젊은 입매가 드러났다.
“화산파 집법원이라. 그 정도로 그만한 무례라면, 화산도 다 했군.”
넓은 어깨.
큰 키에 바위처럼 단단한 체격이다. 찢어진 천으로 팔꿈치부터 손끝까지 감아 놓은 주먹에 광대 무비한 권법(拳法)을 연상할 수 있었다.
“이만 내려야지, 내 배야.”
화아아악!
가볍게 휘두르는 손짓.
정검대 검사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소림(少林)!?”
천근의 힘을 품고서 느릿 느릿 뻗어가는 장력이다.
정검대 검사 하나가 난간을 박차며 천류신화검을 전개했다. 진중하게 압력을 가해오는 경력을 흩어내기 위한 것. 그러나 흩어낼 수 없다. 활처럼 낭창 휘어지는 검날, 당장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파라라라락!
죽립의 남자가 선 자세 그대로 세차게 팔을 휘둘렀다. 헐렁한 소매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격한 떨림을 발한다. 기력(氣力)을 모아 떨쳐내는 공격, 날카로운 바람이 하늘에 떠 있는 정검대 검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반선수(盤禪袖)!”
다시 한번 발하는 외침은 경악성에 가깝다.
대력금강장이. 반선수.
어느 하나만 익혀도 대번에 고수 소리를 듣는 다 전해지는 소림 최고의 절기들이다. 대력금강장에 손속이 어지러워져 있던 정검대 검사가 공중에서 뒤 쪽으로 크게 튕겨 나갔다.
첨벙!
물기둥이 치솟았다.
정검대 검사를 단번에 물리치는 무위(武威), 천하에 숨어있는 와룡(臥龍)이 어찌 이리도 많을 것인가.
태산 같은 기도로 움직이는 죽립인의 주먹에 무서운 내력이 담겨 들었다.
퍼펑! 퍼퍼퍼퍼펑!
굉장한 속도다.
진중한 대력금강장에 날카로운 반선수까지. 특질이 다른 무공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이다.
소림의 무적 권법(拳法) 중 하나, 반격의 여지를 앗아가면서 순식간에 허점을 파고들었다.
“큭!”
나룻배의 좁은 공간, 거리를 내지 못하니 권격을 사용하는 죽립인에게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이다. 거기에, 무공까지 앞서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개하다 막히고, 결국 강물을 향해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처엄벙!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죽립인은 진정 놀랍다.
내리라더니, 정말로 배 위에서 내 쫓아 버렸다. 그것도 화산파 집법원 검사들을.
경지를 추측할 수 없는 무공.
이 자는 명경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다. 천하를 바라보는 자, 이미 완성을 향해 달리고 있는 절정의 고수였다.
촤아아악.
언제 무공을 전개했었냐는 듯, 노를 집어 들어 물을 저어간다.
웅혼한 내력, 네 사람을 태운 배이건만, 바람을 탄 쾌속선처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는군! 계속 쫓아 올 모양이야.”
저번처럼 헤엄을 쳐 오지는 않는다.
물에 빠졌던 두 사람이 강가로 올라오는 옆으로, 나머지 네 사람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경공을 전개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는 배 한척이라도 있으면, 빼앗아 타서라도 따라붙을 기세다. 먼 거리였지만 달려가는 모습에서 악착같은 의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어떻소. 우리 두목. 강하지 않소?”
히죽 웃는 백의 무인이다. 이 남자, 이제 보니, 이 상황을 줄창 즐겁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이름은 강청천(姜淸玔)이오, 장강의 동도들은 장강신추(長江神?)라 부르고 있지.”
“신추(紳?)? 미꾸라지?”
“핫하. 그렇소. 어여쁜 아가씨. 내가 바로 장강 공근(公瑾), 강물 위의 주유(周瑜)를 자처하는 이요.”
“하지만, 주유 공근은 미남(美男)으로 유명한데.”
“핫하. 이분은! 우리 두목이오!”
손을 휘저어 죽립인 쪽을 가리킨다.
정곡을 찌르는 서영령의 한 마디를 강물 속에 던져 넣는 강청천이다.
뭐라고 한 마디 더 하려던 서영령이었으나, 그가 가리키는 죽립인의 존재가 너무 크기에, 더 이상 말을 더하기 힘들었다.
죽립을 쓴 남자.
그가 죽립을 조금 들어 올리더니, 예의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무한(白無限)이다.”
“어이, 두목! 그게 뭐요. 장강 일통을 행하는 무적권신(無敵拳神)! 천하를 굽어보는 장강의 신룡(神龍)! 좀 멋지게 좀 소개해 보시구랴.”
“시끄럽다. 청천.”
백무한의 한마디에 강청천의 입이 꾹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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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극신의 등장에 앞서 뭔가 미진하다 느꼈었는데.
이제야 정리가 좀 되는군요.
한백무림서의 주인공들을 그려가는 재미가 정말 쏠쏠합니다. ^^
어제는 정말, 지나치게 힘이 든 날이었습니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일들이 좀 줄어들고 해야 제맛인데....
도리어 금요일이 되니, 모든 일들이 합쳐져서 폭발하고 말더군요.
저녁밥 먹고 기절 상태.
눈을 떠 보니, 12시 00분 01초.
올리는 것 포기하고 줄창 잠을 자버렸습니다.
어제 연재 기다리셨던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
화산질풍검이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갑니다.
최소한 20페이지, 책으로는 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줄여버릴 계획을 하고 있으며, 더 타이트한 이야기 전개가 될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갖춰 나갈 것입니다.
무당마검 때에는 단 한번, 그것도 3회 분량만 수정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1권 분량이 전체적으로 다듬어지게 될 것 같네요.
새롭게 추가 되는 내용은 아마 없을 것이고, 제목에 걸맞도록 지루하거나, 필요없는 부분들을 없애는 작업 위주로 나아갈 것입니다.
누누히 말씀 드렸듯, 단 한번의 퇴고도 없었기 때문에, 세세한 문장 수정 역시 병행되겠지요.
'글이 가볍다.'란 말과, '글이 경쾌하다'는 말은 무척이나 다르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왕이면 경쾌한 느낌으로 갈 수 있으면 하는데, 어찌 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들" 의 감각이 좀 없어서요.
천랑님이 연재한담에 해 주신 명경과 청풍의 비교처럼(감사합니다), 정말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써 보는 글이니, 이왕이면 확연하게 다른 색깔로 표현시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당마검은.....짙은 푸른빛, 초록빛의 느낌으로 쓴 것이었지만 그게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괜찮았나요?^^)
이번 화산질풍검은 노을 빛, 주홍 빛, 하얀 빛으로 나타났으면 정말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