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56)

  

“또 있나요?”

서영령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격동시켰다.

대단한 화술.

그 때였다.

잠시 동안 침묵하던 방조교가 움직인 것은.

“웃기는 것들이다. 뱀 만난 개구리마냥 오그라들어 버렸군! 기껏 말라빠진 계집 한 년과, 허멀쩡한 애송이 하나일 뿐이다!” 

언변言辯)과 화술(話術)이 먹혀드는 것도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만이다.   방조교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다. 예의와 법도가 없기로는 낭인들의 수십 배 이상이란 뜻이었다.

“어차피 달려들어서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강호 동도들의 간덩이는 송사리 간덩이 크기도 안 되는가! 검인지 뭔지 죽여버리고 빼앗으란 말이다!”

  마구 침을 튀기면서도 서영령의 지법이 날아 올까봐 수적들을 앞으로 돌려두고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다.

비굴하기 짝이 없는 행태. 그러나, 그의 말이 빗어낸 효과는 지금까지 발한 서영령의 시도들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수적들이 달려들면서, 움직이지 않던 다른 무인들까지 한꺼번에 몸을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겁한!”

“비겁하기는! 나는 그냥 네 년놈들이 뒈져 버리면 그만이야!”

우르르 몰려드는 수적들이다.

뭐가 좋다고 방조교의 말을 따르는지는 모르겠다만, 수적들에게는 또 수적들만의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다.

달려드는 수적들에 둘러싸이는 청풍과 서영령.

서영령이 소매로부터 백철선을 꺼내 들었다.

쩌엉! 쩌저정!

앞서 나아가는 청풍의 백호검에 수적들이 뻗어내는 작살과 수창(水槍)들이 짚단처럼 부러져 나갔다. 백호검의 신기, 그러나 적들은 수적들뿐이 아니다. 뒤로부터 달려드는 수많은 무인들이 이 싸움을 거대한 난전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악이군요.”

서영령의 한마디처럼,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대천진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피했어야 할 사태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 보물을 노리는 탐욕의 천성으로 피를 부르는 혈전이 도래하는 것이다.

“비켜!”

“어딜!”

누구부터였을까. 달려드는 무인들이 부딪치고 시비가 붙는다. 급한 마음에 병장기를 휘두르니, 막아내는 무기들에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다.

채챙! 차차창!

청풍과 서영령.

사방천지에 병장기 소리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수적들을 물리치니, 그들 뒤로부터 달려드는 무인들의 공격이 흉험하게 쏟아져 왔다.

“풍랑! 놈들이!”

“알아! 조심해!”

또 있다. 

드디어 움직인다. 처음부터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성혈교 흑의 무인들이 협봉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넘쳐 흐르는 살기, 삼십여 묵신단이 동시에 땅을 가로질렀다. 

스각! 스가각!

“크억!”

“무......무슨!”

서로간에 병장기를 휘두르더라도,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짙지는 않았다. 보물에 눈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견재한다지만, 거기서 죽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놈들은 뭐야!”

“크윽!”

성혈교 묵신단은 다르다. 눈 앞에 거슬리는 것은 무차별로 베어 넘긴다. 청풍과 서영령을 향해 일직선으로. 이 곳에 있는 무인들 따위, 그들에겐 필요없는 장애물일 따름이었다.

“크악!”

“피해!”

아수라장을 넘어선 아비규환이다. 협봉검이 선연한 핏방울을 튕겨내고, 길을 열어가는 사이로 애꿎은 무인들의 시신이 넘어지고 있다. 순식간에 쇄도하는 자들. 청풍이 물리친 무인 하나를 뒤에서부터 베어 넘기면서 첫 번째 흑의인이 협봉검을 뻗어왔다.

쩌엉!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만큼.

청풍의 백호검이 호쾌하게 뻗어나가며 흑의인의 협봉검을 쪼개 놓았다. 그대로 휘어 치는 백야참, 협봉검 안 쪽으로 흑의인의 가슴이 쫙 갈라지며 선연한 핏줄기를 뿜어 놓았다.

  ‘또 다시......!’

시작된다.

자하진기와 백호기가 요동치고 있다. 백호검 검 끝에서 발해지는 새로운 검결이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쩌정!

호보와 금강탄이 하나로. 

그 줄기가 백야참에 이어지면서 장중하고도 유장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몰아치는 흑의 무인들에 맞서 나아가는 백호검이 협봉검 세 개를 단숨에 분질러 놓았다.

터텅!

몇 명씩 덤벼드는 데에도 밀리지 않는다. 백호검이 지닌 장점들을 완전하게 살려내는 청풍의 솜씨에 갈수록 강해지는 무공 수위가 확연히 드러난다. 물러나지 않는 의지, 망설이지 않고 뻗어내는 검결, 이제는 진정한 무인의 모습이었다.

쩌정!

벌써 열 명 째다.

간간히 검을 내 쳐오는 무인들을 막아내면서 흑의인들을 베어 넘기는 중. 쏟아지고 부딪쳐 흩어지는 병장기 가운데, 서영령을 향한 공격들이 일 순간 거세졌다.

‘이런!’

그만한 무인들에 둘러싸이고도, 잘도 버텨내는 서영령이다. 그녀의 무공 역시 눈부신 수준, 그러나 청풍과 같이 일격에 상대를 무력화 할 수 있는 강병이 없어, 숨을 돌릴 틈이 부족하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백철선 사이로 허점을 노린 공격들이 날카롭게 흘러들었다.

“하아아압!”

터엉!

서영령 쪽으로 몸을 날려 백호검을 뿌려낸다. 범의 울부짓음과 같은 기합성. 백야참 백색 휘광(輝光)이 어느때보다 화려하게 뻗어 나갔다.

쩌정! 쩌저정! 쩌정! 

구환도 하나. 창봉 하나. 협봉검 하나.

세 개의 병장기가 일격으로 깨져 나갔다.

엄청난 신위. 그러나, 무리한 움직임에 청풍도 무사하지 못하다. 그의 뒤를 따라붙은 성혈교 흑의인의 협봉검 한 자루가 그의 옆구리를 뚫고 깊게 박혀 버린 것이다.

  “풍랑!”

서영령의 경호성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멈추지 않고 뒤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째앵!

등에 박힌 협봉검을 중간부터 부러뜨려 버렸다.

부서지는 검날에 느껴지는 진동이 끔찍한 고통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올라 왔지만, 꾹 눌러 참고, 백야참을 전개했다. 반 토막 난 검날을 옆구리에 박아 둔 채. 내치는 그의 백호검이 흑의인의 말을 어깨죽지부터 잘라내 버렸다.

“후우. 후우.”

흘러나오는 숨소리가 마치, 상처 입은 범의 그것과 같다.

달려드는 흑의인들. 달려 나가는 청풍의 검이 더욱 더 사나워졌다.

쩡! 카가각!

성혈교 흑의 무인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갈 때다.

한쪽에서부터 훅 끼쳐드는 세 줄기의 기운.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주변 정황을 담아두는 청풍의 눈이 무인들의 수라장을 타 넘는 검은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저것들은......!’

잊을 수 없다.

성혈교 무인들처럼. 흑포에 창백한 피부.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일그러진 얼굴. 화산 본산을 습격했던 자들 중 가장 괴이했던 존재인 흑포 괴인들이었다.

“신장귀(神將鬼)!”

혈적검법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서영령은 이 흑포괴인들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다.  

신장귀.

인간 같지 않은 움직임에 백호검을 잡은 청풍의 손이 더욱 더 굳게 쥐어졌다.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 따위는 품지 않았다. 

백호검을 얻고도 무력했던 과거에 대한 청산이다. 그 자체로 백호의 화신이 된 양, 청풍의 몸이 장쾌한 도약을 이루었다.

두근!

심장 뛰는 소리에, 백호검을 둘러싼 자하진기도 큰 맥동을 보인다. 검결에서 새로운 뽑혀 검결이 나오고, 금강탄과 백야참의 비결이 하나가 된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변화, 검의 진화가 끝 갈데를 모르고 이어졌다.

쩌어어어엉!

흑포 괴인, 신장귀의 팔에 묶인 족쇄가 백호검과 부딪치며 굉음을 울렸다. 동강나는 족쇄지만, 팔은 잘리지 않는다. 역시나 대단한 신체, 더할 나위 없는 강적이었다.

텅! 터텅!

청풍의 발끝이 땅을 박차고, 공중을 일장이나 가로지른다.

두 손으로 굳게 잡아 내리치는 일격. 금강탄도 백야참도 아니다. 처음 펼쳐보는 전혀 다른 검격이면서도, 그 위력은 지금까지의 어떤 무공들 이상이다. 그토록 무지막지했던 신장귀임에도 청풍의 백호검을 감히 맞받지 못한 채, 옆쪽으로 몸을 피해 버렸다.

파르륵! 파라라락!

흑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세 신장귀가 모두 청풍에게 달려든 것이다.

삼 대 일.

벅찬 싸움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전진한다. 청풍은 진실된 용맹으로서 이 난국에 정면으로 맞서 나갔다.

쩌정! 촤아악! 파라라락!

광풍이 분다. 하늘을 나는 듯한 세 개의 검은 그림자와 그 안에서 백색 광휘의 신검을 휘두르는 청풍의 모습은 전설 속 협객의 그것과 같다.

작은 범위의 싸움이나 그것만으로도 장관. 

서영령의 분투와 주변의 아수라장이 빛을 바랠 정도로 압도적인 격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필패야. 한 쪽을 내 주고, 하나를 찍어 낸다.’

실전적 무인의 판단력이다.  

호보로 나아가고, 방어를 포기했다.

왼쪽 어깨를 내 주며 오른손에 쥔 백호검에 온 단전의 내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퍼어엉! 

“크윽!”

신장귀의 장력을 받아내는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뼈 속까지 울리는 느낌, 침투해 오는 서늘한 진기를 자하진기로 막아내며 가슴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장대한 기합성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압!”

퀴유유융!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백광. 뜯겨 나간다. 신장귀의 흑포가 부스러지며 콰드득 소리를 내는 왼쪽 반신이 폭약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크읍!”

쓰러지는 흑포 괴인.

하지만 아직도 둘이나 있다. 양 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모자란 진기를 끌어올리며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후우. 후우.......”

파락! 파라락!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싸움이다.

진기를 가다듬으며 서로의 허점을 탐색하는 시점. 다시금 백호검을 곧추 세우려던 때.

바로 그 때였다.

“........!!”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 

무엇인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물살을 가르는 소리.

대천진 옆으로. 

싸움을 멈춘 무인들이 장강의 물 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보이는 것은 세 척의 배.

대천진 나루터로 들어오는 두 척의 배 사이로 핏빛으로 붉게 칠해진 중형의 전선이 깊숙하게 다가왔다. 

촤르르르르르.

닻을 내리는 붉은 색의 중형선(中形船).

날렵한 군선(軍船)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예술적인 선체(船體)다. 아로새겨진 검(劍) 다섯 자루의 문양이 멋졌다.

  “비검맹 제일(第一) 전선(戰船).......!”

누군가의 침음성.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장강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수적들이다.

온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공포의 감정들.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붉은 선체에 오검(五劍)문양, 그것이야말로 비검맹 산하, 무적의 전선(戰船)을 말함이었으니까.

배의 이름은 검형(劍馨). 

죽음의 그림자가 햇빛을 가리며 수많은 무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나타난다.......!’

검형의 위용을 홀린 듯 바라보는 청풍이다.

비검맹 깃발이 흩날리는 커다란 돛 아래, 검형의 갑판으로 나타나는 자.

퍼얼럭.

넓게 퍼지는 옷이다. 

거칠은 주홍색 물결에 검은색의 칼날무늬가 화려했다. 왜인(矮人)의 복식에 가까운 전포(戰袍)였다.

“파.......파검존! 육극신........!”

뒷걸음치던 수적들이 경악의 외침을 발했다.

그렇다.

이자가 바로 파검존 육극신이다.

선수로 걸어와 아래를 굽어보는 기파. 나타난 순간부터 온 세상을 지배할 듯한 존재감이 퍼져 나간다. 이런 자가 어찌하여 비검맹의 이인자(二人者)란 말인가. 누군가의 수하로 들어갈 사람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화악.

떠오른다.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 그대로 허공에 발을 내 뻗으니, 하늘로부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왼 쪽 어깨로부터 길게 내려가는 비단 장식이 강바람을 만나 날개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파라라라락.

백발이 섞여 회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린다. 바로 그 아래는 장강의 수면. 물 위로 떨어져 내리다니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우웅. 촤아악.

‘저.......럴 수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장강의 수면 위. 그 위로 내려섰지만 가라앉지 않는다.

단단한 대지라도 되는 것처럼 물 위에 내려서는 모습은 이미 신기(神技)란 표현조차 무색할 정도다.

그 뿐인가. 서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출렁이는 수면 위를 한발 한발 걸어오기 시작한다.

턱.

수면을 걸어와 땅 위에 발을 내려놓는 그 소리가 모두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이런 자는 없다.

그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했던 느낌. 

무당파 명경이나, 소림 무공을 사용하던 백무한도 이 자에 비하자면 아래일 듯 하다. 

이런 존재와 싸우려 했었다니.

끼리리릭.

육극신의 출현.

거기게 더해 전함, 검형으로부터 일곱 척의 소선이 내려왔다.

삼엄한 기운.

일곱 척 소선을 탄 비검맹 무인 삼십 명이 더해진다. 동릉의 앞마당, 비검맹의 지척에서 시끄럽게 군것을 징벌하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터벅. 터벅. 

성큼 성큼 내 딛는 육극신의 발걸음에 얽혀 있던 무인들과 수적들이 우왕좌왕 밀려났다. 가는 걸음에 저절로 길이 열린다. 누가 그의 앞을 막을진가. 천천히 걷던 그가 한 쪽에 얽혀 있는 성혈교 묵신단의 흑의 무인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터벅.

그대로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

날카로운 눈매에 가늘게 잡힌 주름이 강자의 연륜을 엿보이게 한다. 

깎아지른 듯 조각같이 뚜렷한 윤곽, 초로에 가까운 나이에 수염은 기르지 않았다. 무인들을 훑어가는 그의 시선이 비로소 청풍의 젊은 얼굴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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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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