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억! 퍼벅!
청풍의 손속이 점점더 거칠어졌다.
하나 둘, 쓰러지는 수적들.
뻗어내는 권형이 급박하고 움직이는 신형이 불안정한 듯 보이지만, 위력만큼은 어떤 권사의 권법에 못지 않다. 일타 일격, 화산권각술의 기본형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팡!
마침내.
삼십에 달하던 수적들이 거의 다 쓰러지고, 서 있는 자들도 공격을 멈추었을 때.
청풍은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를 그 두 눈 앞에 마주하고 만다.
"크헤헤헤헤. 한 발작만 더 오면 이 계집을 죽여 버리겠다."
주저앉아 서영령의 목을 겨누고 회심의 웃음 소리를 발하는 방조교다.
실책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이만큼이나마 막아내고 쓰러뜨린 것도 제 때에 드러난 화산 무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어! 이 놈. 다가오지 말랬지!"
서영령의 목에 댄 소도(小刀)가 떨리고 있다.
겁을 내면서도 끝까지 비겁한 행동을 보여주는 방조교다. 청풍의 발이 멈칫 그 자리에 서고,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
더럽고 지저분한 술수를 쓰는 만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자다.
차라리 보통의 강호 무인들이라면 도의(道義)라도 들먹여 보겠지만, 이 자에게 그런 것이 통할리가 없다. 인의없는 자에게 무엇을 바랄까. 절망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저 뒈질 놈을 잡아라! 잡아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서 있는 수적들 세 명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주춤 주춤 다가오는 수적들.
분노로 가득한 청풍의 눈빛에, 방조교가 그녀의 목을 험악하게 추켜 올렸다. 목에 닿은 소도에 붉은 노을빛이 비쳐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주먹을 꽉 쥐는 청풍이다. 소도가 닿은 서영령의 목에서 붉은 핏물이 가늘게 비쳐 나왔다.
콰악!
서영령의 위기에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챈 수적들이 다가와 청풍의 팔과 어깨를 잡았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청풍이다.
서영령까지의 거리, 목에 겨누어지는 소도, 옆 붙은 수적들.
뛰쳐 나가 소도를 쳐 내고 방조교를 쓰러뜨리기까지.
가능할 것인가.
내력이 완전하다면.
한 순간의 틈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퍽!
수적 하나가 청풍의 다리를 차며 욕지거리를 내 뱉는다. 휘청 몸이 꺾였지만, 청풍의 눈은 죽지 않았다.
'앞으로 한 발작. 폭발력이라면 누가 뭐래도 금강호보다. 그 다음은 세 권법 중 가장 빠른 비형권으로 나아간다.'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나.
방조교는 그 눈치만큼 조심성도 상당했다. 청풍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서영령을 질질 끌다시피 하고, 뒤로 물러난다. 일보, 이보. 거리가 모자랐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틈이 있어도, 불가능한 거리였다.
그 때였다.
청풍의 귀로 익숙한 파공음이 끼쳐 든 것은.
파앙! 파앙! 파아앙!
탄법. 공기를 가르는 소리.
갈대들이 우거진 옆 쪽으로부터 두 줄기의 흑선(黑線)이 날아온다. 일순간 느릿느릿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청풍의 몸이 본능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지금!!'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앞으로 전진했다.
땅을 밟는 감촉, 얼굴에 부딪쳐 흘러가는 바람이 세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퍽! 퍼억!
흑색의 구슬. 흑강환에 맞은 두 명의 수적이 나 뒹굴고.
깜짝 놀라는 방조교의 얼굴에, 목에 대어진 소도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빠악!
마지막으로 날아 온 흑강환 하나가 방조교의 팔꿈치를 때렸다.
찌익, 하고 찢어지는 서영령의 옷깃.
비껴갔다.
청풍의 주먹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기를 갈랐다.
순식간에 들어가는 비형권 일초!
빠아아아악!
방조교의 머리가 한껏 뒤로 재껴졌다. 핏방울이 하늘로 튀어 오르며 온 몸이 통째로 치켜 올려진 방조교다.
비형권 두번째 주먹이 드러나는 그의 옆구리로 깊숙하게 박혀 들었다.
"커억!"
꺾여진 젓가락마냥 허리를 꺾는다.
숙여지는 방조교의 상체.
비형권 세 번째 주먹이 방조교의 얼굴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짓쳐 들었다.
뻐어억!
옆에서 아래로 강타한 일격에 방조교의 머리가 땅으로 쳐 박혔다.
온 몸이 땅을 뒹굴고,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완벽하게 들어간 세 번의 권격.
청풍은 방조교를 돌아보지 않았다. 곧바로 서영령을 향해 몸을 낮추며 그녀의 상세를 확인했다.
"으음......"
그 서슬에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가.
그녀의 입에서 조그만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령매!"
안아 올려든 후, 그녀의 목을 먼저 살펴 보았다. 작은 상처, 다행히 깊지는 않다. 지혈만 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깨끗한 천 부위를 찾으려 허둥댈 때다.
툭.
찢겨져 드러난 목덜미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소도를 들이댄 와중에 끊어진 것일까.
청풍의 발치에 떨어진 그것.
한 개의 목걸이었다.
'이것은.......'
목걸이 줄 가운데, 우윳빛 옥석이 고운 석양빛을 반사시킨다. 청풍이 지니고 있는 것과 쌍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풍......랑?"
"령매!"
흐릿 흐릿 눈을 뜨는 서영령이다.
청풍이 얼굴 가득 반가운 빛이 어렸다. 기쁨이 드러나는 얼굴, 격정이 드러난다.
다행이라는 표정이 만면을 채우고 있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청풍의 옷소매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다.
정신을 차렸다는 것만으로도 어찌하여 이렇게나 짙은 감정이 몰려드는 것일까. 청풍의 눈에 그녀를 향한 깊은 우려의 마음이 드러났다.
사박 사박. 처척.
그런 청풍의 뒤로.
석양 아래,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청풍은 애써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 돌아보면 이 기쁨도 끝이리라.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얼굴을 담아두려 애 썼다.
"아가씨를 넘겨라."
냉막한 음성.
날아온 흑강환의 주인들이다.
홍의 무복의 무인들, 서영령을 본문으로 돌려 보내기 위해 추적해 오던 그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가.’
강한 자들이다.
청풍에겐 이들을 물리칠 능력이 없었다. 백호검을 지니고, 자하진기가 충만했을 때라면 모르되, 비형권이나 화형권으로는 싸울 수 없다. 태을미리장이라도 펼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다섯이나 되는 홍의무인들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일 것이었다.
터벅.
“사부님께서 걱정하신다. 그만하고 돌아오거라.”
“!!”
새로운 목소리.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청풍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홍의무인 다섯 명 뒤 쪽으로 석양을 등진 헌칠한 남자가 서 있었다. 굉장한 무공이 느껴진다. 어둡게 가라앉는 두 눈에 다섯 무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막……사형인가요?”
“그래.”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입을 여는 서영령이다. 친숙한 말투, 그녀에게도 사형제가 있고,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청풍에게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 일이죠. 여기까지 다 오고.”
“여러 가지가 궁금해서 왔지. 대체 어떤 놈인지 보고 싶기도 했고.”
청풍의 팔을 잡은 서영령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되요. 막 사형.”
“글쎄……”
막 사형이라는 자. 그가 빙긋이 웃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안 된다니까요. 풍랑은 손 대지 말아요.”
청풍을 꽉 잡고, 상체를 일으킨다.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그 아름다운 봉목에 강한 빛을 담았다.
“후후. 이것이 그 사매가 맞나 모르겠군. 이 막위군에게 애원이라. 재미있다. 재미있어.”
막위군.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백호검이라 했는데, 검을 들고 있지 않다라. 어디에 놓고 오기라도 한 겐가.”
청풍을 직시하는 눈빛에 위험한 기운이 서렸다.
뭉클뭉클 솟아나는 진기(眞氣), 청풍도 자하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풍랑. 그만.”
서영령의 얼굴이 굳었다.
말리려고 해도 말릴 수 없는 싸움. 막위군의 얼굴에 새겨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눈빛만큼은 쓸만하다. 과연 그 실력도 그럴까?”
온 몸을 타고 흘러 힘을 불러 일으키는 자하진기다.
청풍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실력이야. 보면 알겠지.”
물러나지 않는다.
단단하게 연마되어 강해진 정신이다. 무력에 맞서 기세를 일으킬 줄 아는 강한 무인의 모습이 청풍의 전신에 머물러 있었다.
“풍랑.”
몸을 일으키려던 청풍이다.
갑작스레 강한 힘으로 그를 붙잡는 서영령.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막사형. 알았어요. 내가 갈게요.”
그녀의 한 마디에 막위군의 눈이 서영령에게로 돌아갔다.
단호한 얼굴의 서영령이다.
그가 청풍의 품 안을 박차고 나오더니 당당하게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아직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그녀다. 청풍이 벌떡 일어나, 서영령의 옆을 부축했다.
“풍랑. 가야 되요.”
‘위험하니까.’
“지금 내 상세가 어떤 줄 잘 알죠? 본련(本聯)으로 돌아가야만 완전히 고칠 수 있어요.”
‘그대로 있어야 해요.’
청풍은 그녀의 눈에서 그녀의 진심을 읽었다.
그렇기에 더욱 보내줄 수 없다. 그녀를 지키는 것은 그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짧은 시간.
길게 그의 눈을 들여다 보던 서영령이 현기증을 느끼기라도 하듯, 휘청 다리를 꺾었다.
“령매.”
그녀를 붙잡아 안은 청풍이다.
그 순간.
투툭. 파박.
서영령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청풍의 마혈을 짚었다.
“미안해요.”
털썩.
청풍의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앞으로 꼬꾸라졌다. 점혈을 한 것만으로도 무리를 느끼는지, 서영령의 입가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나온다.
그녀가 막위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련에서는 쓰러진 자와 손속을 나누지 않아요. 어기는 자는 어찌 되는지 알고 있겠죠?”
서영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감정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매는. 언제나와 똑 같군.”
“아니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그녀다. 그런데에도 일말의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막위군 쪽을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와 같을 수는 없지요.”
막위군을 지나치는 그녀.
계속 지워지지 않던 미소가 사라지고, 처음으로 얼굴을 굳히는 막위군이다.
싸늘하게 식은 그의 눈이 쓰러져 있는 청풍에 머물렀지만, 이내 몸을 돌려 서영령의 뒤를 따랐다.
“부축은 필요 없어요.”
가까이 다가가는 막위군을 돌아보며 말한다.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눈빛. 숭무련 일등호법 철혈의 무상 서자강의 피를 이은 그녀다.
석양에 비치는 긴 그림자를 남기며 멀어지는 그녀.
이지선 점혈법에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청풍은 드리운 그녀의 그림자를 좇으며 그녀가 남긴 목걸이에 눈길을 준다.
또 다시.
해가 지고 새롭게 내려 앉는 깊은 어둠이다. 떠오르는 동녘 일곱 별이 가라앉은 청풍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할 때.
한 바탕 꿈을 꾸기라도 한 듯, 그의 눈에 담겨 졌던 용맹의 백색 기운이 걷혀간다.
강을 타고 흐르는 갈대 바람이 청풍의 몸을 스쳐가며, 이제와 다시금 나아가는 푸르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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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부족하다는 타령도 이제는 식상하시지요?
어찌 되었든, 질풍검은 계속 됩니다.^^
이제야 청풍이 갖추어야 할 첫번째를 완성했습니다.
더욱 더 강해져야겠지요^^
선택에 관한 것은.....출판사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청풍의 행보에 관한 것이지요.
청풍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말씀 중에는 최대한 아끼도록 할게요.
대신, 화산질풍검 본문 글로서 이야기드리지요^^
추워지는 날씨, 좋은 주말 되시고요.
관심어린 댓글들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큰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