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56)

지장촌.

구화산 능선 바깥쪽으로 이루어진 마을은 하나의 도시라 불러도 될 만큼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구화산은 본디, 불교의 명산으로 이름이 높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참배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특히나 여름의 이 시기는 지장보살의 탄생을 기리는 구화산제가 열리는 기간으로, 산 기슭 마을 전체가 성황을 이루는 때다. 수많은 민초들이 마을 전체를 채우고 있으니, 밝고도 활기찬 기운이 온 산야에 가득했다.

"석가장 장주가 육순 잔치를 한다던데."

"잔치라고? 그 양반이 왠 일이지?"

두런 두런 들리는 소리다.

옆을 따라 걷고 있던 천태세가 청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두어라.  두 귀는 언제나 열어두어야만 하는 것이니라."

"예?"

"사람들의 목소리 말이다. 정신과 마음을 항상 넓게 만들어 두라는 뜻이다."

가볍게 스쳐가듯 하는 이야기.

천태세의 가르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바퀴 마을을 돌고, 지장촌 외곽으로 나와 논밭에 대어진 도랑의 풀밭에 걸터 앉았다.

"무엇을 보았느냐?"

밑도 끝도 없이 묻는 질문에 청풍은 덜컥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구화제 준비가 한창인 건물들을 보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보고 들은 것이 한 두가지인가.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냥 평범하게 지나친 것도 있다.  무엇을 보았냐는 물음, 딱히 답할 만한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천태세가 묻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귀를 열어 두었으면, 눈도 열어 두었어야지."

천태세의 한마디.

청풍이 눈을 빛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오감(五感)을 모두 열어 놓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바로 그 말이야."

천태세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잔잔하게 정제된 분위기다. 항상 여유로웠던 사부님을 자꾸만 떠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필요한 것들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였어야만 했는가.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했는지 말해 보아라."

"어디서 부터라면........왜 이 마을에 들어 왔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옳게 보았다. 그런 총명함을 왜 쓰지 않고 버려 두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는 왜 왔는지 말해 보겠느냐."

"찾는.......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다. 그것은 곳, 내가 이 곳에 너를 데려온 이유이기도 하지. 마을에 물건이 있다. 여기서 너는 무엇을 했어야 했겠는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보았어야 합니다."

"그렇다. 하지만 그 뿐이만이 아니니라.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고, 가장 처음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너는 그 이상을 바라보았어야 했지."

"........!"

"충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내 버려둔 채, 소홀히 했다는 증거다. 이 마을에 물건을 찾으러 왔다면,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동시에 생각을 하고 판단을 했어야 옳았다."

"예."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천태세의 어투에는 부드러운 중에 엄격함이 함께한다. 귀에 들어와 마음으로 이어지는 충고, 깊은 학식과 지혜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묻겠다. 다시 마을을 돌아 본다면 어떤 것을 보겠는가."

차근 차근 짚어간다.

자연스럽세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 온통 덮여있던 안개가 걷히며 머리 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누가 가지고 있는지을 먼저 알아냅니다. 그 주변을 살펴보고, 어떤 장애물이 있는가를 생각해 두겠습니다. 그 다음은 마을 전체입니다. 행여나 싸움이 벌어지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개입할 수 있는 다른 무인들을 찾아놓고 주변의 지형을 파악합니다. 그러면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려해야겠지요."

"그리고는?"

"얻어낼 수 있는 방도를 궁리하고 거기에 따릅니다. 세부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그 때 그 때 맞추어 대응합니다."

"좋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러나, 그렇게 주변을 파악한 후, 만에 하나 실력이 모자란다 싶으면 어찌 하겠는가."

마음 깊은 곳 까지 들여다 보는 천태세의 시선.

청풍의 입술이 진중함을 담으며 천천히 열려졌다.

"그래도."

굳은 의지가 자리해 있는 청풍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한다. 천태세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입이 단호한 한마디를 끝맺었다.

"강행합니다."

뭉클.

백호검은 없어도, 그것을 휘두르던 호방함은 아직까지 그와 함께 한다.

순하던 천성에 강건함이 더해졌다. 그것을 보는 천태세의 얼굴에 커다란 웃음이 머물렀다.

"그 마음이 무척이나 기껍다. 아주 좋아. 능력이 모자라도 부딪쳐 보는 것, 깨지지만 않는다면, 그 보다 옳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천태세가 손을 들어 지장촌을 가리켰다.

"장부(長夫)라면 모름지기 그와 같은 심성을 지녀야 할 것이니라. 그러나........"

지장촌을 훑어 올리는 천태세의 손.

하늘을 가리키는 그의 손마디에 알수 없는 신비로움이 감돌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하늘에 이르려 하는 자는 저돌적인 용맹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일어버린 고토를 찾아 헤매이며 대륙을 달리던 저 동토의 영혼들처럼, 무예와 지략을 겸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략......."

"용력(勇力)이 과하면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힘이 부족하면 한 발 물러서서 힘을 쌓는 신중함을 지닐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과단성과 진중함, 두 가지만 확실히 해도 천하를 엿 볼 수 있느니라."

  '천하........!'

을지백에 이어 또 다시 듣는 말은 더 이상 생소하지 않았다.

익숙한 만큼. 

저절로 알게 된다. 천태세. 을지백과 같다.

여기에 온 것은 청룡검을 찾기 위하여.   

그리고 천태세를 만나고 말았다. 검보다 먼저, 을지백이 백호검의 본 모습을 이끌어 내 주었던 것 처럼, 청룡검의 진정한 실체를 알게 해 줄 스승을 먼저 대면하게 된 것이다.

"청룡검."

"이제야 깨달았군. 그렇다. 내가 너에게 청룡을 가르쳐줄 이다." 

*                     *                       *

"이제는 무엇이 보이지?" 

"무인들이 보입니다."

"무인들의 동향이 어떻더냐."

"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은 석가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석가장 장주의 환갑 잔치, 거기에 맞추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제대로 보는군."

천태세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을지백과는 완전히 다르다. 옳은 방향을 잡았으면 반드시 그 장점을 알아 보아 주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주었다.

온 종일 핀잔을 당하면서 홀로 커 가는 것 보다는 확실히 편하다. 짧은 시간에 얻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돼.' 

그렇다고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만큼 더욱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려 노력하는 청풍이다. 팽팽하고 치열하게 금강탄, 백야참을 연마하던 정신, 그 진가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무인들의 성향은 네 부류 정도로 나뉩니다. 각각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으니, 아직 미숙하기만 합니다. 어떤 의도를 품고 왔는지, 다시 알아 봐야 하겠습니다."

"옳은 이야기다. 이야기 해 주지 않아도 한 발 더 나아가는구나. 그렇게만 하면 되느니라."

두 바퀴.

청풍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것에는 무공을 익힐 때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전혀 새로운 세계다?

아니다. 

누군가가 대신 해 주었기에, 그녀가 곁에 있었기에 살펴보지 않았던 세계다. 항상 했어야 했던 일임에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복잡해지던 때다. 청풍은 어느새, 종이와 붓을 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필과 먹, 종이들을 사 들고 객잔으로 돌아온 청풍은 흐뭇한 웃음을 보여주는 천태세의 얼굴에 마주 미소를 지었다.

"문필을 가까이 하는 것도 좋겠지. 습득이 실로 빠르도다."

중앙에 석가장 장주를 놓고, 세 무리의 무인들을 표시했다.

"석가장 장주 석대붕은 보검(寶劍)을 수집하는 자입니다. 환갑을 기하여 두 개의 보검을 세상에 풀어 주인을 찾겠다고 했다는데, 지금 이곳에 모여든 무인들은 그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한 이들로 생각됩니다. 잔치가 십 일 후이니, 그 전까지 다른 여러 무인들도 몰려 들겠지요."  

환갑. 보검.

청풍이 세필을 들어 석가장 장주의 옆에 두 개의 단어를 적어 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태세를 앞에 두고 청풍은 한 무리의 무인들 밑에다 '개방'이라는 두 글자를 더했다.

"거지들, 개방이 있습니다. 굉장히 조직적이고 빠르지요. 잔치 음식을 핑계로 산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노리는 바가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냥 구경 차 왔다고 보기에는 확실한 목적이 있어 보였습니다."

"나머지 두 무리는 어떻던가?"

"나머지 둘은......어딘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한 무리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지요.  게다가 그 무리는 다른 어디보다도 청룡검을 노리는 듯한 의도가 강해 보였습니다."

"느낌이라. 그런 느낌도 중요하지. 오감만이 전부가 아니야. 진정 쓰임새 있는 지혜란 번뜩이는 영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숫자의 파악은 되었느냐?"

"그것은 아직........"  

"겉으로 보기에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것이 바로 그런 숫자이다. 이 정도 규모의 마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온 집단이라면 실제로 움직이는 자들이 최소한 열 명은 될 것이다. 전체 인원수는 또 그 두배 정도는 되겠지. 그러나 초점은 거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한번 말해 보아라."

"고수......의 숫자......입니까?"

"그래. 정확하게 보았다. 얼마만한 고수가 몇 명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가장 인원수를 많이 동원하는 집단일수록 의외로 고수의 숫자는 적을 수 있어.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집단이 가장 위험하다. 거기에 맞추어서 생각을 해 보아라."

"예."

"한 가지 더. 무인들의 무리가 네 부류라 했는데, 그 마지막 하나는 그들의 중심인 석가장일 것이다. 그렇지?"

"맞습니다."

"밖에 드러난 세 무인들 보다 석가장을 더 깊이 알아 보아라. 보검, 보물이란 얻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서는 결코 수집따위의 취미를 지닐 리가 만무하니라. 그런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예.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다.

청룡검이 석가장에 있다면 어떻게 하여 그것을 수중에 유지하고 있었는가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청풍이 직접 경험했듯, 강호인이 보물에 대해 보이는 욕심은 보통 정도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실하게 보았던 청풍인 바, 그렇게 꼬여드는 강호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으려면 어지간한 역량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네 부류의 무리들.

그들 중 가장 조심해야 할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석가장일련지도 몰랐다.

"그것은 거기까지 하고, 슬슬 선택을 해야 하겠지."

"선택이라 함은......?"

"무공을 말함이다."

"무공.......!"

"네 몸에는 두 가지의 무공이 함께 있다. 이제는 알고 있겠지. 백호검으로 배운 무공은 화산에서 배운 무공과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는 청풍이다.

확신에 가깝도록 느끼고 있었던 사실.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확인 받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사문의 무공이 아닌 무공을 그만큼 익힌 것, 생각해 보면 또 하나의 금기를 범한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또 다른 것을 익히려고 한다면, 마음에 거리낌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울 것인가 아니 배울 것인가. 네가 선택하거라. 나는 그와 다르다. 강제로 가르칠 마음이 조금도 없느니라. 너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무공보다 역동적인 지혜였고, 이를 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놀라운 말이다.

백호검의 무공을 배울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그 때는 반 강제로 영문도 모른 채 휘둘렸지만, 지금은 휘둘리는 입장이 아니다. 검자루는 그가 쥐었고, 그 검을 놓을지 뻗어낼 지는 그 자신이 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가? 배울 텐가?"

어느 쪽인가.

문득.

청풍은 이 결정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것임을 직감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양자 택일이다.

화산무공이냐. 아니냐.

둘을 가르는 선택.

청룡검의 무공을 거부한다면, 언젠가 백호검의 무공도 버리게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화산 무공으로 뻗어나가 결국은 화산 무공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생각에 도달할 것이다.

만일. 

새 무공을 배운다면.

어찌 되었든 화산의 본산 무공에는 소홀하게 되리라. 그러다 자하진기에마저 소홀하게 되면 어쩔 텐가. 그 때에도 그를 화산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사부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화산 무공의 일로를 걷는 것.

백호와 청룡, 두 무공을 모두 얻는 것. 

청풍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백호. 청룡. 그리고 화산 무공. 따로 생각하지 말자. 결국은 무도(武道)다. 청룡검을 얻기로 마음 먹었을 때에도 생각했었던 일, 이미 결정은 그 때 내려졌어. 청룡검의 무공을 배워도, 자하진기를 잃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 할 수 있어."

청풍은 마음을 정했다.

"청룡검의 무공. 배우겠습니다."

천태세.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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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을 배운답니다.  

드디어 제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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