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56)

"붓을 다오."

세필을 받아 들고, 길게 써 내려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갈겨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훌륭한 필치다. 

머리 속에 있는 글자들을 그대로 쏟아 내기라도 하는 듯, 백지 몇 장이 순식간에 가득 차 버렸다.

"목신운형(木身雲形)의 구결이다. 육신을 강인하게 만들고 내기를 단련하는 내공술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체술로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호신법(護身法)이니라."

받아드는 손길에 무거움이 느껴졌다.

청룡검은 없으나, 청룡검 검을 건내 받은 것 같다. 

첫 장부터 훑어보는 청풍. 그의 눈에 감탄이 차올랐다.

'보통 운기법이 아니구나!'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도 느낌이 확 온다.

이것은 절공(絶功)이다. 

금강탄과 백야참이 굉장한 절기였던 것 처럼, 목신운형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보고건곤조(保固乾坤照) 열 글자로 시작하여, 운체목신형(雲體木身形)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열 글자로 끝나는 천 이백자 구결에, 오묘하고도 신비한 공능이 엿보인다.

백호검의 무공이 실전으로 깨우쳐 가는 감각적 무공이었다면, 목신운형은 학식과 두뇌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이론적 무공이다. 몸으로 익힌다기보다는 탐구와 오성으로 연마해야 하는 진기한 비술이었다.

"깨달음으로 얻는 기공법(氣功法)이니, 구결을 암송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본신 진기 를 근본으로 하여 그 진기를 사용하는 활용법이라 생각하고 차근 차근 구결을 따라가거라.  성급히 대성하려 들지 말고, 천천히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가르침을 준 자에게 보답하려면 그만한 성취를 보여 주는 것이 첫째다.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염을 표하고는 곧바로 구결에 정신을 집중했다. 

고풍스러운면서도 깔끔한 필치가 눈과 머리에 새겨진다. 궁금한 것은 곧바로 질문하며 밤이 새는지도 모른채, 깊고도 깊은 무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무공이 정심해지는 특별한 시간.

새로운 무공 연련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었다.

*                *                  *

낮에는 마을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바깥을 나돌고 밤에는 지닌 바 무공들을 연마하며 보내는 나날이다. 목신운형의 연마를 계속하면서도 자하진기의 연련와 백호검 절기들의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저녁 무렵. 

죽립을 눌러쓰고 참배객들에 섞여든 채 주변을 둘러 보는 와중에도, 청풍의 운기는 끊이지를 않았다.

자하진기를 휘돌리고, 더불어 목신운형의 구결을 되새긴다. 대주천을 이루고 호기(呼氣)의 날숨을 내 뱉는 그의 얼굴에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후우......"     

목신운형의 목기(木氣)는 단전을 돌아 간(肝)에 머무른다. 간장(肝臟)은 몸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장기. 백호검의 금기가 폐장에 머물렀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몸이 달라지고 있어.'

목신운형을 연마한지는 오늘로 고작 삼일이다. 그럼에도 몸 내부가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간장의 특성 때문이다.

간(肝)이란 무척이나 민감한 장기, 감당못할 독기(毒氣)가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도 간장이며, 망가졌다가도 금세 회복되는 것이 또한 간이다. 간에 문제가 생기면 얼굴색이 변하고, 온 몸에 탁기(濁氣)가 가득차게 된다. 간이 건강한 사람은 혈색이 좋고, 쉽게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목기가 간, 담을 강건하게 하니, 피부가 맑아지고 온 몸에 정기(靜氣)가 흐르게 된다. 모든 것이 새롭게 생성되는 느낌, 진중하게 가라앉는 마음이었다.

백호검을 얻고, 폐기(肺氣), 금기(金氣)가 강성했을 때에는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호방하게 소리를 지르고, 사방천지를 제 땅처럼 누빌 수 있는 자신감이 마음을 채웠었다.

육극신의 무위를 생각치 않고, 무턱대고 달려들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백호검의 다급한 기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을 급하게 결정 내리고, 그저 부딪쳐 깨 나갈 생각만 했다. 이전의 성격에 비하자면 분명 고무적인 변화라 할 수 있었으나    그만큼 잃은 것도 크다. 과단성을 얻은 만큼, 성급함으로 빚어지는 폐혜를 동시에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넘쳐 흘러나갈 것 같던 마음을 안정되게 붙들 수 있다. 사물을 보는 시야가 깨끗해졌고, 판단력이 확실하게 돌아왔다. 목신운형 덕분만은 아니다. 천태세에게 배우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리고 꾸준하게 자하진기를 연성하는 차분함이 가져다 준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저들. 그랬군. 놀라워. 왜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까.'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 보던 청풍은 참배객들 사이로 움직이는 무인 하나를 관찰하다 결국, 핵심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평복의 무인.

성혈교다.

치열하게 달려들던 흑의인들만 보아 왔기에 단번에 분간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일반인과 가깝게 행동하는 모습.

성혈교 묵신단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지만, 미세한 부분에서 닮은 곳이 드러나고 있었다. 신체 내부에서 발산되는 진기(眞氣)도 그렇다. 묘하게 비슷한 느낌, 자하진기의 감각이 그 동질성을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가 보자.'

청풍은 미행을 결심했다.

신중하게 발을 옮기며, 오래전 오용 육현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되짚었다.

미행은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절대로 접근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면서, 무인의 뒤를 따라 붙었다.

마을 외곽.

인적이 뜸해는 가운데, 결국 마을 바깥까지 나가 버리는 무인이다.

'마을을 벗어난다라. 오늘은 여기까지군.'

청풍은 거기서 미행을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이보다 더 따라가면 반드시 들킨다. 아직은 경동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이다. 백호검을 들고 있던 예전 같았으면 무턱 대고 달려들어 끝장을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이 무인이 오늘 마을 바깥으로 사라진다 하여, 영영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느 때든 청룡검이 드러날 때 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터였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덤벼들 때가 아닌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얻은 것이 많아.'

발길을 돌리는 청풍.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얻은 것이 세 가지나 되었으니까.

'첫째. 성혈교를 구분할 수 있는 정보를 얻었다. 그 보법. 진기. 새겨둬야 해. 언제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무인이란 꾸준히 초식을 수련하는 이들이다. 일정한 동작과 기법이 그 안에 깃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법. 보법이란 그런 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 중 하나다. 쭉 따라오며 움직이는 것을 관찰해 두었으므로 앞으로는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터였다. 

'둘째. 석가장과 성혈교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석가장의 무인들과는 확실하게 달라. 청룡검이 이곳에 있다는 것, 석가장과 성혈교가 어떻게든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두 곳의 무인들은 서로 관계가 없어. 지금까지의 동향만 보아도 그래. 서로 연관되어 있는 자들의 그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곧, 청룡검이 성혈교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이겠지.'

청룡검이 있는 곳이 사방신검을 탈취해간 곳.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청룡검은 성혈교의 수중에 있지 않다. 을지백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사방신검의 위치는 각각 다르다고. 그것은 곧, 성혈교가 이 사방검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련지도 몰랐다.

'셋째는........성혈교의 무인들이 얼마나 되는가이다. 마을로 들어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어. 눈에 띄지 않기 위한 것. 인원이 너무 많거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원이 많은 것 보다는........역시, 보여 줄 수 없는 것이 있어서겠지.'

늦은 여름 태양이 동천 멀리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곳, 청풍은 마을 바깥 쪽, 성혈교의 무인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 보았다. 

'신장귀라고 했다. 그런 괴인들과 함께 백주를 활보하는 것은 불가능 해. 그들이 와 있다. 틀림없어.'

다시 한번 무인의 걸음걸이와 기도를 떠올렸다.

묵신단 무인들과 같은 살기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닌 바 무공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살기를 다스린다는 이야기. 적어도 묵신단보다 수준 높은 자들이란 뜻이었다.

'만만치 않겠어.'

무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더라도 쉽지는 않다. 신장귀들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그렇다. 신장귀의 수가 셋만 된다해도, 맨손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청룡검을 빨리 얻는다면 모를까, 부러지고 부서져도 되살아나는 육체는 분명, 장법이나 권법으로는 파괴하기 힘들 것이었다.

마을 외곽에서 안 쪽으로 들어오던 청풍.

거지 하나가 걸음을 빨리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개방.......!'

참배객들이 마을 곳곳에 연등을 달고 있는 광경들이 보인다. 그 사이, 또 한명의 거지가 뛰다시피 하면서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개방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이군.'

성혈교. 개방.

마을 중앙의 시장까지 깊숙하게 들어온 그는 마지막 한 무리를 찾았다. 석가장도, 성혈교도, 개방도 아닌 무리. 극소수만이 돌아다니지만, 하나 하나가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자들이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곳. 무엇보다, 정체를 모르겠다. 무공을 감추는 것도 다른 무리들에 비하여 훨씬 훌륭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미행은 시도해 본 적이 없으니, 근거지도 알 수가 없다. 드러난 적들은 아무리 강해도 무섭지 않지만, 드러나지 않은 적은 실체를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이들에 대한 것을 적극적으로 알아 봐야 할 때였다.

"음......?!" 

눈과 귀를 활짝 열고, 한참 동안 주위를 살피던 청풍은 한 순간,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무인들. 

그 걸음 걸이와 기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중. 너무나도 익숙한 보법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발 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으면, 진기가 앞쪽으로 흐르고 발 끝이 가볍게 땅을 밀어낸다. 

'화산 신법. 암향표!'

한 자루 검 처럼 벼려진 기도.

그 위의 얼굴을 기억한다. 

뛰어난 미남으로 손 꼽히며, 속가제자의 신분으로 단기간에 소요관까지 통과했던 비할 데 없는 무재(武材).

매화검수 매한옥이었다.

'화산파가 왜 이곳에.'

철기맹과의 일전이 한창이라는 화산파다. 매화검수가 어찌하여 이런 곳 까지 나와 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화산 매화검수의 출현.

거기에 정신이 팔려 걷고 있는 매한옥에만 시선을 주던 청풍은, 한 순간 경악에 가까운 심정이 되어 두 눈을 크게 떴다.

매한옥, 그 옆에 나란히 있어 드러나는 얼굴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우수에 찬 눈빛. 평소와는 다른 얼굴. 그럼에도 완숙에 이르른 미모가 엿보인다.

연선하다.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이럴 수가......'

청풍은 자신도 모르게 죽립을 쿡 눌러쓰며 저잣 거리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왠지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없는 사저. 연선하라니. 그녀가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청풍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눈에 띄지 않도록. 

걸음을 빨리하여, 도망치기라도 하듯 저잣거리를 벗어났다. 

'사저. 대체.......'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왔음을 확인하고서야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왜 이곳에 나타났는가. 하필 이곳에.

'진정하고, 생각하자. 사저. 사저가 아니라, 매화검수다. 온 것은 사저만이 아니야. 매한옥, 매사형과 함께 왔다는 것은 매화검수의 신분으로 왔다는 뜻이다. 그 이야기는.......'

청풍의 고개가 석가장 쪽으로 돌아갔다. 

'청룡검.'

그 하나밖에 없다.

청룡검이 이 석가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졌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철기맹과 싸움이 한창인 이 때에, 매화검수 두 명이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청룡검 이외에는 추측의 여지가 남아있지를 않았다.

'잠깐. 매화검수가 나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 청룡검을 찾는 일에. 집법원 정검대가 아니라는 사실. 사방신검의 회수를 공식적으로 행하겠다는 뜻인가?'

집법원 검사가 아니라 매화검사가 나섰다.

어찌 된 일인가. 

문득. 청풍은 그 자신에게 내려졌던 임무에 생각이 닿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임무를 실패한 사람이다. 간과했어. 나는........어떻게 이야기되고 있지? 강호에서?'

정작, 다른 것은 찾아 다니면서도 자신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눈을 밝게 하고 귀를 열어두겠다는 것도, 허울에 불과했던가. 

청풍은 곧바로 객잔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차(茶) 한 잔을 시킨 다음, 점소이를 불렀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러는데, 혹시, 백호검주에 대한 소문 들어본 적이 있나?" 

"철선녀와 함께 다니던 백호검주 말씀이십니까?"

"철선녀.......그렇네만."

"육극신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철선녀도 함께요. 그 이야기 돈 게 언젠데 아직도 모르세요. 하기사, 요즘엔 아무도 안 하는 이야기니까요. 백호검인가 뭔가 그건 이제 파검존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더 이상 말할 껀덕지가 없습죠."

'죽었다.......그렇게 알려졌군.'

청풍은 허탈감을 느낌과 동시에 머릿 속이 밝아짐을 느꼈다.

청풍이 죽었다라는 말. 얼마든지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안휘성을 횡단하며 구화산을 찾는 동안, 퍼져나갔다가 관심 밖으로 멀어졌던 소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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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을 고르고. 달릴 준비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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