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이 좀 늦어서 말이지. 여튼 고맙네."
청풍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점소이가 가져온 차를 입에 대었다. 뜨거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들이키며 창 밖, 석가장 쪽을 바라 보았다. 거지 하나가 분주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문득 드는 생각, 청풍이 고개를 저었다.
' 이런.......곳에서 묻다니 성급했다. 사저를 보았기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었을 것이야. 잘못하면 드러나겠어.'
찻잔을 내려 놓으며 죽립을 눌러썼다.
어디에서든 음지에서 움직이는 편이 유리하다. 죽었다는 소문, 그는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자다. 다른 이들이 그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은 움직이는 데 있어 굉장한 장점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쩌면.......아니다. 틀림 없다. 개방에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죽었다고 소문이 퍼졌대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에게야. 그 정도를 몰라서야 강호 제일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개방이라 할 수 없겠지.'
청풍은 판단을 새로이 했다.
이쪽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보았다면 그것은 안이한 생각이다. 얼굴도 제대로 못 보았으면서도 어찌 알겠냐만은 그것을 알게하는 것 또한 개방의 능력이었다.
' 석가장의 실체에 대해서도 다시 알아봐야 한다. 잡입은.......어렵다.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 차라리.......개방과 직접 접촉을 할까.'
개방과 손을 잡는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개방이라면, 저렇게 많은 거지들이 움직이고 있는 개방이라면 석가장의 상황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백호검을 들고 쫓길 당시의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거지들이 가르쳐줘서 청풍을 기다릴 수 있었다는 강호인들의 이야기, 게다가 개방의 젊은 용, 장현걸은 사방신검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가.
' 아니야. 개방은 아직 이르다. 개방이란 분명, 협과 정도를 추구하는 방파이지만,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야. 일단은 홀로 행동하는 편이 났겠어.'
차를 다 마신 후,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서 다시 생각한다.
천태세와도 상의를 해 봐야 할 터. 해지는 바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여장을 풀고 있던 객잔으로 돌아온 청풍은 창밖의 석양을 곱게 받고 있는 천태세를 발견했다.
오늘 하루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려 했을 때다.
천태세가 몸을 돌리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 문제가 생겼다. 조금 더 서둘어야겠어. 천천히 가르쳐 주려 했더니, 여의치 않구나. 이제 닷새 남았다. 하나만 명심해라.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목신운형을 가능한 한 높이 끌어 올려 놓아야 해."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
어딘지 모르게 다급함이 느껴지는 것, 항상 잔잔하고 진중하던 천태세답지 않은 어조였다.
" 무슨 일입니까."
" 그냥 그리 들어 두어라.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천태세가 몸을 돌려 청풍에게 다가왔다. 손에 들고 있던 한 뭉치의 종이를 건내 주었다.
" 이것은 풍운용보(風雲龍步)의 구결이다. 목신운형과 한 흐름을 이루는 보법(步法)이라 익히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먼저 받아 두도록 하여라. 용뢰섬(龍雷閃)은 다음에 가르쳐 주마."
풍운용보.
보법에 필요한 그림과 도해(圖解)가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무공의 기본을 잡을 수 있는, 한 권의 비급(秘給)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가시는.......겁니까."
" 그래. 시간이 되었다. 당분간은 홀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천태세가 청풍을 지나쳐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왔다가 사라진다.
마치 을지백처럼.
그러다가, 중요한 순간 나타나고, 갚을 수 없는 도움을 주리라.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 사물을 확실하게 보아야 하느니라. 그릇된 것에 현혹되지 말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라. 복락이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일지니."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방 바깥으로 나간다. 지금은 가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굳건한 뒷모습을 보이던 을지백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기에, 따로이 배웅을 나가지는 않았다. 배웅을 나갔더라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을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팔락.
청풍은 따라 나가는 대신, 문을 걸어 닫고서 풍운용보의 구결을 넘겨 보았다. 상세한 구결이다. 비급만으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지만, 이 종이들을 보고 있자면 그러한 통설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유 없이 하는 말은 없으신 분이다. 내일은 미지의 집단을 살피도록 하고, 석가장은 환갑잔치가 이루어지는 시점부터 생각한다. 그 때까지는 목신운형과 이 풍운 용보를 익히도록 하자.'
목신운형과 풍운용보의 구결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
깨알같은 구결들을 박아 넣을 듯이 담아두는 청풍의 무공은 유등(油燈)의 기름이 사라지는 만큼 깊어지고 있는 중이다. 하얗게 지새우는 밤이 짧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 * *
" 상황은 어떻지?"
개방 후개. 장현걸이 지장촌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안휘성 남부의 후구당(嗅狗堂) 구화지부의 부장인 고봉산(高奉山)을 만나는 일이었다.
" 일단 생각대로 성혈교가 왔고, 숭무련이 왔습니다. 화산파에서도 매화검수들을 보냈고요."
" 매화검수를 보냈다라. 하나? 둘? 그 이상은 오기 힘들텐데."
" 맞습니다. 두 명, 매화옥검(梅花玉劍) 매한옥과, 천류여협(天流女俠) 연선하입니다."
" 좋군. 좋은 한 쌍이야. 천류여협이 그리도 미인이라더만."
" 나이를 좀 먹은 것 빼고는 쓸만 하지요."
" 쓸만 하다라.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는군. 듣기로 그리 만만한 성격은 아니라더만."
" 뭐, 저와는 볼 일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 그것을 누가 아나? 내 보면 그대로 일러주지."
" 맘대로 하십시오."
" 하! 이 친구 괜찮군. 후구당엔 인재가 많아. 남 당주."
" 아직 부 당주입니다."
" 말 꼬리 잡지 말라고. 내가 나중에 당주 시켜줄게."
" 몇 백년이나 걸리실라구요. 용두 방주께서 쉽게 넘겨 줄 것 같습니까."
" 그 양반이야 뭐, 어떻게든 구워 삶으면 되겠지."
" 구워 삶아도 때밖에 안 나올 겁니다."
" 시끄럽고. 고봉산, 숭무련에서는 누가 왔지?"
" 모르는 인물입니다. 흠검단(欽劍團)에서 온 것 같은데, 단주라도 되는 모양입니다. 감히 가까이도 가지 못할 만큼 무서운 무공을 지녔습니다."
" 호오. 흠검단이라. 그것도 단주 급? 무섭군. 몇 십년 만이야 이게. 흠검단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 있기는 해?"
" 그것을 저에게 묻습니까. 팔황에 대한 것은 칠결 이상이나 아는 극비(極秘) 아닙니까."
" 하하! 이 친구 갈수록 마음에 드는구만. 어이 남 당주, 이 녀석 후구당 부당주로 쓰라고."
" 이 놈은 너무 능글거려서 싫습니다."
" 왜 이래. 똑같은 사람들끼리 한 식구하면 좋잖아."
" 여하튼 안 데리고 있을랍니다."
" 그래. 그렇게 싫다면, 데리고 있어 그냥. 그건 그렇고, 흠검단이라. 육결 방도 봉산이는 용케 흠검당에 대해서도 아는군? 제 입으로 칠결 이상의 극비라 해 놓고서."
" 후구당이잖습니까."
" 대답한번 기막히군. 좋다, 좋아. 그러면, 후구당 예비 부당주가 보기에 성혈교는 어때?"
" 성혈교에서는 오사도(五使徒)가 직접 온 모양입니다."
" 예비 부당주가 하고 싶기는 한 모양이네. 근데 뭐라? 사도(使徒)가 왔다고?"
" 예."
" 오호라. 이거 쎄게 나오네."
" 그렇겠죠. 비검맹 육극신의 일도 있으니까요."
" 하나 둘씩 기어나오는구만. 뭔 난리가 나려고."
" 일이야 다 터지고 있지 않습니까. 후구당에 지원 좀 더 해주십쇼. 코가 열개라도 모자랍니다."
" 그건 방주 양반에게나 물어봐. 난 힘이 없어."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 여튼 난 몰라. 어떻게 할거야 이제."
" 그걸 제가 압니까. 힘 없는 후개가 하자는 대로 하는거죠."
" 자빠졌네. 뒈질라고."
" 뒈지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뒈지는 게 거지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굶죠."
" 뒈지는 게 굶어 죽는 거 하난가?"
" 굶는 것 하나 아니었습니까? 또 뭐가 있죠?"
" 이 놈 걸작이네. 그래. 그거야. 굶어 죽지 않으려면 얻어 먹으러 가야지."
" 얻어 먹으러 간다고요?"
" 석가 늙은이 잔칫상 말이다. 며칠 일찍 가자구. 무슨 생각을 해 쳐 먹고 있는 건지 알아야지."
" 그냥 정면으로 가는 겁니까?"
" 그래. 너랑 나."
" 예?"
" 남 당주는 여기서 뒤를 지원해 줘."
" 예? 아니 잠깐, 왜 나만 갑니까! 아니, 내가 거기를 왜 가요? 천독문(千毒門) 반혈충(斑血蟲)이 우글거리는 곳에!"
" 누가 우리 둘만 간대? 잔칫집에서 얻어먹으려면 입도 여러 개여야 맛이 나지. 화산파도 불러."
" 화산파고 나발이고 난 안 갑니다."
" 지랄말아. 반혈충 역혈독(逆血毒)이면 술 안주로는 그만이지. 구화산 후구당이면 그 정도 준비는 다 있잖아."
" 여튼 난 안 갑니다. 잠혈균(潛血菌)이 얼마나 쓴데요."
" 것 보라구. 해독약도 있으면서 엄살 부리지 말아. 화산파 미녀 검사나 부르셔. 당장."
개방 후개.
후개라 함은 다음 대 용두 방주, 개방의 정점으로 점찍어진 인재를 뜻함이다.
장현걸. 눈을 빛내며 내리는 명령에, 그것을 따르는 고봉산의 젊은 두 눈 역시 은은한 정광을 품는다. 천재라 불리는 후개, 거침없는 기상과 성정에 방주로서 섬길만한 인물임을 느낀 까닭이었다.
* * *
미지의 집단에 대한 탐색을 하려고 마을을 살피던 청풍은 일 순간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 늦었어. 다른 무인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기존에 지장촌에 들어와 있던 무인들 외에도, 본 적 없었던 강호인들이 지나치게 많이 흘러 들어온 상태다.
하룻 밤 새.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거리를 활보하는 무인들의 숫자가 한 둘이 아니라, 그 때의 그 자들을 구분해내기가 도통 어려울 정도였다.
' 돌아가자.'
이대로는 시간 낭비다.
왔다 갔다 확인하는 것보다 객잔에서 무공을 연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정보를 다 얻고서 시작하는 것 보다, 긴장감을 가지고 무공을 가다듬는 것이 더 나은 시점인 것이다.
판단과 함께 행동으로.
청풍은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일일히 다 알고서 대비를 하려면, 지금 흘러 들어오고 있는 모든 무인들에 대해서도 알아두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 그럴 수야 없지.'
객잔으로 돌아가던 와중에, 대장간에 들려 청강장검 두 자루를 구했다. 아무래도 무기(武器)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성혈교 신장귀를 상대하려면 결국 육장보다는 병장기다. 신장귀의 움직임들을 떠올리며 머릿 속으로는 거기에 대응할 검초들을 떠올리고, 발길은 여일하게 객잔으로 향했다.
터벅.
" 어이."
객잔이 얼마 안 남았을 때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
청풍은 온 몸에 긴장감이 팽배해짐을 느끼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수(高手)다. 그것도 굉장한.
" 맞나? 좀 다른가? 죽립 한번 벗어 보는 것이 어때?"
첫 인상.
젊다.
수려한 외모. 늘어뜨린 긴 머리에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두 팔, 언제라도 뛰쳐 나올수 있는 명검(名劍)이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검기(劍技)의 소유자임을 직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였다.
" 나를 아시오?"
청풍은 당황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묻는 모습,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자리한다. 청년 고수, 매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번쩍 빛났다.
" 벗어 보라고."
수려한 외모, 길게 뻗은 검미(劍眉)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출수를 예고하고 있는 미소다. 그러나 청풍은 상대의 무례함에도 전혀 경동하지 않았다.
" 누구신지?"
청풍의 대답은 동문서답에 가깝다. 상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난데 없이 고조되는 공기.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피어 올랐다.
" 들은 것과 다르군. 아니면 아예 다른 사람이거나. 막 사형은 본래부터 사람들을 제대로 못 분간하지."
막사형.
청풍은 단숨에 이 자가 어디서 왔는지 깨닫고 말았다.
' 영령. 영령을 데려간 자, 막위군이라 했다. 무련이라 했었지. 그렇군. 남은 하나는 거기였어.'
포기하려 했던 해답이 나왔다. 확실히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 이렇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 자. 죽립을 내려 봐. 세 번째 말 한다. 그 다음은 없어."
예의가 없는 자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을까.
청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최소한의 존대만이 그녀와 같은 문파의 문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하나다.
고개를 슬쩍 드는 청풍.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 직접 벗겨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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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재미가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그러시다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