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의 한 마디.
청년 고수의 얼굴에 깃들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건방지군."
일 순간.
번쩍!
백주(白晝)의 대로(大路)에서 뽑아 휘두르는 검. 상대의 허리로부터 빛살처럼 뻗어나오는 광체가 청풍의 머리를 노려왔다.
청풍의 몸이 순식간에 뒤 쪽으로 젖혀진다.
피핏!
엄청난 쾌검,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검광(劍光)을 간발의 차이로 비껴냈다. 극도로 유연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움직임, 초 근접거리에서 맞닥뜨린 검격임에도, 그것을 피해내는 회피능력이 놀랍다.
그뿐인가.
뒤로 꺾여지는가 싶더니 다시 앞쪽으로 나아간다. 목신운형의 체술이다. 놀라운 속도로 검자루를 잡아, 발군의 탄력으로 튕겨냈다.
퀴유웅!
금강탄 발검!
호쾌하게 뻗어내는 검날, 찰라의 시간동안 청년 고수의 두 눈에 놀라움이 깃든다.
옆으로 피해내는 모습.
청년 고수의 측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는 훌륭한 신법, 무공과 실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였다.
"겨우 그 정도로......."
옆으로 비껴 서서 검을 늘어뜨린 째, 청풍을 바라보았다.
비웃는 듯한 표정.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청풍의 죽립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검격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부터 죽립의 위쪽으로 갈라지고 있다.
한 치, 두 치, 세 치.
그러나.
툭.
거기까지다.
멈춘다. 그 이상 갈라지지 않는 죽립이다. 끝까지 갈라 놓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 비웃음이 자리했던 청년 고수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청풍이 뻗어내었던 장검을 회수하여 검집으로 되돌렸다.
치리링.
팔락.
한 조각 옷깃이 바람을 타고 땅으로 내려 앉는다.
붉은 색 비단 조각이다.
청년 고수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옷깃이었다.
"어떻소. 더 하시겠소?"
청풍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하다.
발검 대 발검의 대결.
청풍의 죽립이 손상을 입었다지만, 청년 고수의 옷도 잘려져 나갔다.
싸움의 결과를 말하자면 백중세라 할 수 있다.
여유만만하던 청년 고수가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를 지워냈다.
"놀랍군. 실로 놀라워."
청년 고수의 얼굴은 이제 진중하다.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라도 되는가. 그의 눈에 사나운 빛이 깃들었다.
"단주(團主)께서 얼굴이나 한번 보고 오라 하셔서 장난을 쳐 봤는데, 그럴만한 상대가 아니로군. 이름이 뭐지?"
"화산파 청풍이오."
"청풍, 좋은 이름이야."
그가 자신의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는 청년 고수. 갑작스런 칼부림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장소가 안 좋군. 옮기지."
가타부타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성큼 성큼 바로 옆의 객잔으로 들어간다. 청풍도 끝이 갈라진 죽립을 다시금 고쳐 쓰고는 그를 따라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내 이름은 조신량(曺信良)이다."
구석 자리.
사람 없는 객잔에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발하는 목소리였다. 묘한 내력이 담긴 목소리. 다른 사람들이 듣기 힘든 파장을 담고 있다. 신기한 재주였다.
"한 가지 묻겠다. 자네는 두 검 중 어떤 쪽이지?"
"두 검?"
"적검(赤劍)과 청검(靑劍) 어느 쪽이냔 말이다."
적검과 청검.
적사검(赤獅劍), 청룡검(靑龍劍). 석대붕이 내 놓는다 알려진 두 보검을 뜻하는 말이다.
둘 중 어느 쪽을 노리는가를 묻는 모양이었다.
"청룡검이오."
"역시 그렇군."
"이 쪽에서도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일문 일답이라는 말인가? 좋아. 무엇이 궁금하지?"
"그녀는 괜찮소?"
한 쪽이 아무리 무례하게 하대를 해도, 청풍이 예를 차리려는 것은 오직 이 한가지 질문 때문이다. 서영령이 몸담은 문파의 식솔. 그녀의 안위가 궁금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객잔 안 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녀라......."
조신량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아가씨를 말하는 모양이군."
가늘게 좁혀 떠진 눈,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이야기 해 줄수 없다면? 여기서 아까의 계속을 하기라도 할 텐가."
"검을 나누는 것이라면, 언제든 좋소."
"생각 없는 패기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만한 실력이 되나?"
"옷깃으로도 모자르다면, 확인해 보시던지."
미동도 하지 않고서 앉아 있는 청풍.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당장 발검을 한다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굳건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진심이군."
굳혀져 있던 표정을 풀며 기대고 있던 등을 떼었다.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청풍을 향해 상체를 굽혔다.
"아가씨의 상세에 관한 것이라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알고 있다. 되었나?"
"되었소. 충분하오."
청풍의 눈 깊은 곳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다행이다. 실로 다행이다.
그녀가 괜찮다면 모든 것이 괜찮다.
"좋아.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하지."
조신량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화경의 내력이 있더라도 엿들기 힘들만큼 조그만 목소리다. 기이한 파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었다.
"적검과 청검을 노리고 이곳에 온 무리들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이 성혈교다. 알고 있겠지?"
"알고 있소."
"자네는 청룡검을 원해. 우리도 원하지만, 사실 우리가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성혈교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 강하다. 게다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청룡검보다는 적사검이야."
"........?"
"우리와 손을 잡도록 하지. 자네는 청룡검을 가져. 우리는 적사검을 손에 넣겠다."
"!!"
손을 잡자. 협력을 이야기함이다.
놀라운 일,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제안이었다.
"어떤가?"
무슨 속셈일까.
알 수 없다. 왜 청풍이. 숱한 무인들 중에, 다른 이도 아니고 청풍과 손을 잡자는 것일까.
"왜, 나요?"
"이유? 별다른 이유는 없다. 적을 하나 줄이기 위해서라고 할까."
"설명이 되지 않소."
"........."
조신량과 청풍의 눈이 짧은 공간 안에서 불꽃을 튀었다.
날카로운 직관력이 함께하는 청풍의 눈빛이다. 조신량이 고개를 한번 까딱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좋다. 사실, 단주께서도 여기까지 오시기는 하셨지만 정작 임무에는 별반 흥미를 못 느끼시고 계신다. 하지만, 성혈교에서는 사도(使徒)가 왔어. 고수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손이 더 필요해."
"사도?"
"성혈교 일곱 사도. 성혈교 교단의 최고 책임자들이자, 최강의 고수들을 말함이다."
성혈교.
사신검을 탈취해 간 주적이다.
음험한 묵신단 무인들에 신장귀와 같이 괴이한 존재들을 부리는 곳.
그런 집단의 최강고수라면 어지간히 위험한 자들이 아니리라.
"성혈교와 무련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소?"
"적대 관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근본적인 적은 아니지만 서로 견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그랬나.'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련은 성혈교를 잘 알고 있지만, 이번 일에서는 서로 다른 편에 선다. 이 것은 보통 정보가 아니다. 청룡검의 일 뿐에서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 묻지. 어떤가. 손을 잡겠나?"
"........"
실익이 어느 정도 될까.
모른다.
고수들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 더 높은 가능성을 지니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청룡검을 찾는 것.
그것에는 다른 누구의 도움도 끼어들지 않아야만 할 것 같다.
이치로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느끼는 천부의 사명이었다.
"손을 잡는 것. 거절하겠소."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풍이다.
그를 쳐다보는 조신량의 두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많은 이야기 고맙소. 다만 서로의 일에 방해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미련없이 포권을 취한다.
청풍의 단호한 목소리에 조신량은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등받이 몸을 기대었다.
"재미있는 말이다. 그래. 그 말대로, 서로에게 무운이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다시 보았을 때 적이면 적이지 아군이 될 것 같지는 않군."
조신량을 그대로 남겨둔 채, 청풍은 몸을 돌렸다.
걸어나가는 한 걸음.
결단력이 함께하고 있는 일보였다.
* * *
"화산파, 매한옥이라 하오."
"연선하라 해요."
지장촌 외곽, 주변이 확 트인 언덕 위에서 매한옥과 연선하를 맞이하는 이는 허름한 옷에 어울리지 않는 출중함을 지닌, 개방 후개, 장현걸이었다.
"개방, 장현걸이오."
포권을 취하는 장현걸.
손님을 청한 사람으로서의 태도다. 절도있는 가운데 자유분방한 기상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개방, 삼절신룡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소."
"매화옥검의 이름 또한 천하에 드높지요."
"허명일 뿐이오."
"허명이라니 그럴리가 있겠소?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해가 되오."
"지나치지 않소. 중원 최대 방파, 개방의 후개 앞에서 어떤 겸손도 과하지 않을 것이오."
"하하. 매화검수는 확실히 다르오. 천하에 이를 기상들이 두 눈에 보이는 듯 하오."
정도를 이끌어 가게 될 후기지수들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가짐들을 교환한다. 하나 하나 훌륭한 젊은이들, 교차되는 눈빛에 호감이 머물렀다.
"그나저나.......이런 언덕에서 만남이라니, 새롭군요."
연선하의 목소리.
장현걸의 두 눈이 연선하의 자태에 머물렀다.
원숙한 미녀, 굉장하다.
활기와 활발함이 가득했을 얼굴에 살며시 내려앉은 우수가 대단한 매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새롭다. 그렇습니까."
"보통은 객잔이나, 자파의 근거지에서 만나게 되죠."
"언덕과 벌판이 곧, 거지들의 객잔이고 본거지입니다. 거지 소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저분한 곳에 모시기에는 소저의 미향(美香)이 너무나도 고고하더이다."
"소저라니. 지금 제 나이를 알고 하시는 이야긴가요."
"방년 이십 삼세 아니신가요."
"이십 삼 세라뇨. 개방의 정보력은 들리는 바와 다른 듯 하네요."
"하하.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 장모는 그저 섭섭함을 느낄 뿐이오. 방년 이십 삼세로 보인다는 이야기란 말이오."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찌 이리 차갑소. 들려오던 천류여협의 모습과는 다르오. 무슨 슬픔이 있으신게요."
장현걸의 눈.
연선하가 그 두 눈을 빤히 쳐다 보았다.
맑다. 맑지만, 그 안에 지혜와 재치가 번뜩인다. 연선하가 기억하는 순수한 두 눈과는 무척이나 다른 눈빛이었다.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연선하가 먼저 시선을 접었다.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장현걸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슬픔이 있다면, 풀어버려야 옳소. 어울리지 않소. 그런 얼굴."
"언제 본 적이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본 적이 없어도 알 수 있소. 그런 것은."
"이런 이야기 하려고 부르신 것은 아닐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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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청평.
모처럼 대성리에 놀러왔으나, 글 쓰기 위해 택시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밥 다 먹고, 다시 와서 마저 더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