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56)

  

덜컹.

무거워 보이는 문이 열리고, 드리워진 주홍빛 휘장이 드러났다. 휘장 안 쪽으로 넓게 자리잡은 것은 연회에나 쓰일 만한 원형 탁자, 고급스러움이 넘쳐나는 지객당이었다.

"장주님.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연선하는 탁자 저편 상석  방향에, 또 한 폭 휘장이 드리워진 넓은 목상(木床)을 발견했다. 

손 총관의 말에 흔들리는 휘장. 그 안에서부터 얇고도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 화산과 개방인가."

특별한 내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심한 내공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뜻. 하지만 무언가 불길하다. 고수(高手)의 기력이 함께하는 목소리가 아니면서도, 휘장 안 쪽에 위험한 독사(毒蛇)를 풀어놓기라도 한 것 처럼, 경각심을 일으키게 만드는 불안함이 그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산과 개방이라면 이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겠지."

흔들 흔들.

주홍빛 휘장에 음영이 지고, 그 안쪽으로부터 깡마른 손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턱.

휘장을 걷어내고, 땅을 밟는 노인(老人).

몸을 일으키는 속도가 느릿느릿하다.  

'마찬가지다. 이 노인은 위험해.'

연선하의 얼굴이 굳었다.

기운이 없는 양,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쳐드는 한 마리 이무기와 같다. 입을 벌리면 독(毒) 안개 훅 끼쳐들 것 같은, 독룡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다들 젊군. 좋다. 좋아. 젊음이란."

길게 찢어진 눈에 탁한 기운이 서려있다. 

육순의 나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고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나이, 정심한 내공을 쌓았다면, 육순을 헤아리더라도 팽팽한 피부와 뚜렷한 안광을 유지할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노인은 그렇지 않다. 제 나이 그대로, 아니, 제 나이보다도 더 늙은 듯한 외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석가장주, 석대붕이라네."

상석의 호화로운 의자에 앉으며 둘러선 네 명에게 손짓으로 착석을 권했다. 

탁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의 면면을 살핀 석대붕이다.

그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개방 후개. 화산 매화검수 두 사람. 하나는?"

고봉산을 가리킴이다. 

장현걸이 미소를 지으며 대신 답했다.

"차기 후구당 부당주가 될 녀석이요."

"후구당."

고개를 끄덕이는 석대붕이다. 그가 혼잣말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천하 제일 정보조직의 부당주라......."

석대붕이 손을 들어 손짓을 하자, 지객당 한 쪽의 휘장이 걷히며 고운 자태의 시비들이 차(茶)를 내 왔다. 사뿐 사뿐 걸어서 나가는 모습. 무공을 익힌 여인들이었다.

"정보조직을 이끌만한 재능이라면. 아는 것도 많겠군."

"개 콧구멍이 두개라는 정도만 알 뿐이외다."

"그런가." 

화악.

장현걸. 연선하. 매한옥. 고봉산.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개방은 그게 문제야. 아무때나 농지거리를 한다는 것."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내공이 정심하지 않다?

웃기는 생각이다.

이 자는 무서운 고수다. 불길한 느낌만큼. 쟁쟁한 인재들 사이에서 완전하게 자신을 감출 수 있는 화경의 고수였던 것이었다.

"적사검(赤獅劍)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삽시간에 줄어드는 기도.

자유자재다.

마치 일순간 착각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병약한 늙은이로 변화하는 석대붕이었다. 

흔들이는 고봉산의 눈빛.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사검. 사패 시절 전설적 장인인 도철이 제작한 검이나, 도철의 칠대 기병에는 들어있지 않음. 동방의 보고(寶庫)에 관련된 열쇠라 전해지지만, 그 효용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음. 그 정도만 알고 있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석대붕이 웃음을 지었다. 

비틀어진 웃음, 일그러지는 주름살이 그 실체와 더불어 섬찟한 인상을 만들었다.

"어느 쪽을 원하나? 적사검인가, 청룡검인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던져낸 질문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개방과 화산파.

석대붕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재미있다. 이야기하지 않는다라. 마치 진실로 내 육순을 축하해주려 오기라도 한 모양이로구나."

석대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임 하나 하나, 말투 하나 하나에, 상황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절묘한 쓰임새가 있다. 그토록 언변이 좋던 장현걸이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다. 빈틈없는 대인술에 화술이었다.

"자네들에게는 보여주어도 되겠어. 아니, 일부러라도 보여주고 싶군."

그가 몸을 돌렸다. 

손진덕, 손총관이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석대붕의 뒤를 따른다. 

그가 인도하는 문을 따라 하나의 조그만 정원을 지나고, 회랑이 딸려있는 건물을 거쳐 커다란 주옥(主屋)에 이르렀다.

"문을 열라."

"하지만."

"괜찮다. 총관. 이들은 구파, 그리고 일방이야." 

"알겠습니다."

손총관이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후끈 끼쳐지는 공기, 안으로부터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 받으시오.'

손총관의 바로 뒤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던 연선하다. 

뒤에서부터 뻗어진 손. 

장현걸의 손에는 말라비틀어진 적갈색 버섯쪼가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냄새. 독(毒)이오. 중독의 느낌이 있으면 곧바로 그 버섯을 드시오.'

속삭이는 듯 귓전에 들리는 소리.

전음입밀에 가깝다.

고강한 내력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비전(秘傳). 연선하가 흘끗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고(劍庫)요. 어떤 물건이고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손 총관의 경고에 장현걸이 눈썹을 둥글게 올리며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견고하게 짜여진 철문, 석대붕이 철문 한 쪽을 부드럽게 눌러 밀었다.

끼이이이이.

철문 밖은 음험한 분위기나 그 안의 공기는 그렇지 않었다. 청량하고 깨긋한 공기가 맴돌고 있다. 검을 보관하는 창고, 검고(劍庫) 안 쪽은 명검들의 보관을 위하여 관리를 철저히 하고, 그 바깥은 방어를 위해 경계를 강화시켜 놓은 것이 틀림 없었다.

"총 팔십 이 자루. 이름난 명검 진본(眞本)을 이만큼 보유하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오."

유령처럼 걸어나가는 석대붕의 뒤로 손 총관의 목소리가 배경처럼 깔렸다.

월왕검. 금보검. 사피연강검. 

아직까지 빛을 잃지 않고 완전하게 관리되어 있는 명검들이 있는가 하면, 녹슬고 삭았지만 시황제가 썼었다고 전해지는 진왕검(秦王劍)이나  부러져 깨져있는 오검(吳劍)등,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고검(古劍)들이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 하나가 굉장한 보물, 인세에서 보기 드문 전경이었다.

"이, 이것이, 설마 그 벽려검(碧麗劍)이오?"

고풍스럽게 새겨진 벽려란 글씨. 

날이 무뎌진 청동검 한 자루가 조심스레 걸려 있는 것을 본 고봉산이 만면에 놀라움을 띄고서 물었다. 세월의 부침이 드러나는 검신(劍身), 벽려란 이름은 거궐과 함께 중국 고대 명검들의 이름으로 유명한 전설같은 명칭이었던 까닭이다.

"아마도 진품이 맞을게요."

손 총관의 대답에 고봉산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나 석대붕은 범상치 않다. 검의 날카로움과 살상력을 떠나, 전설 속의 그것을 직접 수집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재력과 능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장주."

보물들의 한 가운데 서서,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대붕. 

그의 앞으로 장현걸이 성큼 발길을 옮겼다.

"이와 같은 보물들 중, 굳이 두 검을 세상에 풀어 놓으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의문이다.   

두 자루를 내 놓는 이유. 이처럼 완전히 수집을 하고, 보관을 하고 있음에도 다른 주인을 찾는 저의를 물어보는 의도였다.

"육십년 세월, 강호에서 받은 것을 되 돌려 주려는 생각이라고 할까."

장현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별반 쓸 모 없는 대답. 그가 질문을 더 이어 나갔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두개의 보검으로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노부가 가진 것이 보검 말고 또 있겠는가."

"........."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진정한 속 뜻이 무엇인가.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나이가 이래 되면, 많은 것을 베풀고 싶어지게 되는 법이지. 어떤가. 행여 가지고 나가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네 명을 둘러보는 석대붕이다.

연선하와 매한옥. 

매화검수, 검사로서 어디 보검(寶劍)에 욕심이 없을까. 허나,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욕심보다 경계심이 먼저. 연선하와 매한옥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감사하오나, 괜찮습니다."

매한옥의 진중한 한 마디. 

유혹을 뿌리치는 진인(眞人)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다. 이에, 석대붕의 눈이 번쩍 빛나며 위험한 기운을 품기 시작했다.

"개방은?"

장현걸. 그리고 고봉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장현걸이 순간. 고개를 까딱이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장주, 그런데, 이 곳에는 적사검도, 청룡검도 안 보이오?"

"후후후. 말을 돌리는군. 역시나 구파일방은 재미있어. 눈 앞에 이만한 보물이 있어도 모른 척, 고결한 행동을 보이려고 하지."

석대붕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움찔, 장현걸의 몸이 민감하게 반응할 준비를 한다. 예측하기 힘든 상황, 석대붕에겐 재지나 지혜로 상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함께하고 있는 듯 했다.

"적사검. 청룡검. 그래.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사실, 따로 있었거든."

팽팽하게 긴장되는 공기.

오가는 대화와 무관하게 검고 안의 분위기가 사나워지고 있다.

원인은 오직 석대붕의 음유한 기도 때문이다. 마음을 자극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능력, 연선하마저도 당장 검을 출수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따라오게."

석대붕이 장현걸을 지나쳐 서고의 한쪽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일순간 마주치는 장현걸과 연선하의 눈빛. 

의외의 순간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공유하는 눈빛 교환이었다. 

끼긱. 철컹.

벽면에 숨겨진 비밀 문(門)이다.

열어 재치며 모두를 이끄는 석대붕, 네 사람은 범의 아가리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듯한 느낌에 젖어들며, 어쩔 수없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터벅, 터벅.

상당히 좁은 계단을 내려가 어두운 복도에 이르렀다. 지하 통로, 벽면에는 일렁이는 횃불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든다. 더욱 더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 속으로 들이밀어지는 것 같았다.

차르르르륵. 쿵. 쿵. 차르륵.

조금 더 걸었을 때다.

멀리서부터 기이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차라락.

쇠사슬이 땅에 끌리는 음성이다. 끌리고 요동치며 부딪치는 소리들. 꺾어지는 통로를 지나 나아간 그 곳에는 굵디 굵은 쇠창살이 버텨선 하나의 지하 감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은.......!"

지하감옥 한 가운데.

머리를 산발한 남자 하나가 있다.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 있는 남자.

얼굴은 흙빛에 온 몸의 근육이 터질 듯 팽배해 있다.

쇠사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옷깃은 도복(道服)의 그것이다. 몸부림치는 신형, 그 오른팔 끝에 강철 족쇄와 굵은 쇠사슬로 고정된 물건이 붙어 있다.

이 어두운 감옥에서도 홀로 푸르른 휘광을 발하고 있는 신검(神劍), 용형(龍形)의 검자루가 짙푸른 금속으로 새겨진 그 압도적인 자태. 

청룡검. 

그것이 그 남자의 손 안에 있었다.

촤르르륵. 철컹.

움직이는 것은 극히 한정된다. 특히 오른팔만큼은 여지없이 철저하게 묶여 있다. 어떤 몸부림에도 오른팔 청룡검만큼은 휘두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또 왔군. 늙은이."

탁하기 탁한 목소리.

발음이 명확하지 않다. 어렵게 단어를 만드는 듯한 기색이었다.

"지금은 제 정신이로군.  발작의 주기가  길어지고 있나. 설마하니, 제어하게 된 것인가?"

탁한 목소리로는 석대붕의 그것도 만만치 않다.

어두운 복도에 기묘함으로 울리는 두 사람의 음색.

그의 말에 남자의 입으로부터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큭큭큭. 설마 그럴려고. 몸이 망가져서 발작할 기운도 없는 게야."

"그럴 것임을. 처음부터 내 말했었지. 청룡기를 봉인할 부적술(府籍術)만 사용하라고.......다룰수 없는 것은 잡지를 말았어야 해. 모산파 쯤이 되었으면서."

철컹! 

남자의 흙빛 얼굴이 웃음을 지워내며 격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부추킨 것이 누구이길래!"

쿵. 

발을 구르는 힘이 엄청나다. 신발은 예전에 헤어져 맨 발이 다 드러나고 있고, 드러난 맨발에는 온통 핏줄과 근육이 곤두서 있다. 정상적인 육체가 아니었다.

"진정해. 강 도장. 그러다가 죽으면 이 노부의 입장에서도 곤란하니까."

촤르르륵! 철컹!

속절없는 몸부림이다. 기술적으로 결박해 놓은 신체가 크게 요동쳤다.

"또 발작이로군."

혼잣말 처럼 발하는 석대붕의 한 마디.

쇠사슬에 묶인 남자. 강 도장이라 불린 도인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듯, 눈에 깃든 빛이 완연하게 탁해진다.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려 하지만, 괴력에 삐걱대는 쇠사슬의 마찰음만이 들려올 뿐, 벗어날 방도가 없다.

기사(奇事).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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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십시오! 

수능생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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