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56)

  

죽이지 않고 빼앗아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것도 청룡검을 들고 있는 매화검수를 상대로. 달리 마음을 쓸 구석이 없다. 온 정신을 무공 전개에 집중해도 모자를 상황, 청풍의 발이 힘껏 땅을 박찼다.

터어어엉!

금강호보를 밟고, 금강탄을 뿜어냈다.

제대로 막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단호한 검격이었다.

치리링! 채앵!

강맹한 경력을 막아내는 매한옥의 대응에는 빈틈이 없었다.

슬쩍 옆으로 비껴서면서 청룡검을 빙글 돌리고, 직선으로 들어오는 검격을 감아내어 흩어 놓는다.

한 번 휘돌리는 검날에 담긴 수많은 변화. 이십 사수 매화검법 중 매화유변이었다.

쐐애액.

매화유변으로 청풍의 검격을 방어한 후, 세류표 신법을 전개한다.

꺾어 들어오는 매한옥의 공격, 올려치는 검격이 화려한 검화(劍花)를 만들었다.

'매화만개!'

화산 무공의 정수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백야참을 끌어당겨 백호무 검결로 전환하고, 풍운용보를 펼쳐 회피에 주력했다. 놓치지 않고 뻗어오는 매화검, 순식간에 닥치는 위기였다.

파라라락!

청풍의 몸이 빠르게 물러났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매화검수와의 일전.

한 때 매화검수를 목표로 하던 때가 생각난다.

눈앞을 아른거리는 매화검법속에 사저 연선하의 모습이 있고, 자신의 몫을 다 하고 죽었던 유자서가 있으며, 신여의 송림에 함께 싸웠던 하운이 있었다.

촤아악!

매화검수.

항상 청풍, 자신보다 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름이다.

이제와 매화검수에 정면으로 무공을 겨루는 순간.

밀리지 않는다.

밀릴 수는 없다.

육극신. 

차원이 다른 고수를 목표로 하고 있는 청풍으로서는 매화검수 정도에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퀴융!  

용보로 반보 뒤로. 

호보를 밟아 탄력을 받는다.

금강탄 일격이 응축된 내력을 폭발시키니, 기세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이라 매한옥의 얼굴이 다소 굳어지면서, 강하게 청룡검을 떨쳐 왔다.

쩌정!

정면으로 받아내는 검격이다.

내력과 내력의 교차.

할만 하다.

자하진기, 청풍이 지닌 내력은 매화검수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화아아아악!

청풍의 검이 금강탄에서 변화하여 긴 호선(弧線)을 그렸다.

백야참의 일격.

매화난영(梅花亂飛)에, 매화현현(梅花顯現)으로 맞이하는 청룡검이 현란한 녹청의 광채를 흩날렸다.

쩌적! 파아아아아.

굉음이 울려 퍼진다.

강철이 균열을 일으켜 부서지는 소리. 충격의 여파를 걸러내기 위해 두 사람 모두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나타난 결과는 자명했다.

여전히 훌륭한 자태를 뽐내는 청룡검.

이번 충돌은 확실히 모험이었을까.

청풍의 장검은 밑둥부터 깨져 나가 검 자루밖에 안 남은 상태다.

백야참에 담은 내력이 지나치게 강하여 보통의 장검이 견뎌내기에 어렵기도 하였거니와, 마주친 상대가 청룡검, 안 부러지고 배길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툭.

청풍은 남아 있는 검자루를 미련 없이 내던졌다.

곧바로 옆으로 움직인 청풍이다.

둘러보는 눈.

굴러다니는 병장기들이 사방 천지에 가득하다. 다리를 쭉 움직이며, 발치에 걸린 검 하나를 튕겨 올렸다.

티잉! 

검이 통째로 부서져 새 검을 취했는 데에도 청풍의 신색은 그저 태연할 뿐이었다.

그도 백호검을 다루어 보았기 때문이다.

신병이기와 싸우면서 병장기에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룡검과 마주치면서 검이 깨지는 정도야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 것. 털끝만큼도 놀라지 않은 채, 다음 공격을 준비할 수 있는 이유였다.

  "제법이군."

조금더 허둥대지 않는 청풍을 보며 매한옥이 한 마디 내 뱉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일 장.

검만 뻗어도 순식간에 서로의 생명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매한옥의 눈을 직시하면서 다음 수를 읽는 청풍이 한 발 더 옆으로 움직여, 발에 걸리는 청강장검을 한 자루 더 뽑아 올렸다.

"쌍검?"

눈썹을 찌푸리는 매한옥의 목소리는 다소 비틀린 듯이 들렸다.

제 정신인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제 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력이 고강하기 때문일까.

완전히 침식되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미묘한 성격 변화만을 보이고 있는 듯 했다.

"그것으로 될까?"

부딪쳐 부셔버리는 청룡검의 괴력을 실감해서인지, 매한옥의 말투엔 오만함이 가득했다. 서서히 앞으로 다가오는 매한옥, 일순간 그의 신형이 급속도로 짓쳐 들었다.

치리리링!

오른 손 장검을 뻗어내 청룡검을 비껴냈다. 뒤로 돌고, 호보를 밟아 전진한다. 왼손의 검, 여섯 개의 검집으로 착검과 발검을 연마했던 때 그대로, 백야참의 검결을 재빨리 짚어 나갔다.

채챙! 치이이잉!

측면으로 부딪쳐 검날의 손상을 최소화 했다.

오른손, 그리고 다시 왼손.

금강탄과 백야참의 검격이 난무했다.

차아앙!

새롭게 쌍검을 전개해 보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무공은 도리어 해가 되는 법. 상대가 매화검수라면 더더욱 그렇다. 정밀하게 허점을 파고들어 검을 내쳐 오니, 막아내기가 힘들다. 순식간에 손이 엉켜 버렸다.

치리링!

연신 뒤로 물러나다, 기회를 잡아서 왼손의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한손으로 쓰는 것이 익숙하다는 판단일까.

매한옥의 입가에 비웃음이 머물렀다.

"궁색하군. 두 자루보다 한 자루가 아직은 능숙하더냐?"

누가 들어도 무례하게 여겨질 도발이다.

그 빈정대는 말에 넘어가기라도 한 듯, 청풍의 입매가 굳는다. 이어 땅을 박차는 기세. 바빠르고도 강맹한 기세가 우러 나왔다.

치릭! 차아앙!

백호무를 펼치는 청풍과, 매화검법의 매한옥.

교차되는 검격이 십 합을 넘어섰을 때다.

일순간 벼락처럼 쳐 들어오는 매화직벽(梅花直劈)에 청풍의 검이 휘청 흔들렸다.

"끝이다!"

어렵사리 되돌리는 검.

매한옥의 입에서 기합성과 같은 일갈이 터져 나오고.

쩌어엉!

청풍의 검이 단박에 부서져 나갔다.

비산하는 파편들.

청룡검이 마지막 일격을 위하여 돌아갈 때.

바로 그 순간 죽립에 가려졌던 청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치리링! 퀴유웅!

왼손이다.

검집에 넣어 두었던 왼 쪽 청강장검이 빛살처럼 뻗어 나왔다.

"!!"

촤아악!

하늘로 튀는 핏줄기.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다.

능숙하지 못한 쌍검을 취했던 것도. 왼쪽 검을 다시 검집으로 돌렸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을 노린 안배.

병장기의 열세를 역 이용한 놀라운 한 수였다.

"크윽!"

매한옥의 신형이 비틀 비틀, 뒤로 물러났다.

베어낸 곳은 오른 쪽 옆구리.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제법 깊었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상처가 아닐 터였다.

"머리를 쓴다 이건가."

매한옥의 눈에 기이한 광망이 이글거렸다.

시도는 좋았지만, 이래서야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 청풍의 안색이 더욱 굳었다. 곱게 빼앗기는 글른 모양이었다.

"죽여야 하겠어."

폭사되는 살기다.

상처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않는지.

피가 줄줄 흐르는 데에도 검을 휘돌리며 다가오는 품세가 예사롭지 않은 정신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날아드는 신법에 암향표의 은밀함이 감소되며,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더해졌다.

쩌엉! 쩌정!

검을 분지르고 뼈까지 갈라내겠다는 기세다.

일격 일격이 살초다. 

용보와 호보가 연신 펼쳐지면서, 광폭하게 내리찍는 청룡검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냈다.

콰앙!

땅을 찍는 청룡검에 땅거죽이 움푹 뒤집어졌다.

위험하다. 확실히 이지를 상실해 가는 느낌, 더욱 더 사나워지는 검격이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전부터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청풍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광인(狂人)에 가까워지는 매한옥이다.

매화검법의 초식들도 점차 망가져간다. 초식도 없이 살기만으로 흩뿌리는 검, 위력만큼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쩌저정!

몇 번 더 검격을 받아냈다.

감당이 힘든 공격들.

급기야 청풍이 들고 있던 왼손의 청강장검마저도 깨져 버리고 만다.

검이 없으니 청룡검을 마주할 방도도 없다. 본능처럼 금강호보를 밟으며, 매한옥의 전면으로 뛰어들었다. 

'간다.'

깊이 들어가 용보를 펼치며, 검을 버렸다.

검 없이 가하는 불시의 일격. 나아가는 충만한 일장, 태을미리장이었다.

퍼어엉! 

매한옥의 몸이 덜컥, 뒤로 튕겨 나갔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청풍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움직여 땅바닥에 있는 검 한 자루를 잡아 들고는 매한옥을 향하여 강하게 찍어 내렸다.

쩌엉!

땅을 짚고 있는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철저한 방어가 이루어진다.

청룡검이 이끄는 본능이 아니다.

매화검수로서의 오랜 고련이 몸에 밴 결과였다.

'화산 무공, 매화검!'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매화검결이 스며 나오는 매한옥이다.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청풍의 뇌리를 스쳐갔다.   

치리링! 치칭!

맞붙어 움직이는 검.

청풍은 승부수를 던졌다.

'일깨워라!'

백호무 대신 매화삼릉검을 시전했다.

알아 보기를. 

그래서 정신을 차리기를.

일단 정신을 되돌리는 것이 먼저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될 것이 없었다.

"매화.......삼릉검.......?"

먹힌다.

물러나는 매한옥이다.

청풍은 장검을 회수하며 왼 손으로 다시 한번 태을 미리장을 때려냈다.

파아앙!

장법을 방어하는 매한옥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깃들었다.

몇 가지 익숙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을......미리장? 삼릉검.........화산.........넌........넌 누구지?"

흐릿 흐릿 돌아오는 눈빛이다.

또 한 가지 알았다.   

청룡검의 목기가 사람의 정신을 완전하게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간헐적으로 제 정신이 돌아오는가. 청풍을 살피는 그의 눈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화산파. 청풍입니다."

"청풍, 청풍.........연 사저가.......이야기.......하던 그........청풍인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다.

핏줄이 돋아나는 손등, 온 몸이 부풀어 오르듯, 내력이 급증하고 있었다.

"사저.......연 사저. 사저?!"

연선하를 부름이다. 

한 순간.

매한옥이 몸을 돌렸다.

온전히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무엇인가가 단숨에 달라지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는 매한옥.

흔들리는 두 눈이 먼 곳을 되짚어 마침내, 한 사람에게 머물렀다.

"석......대붕........!"

멀리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대붕이다.

매한옥의 목소리에서 또 한 번 진한 살기가 넘쳐 나왔다.

청룡검을 곧추세운 매한옥.

그의 입이 단절되는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사저. 사저를.......구하러....... 가야.......한다. 모든 것을 끝.......내야 해." 

중얼거리는 소리다.

목표가 확실한 광기(狂氣). 끊임없이 되뇌이는 목소리에 청풍의 얼굴도 크게 굳어졌다.

'연 사저.......!'

구하러 가야한다는 말.

연선하도 뭔가 위급한 상황에 있는 모양이다. 대체 어떻게 얽힌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파아악!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고, 매한옥의 신형이 빠르게 뻗어나갔다.

쫓아가야 한다.

매한옥의 말처럼 이 미쳐 돌아가는 석가장의 모든 것들을 끝내려면, 두 손을 놓고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매한옥에게 맡겨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답은 오직 하나다.

그가 해야 한다.

청룡검을 회수하고 이 일을 끝내야 했다. 

다만 어려운 것은 매한옥의 수중에서 청룡검을 빼앗는 것.

그야말로 난감한 과제였다.

쫗아가고는 있지만, 도통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껏 싸울 수 있다면........!'

싸우면 된다?

그렇다.

손속을 나누어 본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청풍의 무력은 강하다.

그토록 동경했던 매화검수의 무력을 이미 추월해 있는 상태다.

죽일 각오로 싸운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팔을 끊어 놓고 빼앗을 것이었다면, 벌써 청룡검은 청풍의 손에 잡혀 있으리라.

하지만.

죽일 수는 없다.

어디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도 물론 안 된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면, 상대보다 월등한 무공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청풍의 무공은 부딪쳐 깨부수는 백호무. 위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매한옥이 들고 있는 청룡검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병장기가 아니다. 충돌하면 이 쪽이 부러진다. 마음놓고 무공을 전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검이 버틸 수만 있다면!'

보통의 청강장검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대등한 수준의 신병이 필요하다. 굳이 대등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숨에 망가지지 않을 병기(兵器)가 절실했다.

쐐애애액!

그러는 와중에 장내를 거의 다 가로질러 버렸다.

일렁이는 불빛의 그림자.

석대붕의 전신이 지척이다.

순간적으로 사방을 돌아 본 청풍.

조신량을 몰아치고 있는 사도가 있고, 성혈교와 숭무련의 격전이 있다.

지나쳐 돌아가려던 청풍의 눈이 어느 한 지점이 딱 멈추었다.

'저것. 저것이다.'

성혈교 무인들.

숭무련 검사들.

한 가운데에 빛을 뿌리는 보검(寶劍)이 비쳐든다.

붉은 색 사자의 이빨. 

적사검이다. 적사검이 거기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