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
청풍의 외침이 들려왔다.
빠르다.
순식간에 내원을 가로질러 온다.
청풍의 뒤로는 성혈교, 숭무련의 무인들이 떼를 지어 황급히 쫓아오고 있는 상황.
일찍부터 제어가 불가능했던 이곳의 사태는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청룡검을 치켜드는 매한옥.
달려오는 청풍과 무인들.
중앙에서 막 승부가 난 듯 싸움을 멈춘 사도와 조신량까지.
한번 눈을 돌리는 것으로 이 내원을 둘러본 석대붕이다.
결국, 지금의 형세는 하나로 요약된다.
석대붕을 향하여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 그가 그 얼굴에 괴이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래. 결국 그렇다면 들어 오거라. 모조리.”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연 그다.
갑작스레 몸을 돌리더니, 내원 안 쪽, 커다란 전각 쪽으로 몸을 날렸다.
쫓아가는 가.
청룡검을 휘두르는 매한옥을 필두로, 그 뒤의 청풍, 그리고 숭무련, 성혈교의 무인들이 땅을 박찬다.
게다가 뒤를 이어 날아드는 자.
성혈교 오 사도까지.
내원 중앙에는 큰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조신량만이 남겨졌다.
나머지, 개방과 손 총관, 천독문의 잔당들은 아직까지도 내원 바깥으로 이어지는 입구 쪽에 몰려, 어지러운 싸움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타탁!
끼이이이이.
석대붕이 들어가는 곳.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라도 되는 양, 전각의 대문이 열리며 불길한 마찰음이 울려 나왔다.
함정.
누구라도 함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석대붕이 들어가고 뒤따라 매한옥이 짓쳐 나가니, 청풍으로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불도 밝혀지지 않은 곳, 문 안쪽으로 어두운 회랑이 보이고 있었다.
“정지!”
숭무련 무인들은 그래도 조심성이 있었다.
조신량 이외에도 차석(次席)이 있어 이들을 지휘하는 자가 있는 모양, 누군가 외치는 한 마디에 일제히 멈추어 선다. 함정을 예측하고 있기에 진입을 망설이는 모습들이었다.
타타탁. 텅! 터텅!
그러나.
성혈교는 달랐다.
광풍을 몰고 거침없이 날아드는 사도를 중심으로 하여, 곧장 전각 안을 향해 뛰어든다. 조심성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모한 것인지. 그 안에 무엇이 있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부단주께서는?”
단주와 부단주의 부재시 이 흠검단을 지휘하는 자. 그의 질문에 한 검사가 즉각 답했다.
“운기(運氣) 중이십니다.”
숭무련 무인들이 조신량이 있는 뒤 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을 때다.
모두가 놀랐다.
바로 직전까지 내원 중앙에 있었던 조신량이다.
그런데 어느 새 이 앞까지 와 있다.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하고도 곧장 사도의 뒤를 따라 온 듯, 이미 그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운기는 끝났어.”
조신량이 말했다.
멀쩡한 척 굳건하게 서 있지만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이다.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이 신기할 정도.
다시 한번 토혈(吐血)이 일어나는 듯, 울컥, 목 울대를 올리더니, 꾹 참고 그대로 집어삼킨다. 어쩔 수 없이 입가로 흘러 나오는 얇은 핏줄기는 대수롭지 않게 쓸어 닦았다.
“강하더군. 과연 사도다.”
태연하게 말하는 조신량.
그렇게도 빈틈없어 보이던 옷가지가 너덜 너덜 찢겨져 있다. 내상만 입을 것이 아니라, 왼 쪽 어깨도 살점이 한 움큼 날아갔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젊은 나이에 부단주의 직위를 차지한 이유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전각 안 까지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무공으로 맞서는 것은 겁나지 않으나, 기관이나 독(毒)이라면 사양이야. 이곳에서 상황을 본다.”
올바른 판단이다.
이 정도 일까지 벌려 놓은 석대붕이라면 이 안이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기관(機關)과 독(毒) 그 외에 어떤 것이 더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것이 조신량의 결정을 반박하고 나왔다.
“신량. 그러니까 아직 멀었다는 소리를 듣는 게다.”
화아악.
어디서 떨어지는 것인가.
긴 장포를 펄럭 펄럭 휘날리며, 땅 위에 내려선다.
붉은 색 검날 문양이 온 장포에 아로 새겨져 화려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터억.
청수한 얼굴. 짧게 기른 수염이 멋졌다.
조신량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눈매지만 눈만큼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부드러운 빛을
발산했다.
흠검단주 갈염(葛焰)의 출현이다.
칠척 장신에 뇌운(雷雲)이 새겨진 검을 들었다.
숭무련 흠검단 무인 전부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취했다.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뚫고 들어갈 수 있어야지. 사도에게 죽지 않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만 그 정도로 그쳐서야 안 된다.”
퍼얼럭.
장포자락을 휙 내저으며 성큼 성큼 걸어들어간다.
“따라오라. 미친 늙은이의 얼굴이나 보자꾸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다.
그곳에 있음으로 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두려움까지 없앨 수 있는 자. 그것이야말로 흠검단주의 존재감이다. 이 석가장에 모여드는 사람들. 이것으로서 석가장에 나타날 모든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전각의 내부에는 그곳을 채운 공기마저 꿈틀대는 듯, 온통 위험스런 기운이 가득했다.
회랑의 끝까지 이르러, 하나의 태사의 앞에 이른 석대붕이 손을 휙 내저었다.
화아악.
태사의 뒤쪽으로 몇 줄기 등불이 밝혀졌다.
온통 어두운 회랑에 이곳저곳 걸쳐진 붉은 빛 휘장이 검붉은 그림자를 자아냈다.
탁탁탁탁.
회랑 전체를 울리는 어지러운 발소리들.
그들을 앞에 둔 석대붕의 그림자가 발소리에 흔들리기라도 하듯, 일렁 일렁 춤을 추었다.
텅!
땅을 박차는 소리.
가장 먼저 뛰어 오르는 것은 역시나 청룡검을 휘두르는 매한옥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압축하며 날개라도 달린 듯 암향표를 극성으로 펼쳐낸다.
굉장한 속도.
그러나 그는 석대붕을 벨 수 없었다.
석대붕의 지척까지 왔을 때 양 옆에서 나타난 두 개의 검날 때문이었다.
쩌정! 차아앙!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매한옥의 암향표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속도로 뛰쳐 나와 그가 휘두르는 완벽하게 쳐 냈다. 난데 없이 나타난 흑의인들. 하나같이 거구의 신체를 지녔다. 석대붕이 키워낸 석가장 무력의 정점, 흑검노(黑劍奴)들이었다.
탁! 타다닥!
암향표 신법이 빠르게 박차고 다시금 석대붕을 향해 짓쳐들었지만, 석대붕의 양 옆을 지키는 흑검노들의 검술은 그야말로 대단하여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 두 사람만으로 매한옥의 검격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쩡! 채챙!
대단한 것은 검술뿐이 아니었다.
온 회랑을 울리며 검붉은 그림자들을 요동치게 만드는 충돌음들.
청룡검이 발군의 신검이라지만 흑검노들이 들고 있는 검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보검, 명검을 수집한다더니, 그렇게 모았던 보검(寶劍)들을 쥐어준 모양이다. 강맹하게 휘두르는 청룡검에 맞서서도 부러져 나가지 않았다.
꿍! 쿵. 쿵. 쿵.
순식간에 십여 합을 교환한 그들이다.
매한옥의 발이 강하게 땅을 울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잠시 동안의 정적.
석대붕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잘들 오셨소. 이제 이 즐거운 잔치도 막바지에 이르렀구려.”
무섭도록 울리는 탁한 음성이었다.
적사검을 든 청풍이 앞에 서고 그 뒤로 성혈교 무인들이 따라 붙는다. 무시무시한 기도를 흩뿌리는 오사도 역시 회랑을 가로질렀다.
타탓. 타타타탁.
마지막으로 울리는 발소리는 숭무련 흠검단 검사들의 것이었다.
석대붕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뱀의 그것처럼 요요롭게 비쳐지는 눈빛이다. 그가 염사곤을 들어 땅을 한번 꿍! 찍었다.
휘익. 휘이익.
땅을 찍은 것은 일종의 신호.
휘장의 검붉은 그림자들 속에서 꿈틀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흑의의 거구들 네 명이 더 나타났다.
또 한번 꿍, 땅을 찍는 염사곤이다.
끼이이이.
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문이 닫히는 마찰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단숨에 꽝 하는 소리를 내고 닫혀버렸다.
갇혀버린 사람들.
허나, 그 누구도 닫힌 문에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쯤이야 모두가 예측했던 일인 까닭이었다.
“다들 차분하여 재미가 없소. 흥을 더 돋구어야 하겠지.”
꿍, 꿍.
염사곤의 격타음.
그것을 신호로 하여 생긴 변화는 문이 닫힌 것처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었으나, 가볍게 넘기기는 또 어려운 것이었다.
뭉클 뭉클.
어떤 구조로 어떻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땅에 깔아놓은 청석 틈으로부터 붉은 운무가 피어오른다.
“독(毒)이다! 숨을 멈춰!”
사람들의 반응도 문이 닫혔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즉각적이다.
독을 써 온다 해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숨을 멈추고 몸을 피해 보지만,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홍무(紅霧)는 당장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삼켜버릴 것처럼 넘실 넘실 끝이 없었다.
“이 기술. 기관진식. 운기자(雲機子) 맹진(孟眞)과 쌍벽을 이룬다는 귀건노(鬼建老) 합(哈) 노괴(老怪)의 작품이로군.”
독무가 올라오는 것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자.
화려한 장포자락에 딸려오는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큰 보폭으로 나서고 있는 그를 본 석대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명한 안목. 왜 안 납시나 했더니 이제야 오셨군. 숭무련 흠검단주.”
석대붕의 말을 듣는 흠검단주의 눈이 기광을 뗬다.
“날 아는가?”
“알다마다. 강의검의 주인. 그 검. 도철의 칠대 기병 중 호풍환우의 강의검(江疑劍)이 아니었나?”
“오호.......제법이야. 한 방 먹었어.”
흠검단주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올라가는 입 꼬리에 짧은 수염이 함께한다. 시원스런 미소였다.
“그렇다면 나도 한 가지 물어보지. 늙은이. 천품신개, 개방과 맞닿아 있었다더니, 이런 일까지 저지른다는 것, 이유가 뭐지? 단심맹에서 버림 받기라도 한 건가?”
흠검단주. 한방 먹었다고 했다.
헌데, 흠검단주의 말을 들은 석대붕의 표정은 한 방 먹은 정도가 아니었다. 삽시간에 굳어지는 얼굴이다. 진실로 놀랐다는 기색이었다.
“단심맹. 그렇지. 언제나 단심맹이 문제였어. 남의 문파를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특기인 곳. 몇 년 전에는 영락의 암살을 꾸미질 않나, 저번에는 군부의 화기(火器)를 빼돌리지 않나. 그러고 보면 거기는 항상 그래 왔지. 골치 아픈 곳이야. 그래. 안 그런가. 오 사도?”
모두가 숨을 죽이는 비화(秘話).
흠검단주가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성혈교 오 사도를 바라 보았다.
성혈교 오사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두 눈을 빛낼 뿐이다. 흠검단주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질문 상대를 잘못 택했군. 성혈교나 단심맹이나 본래부터 거기서 거기였지. 최근에 두 곳이 짜고서 벌이는 일, 이 쪽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많아. 같은 팔황이라도 못 봐 주겠어.”
거기까지.
오 사도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무표정이 변화하는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공포스럽다. 입을 여는 목소리에 진한 살기가 품어져 나왔다..
“그 이야기. 숭무련주의 뜻인가?”
“글쎄.”
펄럭.
흠검단주가 장포자락을 휘돌리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당장이라도 뽑을 수 있는 기세. 허나, 흠검단주는 검을 뽑지 않았다. 성혈교 오 사도가 서서히 살기를 지워 냈을 뿐 아니라, 흠검단주 본인으로서도 성혈교 사도와 싸우는 것 보다는 석대붕에게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조되었던 전의를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늙은이. 이런 짓을 저지를 정도밖에 안 된다면 단심맹이 버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 시꺼먼 검인들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이지? 천독문의 독 따위는 먹히지 않아. 이 안에 있는 모두가 늙은이의 적이라고.”
흠검단주의 말.
놀라 일그러졌던 표정을 가라앉힌 석대붕이다. 흠검단주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두가 나의 적이다라........과연 그럴까?”
석대붕은 이제 완전히 평소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받아치는 그의 말소리에 살아난 자신감이 묻어난다. 회심의 수를 이야기하는 석대붕. 그가 말했다.
“이 독은 천독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단심맹에서 받은 것이다. 적아 없는 싸움을 하게 되겠지. 살심산이니까.”
“살심산!!”
서로를 향한 설전의 일침들은 한결같이 뜻밖이고, 한결같이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살심산.
살심산은 신체를 해하는 독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마약(痲藥), 마약(魔藥)이었다.
모두를 난전으로 빠뜨려 죽여 버리려는 심산인가.
석대붕의 입에 파멸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냥 둘 수가 없다.”
악독한 심산을 눈앞에 두고 분노를 일으키는 흠검단주.
그것은 정도(正道), 의협(義俠)의 마음일련지. 날카로운 눈매를 무섭게 움직인 흠검단주, 그 그의 허리춤에서 강의검, 절세의 기검(寄劍)이 뽑혀 나왔다.
“살심산은 위험해. 절대 들이마시지 마라!”
수하들을 향한 한 마디 외침.
흠검단주가 석대붕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석대붕이 한 발 물러나니, 둘러친 흑검노들 모두가 쇄도하는 흠검단주 일인에게로 달려든다.
텅! 쩌정!
그것으로 시작되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충돌음.
어떤 것도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혼전이 비로소 절정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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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고. 마지막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