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56)

  

“처음 검을 모으기 시작하던 시절, 나는 수많은 강호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어떻게든 버텨 보았지만, 무공만으로는 어려웠지. 그래서 천독문과 손잡았다.”

탁한 목소리에 오랜 세월의 흔적이 깃들었다.

모든 것을 말하는 석대붕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 듣기에는 실로 어울리지 않은 자리,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 말이 가지는 무게, 그 말이 지니는 숨겨진 의미 때문이었다.

“천독문. 독(毒)을 개발하는 데에는 그것에 당할 희생자가 있어야만 한다. 나를, 내 검들을 노리는 자들을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겠지. 사람을 죽이면서도 명분에 어긋나지 않으니, 마음껏 새롭게 개발한 독(毒)의 효과를 연구할 수 있는데다가, 내가 주는 황금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까.”

분명히 그렇다.

천독문. 

돈을 받고 독술(毒術)을 파는 문파다.

무공이 모자란 문파들이 주 고객이 된다.

독술로 사람을 죽이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챙긴다. 무림 공적에 몰리지 않기 위해, 명분이 없는 곳에는 웬만해서는 뛰어들지 않지만, 필요에 의해서는 악독한 짓도 거리낌 없이 저지지르는 곳이었다.

쓰기에 따라 충분한 힘이 되는 것이 독술.

그러나 독이라는 것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해독약도 필연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독술을 개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었다. 

새로운 독술의 개발에 있어, 석가장과 같은 곳은 굉장히 유용한 실험의 터전이다. 지금은 터전을 잡아 석가장의 보검들을 노리는 자가 거의 없다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하루가 멀다하고 침투해 오는 강호인들이 있었던 예전의 경우, 석가장은 천독문의 가장 큰 실험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돈과 연구 성과를 주고, 천독문의 힘을 빌린다.

완전한 거래.

그것이야말로 석대붕과 천독문이 손을 잡은 이유였다.

“천독문의 독술이 자리를 잡고, 보검이 한 자루 한 자루 늘어갈 무렵이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렇게도 극성이던 습격자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려보았자 빼앗아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이지. 열 자루 정도라면 시도를 해 보겠어도, 오 십 자루가 넘어가면 저절로 엄두가 안 나게 되는 것이겠다.”

석대붕이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나 기묘하여 심중을 알 수 없던 웃음, 지금은 다르다. 씁쓸함이 깃들어 있는 쓴 웃음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가 있었다. 

“누구든 가지고 싶어 하고 빼앗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다. 그리고, 애시 당초 포기하여 별반 관심이 없어하는 물건이 있다. 어느 쪽을 소유하고 있을 때 더 기분이 좋을까. 보검들, 그렇게나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던 지고한 예술품들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내 손에 들어오고 나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내 심정이 어떠했겠나.”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마음.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지닌 물건이 가치 있음을 알아주고, 그것을 부러워하며 탐을 낼 때야만 비로소 성취감을 느낀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평생 보검을 모았지만, 그 삶이 부정 당하는 기분.

심마(心魔)다. 지독한 심마(心魔)였다.

“그래서.”

내상 때문에 안색이 창백한 청풍.

“이런 일을 벌였나.”

몸을 꼿꼿이 세우면서 묻는다. 용서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분노와, 불쌍한 노인에 대한 측은지심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 그래서 그랬다. 그 검, 청룡검이 가르쳐 주었다. 사람은 파멸로 치달아 갈 때, 가장 큰 힘을 발산하지. 보검이 내 수중에 있을 때에는 거들떠도 안 보았지만, 과연 그것이 밖으로 나오자, 달라지더구나. 서로를 죽이고, 짓밟는다. 치명적인 광기다. 그것이야말로 보물이 지닌 마력이지. 그런 모습을 보는 것. 삶의 의미가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검.

청룡검에 고정되어진 석대붕의 눈빛을 보았다.

깨달아지는 바.

만사무불통지라는 복자, 만통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른쪽 광대뼈, 금기(金氣)가 쇠락한다. 지실응(知失應)하면 세력이 약해지고 난조되니, 흉엿보인다. 목기(木氣)는 곧 청룡. 갑인(甲寅)의 목신(木神)으로 춘삼월에 왕하는 길장(吉將)이다. 지득을 하면 보물을 얻고 재물을 취하게 되나, 지실응하면 정심을 잃고 물건을 망가뜨려 패가망신, 파산지경에 이르게 된다.”

백호검 때에도 그랬다.

백호검은 색정음행, 교행불해의 신.

마성에 휘말리면 색정을 밝히게 되고, 흉사를 벌이게 된다.

청룡검도 마찬가지다.

그 특성에 따라.

지실응, 목신에 응하지 못하면 정심을 잃고,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간다.  

분명하다. 

석대붕은 청룡검을 잡았다.

잡았고,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손에서 떨어 뜨려 놓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 다음.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보는 것과 같다.

서영령이 그랬던 것처럼.

괜찮아 보였어도, 사실은 백호의 마성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석대붕도 청룡의 마성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응하지 못한 기운.

끊임없이 석대붕의 마음을 갉아먹으면서, 파멸의 의지를 키워간 청룡기.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네 놈은.......어찌하여 멀쩡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큭큭큭. 이제는 다 소용없다. 다 끝났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불길한 미소다.

다 죽어가는 그에게.

또 무엇이 남았는지.

하염없이 청룡검을 바라보던 그가 연선하와 장현걸을 돌아보았다.   

“화산과 개방, 두 년 놈들. 그곳에 그대로 있을 것이지 잘도 나왔구나. 이 석가장은 귀건노(鬼建老)의 역작. 그곳만이 안전한 곳이었다. 두 명은 말이다. 이곳의 증인이 되어 주었어야 했어. 석가장 모든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로서. 그것이 살려두고 감금한 이유였다.”

모두가 느꼈다.

막아야 한다.

끝에 이르러, 비장의 수(數)를 내보이는 석대붕.

매한옥이 땅을 박차고, 연선하가 몸을 날렸다.

쐐애액!

끼기기긱! 우우웅!

암향표와 팔선보.

늦었다.

석대붕의 손은 이미 태사의의 손잡이를 꺾어 내리고 있었고, 당대 건축 기술에서 한참 벗어난 경지에 이른 귀건노의 기관(機關)이 작동을 시작하고 말았다.

철컥. 철컥. 철컥.

파파파파파파.

사방에 쳐진 붉은 휘장이 찢겨져 나간다.

쏘아지는 것은 수백발의 철시(鐵矢).

제각각 움직이는 고수들의 출수가 눈부셨다.

막아내는 모습.

철시 정도로는 어쩔 수 없는 절정의 무공들이 면밀한 방어막을 갖추어 나간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일 리가 없다. 

기관으로 쏘아지는 화살들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옭아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진짜는 그 다음이다.

쿠쿠쿠쿠쿠.

땅바닥으로부터 느껴지는 진동.

처음으로 그 정체를 알아챈 흠검단주가 경호성을 내 뱉었다.

“화약!” 

쿠쿵! 콰콰콰콰콰콰!

불기둥이 치솟았다.

석가장을 통째로 날려버리려는가.

그만한 화약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폭발의 기세가 엄청나다.

부서지는 땅과 무너지는 기둥.

그 뿐인가.

한 번에 터뜨리지 않는 대신, 터져 나오는 불기둥 사이로 강전(剛箭)과 암기(暗器)들이 뿜어진다.

최소한의 화약으로 최대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폭파술.

귀건로 합노괴가 발한 기관술의 절정이었다.

“안 돼!”

몸을 날리는 연선하.

내상을 입은 청풍을 향하여.

부딪치는 눈빛에, 청풍이 입을 열었다.

“나보다.”

더 이상.

연선하의 보살핌을 받지 않는다.

“매 사형을.”

적사검을 위로.

청룡검을 비껴들었다.

쩡! 쩌정!

갈라지고 부서지는 천정과 땅바닥, 난무하는 암기들 사이에서, 두 자루 쌍검이 움직인다.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고.

연선하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알겠어! 버텨!”

연선하.

이제 그녀가 보듬을 수 없는 남자가 거기에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버텨달라는 한 마디 뿐.   

매한옥의 전신을 가로 막으며 매화검수, 매화검을 뽑아내 천류검법을 펼쳤다.

채챙! 채채채챙!

매한옥을 보호하는 검술.

어렵다.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때. 

갈라지는 천정에, 위에서도 날을 세운 철판들이 떨어져 내리니, 숭무련 검사들이 죽어나가고, 성혈교 무인들이 쓰러졌다.

폭풍처럼 사위를 휩쓸어 가는 죽음의 기운들이다.

힘겹게 검을 휘두르는 청풍.

돌파구는 없다.

게다가 발치에 느껴지는 진동.

청풍의 급히 용보를 펼치며 물러나지만, 거리가 부족했다.

터져 나오는 폭발의 규모가 전에 없이 큰 까닭이었다.

콰콰콰콰콰쾅!

부서지는 느낌이다.

튕겨지는 몸.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그의 심혼을 뒤흔들었다.

‘움직여야.......!’

너무도 충격이 크다.

휘청, 무릎을 꿇고, 흔들리는 그의 두 눈.

또 하나 치솟는 불기둥 옆으로 위기를 맞는 연선하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

뛰쳐 나가려는 것은 의지 뿐.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절체절명.

연선

“제길!”

연선하가 있는 곳.

다행히도 날아드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큰 소리를 내 뱉고 빛살처럼 날아가 항룡십팔장, 강력한 장력을 발하는 이.

장현걸이다.

연선하의 뒤를 막고, 죽음의 위협을 벗어난다.

안도감.

그러나, 안도감을 느끼기엔 청풍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무너지는 땅, 치솟는 불기둥에, 날아다니는 암기까지.

퍼억!

폭발에 휩싸인 돌덩이 하나가 날아와 몸을 비꼈지만,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 옆구리에 틀어박히고 만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

감당하기 힘든 강적들과 싸우면서 축적된 내상들이 마침내 넘쳐나 온 몸을 강타하고 있다.

무너진 방죽에서 쏟아 나오는 홍수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청룡검을 땅에 박고, 몸을 세우려는 시도.

‘끝이다.......’ 

안 된다.

쓰러지는가.

파락!

파라라라라락!

사위를 울리는 파공성

펄럭이는 장포자락이 탁해진 두 눈에 일렁인다.

쾅! 채채채채챙!

떨어지는 돌덩이가 튕겨 나가고, 날아드는 암기들이 튕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잠되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잃는 청풍.

모든 것이 무너진다.

거세지는 폭발이 절정에 이르러.

그토록 거셌던 탐욕들을.

그토록 살벌했던 싸움들을.

노인의 광기와, 젊은이의 도전을 한꺼번에 파묻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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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단락 마무리 했습니다.

수정 작업에 한 가지가 더 추가 되어서, 오늘도 밤을 새야 하겠네요.^^

출판도 가까이 왔고.

피치를 올려야 하는 마당.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먹고, 커가는 청풍입니다.

청풍에게 힘을 주십시오.^^

철기맹과 화산파의 싸움.

총력을 기울인 화산파의 진면목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매화검수와 각 지역 정예들을 한꺼번에 운용하며 철기맹 분타들을 박살내는 한편, 드넓은 화산의 인맥을 총 동원하여 철기맹에 대한 타 세력의 지원을 하나하나 꺾어 나갔다. 

오랜 역사, 막강한 무공을 지닌 화산파다. 초반에 철기맹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화산파가 그 힘을 총동원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무력과 민심. 심지어는 자금력에 있어서도 화산파가 끌어들일 수 있는 것들은 철기맹의 그것들과 차원이 달랐다. 

화산 장문인, 천검. 천화진인.

화산파의 천화진인이 직접 나선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러나. 철기맹이 자랑하는 철갑기마대는 그 두 번의 싸움으로 복구가 불가능한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탈명마군 장요도 그 즈음부터 철기맹과의 연을 끊어버리기라도 한 듯 나타나질 않았으니, 화산파의 파상 공세에 맞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것은 오직 철기군(鐵騎君) 탁무양 혼자만의 힘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백무림서 무림편

강호난세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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