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투투툭.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듯.
청풍은 명멸하는 정신 위로 차차 그 의식을 깨워 나갔다.
“크으.......”
처음으로 느낀 것.
고통이다.
온 몸의 혈맥이 정상이 아닌 양, 이곳저곳에 참기 힘든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뒤틀릴 듯, 내상이 심하다.
심한 만큼 깨닫는 사실 한 가지.
죽은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법.
아직까지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운기를........’
그 다음으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시나, 진기의 운공에 대한 것이었다.
자하진기.
사부님이 남겨주신 유산이다.
몸의 일부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는 기운.
청풍은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기를 도인하고 단전을 깨워 나갔다.
“정신을 차렸나.”
어둠 속.
들려온 목소리.
청풍은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순간적으로 알아채지 못했다. 들어 보긴 했으되, 생소한 목소리다. 이렇게 듣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누군가.......구해주었다는 뜻이다. 헌데.......!’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그 홀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상황이다. 쏟아지는 돌덩이와 암기, 치솟는 불기둥, 정신을 잃은 마당에 조력자가 없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으리라.
“정신을 차렸으면, 어서 내력을 회복하는 편이 좋을 거다.”
“!!”
생명의 은인.
청풍은 비로소 알아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암기의 비 속에서 휘날리던 장포자락.
어째서 이 사람이 그를 구해준 것인가.
청풍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 분간하기 힘든 윤곽을 파악하려 애썼다.
“놀라는 것은 나중에 해도 괜찮다. 서둘러. 이제 버티기 힘들다.”
자하진기를 끌어 올려 안력(眼力)을 증대시킨 청풍은 두 번째로 놀랐다.
그 사람의 정체보다 더 놀라운 것.
철탑처럼 버텨 선 위 쪽에.
거대한 돌덩이가 얹혀져 있다.
무너지던 전각의 기둥과, 기왓장, 그 모든 것이 얽혀 있는 엄청난 무게를.
혼자의 몸으로 짊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어째서........당신이.”
수려한 얼굴.
짧게 깎은 수염.
그곳에 버텨 청풍이 깔려 죽지 않도록 만들어 준 자.
흠검단주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두르라니까.”
다시금 재촉하는 흠검단주의 한 마디에, 청풍은 모든 의문을 접어 두고, 재빨리 가부좌를 틀었다.
둘러본 눈.
나동그라진 적사검이 보이고, 바로 옆 땅에 박힌 청룡검이 보였다.
‘내력을 빨리 회복하려면.’
이어지는 생각이다.
손을 뻗어 청룡검 검자루를 잡았다.
신검이 지닌 기운을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화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목기가 흘러든다.
백호검의 금기처럼.
혈맥을 타고 올라, 단전으로, 그리고 다시 목기가 머무르는 장기, 간(肝)과 담(膽)으로 기운차게 뻗어나갔다.
자하진기에 더불어 목신운형 구결을 떠올렸다.
자하진기는 모든 기운이 샘솟는 근원(根源)이 되고, 목신운형은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지류(支流)가 되었다.
치유의 내공이다.
탁기를 제거하고, 손상된 혈맥을 이어 나간다.
경황 중에 잡고, 싸우는 데 썼기 때문에 미처 알 수가 없었던 청룡검의 진가다.
각기 다른 신검의 특성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후우우우우.”
평소보다 배 이상 증대 되어 있는 회복력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에 내상이 심했음인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평소 내력의 이할 정도를 복구할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된다.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없는 수준, 청풍은 온 몸의 근육을 한번씩 당겼다 펴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회복하는 것이 좋을텐데.”
흠검단주의 말.
청풍은 어둠 속을 훤히 볼 수 있는 자하진기의 안력을 지니고,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방이........!’
모든 방향이 막혀 있다.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반경 일장이 채 되지 않았다.
툭! 투투툭! 투툭!
아까부터 들리고 있었던 소리.
돌가루와 나무 부스러기가 계속하여 떨어지는 중이다.
절묘하게 떠받치고 있는 흠검단주가 없었더라면 모조리 매장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굉장하다.
인간의 육신으로 어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도 정상이 아닌 몸으로.
청풍은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실감했다.
흠검단주의 몸 곳곳에는 미처 막지 못했던 암기들까지 박혀있는 상태였으니.
무너지는 건물을 떠받치고 서 있는 내력, 초인(超人)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살려 주었느냐고?”
쿠쿠쿠. 쿠르르륵.
한 움큼씩 쏟아지는 건물의 잔해들이 있었다.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
흠검단주가 그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이것을 보라고. 그런 것을 듣기보다, 빠져 나갈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야.”
파 묻혀 죽게 된 상황인데도, 여유롭기 짝이 없는 표정이다.
굉장한 남자다.
무공 이상의 인품, 눈에 새겨 마음에 박아 놓을 모습이었다.
“저 위 쪽으로 잘 뚫으면 나갈 수 있을 법도 한데. 하지만, 단숨에 부셔버리고 나가려면, 지금 그 정도 내력으로는 힘들어.”
“.........”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아 두었다.
흠검단주가 가리키는 쪽으로 발을 옮겨 보았다.
고개를 들어 위쪽을 보았다. 얼기설기 부서진 잔해 사이로 외부의 공기가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외부와 이어져 있다는 것.
하기사 바깥의 공기가 들어오고 있지 않고서야, 이 두 사람이 살아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뚫고 나갈 길.
청풍은 천장을 올려 본 자세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흘러 들어오는 공기. 어디서 어떻게 들어오는지. 미세한 흐름을 파악하여 꿰뚫을 방도를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조금 더.......버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 눈을 뜬 청풍이다.
흠검단주가 말했듯, 지금의 내력으로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더 회복을 해야 한다. 단숨에 뚫고 나가기엔 현재 몸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글쎄. 버틸 수 있을까.”
농담처럼 말하는 흠검단주였다.
멋진 사람이다.
청풍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럼. 버텨 주십시오.”
흠검단주의 어투를 따라하듯, 가볍게 발하는 한 마디다. 두 사람 모두.
어둠 속 생사의 경계에서도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흠검단주의 평상심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청풍 그 자신도 그처럼 강인해져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지.
자하진기를 휘돌리며.
계속하여 내력을 끌어 올린다.
회복과 축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청풍.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끝에, 흔들리는 흠검단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아직인가. 이제 한계야.”
한계.
청풍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힘을 비축해 놓으려는 것인가.
완전한 몸 상태 이상으로 내력을 키우려고 하는 듯, 운기가 정점에 오를 시간이 지났는데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쿠륵. 쿠구구구구.
흠검단주의 어깨 한 편.
기둥으로 짐작되는 돌덩이 하나가 한 치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위험하다.
초인의 능력도 결국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그러고도 한참 더 지난 후에야.
청풍이 그 몸을 일으켰다.
“가능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악의 경우, 저 홀로 빠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좀 더 서두르지 그랬나. 너무 늦었어. 후후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받아들이는 흠검단주다.
“그렇다면. 이 강의검을 들고 가라. 생애를 함께해 온 벗이다. 신량, 조신량에게 넘겨 줘. 흠검단을 이어 받으라 전해주어라.”
죽음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일생을 후회 없이 살아온 남자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하지만.......”
“어서. 가져가.”
허리로 고개를 내려 보는 흠검단주의 눈빛.
어찌 그것을 거절할 수 있으랴.
청풍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흠검단주의 허리에서 곧바로 강의검을 풀어내 허리춤에 묶어 놓았다.
“그럼.”
청풍의 눈.
흠검단주의 눈이 어둠 속에서 부딪쳤다.
교차되는 두 남자의 눈빛.
결국 등을 돌리는 청풍이다.
오른손에 적사검. 왼손에 청룡검.
온 몸의 내력을 모아 발산하는 그의 두 손에서 두 자루 희대의 명검들이 긴 검명을 울렸다.
웅웅웅웅웅.
끌어올려.
내 쏜다.
땅을 박차는 것은 금강호보.
터어엉!
청풍의 몸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치솟았다. 퀴유우웅!
꽈과광!
적사검, 금강탄이 머리 위의 돌덩이를 부셔 버린다.
이어지는 것은 청룡검.
쏟아지는 파편과 돌조각에 청룡검의 검격이 청풍의 위 쪽으로 면밀한 방어막을 둘러쳤다.
콰콱! 파파파파파파.
청룡검이 막아주니, 금강탄을 연환으로 내칠 수 있다.
떨어지는 돌덩이를 또 다시 박차고, 다시 한번 적사검을 내 뻗었다.
꽈아앙!
폭발처럼 일어나는 굉음이다.
앞으로 내 쏘는 반탄력을 받으면서, 풍운용보를 펼친다.
한 마리 창룡이 꿈틀거리듯, 흘러나오는 내력을 분산시켜 속도가 줄어드는 것을 막았다. 벽을 찍어 금강호보, 청룡검이 또 한번 뻗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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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일이 고됩니다.
자칫하면 내일은 글을 못 올릴 수도 있겠어요.
무사히 넘어가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
그나저나 서버 이전은 아직도 안 되었는지.
삐걱삐걱 대네요.
어제 부로 모처럼 1권의 전체적인 수정이 끝났습니다.
아마......많은 부분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으실 텐데요.
게시판이 팍팍 뜨는 시간 대를 잘 맞춰서, 조만간 수정본을 올리겠습니다.
난데 없이 비도 내리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모두들 건강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