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이것이다.
이것이 육대세가의 무서운 점이다.
구파가 말하는 명분과는 전혀 다르다. 주는 만큼 받고, 정확하게 대가를 치루겠다는 그 얼굴에는 오직 당당함만이 자리하고 있다.
협(俠)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다고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상도(商道)에 가깝다고 할까.
정도(正道)는 정도이되, 분명한 계산이 함께하는 정도였다.
“굉장하군요. 이것이 황보세가라는 것입니까.”
은연 중에 드러나는 기파(氣波)와 무용(武勇)이다.
필요에 따라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 강호의 무수한 가문들 중에서도 정점에 올라 있다는 육대세가로서 지니는 자신감이었다.
“받아들이겠는가. 아닌가.”
협상의 여지가 없는 순간이다.
상대를 떠 보는 것도, 기색을 살피는 세심함도 찾아볼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넣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막무가네. 그러나.......”
장현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부(否).”
황보가의 이야기를 거절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이다.
“제안은 받아들이기가 불가하외다.”
어차피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 질질 끌어서 좋을 것은 없는 것이다.
육대세가가 강하다?
황보세가 하나의 눈치를 보기에는 개방 후개의 자리가 아깝다. 팔 다리가 멀쩡하지 않고, 황보가 정예들에 무력이 모자란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인 공이 얼만데, 여기까지 목숨을 잃은 개방 방도가 몇인데, 그것을 송두리째 넘길 수야 없었다.
“불가한다. 재미있군. 그 몸으로도 항룡십팔장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본색을 드러낸다.
역시나 그렇다.
장현걸은 알고 있다.
이 황보가는 또한 다른 오대 세가와 다르다.
육대 세가 중 가장 무례한 가문. 강호에는 정대한 육가로 알려졌으나, 음험한 일에 가장 손을 많이 대고 있는 세가가 바로 황보세가다.
그가 이 석가장에 쓴 힘을 차치하고서라도, 손을 잡기가 꺼려지는 세가가 바로 이곳 황보세가였다.
“항룡은 무적이오.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부상자를 상대로 손을 쓸 만큼 철담(鐵膽)의 명예가 알량하지는 않을 테지요. 개방 방도들의 수천 자루 타구봉에 맞아 죽고 싶다면 어디 한번 손을 써 보시든지.”
“겁이 없군.”
당장이라도 출수를 감행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공기가 사위를 채워 나갔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한 일.
겉으로 보기엔 그렇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황보세가의 최고 실세.
그리고, 강호 최대 방파 개방의 후개가 발하는 말이다. 두 거파가 실제로 싸움이라도 벌인다면, 그것은 곧, 강호 전체가 휘말리는 대 이변을 의미한다.
오랜 세월동안 서서히 예고되고 있던 일들.
강호의 질서를 공고히 해 오던 구파 일방과 육대 세가 사이의 엷어진 결속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어쩔까. 해 볼텐가.”
호안철담, 황보고의 무기는 두 주먹이다.
황보세가 정예 무인들의 무기 역시 그들의 권각 뿐. 출수 준비가 따로 필요치 않다. 언제나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갖추어진 고수들, 타구봉을 꺼내 들기 시작하는 개방 방도들의 전신에서 강한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말을 끝까지 들으셨어야지.”
당장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 때.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어투로 입을 여는 장현걸이다.
장현걸은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사태를 악화시킬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가 지닌 천재라는 칭호가 용납지 않는 일이다. 한 순간 감정싸움으로 최악의 사태를 빚어냈다면 삼절신룡이라는 호칭 역시 잘못 붙여진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불가하다는 것은 주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줄 것이 없다는 뜻도 같이 가지고 있기 마련이오. 보검의 향방은 나도 모른다는 말이오.”
장현걸.
신룡(新龍)의 눈이 패력의 호안(虎眼)과 부딪쳐 불꽃을 튀었다.
허실을 파악하는 듯.
굳어진 철담, 황보고의 얼굴에 무서운 빛이 감돌았다.
“자고로.”
궤짝을 다시 들어올리는 황보고. 그가 씹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달변을 구사하는 자. 거짓이 많은 법이다.”
믿지 않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장현걸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자임을 잘 알고 있을 터.
가장 많은 것을 쥐고 있는 자. 이 사건의 열쇠다. 황보고가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거짓은 없소. 이 쪽에서도 알고 싶은 일이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장현걸.
그러나.
그 때 나타난 또 한 무리의 집단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과연 그럴까. 개방의 후개여.”
특이한 신법.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는 열 명의 도사들이 있었다.
질 좋은 도복들을 잘 차려입고, 허리에는 태극반을 찼다.
기묘한 기운을 온 몸에 둘러친 자들, 무공(武功)보다 술법(術法)에 능한 도사들이었다.
‘제길. 모산파! 생각하지 못했어.’
어렵던 상황에 또 하나 고려하지 못했던 틈이다.
위험 요소. 모산파.
구대 문파들 중, 그 세가 약한 축이라고는 해도, 구파는 구파다. 약하다는 것도 다른 구파의 힘이 워낙 강해서일 뿐,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황보세가 못지않은 위협이었다.
“거기서 본 것이 많았을 텐데.”
꿰뚫듯 바라보는 시선. 장현걸을 급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정신을 보호했다.
심여술(心濾術).
불가에서 타심통(他心通)이라 말하는 술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모산파 술법의 하나였다. 그 정도까지 해 온다는 것. 장로급이 틀림없었다.
모산파 장로. 심여술을 쓸 정도의 고수에다가, 목까지 내려온 수염에 청관(靑冠)을 올려 쓴 장로라면 한 사람밖에 없다.
벽라진인(碧羅眞人) 정수심(丁洙沁).
강동 지역 술사들 중 열 손가락에 꼽힌다는 술가(術家)의 명인(名人)이 그였다.
“모산파, 벽라진인이시군요. 그 고명한 명성 익히 들었습니다.”
장현걸이 포권을 취했다.
벽라진인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단숨에 알아본다. 과연 개방의 후개로구나.”
구파와 일방은 한 식구다.
황보고를 대하던 태도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 육대세가보다 면밀한 친분관계를 뜻함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그도 그렇지 않았다. 추궁하듯 이어지는 벽라진인 정수심의 말. 장현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후개여. 그 뛰어난 영혼에게 묻고 싶다. 강 도우(道友)를 직접 보았을 터. 그의 죽음이 느껴지는 지금, 나는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듣고 싶다.”
결국은 황보세가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바다.
모산파.
상청파라고도 불리는 모산파의 도력은 여타 도문(道門)들의 그것과 특성을 좀 달리 한다. 술법에 특화된 그들의 능력은 강남의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았으며, 벽사(?邪)와 지복(祉福), 풍수(風水)와 감여(堪輿)에 관련된 일로 성세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민초와 귀족들 사이로 파고들어 힘을 키워가는 문파.
도가면서도 속가적인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재물의 흐름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뜻. 장현걸은 모산파 벽라진인의 말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며, 끝까지 남아 있던 의문이 풀려지는 것을 느꼈다.
‘모산파. 그렇다. 석대붕은 모산파를 불렀다. 황금을 대가로 끌어들였어.’
모산파는 재물을 받고, 술법을 판다.
사람들의 복락을 축원하는 부적을 만들고, 제사(祭祀)나 장례(葬禮)를 주관하면서 민초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며 복을 비는 것.
그들이 하는 일이자, 그들의 주 수입원이다.
재물을 받고 능력을 주는 것은 천독문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들이 파는 것은 독(毒)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安靖)인 것이었다.
‘모산파를 끌어들여 할 수 있는 일. 청룡검의 제어다. 틀림없어. 석가장주가 청룡검을 쥐고도 그것을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모산파의 부적술 덕분이었을 것이다. 강도장, 그가 휘말렸던 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였겠지. 석가장주가 끝내 광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조각들이 맞아 떨어진다. 확실해.’
유추.
진실을 짚어나간다.
본 적 없었던 것임에도 사실처럼 추측해 내는 재능, 장현걸이 지니고 있는 천재성의 하나였다.
“내가 아는 것은 많지 않소. 나 역시 이 곳에서 얻은 것이 없는 피해자일 따름이오.”
대부분을 알아채 나가면서도 장현걸은 결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십 할 중 구 할을 숨기고, 남은 일할 중 구 푼을 속인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일 푼뿐이다.
적을 상대하는 방법, 당장은 싸우지 않더라도 언제든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다. 그런 이들 앞에서 아는 바를 다 드러내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개방의 후개여.”
황보세가에 이어, 모산파까지.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가.
벽라진인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깃들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길. 곤란하게 되었어.’
수위를 넘어섰다.
이제부터는 살얼음이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시점에서, 모든 이들의 표적은 장현걸이 될 수밖에 없다.
장현걸.
석가장의 참사에서 살아 나온 자다.
청룡검과 적사검 뿐 아니라, 석가장에 있었던 팔십 이 자루 보검들의 향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그에게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달려들 수밖에 없다.
거기서 살아 나온 이가 장현걸 하나는 아니라 하여도.
개방의 후개로서 가지고 있을 사건의 열쇠들이 탐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 모습을 보시오. 이 꼴로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겠소.”
팔, 다리에 댄 부목을 치켜들었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장현걸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난관.
황보세가에 모산파.
추가될 성혈교, 또는 숭무련. 거기에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림사까지 더해지면, 장현걸에겐 운신의 여지가 없어진다.
하나같이 쟁쟁한 곳들 뿐.
후개로서 빌려 쓸 수 있는 개방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 해도,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하나 둘이면 뻗대어 보겠으되, 이제는 불가능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
미리 말하는 것이 좋을까.
차라리.
아는 바를 가르쳐 주고, 경쟁자들의 한 축으로 내려오는 편이 좋을련지도 모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르고 있던 때.
바로 그 때였다.
탁탁탁탁.
달려오는 이. 오결 제자다.
곁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이는 제자.
보고를 듣는 장현걸의 두 눈이 번쩍 기광을 발했다.
‘안 쪽에서 폭음(爆音). 생존자가 있는 것 같다라........’
직감적으로 느낀다.
솟아날 구멍이 생겼음을.
“한 가지. 흥미로운 보고가 들어왔소.”
주위를 환기시키는 장현걸이다.
집중되는 시선.
“이 아래. 석가장이 파 묻히듯 무너진 것은 보시다시피, 지하에도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오. 땅 밑에 길고도 넓은 지하 통로가 건조되어 있었다는 말이오. 무엇인가 있다면 그 안 쪽이겠지. 헌데, 지금 또 그 안 어딘가에선가 올라 온 생존자가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황보세가.
그리고 모산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가 솔깃할 수 밖에.
장현걸이 덧붙이는 말.
“모두 가 봅시다.”
타구봉을 지팡이 삼아 먼저 앞장섰다.
‘이대로 모두의 표적이 되어줄 수야 없지.’
홀로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니까.
살아 나온 자가 누가 되었든.
덮어 씌운다.
장현걸. 그는 할일이 많은 사람. 거파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