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아니. 숲이 아니라 산길로 가!”
흠검단주의 외침.
먼저 방향을 꺾어 올라가는 산로(山路)로 향하니, 청풍도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의아함이 섞인 청풍의 표정을 돌아 본 흠검단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은 구화산 지장보살의 참배기간이다. 사람들을 이용하자!”
“사람들을?”
“여하튼 따라와!”
쐐애애액!
달리는 그들.
숲 사이로 밝혀진 연등(蓮燈)들이 보였다.
연들 아래로 어른어른 움직이는 그림자들.
굉장한 숫자다.
구화산 지장보살의 법력을 기리기 위해 구화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는 불자(佛者)들이었다.
파사사사삿!
발밑에서 스쳐지나가는 잡풀들 소리가 시원했다.
뒤로 따라붙은 수많은 강호인들.
웅성이며 돌아보는 불자들이다. 흠검단주가 쏘아져 나가며 쩌렁쩌렁, 엄청난 목소리로 외쳤다.
“석가장을 박살 낸 적도(敵徒)들이오! 이번에는 지장사 불당을 무너뜨리겠다 하오! 모두 막읍시다! 부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게요!”
구화산 바로 밑, 여기까지 와 놓고 지장촌 석가장의 참사를 모르는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다.
불법의 무한함에 흠뻑 젖어들고자 온 사람들일진저.
부처님이 지켜 주신다는데 두려울 것이 무에 있으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드는 흠검단주와 청풍이다.
진위를 분간할 능력이 없는 민초들이 우왕좌왕 길을 비키고, 뒤따라오는 강호 군웅들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거짓, 거짓말이다!”
“저놈들을 잡아!”
“우리는 아니다!”
외치는 강호인들이나, 계속하여 터져 나오는 흠검단주의 일갈은 강호인들의 외침을 먹어버리기에 충분히 컸다.
“불당이 위험하오! 적도들을 막으시오! 강호의 무리들이오!”
급박한 상황에서는 구구절절, 중구난방으로 소리치는 것보다, 단순한 고함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혼을 빼 놓을 정도로 터뜨리는 흠검단주의 목소리.
굉장한 선동력을 지녔다.
홀리기라도 한 듯. 수십, 수백의 불자(佛者)들이 파도처럼 몰려나왔다.
무공도 모르는 민초들이 둘러싸며 길을 막아서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사이한 방파의 악도(惡徒)들이었다면, 민초들이 막아서든 말든, 베어 넘기며 달려들었겠지만, 황보세가나 모산파나 어찌 되었던 정파(正派)를 표방하고 있는 이들이다. 무공을 전개할 수도 없으니, 돌파할 계책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여 어쩌지를 못했다.
“갈!”
머뭇거리던 황보세가. 황보고다.
그가 결단을 내리기라도 한 듯, 기합성을 내지르더니, 앞에서 막대기 하나를 휘두르는 남자 하나를 잡아 확 내던져 버렸다.
우당탕!
사람들이 휩쓸려 쓰러지고, 뒹굴었다.
일순간 겁을 먹었는지, 멈칫 굳어지는 불자들이다.
“본색을 드러내는군! 하지만 괜찮소! 부처님이 지켜주신다오!”
시의적절한 외침이다.
황보고.
사람을 집어던졌지만, 몰려드는 불자들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을 뿐, 그들을 다치거나 죽게 하려고 한 짓이 아니다.
공중을 날아 던져졌으되, 내력을 사용하여 다치지 않도록 만들었다.
땅을 뒹굴다가 주섬주섬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남자.
그 광경은 꼭 흠검단주의 말처럼 부처님이 지켜 주었기에 멀쩡히 일어날 수 있는 듯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내력을 사용하여 다치지 않게 한 황보고의 의도까지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우민(愚民)들이로다! 모두 정신을 차리거라!”
모산파 벽라진인이 손을 휘두르며 벽사(?邪)의 주(呪)를 외운다.
부적(符籍)을 꺼내드는 벽라진인.
흠검단주는 그것마저도 통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모두 아미타불을 외치시오! 저 자는 정신을 빼앗는 요술(妖術)을 부리는 악적이오!”
아미타불, 사람들이 내뿜는 신앙의 믿음이 모산파 도교술법의 공능을 차단한다.
굉장한 일이다.
무(武)에 이어지는 기지(奇智).
민초들을 뛰어넘든, 다른 길로 우회하든, 금세 뚫려버릴 인(人)의 장벽이건만, 어디서 그 정도 시간을 벌겠는가. 머리를 쓰는 것이 신기(神技)에 이른 흠검단주다. 혀를 내두르고도 모자를 정도였다.
파사사삭!
굽어지는 산길.
흠검단주는 쫓아오는 자들의 시야가 가려지는 위치에 이르자 이내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부턴 숨어서 이동한다.
민초들을 이용한 것은 그야말로 임기응변, 이 정도 통한 것만으로도 요행이라 할 만하다. 같은 수를 쓴다고 다시 통할 리가 없었다.
첨벙 첨벙!
수풀을 뚫고 이른 곳.
산속에 흐르는 개울에 발을 담그고 이동한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린 듯.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개울을 통하여 움직이던 기억. 정검대에 쫓길 때, 서영령이 보여주었던 술책이었던 것이다.
쿨럭!
얼마 가지 않아, 들려오는 기침소리.
흠검단주의 그것이다. 개울물 위에 뱉어내는 핏덩이가 거무죽죽했다. 물에 휩쓸려 아래로 흩어지는 선혈에 흠검단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련에서 뛰쳐나간 그 녀석, 쫓아다닐 때. 그 녀석이 곧잘 쓰던 수법이지. 항상 고민했었어. 개울을 타고 올라가야 되나. 아니면 개울을 따라 내려가야 하나........”
울컥.
한 번 더, 피를 토해낸 흠검단주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청풍이 급히 움직여 흠검단주를 부축했다.
“부처님 앞에서 함부로 거짓말을 하다니. 천벌을 받은 게야. 후후후.”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럴 수 밖에.
그 몸으로 이만큼이나 경공을 전개했다.
그 뿐인가. 거기다가 내력을 다해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으니, 곧바로 쓰러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꼴사납군.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상태라니.”
청풍의 옆으로 기대어 늘어진다. 결국 정신을 잃고 만 것.
한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상태였으니.
청풍이 어깨로 그를 버티고 재빨리 흠검단주의 장포를 찢어 밧줄 대신의 천 줄기를 만들었다.
꾹. 꽈악.
큰 체구지만 어떻게든 등 위에 업어 묶었다.
‘검집이 필요하겠어.’
검 두 자루. 하나같이 예리한 보검이라, 어디에다 대충 매달아 놓을 수도 없다. 계속하여 들고 다니려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촤악! 촤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청풍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따라 올라오는 자들.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아니면 둘 나뉘어 움직이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것은 추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죽지 마십시오.’
등 뒤에 미약한 흠검단주의 숨소리를 느끼며, 몸을 날렸다.
지는 해.
어두워지는 숲속으로.
숨어드는 청풍의 뒷모습. 급박한 상황임에도 은밀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는다. 나직한 밤 새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만이 어울리지 않게도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저 쪽 방향이야!”
‘잘도 알아채는군.’
멀리서도 가깝게 들리는 고함소리다.
심리적인 압박을 위하여 일부러 큰 소리를 치는 것인지.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마음을 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파사사사삭!
한참동안을 더 뛰었다.
위쪽으로. 다시 옆의 능선을 따라.
몇 개의 숲과 개울을 지났다.
‘아직도다. 따라오고 있어.’
그렇게나 은밀하게.
익숙했던 추격전을 되살리며 그 누구라도 뿌리칠 수 있을 만한 경로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흔적을 최대한 줄이고 있음에도 따돌리지를 못했다. 제아무리 추적의 달인들이라도 이것은 지나지다. 뭔가 이상했다.
“그 쪽이 아니다!”
‘또.......!’
갈림길이다.
들려오는 외침에서는 확신이 느껴졌다. 흔적을 되짚어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설마.......술법?!’
그렇다.
추적술과 무공만을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되었던 것을.
상대는 지금까지처럼 단순한 무인들 뿐이 아니다.
도술을 달인들인 모산파가 있다. 세상에 이름난 무공절기가 몇 가지 없음에도 구대 문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모산파. 그 이유가 술법이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따돌리기 위한 잔재주는 소용없다.
흔적을 지우거나 이중으로 만들면서 현혹시키는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머리를 쓸 때가 아니라는 뜻.
방법은 하나다.
무공으로 따돌린다.
금강호보. 자하진기.
경공술을 믿어보는 것이었다.
‘속도를 올린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겠어.’
텅! 파아아아아.
땅이 움푹 패이든, 나무들의 잔가지들이 부러져 나가든 개의치 않았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본다.
문제는 내력.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술법이 통하지 않을 범위까지 벗어나고 봐야 했다.
텅! 터텅!
나무들이 굉장한 속도로 확대되고, 멀어졌다. 가로막는 수풀들은 숫제 적사검을 휘두르며 뚫어내 버렸다.
길이 있든 없든.
무조건 앞으로 쏘아진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파삿! 사사삭!
얼마나 더 왔을까.
청풍은 호보의 속도를 줄이면서 뒤 쪽의 동향을 살폈다.
일단 거리를 벌리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들려오던 외침도, 따라오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흔적을 많이 남겼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야.’
슬슬 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석가장에서 입었던 내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에 치유될 수 없는 상세.
청풍은 등 뒤에 업은 흠검단주의 무게까지도 부담이 되고 있다 느끼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제부터는 다시 흔적을 없애야 해. 다만 모산파가 문제다.어떻게 따라오는 것인가, 그 수법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커.'
술법에 대해 무지하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을 알아야 피해내는 방법도 가늠할 수 텐데, 아무것도 모르니 대중이 잡히질 않았다.
‘술법. 도술........막는 방법. 부처. 불법..........’
흠검단주가 산길에서 불자들을 부추킬 때를 떠올렸다.
아미타불, 힘 없는 불자들의 외침에 부적술이 힘을 잃던, 신비하기 짝이 없었던 광경.
‘그래. 방법을 몰라도, 쓰지 못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물꼬가 트인 듯.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다.
막히면 돌아서 상상하라. 언제나 무력만으로 해결 할 수는 없다. 서영령이 그랬고, 흠검단주가 그랬으며, 청룡검을 가르쳐 준 천태세가 그랬듯이.
난국을 쉽게 돌파하는 데에는 지략(智略)이 우선인 것이었다.
‘불자들이 많은 곳. 구화산제가 열리고 있는 사찰.......불교의 불전(佛殿)이라면.......아무리 모산파라도 그런 곳에서까지 함부로 술법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눈에 띈다는 것이 문제인데.......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한다.’
땅을 박차고,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림자로 보이는 사찰, 산길을 따라 줄줄이 걸려 있는 연등이 보였다.
달려가는 청풍.
본디, 사물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리 있기 마련이지만, 목표를 확고하게 고정시킨 청풍의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다가오고, 다가오고, 다가온다.
아미타불.
그 야밤까지도 들려오는 독경(讀經)소리.
구화산 화성사(和成寺)다.
오랜 역사, 고찰(古刹)의 전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청풍은 그 근역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었다.
아직까지도 참배를 행하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기에는 불가능했다. 두 개의 보검을 들고, 한 사람을 들쳐 업은 모습이 지나치게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사사사삭!
화성사 돌담을 끼고서 그 앞에 펼쳐진 대나무 숲을 헤치고 끊임없이 달려 나갔다.
위로 뻗은 대숲길. 바위를 박차고 올라 꺾여지는 지대에 이르러 아래쪽을 굽어보았다.
‘오고 있군. 하지만 멀어.’
추격자들.
청풍의 밝은 눈에 사찰 측면 멀리로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는 음영들이 비쳐들었다. 술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주효하긴 했는지, 가닥을 놓친 움직임이다. 청풍의 향방을 당장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들. 경황 중에 쥐어 짠 생각이 다행히도 통한 모양이었다.
‘사찰의 뒤로 돌아가자.’
청풍으로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찰. 화성사.
청풍은 이 커다란 사찰을 끼고 돌아서 뒤쪽 능선으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능선 아래쪽으로, 그 다음엔 산 속의 숲과 계곡을 이용하여 벗어나는 것이다.
휘이익! 사사삭!
연등 불빛을 뒤로 하고 달렸다.
지장왕, 지장보살을 경배하는 불경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과연.......’
엄숙한 불경소리였다.
처음에는 그냥 넘겼지만,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음성들이다.
울려 퍼지는 불법의 탐구였다.
화산파. 도가(道家) 화산에서 노장(老莊)을 배웠던 청풍이지만, 이렇게 흘러나오는 불경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마저도 불력(佛力)에 흠취될 것만 같았다.
그토록 충만한 불법.
이런 곳에서 도가 술수를 쓴다는 것은 그 누가 되어도 어려울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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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충분한 숙면을 취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큰일입니다.
할일을 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말이지요.-_-a
게다가.
오늘은.....
설봉님의 사자후를 보고 말았습니다.
큰일이네요. 어찌 3권을 기다릴지.^^
설봉님.
아주 아주 오래전.
암천명조가 나왔을 때 부터.
설봉님 글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가장 재미있게 본 글이라면 단연 산타, 그리고 포영매를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이 더해지는 글들입니다. 특히나 포영매가 그렇지요.
오늘.
거기에 사자후를 더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력하게 들고 있습니다.
보고 있자면, 더 이상 보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더 이상 붙들고 있다가는 내가 쓰는 글이 흐트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다른 사람 글에서 그런 느낌은 받아 본 것은 그야말로 몇 년만의 일입니다. 아직 멀었으니, 더욱 더 분발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듭니다.
더불어......
많이 많이 달아주신 댓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마우스 휠을 돌리며 읽어가는 댓글에 일주일간 어려웠던 일들이 모두 다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더 좋은 글로 보답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써 보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