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던 속도를 줄이고,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가졌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청풍은 경건한 이 사찰의 공기에 전염되기라도 한 듯, 한참을 그렇게 조용히 발을 옮겨 나갔다.
화성사 뒤편으로.
마침내, 연등 불빛이 아른 아른 멀어지고 있을 때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어두움이 깔려있는 깊은 숲 속에서.
청풍은 또 다시 만났다.
마치 을지백처럼.
언제 어디서 나타나고,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는 사람.
녹청의 도포(道袍), 청색 도관의 백발 노인.
천태세가 거기에 있었다.
“이쪽으로 오라.”
또 한층 더 성장한 청풍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따라오라는 천태세.
청풍은 지체 없이 천태세의 뒤를 쫓았다.
‘풍운용보........!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천태세의 신법은 그가 가르쳐준 풍운용보의 보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나아가는 것은 금강호보, 고정관념이었던가. 천태세의 신형은 호보가 아닌 용보를 밟고 있음에도 나아가는 속도가 대단했다.
생각을 열고, 한계를 두지 말 것.
천태세는 그 사실을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안으로."
이끌려 따라간 곳은 구화산 중턱의 깊은 계곡이었다.
계곡 위쪽, 잘 보이지도 않는 동굴.
천태세는 거침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거처라도 되는 양, 들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 남자는 저 쪽에 눕혀 두어라.”
그렇게나 좁아 보이던 입구와는 달리, 동굴 안 쪽은 상당히 넓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십 명이 들어서도 충분할 것 같은 크기였다.
“그대로 더 움직였으면 안 좋았을 것이니라. 지금은 괜찮아. 스스로 회복할 수 있겠어.”
보는 것만으로 흠검단주의 상세를 완전히 파악해버린 천태세다.
고개를 끄덕인 청풍.
묶었던 흠검단주를 풀러내 눞여 놓고 나자, 굉장히 무거운 짐을 덜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들든다.
묘하게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
이제는 좀 쉴 수 있을까.
온 몸의 기운이 쫙 빠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
지친 눈으로 동굴 안을 살펴보는 청풍이다.
안 쪽 벽. 벽화(壁畵)가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부처님을 그린 듯한 벽화였다. 승려가 수행을 하던 장소인 모양이었다.
“이곳은........?!”
청풍이 천태세를 돌아보자, 천태세가 웃음을 지었다.
천태세도 청풍처럼 곳곳을 훓어본다.
그러더니, 이윽고 감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곳도 오랜만이다. 구자산. 여기까지 이르다니. 천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야.”
역시나 그런가.
이 천태세는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천태세.
불화(佛畵)가 그려져 있는 석벽 앞에 섰다.
“여기 그려진 불화(佛畵)가 누구를 그린 것인지 알겠느냐?”
안력을 돋구어 본 청풍이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마모가 심한 그림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온전한 그림을 본다한들, 어차피 알아볼 수도 없었겠지만.
“불가(佛家)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그렇겠지. 화산은 도가(道家). 다른 믿음을 지닌 만큼.”
궁금증을 떠올리는 청풍의 얼굴.
천태세가 계속하여 말을 이어나갔다.
“이 벽화. 지장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도리천(도利天)에서 석가모니의 부촉을 받고 매일 새벽 항하사의 선정에 들어 중생의 갖가지 근기를 관찰하는 보살이지. 또한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륵불은 아직 도래하지 않는 시간에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해박한 지식이다.
천태세가 입은 옷은 분명 도포(道袍)의 형태.
스스로 도사가 아니라 하였었지만, 그렇다고 불가(佛家)의 인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교(佛敎)에 대해 이처럼 자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구자산. 오랜 옛날, 동방의 이인(異人)이 있어, 이곳에 대자대비 불법을 설파하니,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하였다. 광토(曠土)을 내달리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고, 동방 남쪽, 크지 않은 땅을 지니게 되었음에도, 민족의 대륙혼(大陸魂)은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지? 고귀한 신분으로 여기까지 왔던 것을 보면 말이다.”
갑작스럽게 흘러나오는 말.
대륙혼.
동방을 이야기 하는 천태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동방의 이민족(里民族), 중원인이 아닌 사람을 이야기 하고 있음에.
하지만........
이 순간 청풍은 묘하게도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뿌리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쉽게 자각하지 못하는가. 하기사 그럴 만도 하겠지. 홀로 알수 있는 것이 아닐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말해줄 때가 되었느니라.”
천태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한숨.
그가 지장보살이라는 그 벽화를 가리켰다.
“동방의 지장보살. 지금 열리고 있는 참배 의식은 이 동방의 지장을 기리기 위한 행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동방의 남쪽, 신라(新羅)라 불리던 나라이니라. 왕자(王子)의 핏줄로 이 대륙까지 건너와 중원인들의 등불이 된 생불(生佛)이었다.
천태세가 벽화에서 몸을 돌렸다.
청풍을 똑바로 바라보는 천태세.
그가 청풍에게 말했다.
“알아 두어라. 너에게도 그와 같은 동방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두근.
천태세의 목소리가 청풍의 영혼을 울렸다.
동쪽 나라, 청풍의 출신지. 사부님께 얼핏 들었던 말이었던가.
청풍은 어디까지나 중원인일진저.
나서 자란 환경, 쓰고 있는 언어, 몸에 배인 문화.
모든 것이 그가 중원의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천태세의 목소리엔 그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울림이 담겨있었다.
그것이 곧, 천태세의 말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 수 있다.
천태세의 말이 진실임을.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 청풍을 보며, 천태세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잊지만 않으면 되느니라.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만, 크게 지쳐 있구나. 이만 쉬거라. 차츰차츰 천천히 알아가도 될 것이니.”
끌어 오르던 마음이 따뜻하게 가라앉는다.
천태세의 말이 하나의 주문이라도 된 것처럼.
쉬라는 말 한마디에, 몰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오랜 싸움과 추격전으로 심신이 말이 아니다. 천태세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으며 청풍은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열어 두었다.
“이곳은 지장현신, 교각 승려의 법력이 깃든 곳이다. 누구도 찾기 힘들게야. 걱정하지 말고, 기력을 회복하여라.”
마음에 걸리던 마지막 하나가 씻겨져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결국.
두 눈이 감기고.
청풍은 조용한 어둠,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 들었다.
* * *
짹! 째잭!
가을 산, 동굴 안의 공기는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저절로 일어나는 자하진기가 없었더라면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때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비쳐드는 햇살에, 청풍은 퍼뜩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나......!’
천태세를 만났던 것이 꿈결 같기만 하다.
정말 꿈이라도 꾸었던 것일까.
천태세가 온데 간데 없다.
벽화 앞에 서 있던 천태세.
없다.
오로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흠검단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어났는가.”
흠검단주의 첫 마디는 그와 같았다.
마치 그가 이 동굴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한 어투였다.
완전히 회복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
청풍은 천태세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을지백이나 천태세나.
어차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들이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대해 고민해 보았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정신없이 잤군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다. 일단은.”
여전하다.
웃음을 자아내는 남자.
이런 점이 어쩔 때는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어쩐지 알 수 없다. 너무나 대담하고, 너무나 대범하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나쁜 상태인지는 도통 확인할 길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나저나........얼마나 지났는지.......”
발을 옮겨 동굴 바깥 쪽을 슬쩍 내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줄기줄기 끼쳐드는 햇볕이 따스했다.
밤을 꼬빡 지내고도 한참 더 지난 시간이었다.
산공기를 들이마시며 맑아지는 정신에, 청풍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추적해 오는 자들이 추가 인원을 동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군요. 다른 곳은 몰라도, 개방이 끼어 있으니, 만만치 않겠습니다. 서둘러야겠어요.”
황보세가.
모산파.
그들로서는 하루 만에 추격에 가담할 인원을 늘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개방이다.
언제라도 수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다.
산 곳곳을 샅샅이 뒤져 온다면,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경공. 펼칠 수 있겠습니까.”
“그럭저럭.”
“그럭저럭 정도로는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청풍이다.
사태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모습. 하지만, 흠검단주는 웃음으로 청풍의 말을 넘겨 받았다.
“안 된다.......역시나 그렇겠지?”
우스겟 소리일까.
도무지 조급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추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럭저럭으로 안 되면........”
흠검단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쉽게 쉽게 말해도, 서둘러야 한다는 청풍의 말에는 공감하는 눈치다.
그가 먼저 동굴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선을 다해 봐야지. 나가자구.”
바깥을 향해 목을 내밀고,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흠검단주가 가볍게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빠져 나왔다.
타탁!
몸을 날려 계곡으로 착지하는 청풍.
흠검단주가 계곡의 지형을 살피더니, 청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곳을 잘도 찾았군.”
천태세의 이끌림에 서둘러 움직이느라 미처 몰랐지만, 나와서 보니 흠검단주의 말처럼 누군가 숨어들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수색대가 이 앞을 지나쳤다 해도, 간단히 넘겨버릴 곳이다. 더욱이 어둠이 깔린 밤중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여하튼. 가자.”
흠검단주가 몸을 날리고, 이어 청풍도 땅을 박찼다.
바위를 뛰어 넘어 풀 숲 사이로 도약하는 청풍이다. 한 번, 뒤쪽 계곡을 돌아보면서. 청풍은 어제 밤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동방의 핏줄........’
천태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난데없는 이야기였건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 없어지질 않는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앞으로의 행보.
또는 이전까지의 행보에 있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가볍게 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이. 문제가 있다.”
한참이나 달리던 두 남자다.
흠검단주가 멈칫, 신형을 멈추고 청풍의 손에 들린 두개의 검을 가리켰다.
“그 두 검. 빛을 반사시키는 것이 심하다. 움직임이 노출되겠어. 아니, 이미 노출 되었는지도 모르지.”
내려다 본 청룡검과 적사검이다.
과연 그랬다.
흠검단주의 말마따나, 햇빛이 내려앉아 번뜩이는 검광(劍光)이 너무도 강렬했다.
그 정도라면, 멀리서도 아른거리는 휘광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든 광채를 가릴 필요가 있었다.
“곤란하군요.”
청풍은 잠시 동안 고민하다, 이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더니, 찢어 발겨 검신(劍身)을 둘둘 동여매었다.
두 자루 모두.
궁여지책으로 검광을 가리는 청풍을 보며, 흠검단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검집이 필요하겠어. 이왕이면 어울리는 것으로.”
맞는 말이었다.
청룡검이나 적사검이나.
검집들이 없다.
백호검 때에는 비슷한 크기의 검집을 하나 사와, 대충 맞추어 껴 썼었지만, 지금은 그런 궁색한 검집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또한 시급한 일.
흠검단주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두 눈에 기광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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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권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어찌 어찌 하다보니까 상당히 많은 분량을 써 버렸네요.^^
슬슬 드러날 것이 드러날 때가 되었고.
많은 것이 나타날수록, 청풍은 더욱 더 강해지겠지요.
ps. 그리고.....
표지 러프 작화가 나왔습니다.
내일 쯤, 다시 이야기를 드려서 시안이 나오는 대로, 독자분들께 평가 부탁드리
겠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