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사검을 잡고 있던 오른손.
움직인다.
광풍개.
타구봉에 눌려진 적사검에서 전해지던 청풍의 힘이 사라졌음을 느꼈을 때.
광풍개의 안색이 급변했다.
치리리링!
나온다.
호풍환우, 강의검!
세 번째 검이었다.
촤아악!
광풍개의 누더기가 길게 찢어발겨지고, 핏물이 선연하게 번져 나왔다.
“크윽!”
가슴에서 어깨까지.
얕지 않은 상처였다.
게다가 적사검이 가르고 지나간 곳은 용음수로 청풍을 잡고 있는 오른 쪽, 강철같이 잡혀 있던 용음수가 풀려나갔다.
파아아아.
자유를 얻은 청룡검이다.
길게 뻗어나갔던 강의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청룡검이 강력한 백야참을 뿜어냈다.
정신없이 물러나는 광풍개다.
한발 앞으로.
강의검이 빛살처럼 짓쳐 나가며 세찬 바람소리를 울렸다.
피리리리릿!
광풍개가 몸을 휘돌렸다.
창졸지간에도 타구봉을 되돌리며 방어초를 구사하는 광풍개.
그 순간, 금강탄과 같은 궤도로 나아가던 강의검 검 끝이 미묘하게 변화했다.
피릿! 파아아아아!
금강탄이 아니다.
더 강하고 빠른 검격.
백호무였다.
촤아아아아악!
또 한번 누더기가 찢어지고, 피가 튄다.
선연하게 뿌려지는 핏방울, 하늘을 수 놓으니.
마치 가을날 내리는 가랑비와 같아라.
바람을 부르고 핏빛의 비를 뿌리는 호풍환우, 백호무의 힘을 담은 강의검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거기서.......그런.......!”
두 어깨.
광풍개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강의검의 발검을 예측하지 못한 것.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니다.
실수라고 보기엔 청풍의 검격이 너무도 절묘했다.
처음부터.
적사검을 뻗어낼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에, 거기에만 정신이 팔린 광풍개다. 금강탄을 발출할 암시를 강하게 준 후, 적사검에만 신경을 쓰도록 만든 것이다.
광풍개가 그것에 반격을 해 올 것을 예상했고, 용음수에 왼손까지 붙잡혀 주면서 완전한 방심을 유도했다.
그 시점에서 강의검이 뽑혀 나오니, 그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놀림수 뒤의 노림수였다.
두 수 앞을 내다본 청풍.
전략(戰略)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 하겠소?”
치칭!
강의검을 되돌려 허리의 검집에 꽂아 넣었다.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가볍게 땅을 차 적사검을 튕겨 올렸다.
적사검을 오른손에 쥐고, 청룡검은 늘어뜨린다.
언제라도 두 개의 신검이 나아갈 수 있는 자세.
광풍개의 얼굴이 패배감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청풍이 걸어 나가 광풍개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꽤나 큰 키.
광풍개를 아래로 내려보는 청풍의 눈에, 범의 기상과, 용의 지혜가 담겼다.
“화산에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으며, 내 스스로 떳떳하오. 개방에도 마찬가지. 더 이상 나를 막지 마시오.”
한 자 한 자.
강한 어조로 발하는 말.
그대로 광풍개를 지나치는 청풍이었다.
싸움에선 진 광풍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가지요.”
청풍이 흠검단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유유자적 구경하고 있던 흠검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청풍의 뒤를 따른다.
사사삭.
다시금 타구진의 진형을 짜려는 개방도들이다.
하지만.
“그만. 길을 내 주어라.”
고개 숙인 채, 땅을 보며 입을 여는 광풍개의 목소리. 개방도들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깨끗하게 졌다. 그런 패배라면 구차한 모습을 보여선 안 돼. 길을 열어 줘. 봉양(鳳陽)지부(支部)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정도(正道)라는 것인가.
광풍개.
안휘성 북부 전체를 통괄하는 장로로서, 봉양지부의 제자들을 동원했던 모양이다.
그의 명령에 개방도들이 주춤 주춤 길을 트니, 청풍과 흠검단주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그들의 사이를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서서히.
누렇게 변한 들판을 가로질러 멀어지는 두 사람.
남겨진 개방도들 사이에 서늘한 가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질풍이 남기고 간 바람의 흔적.
더 이상 그 수중에 있는 검을 탐내기 힘든. 그런 질풍의 흔적이었다.
* * *
광풍개는 쫓아오지 않았지만, 개방의 추적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잊을 만 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들이다.
직접적인 싸움은 광풍개 이후, 두 번밖에 없었지만, 누군가 끊임없이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이라 할 수 있었다.
산야를 휘젖는 야인(野人)의 모습이 되어가는 청풍과 흠검단주다.
안휘성 경계를 넘어 강소성에 접어든 그들.
그들의 앞에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쏴아아아아.
호변의 바람은 가을의 건조함에도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가을 하늘.
누렇게 변한 갈대가 이리 저리 흔들렸다.
“홍택호다. 중원에서 가장 큰 네 개의 호수 중 하나지.”
기나긴 추격전에 지저분해진 몰골이나 표정만큼은 밝기 그지없었다.
고생을 했음에도, 고생했다 느끼지 않는 얼굴.
두 사람의 전신에 맑은 바람이 함께 하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오나?”
흠검단주의 한 마디.
청풍이 청룡검을 비껴 들었다,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군.”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갈대숲이 크게 흔들리며 두 명의 무인이 짓쳐 들었다.
황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다.
삼엄하게 뿌려지는 권풍.
황보세가다.
결국, 개방 뿐 아니라 황보세가까지도 여기까지 쫓아 온 것이었다.
터엉!
퀴유유웅!
누가 얼만큼 따라 붙었든 개의치 않는다.
망설임 없이 검을 내치는 청풍.
지속되는 싸움으로 또 한번의 도약을 보이고 있는 청풍의 검격이 황보세가 진왕팔권(辰王八券), 여덟 초식을 파훼하고, 옆구리와 허벅지 두 곳을 가볍게 갈라냈다.
“크억!”
검상보다 더 무서운 것.
강력한 진기의 타격에 허리를 꺾고 쓰러진다.
삽시간에 땅을 구르는 두 명의 무인.
하지만 청풍이 펼치는 검격은 역시나 살수(殺手)가 아니다.
죽이지 않는다.
죽일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더 강해진 청풍이다.
그만한 것을 보이려면.
상대를 죽이지 않고도 제압하는 것. 그만큼 더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까닭이었다.
“겨우 두 명. 척후겠지?”
“그렇겠죠.”
청풍이나 흠검단주나.
그들의 태도는 이미 쫓기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쓰러뜨릴 뿐이다. 앞을 막는 자들을 돌파해 나가는 청풍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어느 쪽이 쫓는 쪽이고, 어느 쪽이 쫓기는 쪽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제 다 왔어. 황보세가와는 제대로 못 붙어 보겠는데.”
흠검단주는 홍택호 변에 이르러, 곧바로 쾌속정 하나를 구했다.
개방도들의 시선 따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다.
쫓아 와 볼 테면 쫓아 와 보라는 듯한 느낌.
강단 있어 보이는 사공 하나를 찾아 배 위에 올랐다.
“홍택의 깊은 곳. 심귀도(深鬼島)로 가겠소.”
“예? 심........귀도 말씀이십니까?”
사공의 표정이 딱 굳었다.
허나 흠검단주는 빙글 웃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안개 심한 심귀도. 걱정말고 가 주시오. 심귀도의 주인은 우리를 해하지 못하오.”
“심.......귀도의........주인?”
“여하튼, 가면 되오. 거기에서 살아 나오면, 당신은 이 홍택호 최고의 사공이라 불리게 될 터. 내가 그리 되도록 만들어 주겠소.”
흠검단주의 목소리엔 언제나 그렇듯, 굉장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 자체도 하나의 무공인 듯한 기분이다.
사공의 두 눈이 복잡한 갈등의 기색을 떠올리더니, 결국, 결심의 빛을 담아내고 말았다.
“알.......겠소. 한 번 해 보겠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어서 갑시다.”
사공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흠검단주의 말에 기운을 얻는지, 이내 힘차게 노를 저어 나갔다.
수면을 미끄러지는 배.
청풍은 떠나오는 호변 뒤를 보다가, 몇 척의 쾌속정이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끈질기군요.”
“그렇군. 아, 사공은 신경 쓰지 마시오.”
흠검단주는 다시 한번 사공을 독려하고, 배 뒷전에 기대며 쫓아오고 있는 배들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저들은 따라 오지 못해. 그저 우리는 이 홍택의 풍광이나 즐기고 있으면 된다.”
흠검단주의 말에 청풍이 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 풍광을 즐기려나.
가을 하늘이 지독히도 높다. 기울어져 가는 해가, 아주아주 천천히 옅고도 옅은 노을을 번져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촤악! 촤아악!
얼마나 왔을까.
홍택호변 육지는 이미 까마득했고, 어스름한 안개가 깔려있는 곳 까지 들어왔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생겨나는 물살이 풍부했다.
“이제........심귀도........의 영역입니다.........”
사공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어찌 된 일일지.
안개가 이리 심할 시간이 아닌 데에도, 시야를 탁하게 만드는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귀신 귀(鬼) 자가 왜 붙어 있는지 알겠다.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치 않을 듯한 공기가 사방을 가득 메워갔다.
“좋아. 사공은 잠시 귀를 막게. 꽉 막아야 할 거야.”
뱃전 앞으로 나서는 흠검단주다.
공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이는 흠검단주.
청풍은 흠검단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금세 알아챘다.
소리를 지르려는 것이다. 그가 왔다고.
간단하고도 단순한 방법.
흠검단주 그 자신의 성격과 묘하게 어울리는 방법이었다.
“당 노인 내가 왔소! 흠검단, 갈염이오!”
뿌옇게 가려있던 안개가 일순간 넓게 흩어져 버린다.
엄청난 내력이다.
온전히 제 힘을 회복한 흠검단주. 그 진정한 웅혼함이 절로 느껴졌다.
“이제 그만 떼도 좋소.”
흠검단주가 벌벌 떨고 있는 사공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런 엄청난 외침이 귀를 막는다고 들리지 않을텐가. 흠검단주를 보는 사공의 눈에 심귀도에 대한 것 보다 더한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쭉 가면 되오. 그 어떤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오.”
약속처럼 하는 말.
사공으로서는 이 괴이한 상황을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듯, 다시 열심히 노를 저어 배의 속도를 빨리 했다. 어스름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땅 그림자, 심귀도에 도착한 것이다.
끼긱! 타탓!
수면이 낮아진 곳.
청풍과 흠검단주가 몸을 날려, 모래밭 심귀도에 올랐다.
다시 배를 돌리려는 사공, 흠검단주가 그를 만류했다.
“아직은 돌아가지 마시오. 쫓아오던 배들이 침몰하는 때니까.”
흠검단주의 웃음에 사공이 다시 한번 찔끔 겁을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개 저편.
심상치 않은 물소리와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폭음(爆音),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 노인의 수작이다. 전부 헤엄쳐서 돌아가야 할 거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흠검단주다.
앞장서는 그.
청풍이 그 뒤를 서둘러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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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슬아슬 하군요.
잠시 쉬어가는 타임입니다.
오랫동안 달려 왔죠. 재충전의 시기가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