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56)

  

“나는 여기에 남겠다.”

흠검단주의 말.

청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기실, 흠검단주의 입장에서 굳이 청풍과 함께 움직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흠검단주 스스로도 가는 길이 다르다 분명히 말했었으니까.

그 뿐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이곳에 있는 당 노인. 심귀도의 장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여기까지 끌고 온 황보세가, 모산파, 그리고 개방까지.

이 섬 안쪽까지 침범해 들어왔을 때를 대비하여 남는 것이었다.

결국은 청풍을 쫓아 온 것임에도.

만의 하나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흠검단주가 그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였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청풍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흠검단주.

청풍이 근본 원인이든.

이 곳까지 오자고 한 것이 흠검단주였든.

누구이든지간에 책임 여하를 떠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고하게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남자다. 

그런 사람에게 달리 할 말이 있을까.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준 사람. 고맙고도 또 고마울 따름이었다.

촤아아악.

심귀도로 들어오는 것에는 능숙한 사공이 필요할지 몰라도, 나가는 것에는 유능한 사공이 필요 없다 하였다. 물길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굳이 거스르지 않아도, 놔두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간다.

심귀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곳이다.

흠검단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보물이 있는 곳이 새겨진 철판. 말하자면 일종의 장보도(欌寶圖)지. 헌데, 당 노인은 전혀 탐내지 않았다. 놀랐나?”

“예.”

놀랐을 수밖에 없다. 어떤 가치가 있을지 모르는 보물들. 그것을 그처럼 선뜻 내 준다는 것은 정말 의외다. 그 동안 보물에 눈이 어두워 달려드는 강호인들만을 봐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처럼 사심 없는 사람. 거기에 청룡검의 검집 용갑을 만들어 주는 것에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청풍으로서는 서영령과 흠검단주에 이어 정말 드물게 보는 인간형이라 할 수 있었다. 

“놀랍지. 나도 놀랍다. 사실, 우리 측에서도 적사검을 노리고 석가장에 갔던 것이니까.”

솔직한 말투였다.

흠검단, 숭무련이 석가장의 참사에 끼어들었던 것은 처음부터 ‘적검(赤劍)’ 즉, 적사검을 노린 것이었다고 들었었다. 물론 흠검단주는 청풍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로 온 것이었다 하였지만.  

“마장(魔匠)이라는 오명을 얻었을지언정, 억만금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만큼의 재주가 있는데 달리 무슨 재물이 탐날까. 그것이 바로 명가(名家)의 법도다. 그것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강호는 분명 잘못 흘러가고 있는 것이겠지.”

가슴에 새겨지는 말이었다.

억만금의 재주.

이미 스스로 지닌 바 가치를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낼 이유가 없다는 것.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협의도(俠義道)와는 다르다?

달리 협(俠)이 있을까.

그렇게 자신의 중심을 꽉 잡은 자,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그것이 곧 명가의 마음이자 협의지심(俠義之心)이다. 거기에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당 노인. 그의 태도는 또 하나 배워야 할 모습인 것이었다.  

쏴아아아아.

호면으로 나갈수록.

섬을 둘러싼 짙은 안개가 걷혀갔다. 

시야가 훤해지니, 저 멀리로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보세가. 모산파. 개방의 배들이다.

  들어오기 여의치 않으니, 밖으로 나올 것을 잡기위해 이처럼 섬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청풍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이미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심귀도.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흠검단주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그토록 입이 거칠었던 당 노인, 심지어는 함께 손속을 나누었던 젊은 천재 당효기까지도.

‘아무도.’

청풍을 실은 배가, 물살을 탔다.

가까워지는 적들의 배들.

‘건들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 인의(仁義)없는 강호인들에게 해를 입도록 만들지 않겠다.

청풍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마음먹는다. 저번에는 타의에 의해서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가 직접 선택한 길이다.

청풍의 손이 청룡검, 검자루에 닿았다. 

쏴아아아아.

몰려드는 쾌속선들에, 가장 가까운 배에 있는 자들은 청색 도포들을 입은 모산파 도사들이었다.   

질주를 시작하는 청풍.

그의 발이 뱃전을 밟았다.

터엉!

부서질 듯 흔들리는 작은 배를 뒤로 하며, 푸르른 호면(湖面)을 뛰어 넘는다.

청풍의 몸이 하늘을 날고.

마침내.

청룡검이 용갑(龍鉀)에서 뻗어 나오며 그 웅혼한 자태를 드러냈다.

치리리리링!

용갑 끝을 스치며 내는 검음(劍音)이, 신검(神劍)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듯 느껴진다.

그 아래, 모산파 도사들이 제식용(祭式用) 월도(月刀)들을 꺼내 휘둘러 왔다.

쩌엉! 쩌어엉!

두 명의 도사들.

월도 두 자루가 반 동강 나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용보(龍步)를 밟아 내려서며 몸을 휘돌린다. 

나선으로 휘날리는 옷자락.

그대로 회전하며, 백야참 긴 궤적을 그려냈다.

쩌정! 파아아. 

반 토막 남은 월도로 백야참을 받아낸 도사가 그 강력한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배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 뿐이 아니다. 백야참을 피해 공중으로 몸을 뽑아 올린 도사 역시, 배 전체를 휘돌고 있는 청룡검의 검력에 미처 배 위로 내려서지 못하고 물에 빠지고 말았다.

첨벙! 처엄벙!

도약에서 이어지는 공격으로 순식간에 두 명을 떨구었다.

배에 남은 도사는 한 명.

호보를 밟으며 그대로 나아가는 청풍이 강맹한 일격을 발출한다.

쩌어어엉!

금강탄. 절대로 받아낼 수 없다.  

역시나 꺼내는 월도가 터지듯 깨져 나가고, 도사는 배 뒤 쪽으로 멀리 튕겨 나가고 말았다.

처엄벙!

배 하나.

모산파 도사 세 명이 물속으로 곤두박질 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가드는 적선들,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여기에.”

뱃전, 난간에 발을 올리고, 청룡검을 겨눈다.

청풍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룡검주가 있소.”    

겨눈 자세 그대로 다가드는 모든 배들을 휘돌며 검을 움직였다.

구름 사이로 어둡게 비쳐드는 햇빛이 마치 그 청룡검에만 머무르는 것 같다.

굉장한 기상.

빼앗아 보려면 빼앗아 보라는 패기다.

일순간, 다가들던 배들이 멈출 정도.

그런 그들 앞에서 청풍의 눈이 다음 목표를 찾는 듯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오지 않으면.”

옆으로 움직이는 청풍, 발을 들어 올렸다.

“내가 가겠소.”

뱃전에 걸린 노를 강하게 차버린다.

절묘하게 물살을 때리는 노다. 청풍을 실은 배가 거짓말처럼 앞으로 뻗어나갔다.

촤아아아아.

내력을 실어 힘을 받으니, 나아가는 속도가 상당하다.

청룡검을 들고 몸을 낮추어 다시 튕겨낸다.

솟구치는 청풍이다.

금강호보, 박차는 배가 뒤집어질 듯 요동쳤다.

쫓아서 잡을 생각만 했지, 이렇게 먼저 공격을 가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가. 청풍이 날아드는 배, 황색 무복을 입은 황보세가 무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권격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파라락. 

적선(敵船)에 내려서는 청풍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풍운용보, 굉장한 탄력이다. 세 줄기 권격을 피해내는 청풍의 눈이 번쩍 기광을 발했다.

퀴유유웅!

금강탄으로 내치는 강력한 검격.

목표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격이 꽂히는 곳은 놀랍게도 황보세가 무인들이 아니라, 배의 밑바닥이다. 청룡검 검끝이 막강한 내력을 담고 아래를 향해 짓쳐 나갔다.

꽈아아앙!

폭음이라도 울린 듯 하다.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비산하는 사이로 물살이 치솟았다. 구멍이 뚫린 정도가 아니다. 조각 조각 갈리지는 손상이 온 배로 파급되어 간다. 가라앉을 수 밖에 없도록, 배 전체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격이었다.

텅!

청풍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지체하지 않았다.

당황과 분노를 함께 떠 올리며 짓쳐오는 황보세가 무인들의 권격들을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피해내더니, 그대로 뱃전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또 다른 배로 날아드는 청풍이다.

과감함과 신속함을 동시에 갖춘 모습이었다.

자로 잰 듯한 움직임.

이번에는 개방이다.

앞서 두 배가 작살나는 것을 보아서인지. 

타구봉을 자못 삼엄하게 휘두르며 방어하고 있었다. 

파아아아! 파삭!

제 아무리 방어를 하려 해도, 내리치는 청룡검의 위력은 막강하기만 했다.

타구봉 두 자루가 한꺼번에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치링!

물러나고 굳어버린 개방 방도들 가운데로 떨어진 청풍이다.

착검결, 청룡검을 용갑으로 되돌린 후, 검집 채 허리춤에서 뽑아낸다.

퍼어억!

당 노인이 준 용갑은 검을 보관하는 검집 이상의 선물이었다.

죽이지 않을 상대라면 검을 넣어 둔 채로도 휘두를 수 있다. 그 자체로 하나의 병기(兵器), 가격당한 개방 방도가 무참히 쓰러져 배 위를 굴렀다.

“과연 대담한 젊은이로구나. 광풍개가 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 명에서 네 명. 

적은 숫자만 타고 있던 소선(小船) 대신, 조금 더 큰 쾌속정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고수출현이다.

개방도들이 몰고 있는 쾌속선 위에 서 있는 자.

“!!”  

개방의 인물이 분명한데도 지금까지 보았던 개방 거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청수한 모습. 

누더기는 누더기나, 조금도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다. 유삼(儒衫)을 입혀 놓으면, 그대로 유가(儒家)의 학자라 해도 믿을 얼굴이었다.  

“나는 강호에서 양화개(陽貨?)라 불리는 이다. 무도(無道)한 화산의 제자가, 사람들을 해하고 보물을 탐한다기에 그 악행을 징계코자 이렇게 찾아 왔다. 검을 세 자루나 찬 그 형상(形狀)보니, 그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알겠다. 군자(君子)는 자고로 그와 같은 쇳덩이를 멀리하는 법이거늘. 포악함이 가득한 모습이로구나.”  

고상함이 드러나는 말투는 차분하다 못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다.

양화개 언언(言偃).

그 이름자가 공자(孔子)의 제자였던 자유(子游)의 이름과 똑같았기에 논어(論語) 양화편의 양화를 따 별호로 불리게 된 자다. 

얼핏 보기에도 학식이 넘쳐 보이는 얼굴에, 구걸하기 위한 바랑도, 개를 패기 위한 타구봉도 들지 않았다. 개방 내에서도 가장 개방도 답지 않은 개방 장로라 불리는 이. 군자는 사람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 권각술이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 전해지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의 인물이었다.

“개방에서만 핍박을 해서야 쓰겠소! 그렇게 품위로 포장하지 마시오. 속셈이 따로 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니라오!”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

또 한척.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쾌속선이 있었다.

이번에는 황보세가.

역시나 큰 체구에 거친 외모다.

허나, 그 얼굴은 황보세가를 지휘해 오던 호안철담 황보고가 아니었다. 

또 다른 고수.

광서비웅도(廣西飛熊刀) 오계평이 그의 이름이다.

황보세가가 행했던 수 많은 전투의 첨병으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온 용맹한 가신이었으니. 숱한 싸움으로 다져진 무공, 구파일방의 장로들 못지않은 무력을 지닌 자였다

“황보세가. 오계평 오 대협이여. 오 대협이야말로 그 심중(心中)이 가장 뚜렷한 사람 아니겠소. 이 쪽에서 원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외다. 양보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세 번째 쾌속선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개방과 황보세가. 

모두 새로운 고수들이 나섰다면, 모산파의 고수는 그나마 안면이 있는 자라고 할까. 

오계평에게 양보하라 말하는 이는 다름 아닌 벽라진인(碧羅眞人) 정수심(丁洙沁)이었다.

처음 석가장의 폐허에서부터 추적해 왔던 자.

청풍의 눈에 은은한 분노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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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내로.

화산질풍검 1-2권이 나갑니다.

많은 부분 수정하여, 그 흐름과 분위기가 제법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더 재미있는 방향으로 겠지요.^^

최고의 퀄리티를 위하여, 저와 출판사 양쪽 모두가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표지도 여러 분들의 말씀 최대한 수렴하려 하였고, 글 내용도 수많은 댓글, 수많은 조언들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하였으니, 책으로 다시 보셔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것으로 자신있게 약속드리겠습니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

건강 유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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