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녕양(寧陽) 땅이 어디에 있소?”
“바로 이 근처잖소. 서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되오.”
“그럼 동평(東平)은 어디요?”
“동평? 그것도 이 근처요. 이 지역 사람이 아니구려.”
“그렇소.”
“하기사 그것은 말투만 들어도 알겠소. 산서 쪽에서 오셨소? 내 아는 친구 녀석이 그런 억양을 쓰더이다.”
“그보다 서쪽이오. 계속 물어봐서 미안하지만........태안(泰安)은 어디에 있소?”
“그 보다 서쪽이면 절강이오? 멀리도 오셨구만. 태안은 여기서 동쪽이오. 쭉 뻗은 관도가 있소.”
“장구(長驅).......는 어디오?”
“장구? 장구는 좀 멀다오. 북쪽으로 한참 가야 있소.”
“우성(右城)은?”
“북서로 한참가야 있는데.......타향 사람이니 어쩔 수 없겠군. 이러다 날 새겠소. 좋소. 어디든 다 물어 보시오.”
“이것은 좀 다른 질문인데.......산동에서 요녕 쪽으로 넘어가려면 어느 길이 가장 빠르오?”
“요녕까지? 멀리도 가시는군. 아무래도 배를 타는 것이 빠를 거요. 육로로는 거의 막혀있다 시피 하다오.”
청풍의 질문은 산동성을 넘어 요녕까지 이어졌다.
중구난방으로 물어보는 지명들. 열 개가 넘어갔을 때에 이르러서야 청풍의 질문은 끝이 났다. 저잣거리 한 구석. 파리를 날리고 있던 고서점(古書店)의 주인은 용케도 그 의문들을 다
받아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왜 그렇게 물어보는가.
이유는 한가지였다.
추격자들의 이목을 흐리기 위해서다.
그가 나가고 나면, 몇 시진 안에 누군가 이곳에 찾아와 청풍이 한 이야기들을 캐내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역으로 이용한다.
추격자들은 장보도의 존재를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장보도에 새겨진 위치를 그대로 물어볼 수는 없다. 관계없는 여러 지명들을 통해 청풍도 잘 모르는 보고(寶庫)의 위치를 파악하고, 더불어 그의 행보를 쉽게 짐작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청풍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주인이 모르는 사이, 슬며시 동전 몇 개를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실로 고지식한 사람이라면 쫓아 나와 청풍을 돌려주려 할 테지만, 그렇기에는 장사가 너무 안 되는 곳이었다.
타탁.
죽립을 사서 눌러 쓰고, 피풍의와 옷가지를 새로 마련하여 행낭을 하나 새로 마련했다.
마을 두 개 정도 지나치며 정보를 조금 더 모은 후, 보고(寶庫)가 있는 곳까지 곧장 찾아갈 생각이었다.
성큼 성큼 발을 옮기는 청풍이다.
마을을 벗어나, 다시 들판으로.
바람 부는 대지가 그의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산동성의 중심부에는 태산이 있다.
철판에 새겨진 보고의 위치는 태산 북동부.
이동하는 동안 겪었던 싸움의 횟수는 두 번 밖에 되지 않았다.
마을 세 개를 거치면서.
모산파는 청풍의 위치를 추적하기를 포기해 버렸는지, 어느 시점부터 따라오는 낌새가 사라져 있었고, 길을 막아선 개방과 황보세가도, 전보다 적극적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강소성에서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행보였다.
하지만 청풍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추격이 헐렁해질수록 오히려 안 좋은 예감이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 째가 되었을 때.
청풍은 그 예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라도 뿌릴 듯, 구름이 가득하여 우중충한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흐린 날씨와 너무도 어울리는 흑의인들이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자들. 성혈교 묵신단이다.
굳이 그들이 펼치는 신법(身法)을 보지 않더라도, 한 손에 들린 협봉검만으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성혈교.
그 동안 잠잠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까.
청풍도, 성혈교 측에서도.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비 냄새,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갈 때.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곧바로 싸움으로 들어간다.
이십 명을 거뜬히 넘어가는 숫자, 제일 앞에 선 흑의 검수 세 명이 협봉검을 치켜들며 사나운 기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치리링!
용갑에서 청룡검이 뽑혀 나오며 긴 섬광을 그려냈다.
단호하게 검을 뽑은 청풍.
짓쳐오는 협봉검에 똑같이 사나운 기세로 맞서 나갔다.
쩡! 촤아아악!
협봉검 얇은 검날이 부러져 나가고, 그대로 나아가는 검에 묵신단 무인의 가슴이 쫙 갈라졌다.
한발 더 앞으로.
이번에 뛰쳐 나오근 것은 강의검이다.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협봉검을 통째로 부러뜨리며 백야참이 반월을 그렸다.
스가각!
팔 한 쪽이 통째로 잘려나가며 피분수가 튀었다.
한발 더.
발을 이동하고 공격으로 넘어가는 움직임이 절묘하다.
금강탄 막강한 경력을 담은 청룡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져 나가 가슴을 꿰뚫었다.
쿵!
땅으로 쓰러지는 육신이 큰 울림을 발했다.
기세를 탄 청풍이다.
묵신단 무인들 협봉검 사이로, 쏘아져 들어가며 거침없는 질주를 보였다.
쩡! 쩌정! 촤아악!
혼자서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데 필요한 것들.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방위에서 협봉검이 찔러 들어와도, 몸이 먼저 반응하며 그 공격을 차단한다.
사각 따위는 없다.
시야가 닿지 않는 곳도, 공격할 수 있고,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발해지는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순식간이었다.
열 명에 이르는 묵신단 무인들이 쓰러진 것은.
상대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지, 묵신단 무인들이 산개하며 뒤로 물러났다.
청룡검을 늘어뜨리며, 강의검을 앞으로 겨눈 청풍.
그의 눈에 새로 나타나는 다섯 개의 인영이 비쳐들었다.
‘역시.’
그렇다.
이들 묵신단 무인들로는 안 된다는 것을 성혈교 측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가온다.
요사로운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는 자들.
그때 상대했던 흑포괴인들과는 다르다.
하얀 마의(麻衣)를 입고, 한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기형도(奇形刀)를 들었다. 붉게 충혈 되어 있는 눈, 혈안(血眼)을 지녔지만, 흑포괴인들보다는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몸에서 발해지는 살기(殺氣)가 칙칙하지 않다. 방금 전에라도 사람들을 죽이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채채챙!
혈안백포의 괴인들이 고어(古語)체 붉은 글자들이 새겨진 기형도들을 일제히 치켜들었다.
삼엄한 기운이 그들이 서 있는 대지를 온통 채워 나간다.
비로소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싸움과는 다른 양상.
검을 잡은 두 손에 자하진기를 한껏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웅혼한 내력이 실리니, 두 자루 신검(神劍)에서 맑은 검명이 울려 나왔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짓쳐든다.
호쾌하게 뻗어나가는 청풍의 신형 끝에서 두 개의 검광이 긴 잔영을 남겼다.
쩌저저저정!
다섯 자루의 도신(刀身)과 두 자루 검신(劍身)이 빠르게 얽혀 들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도검의 충돌이다.
시종일관, 일격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살초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도.
허초를 발하며 공격의 순간을 재는 것도.
전초전(前哨戰)이라 부를 만한 손속의 교환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를 죽이겠다는 순수한 의지만이 그 검격의 소용돌이 속에 충만해 있었다.
쩌정! 쩌저정!
금강탄과 백야참을 전개하던 청풍의 검.
순식간에 백호무(白虎舞)까지 이른다.
목숨을 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빛살처럼 뻗어나간 검격이 두 개의 기형도를 한꺼번에 튕겨냈고, 이어 올려치는 강의검이 금강탄 막강한 경력을 뿜어냈다.
쩌어엉!
막아내는 기형도 칼날이 엄청난 충돌음을 울렸다.
‘깨지지 않는다?’
혈안백포의 괴인들.
다른 적들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몇 번이나 청룡검, 강의검과 마주쳤는데에도 병장기가 부서지지 않고 있다.
붉게 빛나고 있는 고어(古語)의 문양들, 아무래도 기형도 검날을 강화시키는 기이한 공능을 지닌 모양이었다.
쩡! 쩡! 쩌정!
어느 한 쪽도 치명적인 공격이 들어가지 않으니, 저절로 싸움이 길어지고 있다.
차라리 좋은 경험이었다.
항상 압도적인 신병(神兵)으로 싸우다보니, 어느 샌가 거기에 의존하고 있었던 느낌이다.
부딪치는 순간, 상대의 병장기를 파괴해버리는 신검(神劍).
그것은 진정한 실력이라 할 수 없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약점이다.
무공을 보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던 이면에는 이미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던 그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쩡!
신병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마치 두 자루 청강장검을 들고 있다는 느낌으로 검을 전개했다.
변화가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밀어내 부수어 버릴 듯 강맹했던 검격이 훨씬 더 날카로워지고 정교해졌다.
억지로 끌어내지 않아도 청룡검이나 강의검은 이미 그 자체로 강력한 검이었으니.
거기에 세밀함이 더해지자, 일순간에 돌파구가 생겨난다.
보이지 않던 허점이 보이기 시작하며 발을 밟는 투로가 훨씬 정순해졌다.
퀴융! 치칭! 치치칭!
청룡검으로 전개하는 금강탄 일격이 기형도 세 자루를 타고 오르며 몰아치는 경력을 끊어 놓았다.
이어지는 것은 강의검의 백야참이다.
투로가 정심하게 짜여지면서 금강탄과 백야참을 연환하는 고리가 짧아지니, 공격의 속도가 더욱 더 올라갔다.
상대의 방어보다 한 박자 먼저 날아드는 검격.
혈안백포 괴인의 팔 하나가 잘려나가며 마침내, 정체되어 있던 싸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뿌려지는 핏물이 땅바닥에 긴 궤적을 남겼다.
피를 보니 살기가 더 치솟은 것일까.
몸을 돌보지 않고 미친 듯 몰아쳐 온다.
팔이 잘린 혈안백포 무인도 지혈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쩌정! 쩡! 스가각!
또 하나.
갈빗대까지 베어낸 일격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 정신이 아니야.’
번들거리는 혈안에서 광적으로 발해지는 살의.
이미 사람이라 볼 수 없는 몰골이다.
육신이 망가져도 끊임없이 움직이던 흑포괴인들, 신장귀의 모습, 그리고 석가장에서 살심산에 중독 되었던 무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술이든, 약물에 의해서든 이들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쩡! 쩌저정!
충돌을 거듭하는 일대 오의 격전이다.
어느 순간.
청풍은 적들의 기형도에 새겨진 붉은 문양들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딪치는 검격, 한 자루 기형도에 쫙 하고 금이 갔다.
짐작이 맞은 것이다.
기묘한 술수로 병장기를 단단하게 만들었으나 그것도 일정 한도까지였던 듯, 강도가 약해지고 있었다. 아니, 본래 강도대로 돌아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리라.
째애앵!
첫 번째 기형도가 부서져 나간 후.
싸움의 양상이 급격하게 기울어 버린다.
하나씩.
치명상을 입으며 쓰러지는 혈안백포의 괴인들이다.
백야참 일격이 마지막 남은 혈안백포 괴인의 목을 휩쓸어 버리기까지.
궁지에 몰려 동귀어진으로 달려드는 공격들에 두 줄기 도상(刀傷)을 입긴 했지만, 피륙의 상처에 불과할 뿐이었다.
항상 죽을 각오로 달려들던 성혈교다.
혈안백포 괴인들을 모두 다 쓰러뜨리고, 묵신단 무인들 다섯 명을 더 베어 넘기고 나자, 도무지 안 되겠다고 느낀 것인지,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주춤 주춤 달려들기를 멈추었다.
스윽.
청풍은 두 자루 검을 땅으로 늘어뜨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인 마당. 도주를 시도한다면 쫓아가지 않을 생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혈교 묵신단 무리들은 기회를 주었는데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들이 믿는 종교의 경전이라도 되는 것인지.
그러더니 한순간.
그대로 협봉검을 들어 자신들의 목을 갈라 버렸다.
털썩. 털썩.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결을 하는 모습들.
청풍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다.
사방신검이 탈취 당하던 날, 화산파 본산이 습격을 받았을 때, 이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 다 이들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수많은 시신들 앞에서.
청풍은 그 참상이 보기 싫다는 듯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렇게나 청명하던 하늘도, 오늘은 푸르지 않았다.
한 방울.
한 방울.
겨울이 가까워 온 가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진동하는 혈향을 씻어 주려는가.
청풍은 두 자루 검을 검집에 꽂고, 죽립을 고쳐 썼다.
한 발 나아가면서.
격전으로 인하여 소모된 내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하진기를 도인하고 있을 때.
그 때였다.
청풍의 몸이 흠칫 굳으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 청풍의 몸이 한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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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라 말씀드렸는데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간에 다소 수정할 부분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늦어져 버렸네요.
거듭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