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56)

터벅. 터벅.

넓게 펼쳐진 풀밭.

다가오는 발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진다.

‘........!!’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중년의 나이, 깎아지른 듯 뚜렷한 윤곽을 지녔다.

잔잔한 안광을 뿜고 있는 두 눈.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진중한 기도와 출중한 외모가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는 남자였다.

스윽. 

청풍의 두 손이 자신도 모르는 새 허리춤으로 이동했다.

청룡검과 강의검에 올려지는 두 손이다.

그저 걸어오고 있을 뿐인데.

싸우고자 하는 전의(戰意)가 느껴지지 않는 데에도,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경고가 발해지고 있었다.

“자네가 청풍인가?”

중년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도 차분했다. 

북서지역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짧은 한 마디로는 어디 출신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읽어지지 않는 자다.

어디에서 온 자인가.

어느 정도 강한 자인가.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측량할 수 없는 무력, 일가(一家)를 이룬 자다.

일대종사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터벅. 터벅. 척.

땅에 쓰러진 성혈교 무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혈안백푸 괴인들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담담한 시선.

한 손을 쭉 내리 뻗더니, 죽어 있는 자의 목덜미 옷깃을 잡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큰 키. 사람의 몸을 잡아 올리는 모양새가 마치 가벼운 물건을 다루는 듯 했다.

죽어 있는 데에도 부릅뜬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혈안 백포의 괴인을 보며, 그 남자가 두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혈귀인(血鬼人). 아직 미완성으로 보이지만 결국 만들고 말았군.”

괴인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기색이다. 

툭 하고, 혈안백포 괴인을 땅으로 떨구더니, 청풍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혈귀인 다섯에 이 정도의 묵신단이라. 모두 물리치다니, 듣던 바와는 꽤나 다르다. 그 정도 무력(武力).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중년인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

그 콧날과 입매.

순간 청풍은 이 남자의 얼굴이 꽤나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투, 억양도 그랬다.

목소리의 고저에서 드러나는 버릇. 익숙했다. 한두 번 들어본 말투가 아니었다.

“하기사.......그러니까 갈염에게서 그 검을 빼앗을 수 있었겠지.”

어디서 왔는지 확연하게 알려주는 한 마디다.

어투에서 느껴지는 적의(敵意).

무련. 숭무련이다.

중년인이 이야기하는 검이란 강의검을 뜻하는 바다. 청풍이 흠검단주를 해치고 강의검을 얻는 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청풍은 갑자기 고개를 쳐드는 한 가지 놀라운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숭무련의 인물이라는 점. 

본 적이 있는 듯한 외모와 익숙한 말투까지.

중년인의 정체를 암시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말이 없군.”

중년인이 한 발 더, 청풍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당혹감과 놀라움이 밀려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린다.

중년인의 정체, 청풍이 짐작하는 그대로라면.

그리고 이렇게나 오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한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 중년인의 얼굴을 보며, 청풍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런 상황, 이렇게 만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그 검이 탐났나?”

쏴아아아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죽립 위를 적시며 방울져 떨어지는 물줄기가, 그의 마음에 내리는 비와 같다. 

굳게 다물었던 입.

청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분을 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통할 말이 아니다.

누구라도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임에.

흠검단주가 본인이 여기에 있다면 모를까.

말 한 두 마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하지 않았다........그러면 그는 어디에 있지?”

중년인의 반문.

청풍은 즉각적으로 답했다.

“심귀도에 남으셨습니다.”

“심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 청풍은 또 다시 뭔가 틀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런데 왜 심귀도에는 갈염이 없었을까.”  

청풍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귀도에 흠검단주가 없다는 말. 

중년인의 목소리에 냉엄함이 깃들었다.

“심귀도에 대한 확인은 끝났다. 거기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그 정도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흠검단주가 없더라도, 당 노인과 당효기, 그리고 장인들이 있을 터.

그런데 아무도 없다니.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흔들리는 청풍의 눈빛을 보는 중년인의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결백을 증명할 길이 사라져 버린 상황.

난감했다. 

흠검단주와의 친분과 교감을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사람 앞에서 구차해 질 수는 없었다.

“달리 할 말은 없는가?”

마지막 선고처럼 물어온다.

청풍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 점 거짓이 없는 당당함을 품고서, 그의 눈을 직시한다.

청풍과 중년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화아아악! 

치솟아 오르는 기파.

청풍의 몸이 움찔, 커다란 흔들림을 보였다.

무시무시한 공력이었다. 전해지는 막강함이 육극신의 그것에 필적할 정도.

그럼에도 청풍은 받아냈다.

굳건하게 마음을 다지며, 용갑에 꽂혀 있는 그대로 청룡검을 비껴들었다.

뽑지 않는 검이다.

중년인.

한 마디와 함께 첫 발을 내딛었다.

“건방지군.”

촤아아아아아.

거리를 좁혀오는 그 움직임 그대로 땅 전체가 갈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성혈교 사도보다.

흠검단주보다 강한 자.

이것이 상승의 무공이다. 

언제든 맞서 싸워야 하고, 또한 지지 않아야 하는 막강함이 거기에 있었다.

텅!

금강호보 진각음과 함께 청풍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상대의 시간에 빨려드는 듯, 시야에 비쳐드는 모든 것이 느려지고, 공기의 흐름 하나 하나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진입하는 새로운 세계다.

무공의 경계.

진정한 고수들의 영역이었다.

휘류류류류.

중년인이 뻗어낸 첫 일격은 장력(掌力)의 산개다. 

쏟아지는 진기의 줄기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커다란 연화(蓮花)와 같았다.

파아아아.

몰아쳐 오는 경력의 방향과 궤도가 압도적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던 청풍이 용보를 밟으며, 용뢰섬(龍雷閃) 방어초를 쏟아냈다. 한 올 한 올 풀려나는 진기의 흐름이 감당하기 힘든 격류(激流)와 같았다.

“!!”

용뢰섬을 뻗어내는 청룡검이 미친 듯 흔들렸다.

기암괴석 충만한 협곡의 급류에 나무로 만든 소선 하나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성혈교 사도의 일격도 단숨에 막아내던 용뢰섬이 이번에는 제 위력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파아! 파아아앙!

결국.

흩어지는 경력이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그 경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산하는 폭풍우를 만들었다.

텅! 텅! 터어엉!

청풍의 발이 땅을 세 번이나 밟으며 뒤로 튕겨 나왔다.

용뢰섬.

그것으로도 그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장법이었다.  

‘역시......!’

다시 다가오는 중년인을 보면서.

청풍은 중년인의 정체에 대한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발동작, 한 마리 백학처럼 뻗어 나오는 신형.

알고 있다.

하나 하나 각인되는 모습이다.

물러나던 청풍이 다시금 호보를 밟으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힘대 힘으로 나갈 생각이다.

청룡검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신기(神技)의 검력을 뿜어냈다. 

백호출세. 청풍으로서는 초식명도 알지 못하는 백호무 그 첫 일격이었다.

콰아아아.

막강한 검격이 짓쳐오는 것을 보면서도.

중년인은 날아오는 기세 그대로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장력을 펼쳐내니, 그 위력은 아까의 첫 일합보다 더욱 더 강하다.

퍼져 나가는 진기가 청룡검 용갑을 통째로 옭아매며, 그 속도와 힘을 잠식해 들어 왔다.

‘이 공력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청룡검을 붙잡는 이 내력.

접해 본 적이 있는 내공이다.

천지일기공.

육극신에게 부상당한 후, 그녀를 되살리며 도인했던 그 흐름과 똑같은 기감(氣感)이 중년인의 공력 안에 흐르고 있었다.

파아아! 쩌정! 쩌정!

청룡검 용갑, 백호출세를 막아놓고.

그것을 튕겨내는 수법은, 두 손가락으로 뻗어내는 지공(指功)이었다.

이지선(二指線)이다.

서영령이 펼치는 것보다 몇 배 강한 이지선. 상승 지법이 지닌 그 진정한 위력이 거기에 있었다.

쩌어어엉!

청룡검, 백호무가 무위로 돌아 간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청풍을 구한 것은 오로지 숱한 실전으로 단련된 임기 응변 하나였다.

땅을 짚고 등 뒤로 팔을 돌려 등에 맨 적사검을 꺼냈다.

역시나 검집 채로.

가슴으로 묶어 맨 끈을 통째로 끊어내며 휘두른 일격이었다.

텅! 촤아아아.

어려운 자세로 장력을 받아내 뒤로 미끄러지는 청풍이다.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그의 발이 다시금 땅을 박찬다. 

기량의 차이를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청풍이었다.

꽈아아앙!

다시 한번 충돌하는 경력이다.

바람 앞의 등불이련가.

청풍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넘쳐흘러 삼킬 수 없는 핏물이 입가를 타고 목까지 흘러나왔다. 

쏟아지는 빗줄기.

핏물이 물방울과 섞여 온 몸을 적신다.

사방 천지의 기운들이 손에 잡힐 듯 하던 상승의 영역이 희미해졌고, 아직 그 안에 있는 중년인의 무공은 잡을 수 없는 환상과도 같았다.

그래도.

청풍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증명이었다.

결백함을 보여줄 수 없다면, 적어도 당당한 남자인 것만큼은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아버지와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 안 듣는 딸아이의 이야기죠.” 

“저는 무공을 전부 다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내공은 천지일기공이고, 선법은 백학선법이라 부르죠. 백강환을 내쏘는 지법은 이지선(二指線)이라 하는데, 제가 지닌 무공 중 가장 자신있는 무공이에요.”

총명한 눈빛에 아름답기만 한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이.

눈앞의 중년인.

그녀와 빼 닮은 콧날과 입매, 그녀와 같은 말투와 억양을 지닌 이 중년인에게 청풍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나약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퍼어어엉!

튕겨진 청풍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온 몸을 때리는 빗물.

청풍의 몸이 땅으로 떨어진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속에서.

쳐박힌 땅 위에 청룡검 용갑을 박고, 몸을 일으켰다.

부서질 듯한 육신에 들끓는 내력. 

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싸울 수 없는 몸 상태임에도, 그저 죽지 않는 무인의 눈빛만을 품은 채, 중년인, 산서신협 서자강을 바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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