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벅. 처벅.
다가오는 사자강의 발밑에서 축축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장력의 사정거리.
끝장을 보려는가.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가 서자강의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멈칫.
서자강의 걸음이 멈춘다.
촤아아악!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챈 청풍이다.
결국.
이번에도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가 눈을 감았다.
“안돼요!”
물살을 가르며 날아드는 신형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흐르고 있는 것은 흐르는 빗물일까, 아니면, 방울지는 눈물일까.
격전이라도 치르고 온 것처럼, 소매한쪽이 찢겨 나가있고, 경장 전체에 흙이 묻어 있었다.
싸움을 한 듯 보인다는 것.
실제로 격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촤악! 촤아악!
그녀의 뒤로 따라붙는 무인들이 이십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서영령이 청풍의 앞을 막아섰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에서 서자강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위군.”
한사람의 이름을 내뱉는 서자강이다.
서영령을 쫓아오던 무인들 쪽에서 경직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예.......!”
“이 아이가 어째서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지?”
“그, 그것이........!”
비를 맞으며, 굳은 얼굴로 멈추어 선 이.
그의 옷도, 찢겨지고 더러워져 싸움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부상당한 청풍을 두고, 서영령을 데려갔던 자.
막위군이었다.
“련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지키라 하지 않았었나?”
막위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여는 막위군의 목소리에는 낭패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부님께서.......나서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도리어 서자강의 분노를 자극한 듯.
서자강의 눈이 무서운 빛을 뿌렸다.
“내가 나섰기에. 그렇기에 위군, 너에게 맡긴 것이었다.”
잔잔한 목소리에 강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무상 서자강.
막위군의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죽을 죄를.........졌습니다.........”
서자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왕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
그의 시선이 서영령에게로 돌아갔다.
“그 몰골. 동문과 싸워서라도 예까지 와야만 했었나?”
숨을 고르고 진기를 모으는 서영령이다.
“아버지가........”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버지까지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잖아요.”
아버지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딸이다.
서자강이 한 발 나아가며 물었다.
“어째서 이것이 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
“무련(武聯)의 두 기둥 중 하나, 무상께서 손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녀의 목소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서야만 하는 일이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과 관련된 일이니까.”
반항 같은 그녀의 말을 받는 서자강이다.
그의 대답은 그녀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
“갈염을 보낸 것도 나였다. 어떤 놈인지 확인해 보라고.”
“하......하지만.......!”
“갈염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스스로도 가길 원했던 일이었지만, 결국 책임은 내게 있다. 게다가 문상(文相)께서는 처음부터 반대했던 일이었지.”
“갈 숙부께서 잘못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요! 아니, 갈 숙부가 누구에게 당할 사람이었던가요?”
“누구에게 당했냐고? 네 뒤에 있지 않느냐.”
“갈 숙부를! 풍랑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아........!”
뒤를 돌아보는 서영령. 외치던 말이 뚝 끊겨 버렸다.
곧 죽을 듯 빈사상태로 보였던 청풍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당당하게 버텨 서 있었던 까닭이다.
“보아라. 저 놈은 강해.”
청풍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서영령이다.
청풍의 눈, 괜찮다고 말하는 그 눈빛에 서영령의 눈에서도 왈칵 눈물이 솟아 나왔다.
“석가장에는 성혈교의 사도도 있었다고 하였다. 갈염의 무위라면 오 사도 정도는 꺾을 수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 갈염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면,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있어. 그 만큼 실력이 된단 말이다.”
그토록 강인했던 서영령.
눈물과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녀가 말했다.
“풍랑은 갈 숙부 같은 분을 해칠 사람이 아니에요. 함부로 살수를 쓰지도 못하는.......!”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도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 누워 있는 시신들.
굴러다니는 협봉검이 성혈교 묵신단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살행을 누가 했겠는가.
청풍이다.
그 동안, 못 본 시간 동안 변해있다면, 이렇게나 강해진 청풍이라면, 어쩌면 그는 그녀가 알고 있던 청풍과 전혀 다른 사람일련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풍랑. 풍랑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죠?”
서영령이 청풍의 옷소매를 잡았다.
애원하다시피 하는 얼굴이다.
청풍으로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서영령이 서자강을 돌아 보며 말했다.
“그것 보아요. 풍랑이 그랬을 리가 없어요.”
항상 사리가 분명하던 그녀.
그렇게나 당당했던 그녀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하게 평정심을 상실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서자강이 억겁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너의 이런 모습. 처음 보는구나.”
전에 볼 수 없었던 딸의 얼굴을 보는 서자강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풍랑.
서영령의 말과 행동이 서자강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키고 있는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수 있으리라.
한참의 침묵 속에 땅을 누비는 빗소리만이 가득하다.
이윽고 서자강이 입을 열었다.
“묻겠다.”
청풍을 향한 시선.
적의는 줄어들었을지언정 수그러들지 않은 의혹이 깃들어 있었다.
“갈염이 건재하다고 한다면, 그는 어디 있는가.”
바라는 대답을 해 줄 수 없다.
청풍으로서도 궁금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솔직히 대답했다.
“모릅니다.”
단호한 눈빛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서자강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그를 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증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이 먼 곳에 있으니, 오직 그 증거는 그의 마음과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청풍은 이번에도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없습니다.”
서자강이 턱을 치켜 올리며 내리 깐 시선으로 청풍를 바라 보았다.
그 모습. 서영령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역시. 그냥 둘 수 없겠어.”
서영령이 다급하게 움직여 청풍의 앞을 가로 막았다.
두 팔을 들고 고개를 흔든다.
그녀를 보는 서자강. 그가 말했다.
“갈염을 해쳤든 그렇지 않든. 그 진위(眞僞)를 떠나서.”
손을 뻗는다.
“이 놈은 위험해.”
“아버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숭무련 일 호법으로서의 명령이다. 비켜라.”
쏴아아아아아.
가을에 내리는 비임에도.
거세진 빗줄기는 마치 한 여름의 폭우와도 같았다.
“대체 왜......!”
“문상께서는 결국, 구파와 일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이 놈의 무공, 이 놈의 성정. 장래가 걱정된다. 그 때가 되었을 때, 이 놈은 분명 본련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여기서 끝내 는 것이 나아. 그 편이 좋다. 무련에게 있어서도, 너에게 있어서도.”
서영령의 눈이 다시 한번 뿌옇게 차오른다.
그녀가 소리치듯 말했다.
“아무리 무련의 일이라 한들! 나중에 위험해 질 것이라 생각하여 살의를 품다니요! 아버지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나를 생각한다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비켜라”
서자강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절망에 가까운 표정. 서영령이 외쳤다.
“안 돼요. 절대 비킬 수 없어요!”
하지만.
딱 버텨선 그녀.
그녀를 비키게 만든 것은 서자강이 아니었다.
청풍.
그가 서영령의 팔을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해 때문이라면 결백을 말하겠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가 없지요.”
청풍이 땅에 박은 청룡검에서 손을 떼었다.
이제는 단순히 흠검단주를 해쳤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상의 것.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과도 같은 길에 올라 선 것이다.
“화산파. 청풍입니다.”
빈 손. 그가 두 손을 올려 포권을 취했다.
“화산과의 일전을 생각하신다면. 화산의 제자로서, 거기에 맞서겠습니다.”
우르르릉.
천둥마저 치는 하늘이다.
비바람이 쓸고 지나가는 땅 위에.
청풍은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어떤 것을 기대했던 것일까.
이처럼, 무련, 숭무련이. 서영령의 사문이 구파와의 일전을 벌여 온다면.
그녀가 말하던 것처럼.
흠검단주가 말하던 것처럼.
그 걸어가야 하는 길이 이리도 다르다면.
청풍은 어디에 서야만 하는가.
대답은 정해져 있던 것일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냉엄하고 차가웠던 사문이었을지언정.
그가, 조그만 손으로 사부님의 거친 손에 이끌려 가파른 화산에 이르렀던 그 옛날부터.
그 때부터 이미 청풍은, 여기 이 자리에 서서, 화산파의 제자임을 말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 기상! 화산이 아니라 숭무의 품에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간다.
서자강의 손이 활짝 펴지고.
속가십대장공을 능가한다 알려진 백결연화장, 막강한 장력이 청풍을 향해 뻗어 나갔다.
파아아아아.
땅을 밟는 청풍.
그의 발밑에서 물보라가 일고.
그의 손, 잡아 쥔 청룡검이 한 줄기 끌어 올려지는 자하진기를 받아 긴 떨림을 보였다.
위이이이이잉!
작은 진기가 목신운형 진결을 거쳐 동방목신 구름을 노니는 청룡기가 되었다.
용보와 운형.
용뢰섬이 섞여들며 작은 힘, 사량발천근의 청룡결이 생성된다.
파아아! 파파파파파파파!
백호무처럼, 한 순간에 터져 나온 이름.
청룡결.
화려하게 터져 나오는 백결연화장의 경력에 회전하고 선회하는 청풍의 청룡검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청룡이 불러내는 구름이다.
청룡이 불러내는 비다.
목신 청룡에 힘을 주는 생명이었다.
위이잉! 콰아아아.
그러나.
충만하지 못한 자하진기. 심각한 내상은 결국 백결연화장 일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다가드는 다음 일격.
퍼어어어엉!
청풍의 몸이 하늘을 날고.
뒤 따라 몸을 날리는 서영령의 신형에.
서자강이 빛살처럼 짓쳐들어 그녀의 마혈을 제압해 버린다.
촤아아악! 털썩!
청풍의 몸이 땅에 눕고 말았다.
아버지의 손에 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서영령. 소리 없는 절규가 만천에 휘도는 비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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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입니다.
100회 기념과 동시에, 화산질풍검 출판 기념 이벤트.
내일, 공지로 띄우겠습니다.
내일 연재 전 까지 공지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