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은 일어나지 못했다.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자강이 말했다.
“검을 회수하라.”
청풍이 지닌 세 자루의 검 모두.
막위군과 숭무련 무인들이 청풍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궂은 비 쏟아지는 이 들판은, 얼마나 복잡한 인연과 놀라운 조우(遭遇)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는지.
“거기까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편으로부터 들려오는 한 줄기 목소리가 있었다.
마치 언제나 거기에 서 있었던 듯.
뒤로 넘긴 머리카락.
옆머리는 짧게 깎여 하얀 살갗이 엿보이고 있다. 한 쪽 귀에 흑적색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인간 이상의 무언가가 전신을 둘러치고 있는, 기이한 남자였다.
“네 놈은.........!”
남자를 본 서자강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네 놈이 어째서.......!”
당혹감마저 묻어나는 서자강의 목소리.
서자강의 말투에서 적의(敵意)를 느낀 막위군이 허리춤에서 한 자루 협도(狹刀)를 꺼내들었다.
“위군! 안 돼!”
멈칫.
쳐 나가려던 막위군이 서자강의 외침에 도를 거두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제 사부를 돌아보는 막위군이다.
서자강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멸이다. 이 인원으로는 상대할 수 없어.”
막위군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숭무련의 제일호법.
무상 서자강이 하는 이야기다. 그가 여기에 있는 데에도, 전멸이라니.
이 남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잘 아는군. 확실히 숭무련은 다른 팔황과는 다르단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기이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서자강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삼십년 전, 성혈교 총단이 단 한사람의 손에 초토화 되었다. 이 놈 짓이지. 팔황의 숙적, 당대 무적진가의 가주, 진천이 이 놈이다.”
막위군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숭무련을 비롯한 여덟 개의 문파, 팔황.
원나라 말기, 사패 시절부터 팔황의 가장 강력한 상대였던 곳이 무적진가다.
무적진가의 가주라면, 서자강의 그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혈교 일곱 사도 중 여섯이 죽었어. 사황까지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 놈에 맞서려면 련주께서 직접 나서야 돼.”
서자강의 말이 멈추었다.
기다렸다는 듯, 발해지는 ‘그’의 목소리.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쉽겠군.”
요요롭게 빛나는 눈빛이다.
온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달랐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도 그의 몸을 비껴간다. 그 혼자만이 현실세계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해 볼 텐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무력이 드러나는 순간.
그 목소리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마저도 파동을 일으키는 것 같다.
막위군도, 다른 모든 무인들도 알 수 밖에 없다.
이 남자는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무상, 서자강이라는 강자가 있다지만, 서자강 본인의 말처럼 역부족이다.
절대적인 무위를 지닌 숭무련주일지라도, 이 자에게 이길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서 결정하도록 해.”
‘그’가 한 발 다가왔다.
한 발 다가온다 생각했는데, 어느 새 쓰러진 청풍의 앞에 서 있다. 청풍을 내려다보는 ‘그’다.
‘그’의 말을 곱 씹는 서자강.
서자강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그 이야기는........그냥 보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반문하는 서자강이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물론이다.”
보내 줄 수 있겠는가.
패배를 이미 인정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다른 무인이면 모르되, 이 남자에게 는 이미 승(勝)과 패(敗)의 개념조차 적용시킬 수 없다.
무엇보다 서자강을 물러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움직여 그의 한 팔 쪽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그 홀로 있다면 한 번 호쾌하게 싸워보고, 죽음이든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팔에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그의 딸이 안겨 있다.
싸울 수 없었다.
상대는 수십 년, 팔황과 죽음의 사투를 벌여온 가문의 수장이다.
일단 싸움이 벌어진다면 용서와 자비를 바랄 수 없는 자였다.
이 자의 목적은 청풍이 틀림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포기하고 사라지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리라.
싸움에서 등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이 자에게만은 예외가 될 수 있을 터. 서자강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알겠다. 네 놈의 앞이라면 물러나는 것도 수치가 될 수 없겠지.”
서자강의 눈이 쓰러진 청풍의 허리춤에 묶여 있는 강의검에 닿았다.
시선을 돌리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단은 벗어나야만 한다.
강의검. 흠검단주의 일도 중요했지만, 딸의 목숨도 중요하다.
게다가 여기서 전멸당한다면, 흠검단주의 생사를 밝히는 것 또한 요원해질 수 밖에 없다.
그 뿐이 아니다.
‘그’, 무적진가의 가주인 진천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숭무련에 알려야만 했다.
황실 깊은 곳에 틀어박혀, 강호의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듯 보였던 진천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돌아간다.”
서자강의 명령.
서영령을 들쳐 업은 채, 쏘아져 나가는 그의 신형 뒤로, 막위군과 숭무련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빗방울 하나 맞고 있지 않은 ‘그’.
오연한 눈빛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히 그치는 가을비에.
진천이 아래에 누운 청풍의 위로 한 손을 내 뻗었다.
“일어나라.”
명령처럼 발해지는 한 마디.
닿지도 않은 청풍의 몸이 충격을 받은 듯, 땅에서 펄떡 튀어 올랐다.
“커헉!”
숨통이 트이는 듯, 헛바람을 내 뱉으며 다시 긴 숨을 들이킨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나, 그것은 탁기(濁氣)를 가득 머금어 토해 내야만 하는 탁혈(濁血), 피가 뿜어지면 뿜어질수록 청풍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 빗방울이 얇은 안개처럼 변했을 때.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지.
청풍의 눈이 꿈틀 하며, 움직임을 보였다.
서서히 떠지는 눈.
청풍의 눈동자가 내려보는 진천의 얼굴에 맞추어 졌다.
“재미있는 눈빛이군.”
진천의 첫 마디다.
인연의 끈과, 천하의 이치를 이미 알고 있는 자.
그의 말에 담긴 현기(眩氣)는 청풍이 들었던 적 있던 매화검신 옥허진인의 목소리와도 또 그 격을 달리하고 있다.
범상치 않은 인물.
청풍이 자하진기를 휘돌리며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든 신검(神劍)보다 몸 안의 기(氣)를 먼저 확인하는 것. 훌륭한 자세다. 제대로 배웠어.”
번쩍.
그 말 속에 담긴 무학(武學)의 깨달음이 청풍의 머리 속에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다.
처음 보는 자, 지금까지 본 어떤 누구와도 다른 자임을 알아챈다.
범상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고하(高下)의 의미가 필요 없는 자다.
천하를 엿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정점에 올라 모든 것을 통달한 자의 현신이 거기에 있었다.
터억.
그토록 엄중한 내상을 입었었음에도, 이상하게 몸이 무겁지가 않았다.
바로 일어나 포권을 취하는 데, 기혈의 뒤틀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입었던 내상이 치료된 상태라는 뜻이다. 그것을 해 주었다면 누구인가.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구명(救命)의 은(恩).......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그렇듯 순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타고난 천성이 어디로 갈텐가.
그것을 알아 본 진천이 그 권태로워 보이던 두 눈에 한 줄기 흥미를 떠올렸다.
“만통자가 하는 말에 속는 셈 치고 와 보았더니, 예상 밖의 인물을 만나는군.”
비가 그친다.
조금씩. 비쳐드는 햇살이다.
아직은 우중충한 하늘이나, 밝아지는 땅이 변하고 변하는 삶의 고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좋은 눈이다. 이름이 무엇인가.”
“청풍입니다.”
“그 내공(內攻). 그 성품(性品). 누구에게 사사(師事)했나.”
“사부님께선 선현이란 도호를 쓰셨습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예상했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선현.......화산에 옥허 외에도 사람이 있었군. 천화가 검맥(劍脈)을 이은 후, 살피지 않았더니. 과연 천하 명산의 정기란 그 안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구나.”
겉으로 보기엔 이십 대 후반이나 되어 보이는 외모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않다.
매화검신 옥허진인과 화산장문 천화진인마저도 가볍게 논하는 자.
무서운 것은, 그런 그의 말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은 차치하고서라도, 온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도가 그 말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직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가능성이 보인다. 무당과 소림만을 생각했었는데 생각을 바꿔야겠어. 험준한 화산 산세에, 패도(覇道)의 장문인. 그 밑에서 순정한 협(俠)의 기질이라면, 역시나 돌고 도는 원, 참과 모자람이 없는 불변의 천도(天道)를 생각해야 하겠지.”
무당과 소림을 말한다.
청풍이 무당파 명경, 그리고 장강의 백무한을 떠올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거기에 더 더욱 놀라운 것은 천도(天道)를 논하는 이 남자의 능력이라고 할까.
마치 청풍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눈을 빛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무(武)의 그릇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는가. 한 가지만 일러주마. 상단(上丹)을 열어라. 쓸 수 있는 심결을 가지고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무(武) 그릇이란 키우기 어렵지 않아. 게다가 그 혈맥에 신검(神劍)의 힘이 함께하고 있으니, 깨달음이 찾아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라. 더 어려운 것은 광명된 마음이야. 그 지닌바 정대한 마음을 지니고 가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는 이야기다.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하는 청풍.
그것으로 볼일이 끝났다는 것일까.
진천이 몸을 돌려 발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시 볼 때까지. 무운을 빌겠다. 은(恩)에 대해서는 훗날 이야기 하도록 하라.”
청풍은 그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모습.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짧고도 짧은 만남.
많은 것을 주고 가는 자다.
그의 말처럼. 다시 보는 날이 온다면.
그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을 해야만 하리라.
진기를 휘돌리며 북쪽 땅을 향해.
발을 내 딛는 청풍의 머리 위로, 서서히 개어가는 가을 하늘이 비쳐지고 있었다.
청풍의 행보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은밀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도록.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다.
서자강의 장력에 입은 충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
대체 얼마나 광대무비한 공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상을 순식간에 다스려 놓았다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회복시켜 놓은 것은 아니었다.
대라신선이라도 못할 일. 아니, 그 내상을 이만큼 움직이게 치료해 놓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신선에 가까운 능력이라 할수 있었다.
깊은 산을 지나, 몇 겹 산중, 물 흐르는 들판 위쪽에.
청풍은 인적 없는 고토(故土)의 험지(險地)에서, 마침내 적사검 철판에 새겨진 장소에 이르렀다.
높게 솟아 있는 언덕.
그저 산중의 언덕이라고만 생각하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청풍은 바위 가득한 언덕의 아래쪽에서 조그맣게 틈을 보이고 있는 동굴 하나를 발견한다.
동굴 입구에 이르러, 청풍은 숲 쪽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늘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미리부터 공력을 완전히 회복시켜 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후우우우.”
모든 기혈을 다시 열고, 내력을 충만하게 일으키는 데에는 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숲 전체, 언덕 너머 주변까지 어떤 무인들의 기척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비 오는 들판의 싸움 이후, 청풍의 흔적을 추적해 온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곳.
어둡게 깔려 드는 밤공기, 나무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몸 상태를 점검할 때.
청풍은 다시 만나게 된다.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는 곳이더라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언제 오고 언제 갈지 모르는 스승.
푸른 도포에 청관을 쓴 노사(老師).
다시 만난 천태세는 여일하게 변한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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