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56)

“많이 성장했다. 놀라울 따름이니라.”

특유의 말투 그대로.

주변을 돌아보는 천태세가 몸을 돌려 거대한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높은 언덕.

그 언덕을 바라보는 천태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돈다.

그가 청풍을 돌아보며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이르렀다. 천도(天道)란 무릇, 이처럼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는 법. 하지만 그것도 네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노릇이니라.”

천태세가 앞장서 언덕 쪽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그 때.

구화산에서 찾기 힘들던 고승의 거처에 데려가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익숙한 듯 거침없이 들어가는 천태세를 따라 동굴에 진입한 청풍은 이내 자하진기를 끌어올려 안력을 돋우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

그랬다.

낮에도 슬쩍 들어 와 보았지만,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꽉 막힌 좁은 동굴, 야생 동물들의 보금자리로도 쓰기 힘들 듯한 장소였다.

“훌륭한 기술이다. 확실히 잘 만들어 놓았어.”

천태세가 가장 안 쪽을 막고 있는 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잘 만들어 놓았다는 말.

청풍이 그 벽으로 다가가 모양새를 살폈다.

이끼가 낀 곳 사이사이로 매끄러운 석벽이 드러나 있다.

건물이나 기관(機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청풍이다. 

하지만 그로서도 자세히 보면 볼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

천태세의 말처럼, 이 벽은 만들어진 석벽이란 뜻이었다. 

손을 뻗어 이끼들을 쓸어 내렸다.

자연적인 벽인 것처럼, 군데 군데 바위들이 돌출되어 있었지만 만지고 두드리다 보니, 그것들도 인공적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청룡검 용갑을 들어 내리치자, 쉽게 부스러져 내리며 본래의 석벽을 드러내 놓았다.

“사방신검.”

사람 어깨 너비의 세 배쯤 되는 벽이었다. 

그 벽을 바라보던 천태세가 꺼내 놓는 이야기. 

긴 시간을 격한 울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사방신검이 천하에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검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 

이전에 나타난 적이 없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이 곳은 그 당시, 사방신검을 지니게 되었단 사람. 동방노인이 남긴 꿈의 흔적이다. 대륙을 내달리고 싶었던 오래된 영혼들의 잔재. 그것이 여기에 있다.”

천태세가 석벽의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좁은 틈새. 

그것을 발견하는 청풍을 보며, 천태세는 다시 청풍의 옆구리를 가리킨다.

‘적사검.’

열쇠라더니.

그 열쇠라는 단어는 어떤 실마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말 그대로 열쇠인 게다.

틈에 맞추어 껴 문을 여는 도구.

청풍은 부러진 적사검을 검집에서 뽑아 내, 그 틈새 안으로 밀어 넣었다.

키기기기긱! 

그르르르르릉!

안 쪽에서 묵직한 금속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태연한 신색으로 서 있는 천태세.

이내, 들려오는 금속성이 가까워지더니, 눈앞의 석벽이 먼지를 흩날리며 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실로 신기한 기관(機關)이었다.

부러진 검을 꽂아 넣은 것만으로 커다란 석벽이 밀려난다.

쿵!

완전히 밀려난 석벽 끝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꽂혀 있던 적사검이 ‘끼릭’소리를 내며 반 자 정도 밀려 나왔다.

진기한 광경이었다.

석가장. 

온 장원이 무너져 내리던 석가장도 굉장했지만, 이것은 또 다른 정교함과 세밀함으로 청풍을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터벅.

열린 틈새로 위아래를 살펴보는 청풍이다.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쇠사슬 소리와 기관의 금속성은 대체 어떤 것들이 낸 것인지, 아무리 살펴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들어와라.”  

열린 문.

곧게 뻗는 석굴이 있었다.

보고(寶庫)라 하기에, 얼마나 험한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했더니, 그런 것은 존재치도 않았던 것 같다. 

전혀 경계하지 않는 몸짓으로 걸어 나가는 천태세.

청풍은 다소 당황스런 기분이 되어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어둡고도 어두운 곳이었으나, 어떠한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묘하게 친근한 느낌이 들고 있다. 그 안 쪽,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의 해답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 왔군.”

어느 순간부터.

옆으로 뻗어있던 돌벽의 양상이 변하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벽돌로 만들어진 곳. 

이십 발자국 정도 들어온 부분부터 그 시대가 달라져 있는 듯싶다. 돌벽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고대의 숨결, 천태세가 그 벽의 한 쪽 면을 가리켰다.  

“이 쪽이다.”

벽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딘가를 향한 입구다.

역시나 익숙하게 들어서는 천태세, 청풍도 금세 그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섰다.

“화섭자가 있는가?”

화섭자. 

저번 마을에서 행낭을 꾸리다가 챙겨 놓았던 기억이 났다. 

워낙에 정심한 자하진기 덕분에, 어차피 주변 사물 분간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이 있으면 훨씬 시야 확보에 편하리라. 

화섭자로 불을 붙이니 눈앞이 확 밝아졌다.

“이 곳은.......?!”

청풍의 두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커다란 석실 한 가운데 널찍한 장방형의 돌판이 놓여져 있다.  

돌로 만든 관. 석관(石棺)이다.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이야기, 청풍은 얼굴 가득 의문을 품은 채, 천태세를 바라보았다.

“그래. 고분(古墳)이니라.”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 중에는 반드시 잘못 된 정보가 섞여있기 마련이다.

동방의 보고(寶庫)라고 했던가.

화려한 금장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석으로 치장된 장신구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보물들과는 거리가 먼 장소로만 보였다.

“본디, 이런 고분이란 산 속에 만들지 않지. 숨겨서 지을 수밖에 없던 영혼의 쉼터, 안타까움이 서린 곳이다. 보아라. 무엇을 느끼는가?”

천태세의 손짓.

청풍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놀란다.

석벽.

네 방향의 석벽에 그려진 그림이 있다.

바로 옆의 서벽(西壁).

백호다.

익숙한 모습이다. 그림의 형태와는 별개로 오랫동안 봐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형상이다.

백호검에 새겨져 있던 백호 문양과 거진 다를 바가 없는 벽화가 벽 전면을 채우고 있었다. 

청풍의 눈이 번쩍 옆으로 돌아갔다.

반대편의 동벽(東壁).

청룡이었다. 

청룡검 검신에 새겨진 문양처럼.

구름을 휩싸고 비늘 갑옷을 둘러친, 청룡의 벽화가 벽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동청룡과 서백호. 벽사(?邪)를 기원하는 영물(靈物)로서 무덤을 지킨다. 이들이 있기에 영혼은 안식을 얻으며, 잡귀(雜鬼)의 시달림을 받지 않느니라.”

청풍의 시선이 이번에는 북벽(北壁)에 이르렀다.

백호와 청룡.

검을 통하여 본 적이 있다면, 남과 북의 신수(神獸)들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풍의 시선이 남쪽으로 돌아갔다.

붉은 새.

주작(朱雀)이다.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니, 불같은 기상이 일어난다.

주조(朱鳥), 봉황(鳳凰)의 형태, 화기(火氣)를 맡은 태양신의 형상이었다.

청풍의 시선이 마지막 북쪽에 이르렀다.

역시나 익숙하지 않다. 

거대한 거북 형상에 꿈틀거리는 뱀이 동체(同體)를 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현무(玄武).

북방에 위치하기에 현(玄)이라 하며, 등껍질이 단단하기에 무(武)라 부른다.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의 모습이었다.

“남주작과 북현무는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는 신수이니라. 우주를 담고, 선도를 담는다. 그 가운데 땅이 있어, 등사와 구진이라, 위에는 하늘이 있으니, 인간만이 오롯한 위치를 지킨다.” 

사신(四神), 사신도(四神圖).

청풍은 알 수 없는 격동을 느끼며, 천정을 올려 보았다.

구름문양 가득한 곳, 사람이 하늘이고 또한 사람이 땅이다.

이제와 여기서 이런 벽화를 보는 지금.

청풍은 그 몸 속 심장에 가득 찬 혈맥(血脈)의 흐름을 벅찬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천하에 약속된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약속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여기에 이어졌으니, 그것이야말로 네가 그 검들을 다룰 수 있는 이유이니라.”

머리보다 먼저.

모든 것을 알 것 같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주변을 휘도는 운명들이, 세월의 흔적들이 손에 잡을 듯 느껴진다. 

“힘을 더 키우기로 마음먹었다면, 이곳이 바로 그 약속의 땅이 될 수 있다. 측실(側室)을 연공실(煉功室)로 써라. 이 무덤의 주인은 대륙의 꿈을 꾸던 자, 그 옆에서 무(武)의 연련이라면 결코 안식에 누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영혼도 기꺼움을 느끼리라.”

현실(玄室)과 측실(側室)로 나뉘어져 있는 구조다.

앞장서는 천태세.

청풍은 경건한 마음으로 이름모를 고분의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시신의 안식처인 현실을 나선다.  

넓은 석실.

측실의 천정에는 연꽃 문양들이 조각된 안 쪽으로 무사(武士)로 보이는 남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긴 깃털 두 개를 양쪽에 꽂아 놓은 모자를 쓴 무사들이다.

중원의 양식과는 다른 복식들.

동방의 보고(寶庫)가 거짓이다?

아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동방의 정기(精氣)가 충만한 곳, 역사의 보고(寶庫)다. 

화려한 재화만이 보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재보(財寶)란 굳이 빛이 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찬연한 꿈의 증거.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무가지보(無價之寶)였다.

그리고 마침내.

청풍의 눈이 천태세에 이르러, 그 동안 남겨 두었던 질문을 던져낸다. 

언젠가는 알아야 할 그것. 

청풍의 입이 열렸다.

“이 고분. 이 땅. 그리고, 사방신검. 노사(老師)는 어떤 분이십니까.” 

을지백과 천태세.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다.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할까.

천태세의 입가에 차분한 미소가 깃들었다.

“나는, 우리는.”

천태세는 청풍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 스스로 ‘우리’ 라는 표현을 썼다.

을지백. 그리고 천태세.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동방에서 약속을 짊어지고 온 이들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네가 사신(四神)을 알고, 네 자신을 알았을 때 저절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니라. 더 나아가고 나아가면, 길은 열리고 다음의 하늘이 펼쳐지는 법이거늘, 남은 것은 오직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거기까지다.

모든 해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 예상했기에.

청풍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은 당장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천태세의 말처럼, 오직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것인 바.

연련의 시간.

탈바꿈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                   *                    *

“이것이 청룡결의 제 모습이다. 감이 잡히는가?”

“투로(鬪路)는 알겠습니다.”

“투로를 잘 갖추어야 실전(實戰)에 탄력이 생긴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 다만 얼마나 체계적으로 정리하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예.”

“두 진기의 융화는 어디까지 되었지?”

“잘 섞이지 않습니다. 워낙에 성정이 다른 진기이니까요.”

“그렇겠지.”

“그래서 자하진기의 연마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옳은 선택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려면 땅이 비옥해야 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지(地)가 먼저라는 점을 잊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단전이 잡혀야 인(人)이 살아난다. 백호기와 청룡기가 인(人), 중단(中丹)과 가장 크게 호응하는 진기(眞氣)라고 할 수 있지. 백호기와 청룡기. 심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중단이란 사람의 마음, 굳건한 육신으로 그 땅을 만들어줘야 하느니라.”

“예.”

“육신과 마음이 정(瀞)해지면, 혼(魂)을 연련할 수 있다. 백호기와 청룡기를 제대로 융화시킬 수 있다면, 백(魄)의 영역까지도 넘볼 수 있으니라. 천(天)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지(地)와 인(人)을 정심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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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배는 끝났습니다.

능동적으로 나아갈 길만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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