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56)

고봉산의 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눈에서 손가락을 땐 장현걸이다. 

그가 눈을 뜨고, 고봉산을 바라보았다.

“봉산.”

“예.”

“도저히 안 되겠다.”

“예?”

“너, 돌아가라.”

“아니, 그게 뭔 소립니까. 돌아가긴 얼로 돌아가요?”

“안휘성. 원래 네가 있던 구화지부로 돌아가란 말이다. 더 이상 말려들지 말고.”

“예에?”

“더 있으면 위험해. 이 상황대로라면, 그 쪽에서도 움직일 거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어.” 

장현걸의 얼굴은 더 이상 침중할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고봉산도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은 듯, 걱정스런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모든 것의 시작은 석가장이었다. 거기에 관여해서는 안 되었어. 아니, 관여했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지. 너무 쉽게 생각했었어. 거기서 망가지고 말았다.”

장현걸의 시선이 연선하에게 닿았다.

“매화검수. 매한옥 그 친구도.......아직 그대로겠지?”

“........그래요. 못 뿌리치고 있지요.”

연선하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녀를 보는 장현걸의 얼굴에 떠오르는 빛.

그것은 죄책감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었다.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어. 그런 식이 아니었다면, 그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자책하는 말투에 연선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죠. 그나 나나, 화산의 제자로서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당신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게다가 저로서도 석가장의 임무실패에 대한 징계를 가볍게 받게 된 것에는, 당신이 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던가요.”

후개.

개방 방주의 후계자로서 지니는 비중이다. 

삼 개월의 매화검수 자격 박탈과, 대외적인 활동금지.

화산 장문인과 직접 만나 상황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야기하여 연선하가 받아야만 했었던 문파의 징벌을 줄여주었었던 장현걸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했던 도리였지. 일종의 속죄였으니까.”

속죄.

그 단어에 먼저 얼굴을 굳힌 것은 고봉산이었다.

더욱 더 가라앉는 방 안의 공기다.

장현걸이 한숨을 내 쉬더니, 연선하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해결할 것은 해결해야 하겠지. 고백할 것은 고백해야 할 것이고.”

잠시 멈춘 목소리, 꺼내기 힘든 말을 하는 기색이었다. 

천천히 이어가는 장현걸의 얼굴에는 전에 없었던 비장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소.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감추어져 있었던 비밀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다.

장현걸이 할 이야기를 눈치 챈 고봉산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청풍.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당연한 말이다.

그 이름이 여기에 왜 나오는가.

연선하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는 강호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지. 실제로 죽었다는 소문도 퍼진 적이 있었으며, 지금 상태에서도 행방불명된 상태요.”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작년 가을. 

석가장에서 청룡검을 얻은 후, 무작정 북쪽으로 향했다 알려진 청풍이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사라져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사제.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떠한 정보도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살아있을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며 답답함을 삭혀가고 있는 연선하에게, 청풍에 대한 소식이란 기대되면서도 두려운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수많은 강호인들이 그를 쫓았소. 백호검을 들고 있을 때에는 백호검을 노리기 위하여. 청룡검을 얻었을 때에는 청룡검과 석가장 보고(寶庫)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천천히 천천히 이어지는 장현걸의 목소리다. 

연선하의 얼굴을 살피는 그의 눈에 결국 무엇인가 결단을 내린 듯한 빛이 떠올랐다.

“그를 쫓도록 만든 사람. 강호에 그의 행방을 퍼뜨린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흔들리던 연선하의 눈이 한 순간 착 가라앉았다.

불신의 기색. 그녀의 눈이 장현걸의 눈에 머물렀다.

“설마.”

“그 설마가 맞소. 바로 나였지. 화산 제자 청풍을 죽음으로 몰아쳤던 자. 그것이 개방 후개, 장현걸이오.”

결국.

입 밖으로 뱉어낸 말.

한 덩이 얼음덩이가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공기를 일으켜 나간다.

연선하가 탁자 위 죽간에 올려져 있던 팔꿈치를 접어 한 손으로 도톰한 입술을 매만졌다.

커다란 갈등을 일으키는 기색이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조사한 만큼 알고 있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나겠지. 어쩔 수 없었다는 것, 그것으로는 변명이 되지 않을테지만.”

장현걸.

솔직함이 묻어나는 얼굴이다.

그러나, 연선하의 얼굴에 새겨진 서릿발 같은 냉정함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청풍 때문에 마음 졸였던 것이 얼마나 컸던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지,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던 그녀가 이윽고 한 마디 입을 열었다.

“육극신에 관한 것도.......?”

“그렇소. 그에게 육극신에 관한 것을 가르쳐 준 것도 나고, 비검맹에 그의 정보를 흘린 것도 나요.”

“그렇다면.......작년 가을 개방이 움직였던 것은.......”

“개방이 움직인 것. 다른 강호인들의 핍박을 막고,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당신에게는 말했었지.”

연선하가 석가장에서 입은 부상을 추스르고 몸이 회복되면서 장현걸에게 들은 이야기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들. 

장현걸은 한 번 깊게 눈을 감았다 뜨고, 말을 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소. 함구령을 내렸으니 당신을 몰랐겠지. 언젠가는 알게 되었을 테지만. 그럴바엔 나에게 직접 듣는 것이 나을 것이오. 그를 도와주기 위해 보냈다는 개방도들은, 그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소. 오히려 그 반대였지. 그를 추격하여 공격하고, 청룡검을 빼앗으려 했소. 그것이 진실이오.” 

털어놓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의 기분.

연선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고개를 설레 설레 젓고 말았다.

탁자 위 어지럽게 쌓여 있는 죽간들에 시선을 주던 연선하. 

그녀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랬어.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그랬던 거야. 그래야 들어 왔던 정보들이 제대로 맞추어져.”

청풍에 관한 일들은 그녀 나름대로도 알아보려 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삼 개월 동안 매화검수로서 활동이 불가능했던 만큼, 그녀가 접할 수 있는 정보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제 와서야 다시금 서천각 업무를 보게 된 그녀였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았던 일들, 그 해답이 장현걸의 이야기 속에 있었다. 비로소, 그 실체를 알게 된 것이다.

“이유라도 들어봐야겠어요. 대체 왜 그래야만 했죠?”

죽간들에 시선을 고정한 그대로.

그녀는 장현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장현걸을 쓰디 쓴 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소. 그럴 수밖에 없었지.  당신과 매한옥의 안위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다른 강호인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구실이 절실했소. 무엇보다 손진덕, 석가장 총관의 신병을 확보한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랬소. 풍 장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도 당장 다른 방도가 없었지.”

“풍 장로라면 천품신개?”

“그렇소. 풍대해 장로.”

“........”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이야기.

연선하는 머리가 차갑게 식은 만큼, 장현걸이 처한 상황도 냉정하게 판단해 볼 수 있었다.

과연 다른 선택이 없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일이었으리라.

문제가 있다면, 협의지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개방도로서.

그것도 개방 후개로서, 확실히 해서는 안 되는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더 해명할 일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덧 붙이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지.

장현걸이 끊어졌던 말을 이어 붙여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소. 손진덕을 심문하여 풍장로에 관한 단서를 잡기는 했지만, 그것은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 결과적으로 개방이 석가장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오. 수많은 제자가 희생되었고, 청룡검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방도들이 동원되었지만, 역시나 실패로 돌아갔소.”

이제는 고백과 함께, 다음 일에 대한 예상도 섞여 있었다. 그가 고봉산을 구화로 돌려보내려는 이유 역시 거기에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장로는 바보가 아니오.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과감한 분이지. 손진덕에게서 정보가 흘러나왔다는 것 쯤, 금세 눈치 챘을 것이오. 얻은 것도 없이 이쪽의 패를 다 보여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더욱이, 석가장의 일을 구실 삼아 이미 압박을 가해 오고 있는 중이오. 그만한 인력을 동원하고도 뚜렷한 결과물이 없으니까 그렇소. 무엇이 어떻게 되었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그 압력은 더욱 커 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와 관계하고 있었던 모든 개방도들이 다칠 수밖에 없소. 승산 없는 싸움이라면 필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지. 봉산, 그것이 내가 너를 돌아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

고봉산. 

연선하.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내부로부터 장현걸을 조여들고 있는 힘.

연선하가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대체 천품신개의 뒤에는 누가 있는 것이죠?”

세간에 알려진 정협(正俠)의 모습과는 다르다. 

장현걸은 알고 있는 바를 전부 말하겠다는 듯, 그 비밀까지도 연선하에게 이야기 했다.

“나로서는 단심맹을 의심하고 있소. 단심맹 역시 팔황의 하나지. 구주를 이야기하고 팔황을 되새김하는 그들이오. 그들의 힘은 사해에 뻗어 있소. 그 힘으로 개방까지 집어 삼키려고 하는 것이오.”

“첫 목표는 후개 당신이겠군요.”

연선하.

목소리에 담겨있는 냉기(冷氣)가 다소 줄어든 느낌이었다. 

납득하고 있는 것인가. 

어차피 청풍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바. 

연선하는 장현걸의 말에서 느꼈던 분노와 놀라움을 일단 눌러두기로 마음먹었는지, 당장 경동하지는 않았다.  

더욱 더 짙어지는 쓴웃음으로.

장현걸이 대답했다.

“맞는 말이오. 나에게는 이제 피할 구석이 없소. 풍 장로는 내부에서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실패를 구실삼아 끊임없이 내 입지를 줄여 나갈 것이고, 단심맹은 외부에서 나를 노려오게 될 것이오. 아직까지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지만 머지않았소. 성혈교가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요. 이런 식이라면, 실로 위험하지. 더 이상 나로서는 속수무책, 어떤 방도도 유용하지 못하오. 당신도 마찬가지요. 이렇게 된 이상, 나와는 행동을 같이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오. 아니, 어차피 정나미가 떨어져서 함께할 마음도 안 나겠지만 말이오.” 

자신감을 크게 잃은 모습이다.

협의지도를 어겨가면서까지 청풍을 죽음으로 몰아세웠던 행동에는 그 스스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화를 내고, 다그쳐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연선하는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 그녀가 상심해 있었을 때.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었던 그의 시도가 있었던 까닭이었을까.

아니면, 생명의 은인으로서, 그녀를 구해주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다시 죽간을 펴 들었다. 

굳어지는 장현걸의 얼굴. 

연선하의 목소리가 죽간들 위에, 편치 못한 그의 마음 위에 내려앉았다.

“당신을 용서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무엇이 정도(正道)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면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을 거예요.”

*                *                *

그 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안 드리고 연재 중단했던 점, 먼저 죄송스럽다는 말씀부터 올립니다.

제 건강을 염려해 주시고 무슨 일이 있었을지 걱정해 주셨던 분들.

너무너무도 감사드립니다.

제 건강은 일단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제 건강이 아니라, 어머님의 건강이 문제셨습니다.

아들이다 보니, 오히려 이야기를 안 해주시던 어머님이었는데, 안방에서 왠 병원 팜플렛을 발견하여 사실을 알게 되었죠.

며칠 후에, 어머님께서 큰 수술을 하십니다. 

효자 노릇을 못 해드리던 자식이라, 어떻게든 마음 써 드리려다 보니, 연재나 그 밖의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큰 일이라면 큰 일일수 있지만 또한 편히 생각하면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임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일도 있고요.(고무림 내에서요).

일부러 쪽지까지 보내 주셨던 여러 독자분들께도 일일히 답장 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연참대전이 새롭게 시작되었는데.

글쎄.

따라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게 될 것 같습니다.

기다리시는 독자분들도 중요하고, 글 쓰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제게는 어머님 건강이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네요.

작은 분량씩이라도 올려보려고 애는 쓰겠습니다.

잘 되지 않더라도 좋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어머님께는 그만큼 못 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무척 안 좋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잘 되길 바랄 뿐이네요.

새해, 가족들 더 많이 많이 신경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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