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56)

  

제나라의 옛 수도로서 오랜 역사를 지녔던 고도(古都), 제남.

산동성 일대에 위치한 화산(華山)의 지파(支派)들을 통괄하는 화산 산동(山東) 지부(支部)는 그와 같은 역사의 고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말 놀랍군요.”

제남으로 날아든 하나의 죽간에는 현재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다지?”

부드러운 목소리.

작은 키에 온화한 인상을 지녔으나 언뜻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남자였다.

“난리가 났습니다. 허공노사의 실종 이후, 북풍단주가 출현하여 철기맹을 파죽지세로 몰아치고 있다고 합니다.”

“북풍단주?”

“작년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혼인식에 난입하여 온 강호를 들끓게 만들었던, 그 마검(魔劍) 말입니다.”

“아아, 결국 무당에서 파문조치까지 내렸던 그 자로군.”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화산파 산동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도인, 단영검객(斷影劍客) 송현(宋晛)이었다. 속가제자 출신이나 젊은 시절 매화검수를 지냈으며, 지닌바 검술이 본산 장로 이상이라 일컬어지는 고수였다. 

“단신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강서로 진입하던 철기맹 주요 근거지들이 삼일만에 박살나고 말았답니다.”

“단신으로?”

“예. 철기맹 서금지부, 석성지부가 연이어 무너졌을 뿐 아니라, 광동의 화평 본부까지 초토화를 시켰다더군요. 그 일대 전 철기맹 지부들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합니다.” 

“허어.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그럴 수 있을까. 한 문파를 통째로 물러나게 만든다? 그 정도라면 장문인께서 직접 나선 것에도 못지않겠어......” 

“그렇지요. 이미 천하(天下)를 논하는 무위라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철기군 탁무양이 제 아무리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무공에는 당할 수가 없겠지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송현의 사제, 지운검객(智澐劍客) 이지정(李智晶)이었다.

산동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련한 서천각의 업무를 보고 있는 이. 

역시나 속가제자 출신으로 매화검수까지 오르지는 못했으나, 지닌바 재지(才智)가 무척이나 훌륭하여 한 성의 군사로 있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재인(才人)이었다.  

“화산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어. 본래는 우리의 싸움이었는데 말이다.”

“예.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북풍단주 쪽에서도 잃은 게 많다고 하니까요. 저번 싸움에서 북풍단 주요 인물 몇 명이 죽었다는 정보입니다. 게다가 허공노사께서는 북풍단주의 스승이셨죠.”

“북풍단주.......북풍단주라. 무당의 파문제자임에도 별반 제지가 없는 모양이지?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예. 그렇습니다. 그 파문 건도 사실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말만 파문이지, 실상은 무당파의 전력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북풍단 단원들도 매한가지고요.”

“하기사, 이미 구파의 장문인에 필적한다 여겨지는 무공이라면, 파문이란 두 글자로 어찌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겠지.”

“........”

단영검객 송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

북풍단주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는 그의 눈이 더욱 더 깊게 가라앉았다. 입매를 굳히고 잠시 동안 침묵하던 그가 이내 한 쪽으로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죽간들을 가리켰다.

“이 일.......놀랍다고만 말할 일이 아니다. 그냥 스쳐 넘겨선 안 돼. 지금까지 매화검수의 피해가 얼마나 된다고 했나?”

“작년, 처음부터 말씀이십니까.”

“그래. 작년에 처음 철기맹과 부딪쳤을 때부터.”

“작년부터라면 사망자는 일곱 명이고 자격 박탈자는 네 명입니다. 그 중 철기맹과의 직접적인 싸움에 의하여 사망한 이는 여섯 명이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격을 박탈당한 이는 세 명입니다. 부상자들 중 매화검수로서의 임무 수행이 어려운 두 명까지 합하면 총 열 세 명의 매화검수를 잃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지정은 죽간을 펴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쯤은 이미 머릿속에 모조리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열 세 명이나 잃었다니, 막심한 손해로군.” 

송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침중했다.

젊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깎여버린 화산파의 체면을 아쉬워하는 것인지,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심각한 손해이긴 해도, 터무니 없는 숫자는 아닙니다.”

“터무니 없다.........매화검수들의 희생 없이 싸우기엔 애초부터 어려운 상대였다는 말이겠지?” 

“예. 화산은 철기맹을 너무 가볍게 보았습니다. 정보도 부족했고, 대응도 좋지 못했으니까요. 지나치게 커진 화산파의 규모에, 옥석을 가려내기 위한 실전 무대로 이용했다 한들, 잃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얻은 것이 비해서요.” 

장문인의 의도까지 모두 다 읽고 있었던 이지정이다. 하지만 송현이 보고 있는 것은 그런 전략적인 배경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야.”

보다 근본적인 것.

송현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돌리듯, 질문을 던졌다. 

“북풍단주라는 자. 나이가 얼마나 되나?”

“예?”

“북풍단주의 연배 말이다.”

“북풍단주의 연배라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사십 세 안 쪽이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허공노사께 사사받았으니, 배분 상으로는 굉장하지만, 실제 나아니는 무척이나 젊지요.”

“그래. 젊지. 굉장히 젊어. 그 나이에 철기맹과 같은 문파를 뒤흔들 수 있는 무인, 화산파에는 있나?”

바로 그것이다.

그 나이의 그 무공.

이지정이 깨닫는 바가 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

“북풍단주 뿐이 아니지. 일권진산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작년에 무당산에서, 무당파에 들어오는 자 병기를 지닐 수 없다는 해검지(解劍地)를 선언했던 이도 기껏 서른 정도나 되었음직한 젊은이였다고 했지. 그 연배, 말하자면 후기지수야. 그들과 같은 연배를 화산에서 찾는다면 결국 매화검수라는 이야기가 되지. 그러나 매화검수는 어떤가. 철기맹과의 싸움이 험했다고는 해도, 반밖에 남지 않았어. 그 드높은 자존심과 명성에 비하여 그 무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긴 이야기를 듣는 이지정.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매화검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 것이군요.”

“그래. 매화검수라 함은 화산파의 주력으로 내세운 문파의 얼굴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드러난 바, 무당파의 젊은 고수들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직관으로 문제점를 짚어낸 송현이다.

지모와 이론에 능한 이지정이 그 원인을 분석한다.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이지정, 천천히 입을 열며, 그 대답을 한 마디씩 차근차근 풀어놓기 시작했다.

“화산파. 매화검수.......매화검수는 말씀하신 것 처럼 화산파의 얼굴이지요. 그것이.......도리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닐지요. 매화검수들의 무공을 보면, 급속도로 발전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정체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운대관, 천화관, 소요관을 통과하고 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고수의 반열에 오를 뿐 아니라, 화산파 내외에서의 지위와 권한도 대단하지니, 그 이상 뻗어나갈 기회를 잡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한 해답이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이지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송현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결론은 하나야. 지금의 매화검수들로는 안 된다는 것. 이대로라면 화산파는 나설 기회를 잃게 돼. 장문인께서 직접 나서셔서 살검(殺劍)을 쥐신다면 북풍단주와 같은 위력을 못 보이시겠냐만은, 그래서야 무당파의 파문제자와 같은 위치로 내려서는 것 밖에 안 된다. 우리가 시작한 싸움, 그러나 이대로 북풍단주나 무당파가 끝을 내게 되면, 화산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게 돼.”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위기라 할 수 있었다.

구파, 특히나 화산파에 있어, 문파의 명예란 지고의 가치를 지니는 명분이다.

그것을 잃는다면 문파의 정신이 타격을 입는 바, 화산파의 입장에서는 북풍단주의 막강한 무위가 오히려 화산의 체면을 깎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강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늦었어. 북풍단주에 비견될 고수가 나와 주면 될 테지만 그럴만한 후기지수는 보이지 않아. 매화검수들 중, 뛰어난 무재가 아닌 이 없다지만, 누가 되었든 그 수준까지는 무리일 터. 화산의 성세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다.” 

송현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스로 속한 문파가 최고가 되길 바라는 그 순수한 마음들에.

화산과 수 천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짙은 한숨이 떠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지난 어느 화창한 봄날.

제남에 찾아온 한 줄기 바람이 있었으니.

단영검객 송현과 지운검객 이지정의 마음에도 다시금 희망의 불꽃이 일렁이게 된다. 

*             *            *

화산파 산동지부의 현판은 이층으로 된 커다란 전각의 대문에 올려져 있었다.

화산파와 관계되어 있는 수많은 문파들의 무인들과, 산동지부에 오가는 속가제자들의 발길로 분주하던 산동지부는, 화산파 전체가 전시체제로 들어간 만큼 엄중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땅 위를 가로지르고, 시리도록 하얀 구름이 하늘에 수놓아진 봄날이었다.

집무실에서 수많은 서신들과 죽간들을 살피고 있던 이지정은 화산 특유의 절도 있는 동작으로 들어온 지부소속 제자에게서 뜻밖의 보고를 받는다.

“이 사부님.”

“무슨 일인가.” 

가라앉은 기분 때문인가.

이지정은 문서 위에 머물러있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용무를 물었다. 

“본산의 영패를 지닌 사람이 이 사부님을 만나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본산의 영패?”

본산의 영패. 

그런 물건은 없다. 동그랗게 만들어진 금속 영패라면 화산파에서도 사용하지 않은지 삼십년이 넘었다. 아니, 그러고 보면 아주 없지도 않다. 매화검수나 화산 본산 제자를 사칭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조악한 물건이라면 가끔 있기는 한 것이다. 하지만 감히 화산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것은 도리어 강호를 잘 모르는 이들이나 할 수 있는 일, 십이면 십,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안건이었다.

“예. 매화가 새겨져 있는 영패입니다.”

“매화?”

이지정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역시나 그렇다. 매화 영패라면 볼 것 없이 사기다.

매화검수들의 신분은 허리에 찬 매화검으로 나타내니까.  

이지정은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에만 박혀 있다. 제자의 머뭇거리는 대답이 귓전을 울렸다. 

“백색의.......매화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백매화?”

“예. 어찌 할까요?”

“돌려 보내.”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지정은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필을 들고 글씨를 쓰는 이지정.

문서 위에 고정되었던 그의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백매화........은패?’

워낙에 오래 전에 들었기에 잊고 있었던 서천각의 업무 하나를 떠올린 그다.

써 내려가던 세필을 멈추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그 영패가......”

그제서야 고개를 든 이지정이다.

흠칫 굳는 얼굴, 이지정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이미 들어 와 있었다?’

그렇다. 

그의 집무실에는 보고를 하러 온 제자만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립을 쓴 남자.

백매화 은패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자 역시 그의 집무실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서천각의 일을 보시는 분이십니까.” 

죽립을 벗으며 먼저 말을 걸어온다. 

드러나는 얼굴.

대단한 첫인상이었다.

미모(美貌)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얼굴에, 거친 기상과 차분한 지혜가 함께 드러나고 있다. 

허름한 도포 속에는 완전하게 다듬어진 육체가 엿보이고 있었다.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이 함께 서려있는 듯한 모습, 신비롭다고까지 할만한 기도였다.

“그렇네. 내가 산동지부 서천각의 일을 보고 있는 이지정일세.”

이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로 등을 기댔다.

이 정도 거리.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데에도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것은 상대가 외모 이상의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기를 끌어올리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처할 준비를 하는 이지정이다.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여는 남자의 말에, 이지정은 자신의 눈에 이어 귀까지 의심했다.

“화산 제자. 청풍입니다.”

‘화산 제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십 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매화검수 중에서도 이런 기도를 낼 수 있는 이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설마하니 같은 화산의 문하일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이유다.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이지정.

스스로 청풍이라 밝힌 상대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백매화가 정교하게 새겨진 은패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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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걱정과 우려 보여주신 독자 여러분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렇게 관심가져 주셨던 만큼, 어머니께서도 저번 주에 무사히 수술을 마치셨고, 이제 많이 회복되셔서 슬슬 아들을 구박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본디 워낙에나 강하셨던 분이셨기에, 그 동안 약해지신 어머니 모습을 뵈려니 참으로 마음이 쓰리더군요.

그래도 한시름 놓은지라, 이렇게 글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시는 만큼, 댓글 하나 하나에도 기운을 얻었었고요. 

그렇게 흘러가는 와중에도 어찌 어찌 3권이 출판되었다 합니다.

이전에 많이 써 놓고, 수정도 간간히 봐 놓았었기에 망정이지, 출판 스케쥴에도 거의 신경을 못 써서, 출판사 편집팀에서 고생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러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또 한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올려야 되겠습니다.

3권은 내용 면에서 손 본 것도 있지만, 거의 모든 문장을 새롭게 바꾸었다 해도 될만큼 매끄러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연재분에서 보셨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 받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이제는 연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만간 출판사와의 계약 문제로 연중을 해야만 하겠지만, 그 때까지는 다시금 성실한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S. 시간이 나는 고로, 이제 이벤트와 연재 외적인 것에 대해서도 하나 하나 새롭게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도 안 챙겼다고 하여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꾹꾹 새겨서 

      기억하고 있사오니, 그동안 제대로 신경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히 용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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