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은매패(銀梅牌).........!”
매화검수.
아니다.
매화검수는 원로원의 명을 받지 않는다. 오직 장문인의 명만을 받을 뿐.
원로원에서 키운 제자인가.
하지만 원로원에서 그런 제자를 키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기이한 일이었다.
게다가 더욱 기이한 일은 청풍이란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다는 사실이다.
은매패를 뚫어지게 바라본 이지정은 그제서야 기억 속에 박혀있는 하나의 이름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청풍! 청풍. 그래! 원로원의 비호를 받으며 백호검을 지니고 강호로 나섰던 보무제자!’
청풍. 어찌 그것을 잊고 있을 수 있었을까.
장강 비검맹의 영역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었지만, 석가장 참사 때에도 나타났다 하였고, 청룡검을 입수한 후에는 안휘에서 산동까지 긴 추격전을 벌였던 이름이다.
당시에는 화산과 철기맹과의 싸움이 한참이었고, 북풍단주가 일으켰던 도주사건이 워낙에 큰 관심을 끌었던지라 별반 주목을 받지는 못했었지만, 서천각 측에서는 청풍의 행보를 꽤나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었던 바 있었다.
산동성, 서천각 이지정의 관할까지 넘어 왔던 청풍이다. 하지만 그가 청풍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은 미묘하게 시기가 늦어진 다음이었고, 뭔가 손을 쓰려 했을 때에는 이미 청풍의 행보가 불분명하게 변해버린 상태였었다. 서천각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었기도 했지만, 청풍을 쫓았던 집단들의 행사가 무척 은밀했던 까닭이었다.
“이 은패는 원로원의 명을 대신하지. 이것을 가져 왔다는 것,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내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야.”
이지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과 일부가 될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던 모습에서 한 순간에 벗어나는 느낌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사형께 말씀드려야겠어. 송 사형이 이 산동지부를 책임지고 계시는 만큼,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집무실을 나가더니, 한참이나 걸려서 돌아온다.
문을 여는 이지정.
혼자가 아니다.
단영검객 송현의 다부진 체구가 그의 뒤에 함께하고 있었다.
“자네가......그 청풍이로군.”
“예.”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 생각했더니, 이지정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었다. 청풍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 그의 눈이 청풍의 전신을 훑었다.
“사라졌다기에 죽은 것으로만 알았었다. 살아있었다니.”
청풍의 기도는 이제 누가 보아도 놀랄 만큼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만큼, 송현의 두 눈에는 이지정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탄이 머물러 있었다.
화산의 미래를 걱정하며 제대로 된 후기지수가 없다고 한탄했던 것이 바로 며칠 전이거늘, 그 한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인재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산동지부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송현의 시선이 백매화 은패에 머물렀다가 청풍의 두 눈으로 옮겨졌다.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대화다.
산동성 화산 지파들을 이끄는 그의 지위에 무척이나 어울리는 말투였다.
“산동지부에 바란다기 보다는.......”
쏘는 듯한 송현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청풍은 이지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천각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경과 예의를 잃지 않는다.
지닌 바 무공이 본산 장로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단영검객 송현의 앞임에도, 청풍은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서천각이라........”
송현이 다시 한번 눈을 빛냈다.
“정보. 정보를 원하는 것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그랬다.
청풍은 이제 무작정 부딪치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무공의 연련도 중요하지만, 다시 강호로 나온 지금, 그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상태다.
정보가 필요하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 백매화 은패를 통해 서천각을 움직이면, 또 다시 화산 집법원이 찾아올 수 있다? 그런 것은 이제 두렵지 않다. 이렇게 산동지부까지 제 발로 찾아 온 이상, 화산파 본산에서 나서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보라면 어떤 정보를 원하는가?”
“먼저 지금 돌아가는 강호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강호의 상황.........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말하나?”
“작년 석가장의 혈사부터 지금까지 전부입니다.”
“석가장의 혈사 때부터?”
“예, 그렇습니다.”
“석가장의 혈사, 그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
“그 안에 있었지요.”
“그럼에도 다른 일들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야겠다는 말인가.”
“예.”
송현이 이지정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풍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 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검토해 보면서 인과(因果)와 진행(進行)을 상세히 파악해 놓으려는 의도다. 강호에 재 출도함에 있어 확실한 그림을 그리고 시작하려는 모습, 준비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였다.
“화산은 철기맹을 괴멸 직전까지 몰아붙이며 힘을 쏟아 붓고 있었네. 석가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다만 매화검수 두 명만을 파견했었어. 그 안에 있었다면 만났을 텐데.”
“예. 만났었지요. 하지만,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원하는 이유.
이것 역시 그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연선하와 매한옥. 두 사람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그랬군. 결론부터 말하지. 일단 두 사람은 살아 있네.”
‘일단’은 살아 있다.
그 말에 담긴 뜻이 묘했다. 청풍이 되물었다.
“살아 있지만,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천류여협은 괜찮아. 매화옥검이 문제지.”
천류여협은 연선하의 별호다.
무사했던가.
마지막으로 건물이 무너지던 때. 연선하를 구했던 장현걸이 살아 나왔던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화옥검 매한옥.
그에게 일이 생겼으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했던 바다.
청룡검을 잡았었기 때문에.
살아 왔을지라도, 후유증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지대했다.
“매사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매사형? 그가 자네에겐 사형이 되나?”
난데없이 해 오는 송현의 질문엔 또 한번의 감탄이 담겨 있었다.
매한옥보다도 어리다는 사실에 더욱 고무됨을 느끼는 모양이다. 심각했던 그의 얼굴에는 이제 희미한 미소까지 그려지고 있었다.
“사형. 사형이라. 그래, 이야기가 빗나갔군. 매화옥검은 지금, 그 전투의 여파로 폐인이나 다름없게 되었다고 들었네. 그 때 이후로 매화검을 쥐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이요, 결국은 매가장 본가로 귀환 조치가 내려졌지.”
“그 정도입니까.”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음에도 청풍의 목소리는 잔잔하기만 했다.
감정의 기복이 크게 없어진 모습이다. 그 간의 수련이 가져다 준 강인함 때문인 것 같았다.
“제 정신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매화검은 회수되었겠군요.”
“그랬지. 본산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까운 인재가 망가지고 말았어.”
매화검을 쥐지 못하게 되어 회수 되었다는 것은 곧, 매화검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거기다가 본래 출신지였던 매가장으로 보내졌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화산의 전력(戰力)으로는 쓰지 않겠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다.
졸(卒)이 되어 버려지고 싶지 않다면 차(車)나 포(包)가 되어야 한다는 말.
차나 포도 쓸모 없게 된 것은 내려둘 수밖에.
급전직하로 무너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다.
창공을 날던 매화 꽃잎이 땅바닥에 흩어져 부스러지고 만 것이었다.
“천류여협 또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매화검을 반납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네. 아니, 원래는 받아들이려 했었지.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하지만, 개방의 후개가 나서서 그것을 막았네.”
“장현걸 말씀이십니까.”
“잘 아는군. 천류여협이 엄중한 징계에 처해지기 직전, 그가 장문사숙께 독대를 요청했지.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는 잘 모르네. 석가장의 참사가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어찌 될 사안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겠지.”
“그것 외에 다른 것도 있었을 겁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이지정이 송현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장문인께선 쓰임새 있는 인재를 중요시하시지요. 개방 후개가 그렇게 까지 나섰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짧은 시간만에 ‘후개’라는 인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천류여협의 능력을 높게 보셨겠지요. 개방이라는 대 방파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통로를 마련한다는 것이 장문인께서 하신 생각이셨을 겁니다. 실제로 천류여협은 현재, 서천각에서 개방과의 연수를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이지정의 말을 듣는 청풍의 눈이 한번 깊은 빛을 내뿜었다.
이래서 사문의 힘이 중요하다.
놀라운 시야. 그 혼자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주는 이들.
이들은 새로운 조력자라 할 수 있다.
이전까지처럼 조력자들이 청풍을 찾아와 힘을 빌려주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청풍이 그 힘을 찾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찾아서 배우고 활용해야 할 때. 남이 짜 놓은 판 위에서 정처 없이 움직일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을 만들어 나가려는 일보였다.
“그래. 여하튼 그 이후, 화산은 철기맹을 무너뜨리게 되지. 그러는 동안 무너진 석가장에서는 명검들의 보고(寶庫)가 묻혀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군소문파에서 육대세가, 구파들까지 안 나선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 열쇠가 되었던 자. 자네는 산동성까지 질풍처럼 달려왔고, 어느 날 갑작스레 사라지고 말았지.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진 바 없고, 수많은 인명피해만을 남겼다. 그것이 드러난 석가장 혈사의 전모였다.”
청풍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철기맹이 다시 발호하고 싸움이 재개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성혈교가 그 뒤를 지원하며 세력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어디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졌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것들을 하나도 빼지 않은 채 말하는 데에도 청풍은 전혀 지겨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북풍단주로 불리는 마검 명경이, 갑작스레 나타나 철기맹을 박살내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 송현은 갑작스레 한 가지 질문을 던져 왔다.
“놀라운 자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천각에서 보내오는 정보인 만큼, 특별한 과장은 없겠지. 어떤가. 정말 강할 것 같지 않나?”
묘하게 도발적인 한마디였다. 진지하게 전해져 오는 송현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청풍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답했다.
“예. 강하겠지요.”
변함없는 청풍의 목소리다.
송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어왔다.
“자네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단신으로?”
호승심을 자극하는 언사였다.
돌려 말하는 듯 하나, 결국은 누가 더 강하겠냐는 질문이다.
거기에 대한 청풍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는 저보다 강합니다.”
스스로의 무공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위치도 모르는 채, 육극신에게 달려들었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디까지 왔는가.
청풍은 알고 있다.
아직은 따라가야 올라가야 하는 기나긴 무공지로(武功之路)의 도중(道中)일 뿐이었다.
“더 강하다.......그것을 어찌 알지? 싸워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 아닌가?”
“저는 그를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싸워보지 않고도 알 수 있지요.”
“.......그렇군.”
송현은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별반 호승심을 드러내지 않는 듯한 청풍의 눈이지만 그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력한 한 줄기 바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풍단주를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잡으려 한다.
북풍단주가 놀랍다지만, 송현과 이지정에게 이 청풍은 북풍단주 못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현 상황은 어쨌든 그러하네. 철기맹에서는 북풍단주를 막을 도리가 없어. 북풍단주의 무위가 들리는 바와 같다면 철기군 탁무양 본인이 나서더라도 안 될 일이지. 철기맹은 다시 한번 무너질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화산파에 의한 것이 아닐 것이란 사실이겠지.”
긴 이야기의 끝인가.
차근차근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 송현과 이지정이다.
청풍은 그들이 말해주었던 강호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머리 속에 집어넣었고, 필요했던 정보들을 정리하여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그래, 가르쳐 줄 만큼 가르쳐 준 지금. 다시 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어찌 되었든 결론은 하나였다.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끼는 청풍이지만, 그 자신의 입으로 말했듯 그는 아직 마검 명경에 견주지 못한다.
그래서 필요했다.
다음 것이.
청풍이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물건을 찾아야 합니다.”
“물건?”
“예. 잃어버린 물건. 주작검과 현무검의 위치를 파악해 주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부탁드릴 사안입니다.”
“주작검과 현무검을? 그렇군. 그것을 다 찾을 생각이군!”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제 임무는 그것이었지요.”
“그것이 첫 번째라. 그렇다면 두 번째는?”
“매가장, 매사형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매화옥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거기는 어찌하여?”
“매사형을 다시 일으키겠습니다.”
송현은 청풍의 전신으로부터 갈무리 되었던 한 줄기 바람이 밖으로 뻗어 나오는 듯한 환상을 느꼈다.
허리춤으로 내려간 시선.
왼쪽에는 용의 비늘이 조각된 검집 위로 청룡검의 검자루가 보였고, 오른쪽에는 뇌운이 새겨진 검집에 멋들어진 검자루가 눈에 띈다.
작년 가을.
세 거파의 추격을 뿌리치며 암암리에 대지를 휩쓸었던 두 신검이다.
청룡검과 강의검
두 검의 주인이 그들 앞에서 강호에 대한 질풍 같은 의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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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공지도 드리지 못하고 1권 반 분량과 2~3 권 분량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말씀 드리고 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좀 경황이 없네요.
그래도 어떻게든 글은 올려겠다 싶어 이렇게 늦게라도 글을 올립니다.^^
화산질풍검 3권도 나왔지요.
책방에 압력 팍팍 넣어 주시고요.....^^
글은 지우더라도, 달아주셨던 댓글은 하나 하나 전부 다 다른 곳에 파일로 저장하여 평생 보관토록 하고 있으니, 그냥 지웠다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새로 시작하는 연재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 해 주신 것.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침에 열어보시는 여러분. 오늘 하루 좋은 날 되시고요.
저녁 때 보시는 분들. 행여나 짜증나는 일 있더라도 기분 좋게 푸시고 행복한 밤 되십시오.
이 새벽까지 안 주무시고 바로 보시는 분들, 다음날 늦잠에서 깰 때까지 좋은 꿈 꾸시길 기원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