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성 북단을 지나고 동정호의 지류를 건넜다.
육지를 가로지르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지만, 강과 호수를 건너는 데 오히려 많은 시간을 소모한 상황. 경공을 최대한 펼치며 움직인 청풍은 마침내, 형산지부에 이르렀고 명경과 귀도의 위치에 대해 마지막 점검을 했다.
명경의 움직임은 남궁세가를 향한 직선 경로로.
귀도는 명경이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이제는 분명해졌다.
두 사람은 만난다.
그것도 지금 쯤.
서둘러 여기까지 왔지만 청풍은 시간을 완전히 맞추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는 단축했다 해도, 그 둘이 부딪치는 것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할 것이란 이야기였다.
‘서둘러야 한다.’
그래도 청풍은 발길을 재촉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 지에 대한 궁금함보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빨리 당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만날 것이라 서천각에서 예측한 지점은 형산 남서부에 펼쳐진 구릉지였다.
남악(南岳) 형산의 장대한 산세를 감상할 겨를도 없이, 속도를 더 하며 달려간 청풍이다.
하지만 청풍은 그 구릉지에 다다르고도, 목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람의 종적도 없고, 싸움의 흔적도 없다.
서천각에서 준 정보란 어디까지나 어림짐작으로 짚어낸 예측에 불과했던 것. 여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풍은 가장 높이 솟은 언덕을 찾아 올라, 구릉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곳.......!’
청풍의 눈에 남쪽으로 펼쳐진 커다란 대숲이 비쳐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이다. 신묘한 예감의 근원지인 상단전에 느껴지는 특별한 감각을 느끼며, 그 쪽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쏴아아아아.
대나무들을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사방을 녹색으로 채운 그곳의 한 복판에서 청풍은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아낸다.
‘여기다! 여기서 싸웠어.’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터져나간 대나무 줄기들과 바스러져 흩어진 대나무 이파리들.
막강한 내력이 휩쓸고 간 자리다.
청풍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격전의 공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주변의 흔적을 보고 싸움의 흐름을 읽어냈다.
‘동수(同數)다.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어. 귀도란 남자가 그렇게 강했었나?’
청풍은 크게 놀랐다.
명경의 무위를 익히 알고 있는 청풍이기에 더욱 더 그렇다.
땅과 바람에 새겨진 싸움의 결과들.
이 싸움은 결코 일방적으로 진행된 싸움이 아니다.
비슷한 무위를 지닌 자들끼리 생사를 걸고서 벌인 사투가 틀림없었다.
‘이것은........!’
넘어진 대나무들을 따라.
청풍은 움푹 움푹 패여진 땅거죽 사이로 진득하게 남아 있는 핏물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번쩍 빛냈다.
‘피다. 오래되지 않았어!’
싸움의 장소도.
충돌의 시간도.
서천각의 예상과 조금씩 어긋나 있다.
하기사 그 시간과 장소도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일 뿐.
이 정도 오차라면 오히려 실제와 근접해 있는 것이라고 서천각의 능력을 높게 봐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는 두 사람 모두 흘렸다. 이 쪽과 이쪽이 달라. 그 뿐이 아니다. 이 전까지는 두 명의 싸움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일대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흔적이 더 있어.’
청풍은 검게 굳어가고 있는 핏물과 그 주변의 풀숲을 살피며, 또 한번 싸움의 결과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장소에는 명경과 귀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최소한 둘 이상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귀장낭인, 그리고 귀호이리라. 청풍의 두 눈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일대 일 생사결의 비무, 그것이 삼 대 일로 바뀌었다면 그의 패배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정도 혈흔이라면 양쪽 모두 치명상이겠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상황을 살피는 청풍의 두 눈이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싸움은 여기서 끝이 났고, 어떤 방식으로든 여기서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곳에는 단 한 구의 시체도 없다. 설마하니 상대의 시체를 수습해 가지도 않았을 터.
어느 쪽이든 이 정도 피를 흘린 다음이라면, 쉽게 이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찾아야 해.’
그것이 바로 다음 단계다.
이제는 싸움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찾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끝낸 자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찾아야 했다.
혈흔을 따라서.
이리 저리 움직이던 청풍은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하게 된다.
‘이동 방향이 하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움직인 경로는 단 하나였다.
대나무숲 남쪽을 향해 뻗어가는 길.
남겨져 있는 발자국들과 곳곳에 뿌려진 혈흔을 보면, 굳이 흔적을 감추려는 노력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노력 따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었던 듯한 느낌이다.
두 사람의 족적.
귀도 일행의 흔적인 듯 한데, 무엇인가 이상했다. 모두가 부상을 입은 것처럼 드러나 있는 족적이 거칠었다.
‘기이한 일이다. 이 흔적이 귀도 일행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면.......대체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명경.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싸움이 시작되던 곳에 보이던 말발굴 자국.
그것마저도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없어져 버린 상태다.
말발굽 자국은 명경이 타고 다니던 기마가 틀림없을진데, 그것은 또 어인 일일지.
설마하니 귀도 일행이 명경과 함께 움직였을 리도 없었으니, 도무지 해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소용없는 고민이다. 결국 귀도 일행을 만나면 해결될 일이야.’
청풍은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의문들을 단숨에 접어놓고서, 움직이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펼쳐져 있던 대숲을 단숨에 벗어났고, 키 작은 풀숲이 온 땅을 덮은 초지(草地)로 접어들었다.
파아아아아.
얼마나 달렸을까.
좁은 산길로 진입한 청풍은 다시금 상단전을 자극하는 기묘한 감각을 체험했다.
가까워 오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오는 느낌.
무엇인가 강렬한 것이 저 앞에 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
남화(南火)의 기운을 머금은 기물(器物)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 속도가 느려.’
청풍은 마침내, 숲길 저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두 개의 기척을 잡아냈다.
조금 더 접근한 청풍.
그의 눈이 한 순간 기광을 띄었다.
‘멈추었다. 기다리겠다는 것이로군.’
앞쪽에 있던 두 개의 인기척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한 곳에 멎고서 나아가질 않고 있다.
이쪽을 감지한 모양.
대단한 감각이다. 밑바닥부터 깔려드는 긴장감을 느끼며, 청풍은 주저하지 않고 앞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름드리 나무 세 그루 사이.
바로 그 뒤 쪽으로 귀도 일행의 존재를 느낄 때였다.
파라라락!
한 줄기의 거센 파공성.
훅 끼쳐드는 적의(敵意)와 함께, 희끗한 신형 하나가 청풍의 온 몸을 삼켜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어왔다.
“!!”
파아아아!
청풍의 몸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청풍의 움직임은 불시의 습격에도 마치 예측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기만 했다. 첫 일격을 격중시키지 못한 상대가, 급격하게 방향을 꺾으며 달려들어 왔지만, 이미 청풍은 반격의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용갑에 감싸여진 청룡검이 어느 새 묵직한 일격을 뻗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파아앙!
상대의 몸이 단숨에 뒤 쪽으로 튕겨나갔다.
몸을 둥글게 말면서 땅에 착지하는 자. 동물적인 움직임이다.
허리까지 내려올 듯, 길게 내려앉는 백발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남자였다.
‘이 자가 귀호로군.’
길게 찢어진 눈에, 번들거리고 있는 광채가 요요롭다.
사람 같지 않은 기도.
천하에서 가장 요사하다는 표현이 실로 어울리는 자였다.
청룡검 용갑으로 귀호를 겨누고 있자니, 또 한 사람의 접근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자.
“단심(丹心)에서 온 놈인가.”
귀호처럼 다짜고짜 달려들지 않은 채, 한 마디 질문을 던져 온다. 청풍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칠흑같이 검은 눈을 지닌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곱상한 외모이나, 또한 묘하게 거칠다.
두 가지 얼굴이 동시에 있는 듯한 느낌.
바로 이자다.
이자가 바로 귀장낭인이다.
귀장(鬼將). 장수의 칭호가 별호 안에 있기에 꽤나 나이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이제 보니, 아무리 높게 쳐 주어야 청풍의 연배 정도로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귀장낭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등 뒤에 비껴 맨 목갑 때문이었다.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길쭉한 목갑, 그 안쪽으로 청풍이 찾고 있는 주작검의 존재가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심이 아니라 화산이오.”
“화산파?”
“그렇소. 화산파, 내 이름은 청풍이오.”
청풍의 대답.
귀장낭인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다.
누그러지는 적의.
하지만 귀호가 뿜어내는 살기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을 어찌 믿는가. 이 놈 위험하다. 죽이는 것이 좋겠어.”
“육(陸) 형. 언제나 그런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이번에도 낭패를 당했잖습니까.”
“그것은,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그들을 다시 돌아 본 청풍은 귀호와 귀장낭인의 상태가 과히 좋지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통 찢겨져 나풀거리는 귀호의 백삼은 차치하고서라도, 귀장낭인의 옷가지 역시 멀쩡하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공격이라도 당한 것일까. 두 사람 모두 무척이나 지친 모습에, 큰 내상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들이 정순하지가 않았다.
“육형 말씀대로 할 수는 없지만, 제 아무리 화산파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 두어야겠군요. 당신은 적(敵)입니까. 아군(我軍)입니까?”
대뜸 물어온다.
그 두 눈을 바라보는 청풍.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우에 따라, 적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오.”
귀장낭인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대답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말.
주작검을 얻으러 왔으니, 넘겨주지 않는다면 이들과 일전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솔직하다면 솔직한 그의 목소리에 귀호의 살기가 더욱 더 강해졌다.
“그러게, 죽여야 한다니까.”
“그래야 할까요?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귀장낭인이 고개를 저으며 귀호의 말을 끊었다.
“게다가 육형, 무엇보다 이 남자는 우리에 대한 적의가 없어요.”
덧붙이는 말에서 느껴지는 마음.
귀장낭인은 어떻게든 이 대치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귀호의 급습을 받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
귀장낭인은 청풍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그가 다시금 청풍에게 물었다.
“경우에 따라서라........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간다면, 오히려 청풍으로서도 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지금.
청풍이 손을 들어 귀장낭인의 등에 묶인 목갑을 가리켰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본디 화산의 물건이오. 돌려받으러 왔소.”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귀장낭인의 얼굴이 더욱 더 굳게 변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로군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뢰물이니까요.”
그렇다.
이제 나올 때다.
귀도.
결국은 귀도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바.
“귀도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로군.”
한 발 나서는 청풍이다.
그러나, 청풍은 이내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된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안 되겠습니다. 귀도 형님은 이런 상태라서요.”
귀장낭인의 뒤 쪽.
앞으로 나아간 청풍의 눈으로 바위 옆에 기대어진 한 남자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정신을 잃고,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자.
가슴을 감싸 놓은 붕대에 번져 나온 핏물이 흥건하다.
굳이 풀러 보지 않더라도, 엄청난 상처임을 알 수가 있다. 기식이 엄엄한 육체에 느껴지는 진기는 끊어질 듯 미약하니, 당장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태라.
귀도와는 그 어떤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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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대에 올리려니, 다시금 연참대전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군요.
혼자 하는 연참대전도 좋겠죠.
오늘 연재 한담에서, 화산질풍검 반품한 대여점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럴 낌새가 보이면 미리 미리 막아 주십시오.
앞으로 나올 4, 5, 6권은 더 재미있게 쓸 수 있도록 미친 듯이 노력중이라고요.
그리고.
그런 만큼,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요.^^
다른 약속은 못 지켜도, 그런 것만은 지킬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대여점 압박. 많이 많이 넣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