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호의 체격은 상당했다.
청풍도 큰 키였지만, 귀호는 그보다도 한 뼘이나 커 보일 정도다.
백발에 호리호리한 신체를 지닌 귀호가 어깨위에 귀도를 둘러메고 앞서 나가면, 귀장낭인은 그 배후를 지키며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한 기색이다.
청풍이 그들을 공격할 의지를 보이지 않자, 곧바로 쓰러진 귀도를 수습하여 이동을 계속하는 그들. 청풍은 일단 그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하고, 귀장낭인의 뒤를 따라 붙었다.
"북풍단주와의 싸움 때문이오?"
산 속 깊은 곳, 어둑 어둑한 계곡에 이르러, 귀장낭인과 귀호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그제서야 질문을 던지는 청풍.
귀도가 빈사상태가 된 이유를 묻는 청풍의 질문에 귀장낭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귀장낭인의 눈이 복잡한 빛을 발했다.
다그치는 듯, 기이하게 흔들리는 눈빛이다. 하지만 청풍으로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굳이 감출 까닭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주작검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하여 서천각에 당신들에 대한 조사를 부탁드렸었소."
"서천각? 화산파의?"
"맞소."
"화산파....... 그랬군.......그랬어.......한 동안 알 수 없는 자들이 따라 붙는 느낌이 들더니만, 그런 것이었군요."
귀장낭인은 품고 있었던 의문이 풀렸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표정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아직도 어둡기만 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아 있는 기색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귀장낭인.
청풍은 잠자코 그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싸움이 벌어졌던 곳에서부터 지금 이들을 만나기까지 가장 궁금했던 것.
북풍단주에 관한 이야기였다.
"싸웠다고 한다면........그 후, 북풍단주는 어떻게 된 것이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가.
귀장낭인의 얼굴이 더욱 더 어두워졌다.
"그는........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데리고 사라졌지요."
"어떤.......?"
"엄청나게 강한.......자였습니다. 저와 육형이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리어 낭패만 당했을 뿐입니다. 헌데.......그 남자......."
갑작스럽게 혼란을 느끼는 듯한 귀장낭인이다.
한 손을 올려 이마를 감싸는 귀장낭인.
그가 두서없는 말을 흩어 놓았다.
"본 적이 있는 남자........북풍단주 역시도........분명.......기억이........"
알 수 없는 시간, 어딘가의 과거로 맞추어진 시선이다. 숫제 고통이라도 느끼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칠흑 같던 눈동자가 까마득한 심연을 품어냈다.
그 광경.
들려오는 한 마디가 있었다.
"또 시작이군."
귀호의 목소리다. 그가 청풍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 놈. 중원에 오기 전까지의 기억이 없다. 기억을 잃어버렸어. 인간이란 웃기는 존재다. 제 분수도 모르고서 명부의 힘을 함부로 빌려 썼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놈은 좀 나은 거다. 저러다가 금세 괜찮아 지니까."
기이한 언사다.
마치 자기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
하기사 그것은 그냥 보기에도 그렇다. 긴 백발에 요사스런 눈동자, 동물적인 움직임을 보고 있으려면, 도무지 인간이란 생각이 안 든다.
귀장낭인이나, 귀호나.
모두 전에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자들이다. 어떤 사연을 가졌을지, 청풍이 경험한 적 없었던 세상을 헤쳐 온 이들 같았다.
"그 나타났다는 자는 어떤 자였소?"
귀장낭인과 귀호는 그처럼 예사로운 인물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명경을 빼 갔다면 그 역시 보통 남자가 아닐 것이다. 그 정체가 사뭇 궁금했다.
"그 놈은.........이미 경계를 벗어난 놈이었다. 반선(半仙)의 영역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지. 신(神)과 마(魔), 요(妖)와 선(仙)이 한 몸에 있었다. 만물에 공평하다는 천도(天道)가 천년 세월에 단 한 번 실수를 한다고 한다면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설마.......'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진중함이 묻어나는 말투다.
청풍은 그러한 그의 말을 들으며, 묘하게도 구체적인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남자.'
서자강에게 쓰러졌던 청풍을 일깨워 상단전 무학의 실마리를 주었던 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던 압도적인 기도가 생각났다.
"혹시 그 자의 이름이.......?"
"이름은 알 바가 아니다.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또 다시 아까와 같은 말투다.
확실히 이상한 어조였다. 귀호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귀호의 말처럼, 귀장낭인이 혼란스럽던 정신을 수습한 듯, 대신 대답을 해 왔다.
"그 남자의 이름은 진천(震天)이라 했습니다. 귀도 형님과는 그 전에 이미 안면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의뢰 목표를 빼앗아 간다는 데야 우리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박살이 났지."
"십 초를 채 못 버텼습니다. 북풍단주를 데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데도요."
진천.
그 이름. 역시나 여기에도 개입하고 있었던가.
차차 윤곽이 잡혀간다.
남은 의문은 하나.
청풍은 마침내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북풍단주와의 싸움.........누가 이겼소?"
청풍의 가졌던 궁금증의 핵심이다.
귀장낭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귀도 쪽으로 돌렸다.
"그것은.......귀도 형님에게 물어 보십시오. 북풍단주 그 자도 쓰러졌지만, 그 직후 귀도 형님도 정신을 잃었으니, 실제로 누가 더 강했는지는 당사자들밖에 모를 것이오."
쭉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상했던 일이지만, 직접 듣고 보니 또 한번의 충격이다.
북풍단주가 쓰러졌다는 말.
쓰러진 명경을 진천이 구해갔다는 이야기다.
청풍은 계곡 물가에 눕혀진 귀도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
이들이 명경을 공격한 것은 '의뢰'라는 낭인의 명분 때문이다.
그들만의 도리를 위한 것이기에 그것은 청풍이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관계없는 일일지라도 이상하게 분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몫을 빼앗긴 기분에서 앞서간 자에 대한 승부욕까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격한 감정들은 결국 호승심의 다른 이름일까.
만검지련자란 목표를 잡아 준 을지백의 마지막 외침이 생생했다.
마음속의 지향점이었던 명경.
그런 그를 쓰러뜨린 무위라면 대체 어떤 경지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 과연 그를 쓰러뜨릴 만큼 강하기는 했던 것일까, 당장이라도 귀도를 일으켜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의뢰물이라 했는데, 대체 어디로부터 그런 의뢰를 받은 것이오?"
청풍은 화제를 바꾸었다.
무공에 대한 경쟁심은 벗어날 수 없는 독약과도 같다. 동방의 고묘에서 무공을 닦고 큰 성취를 이룬 지금에 와서는 더욱 더 그랬다.
아직 만검지련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기에 더 큰 호승심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을 돌렸다. 지금은 귀도를 보면서 누가 더 강한가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다. 주작검을 얻고, 스스로의 힘을 더 키우는 것이 먼저다. 나아가 육극신과의 일을 마무리 짓는 것. 그것이 바로 청풍의 사명이었다.
".......의뢰인에 관한 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쪽의 불문율입지요. 하지만........"
부정적인 대답을 먼저 하는 귀장낭인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
귀장낭인의 이야기는 기가 막힐 만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예외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외?"
"의뢰인이 죽어 버렸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귀장낭인이 말을 끊고, 귀호가 그 말을 받았다.
"죽여 버린 거지. 우리가."
"!!"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던 청풍도 이번에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고용자들이 의뢰인을 죽였다는 것.
낭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청풍이지만, 그런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아함이 가득한 청풍의 눈빛에 귀장낭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의뢰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처음부터 놈들은 지급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대금을 받을 날이었습니다. 그 대신 공격을 받았지요. 그것이 아까 말한 단심맹입니다. 꽤나 위험한 싸움이었지요."
이들이 추격을 경계하던 상대.
처음 이들에게 받았던 질문도 단심이냐는 것이지 않았던가.
단심맹.
그러고 보면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다.
석가장, 싸움의 와중에 나왔던 이야기.
흠검단주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단심맹. 그렇지. 언제나 단심맹이 문제였어. 남의 문파를 잠식해 들어가는 것이 특기인 곳. 몇 년 전에는 영락의 암살을 꾸미질 않나, 저번에는 군부의 화기(火器)를 빼돌리지 않나. 그게 해안의 왜구들에게까지 넘어갔었다지"
"성혈교나 단심맹이나 본래부터 거기서 거기였지. 최근에 두 곳이 짜고서 벌이는 일, 이쪽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많아. 같은 팔황이라도 못봐주겠어."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일.
강호의 비사(秘事)를 밝히는 것이었기에 주의 깊게 들어 놓았던 말이다.
성혈교나 숭무련처럼 단심맹도 같은 팔황이라 했다.
대체 팔황이란 무엇인가. 육극신이 있던 비검맹 역시 팔황 중 하나라 했었다.
팔황이 여덟 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철기맹 또한 팔황의 한 지류인 것일까.
청풍은 비로소 깨닫는다.
결국은 팔황과 얽혀 돌아가는 사건들.
청풍은 언젠가부터 그 팔황이란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만들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아직도?"
"그렇지요. 아직도 쫓기고 있습니다. 단심맹과 담판을 지으려 해도, 거점을 알 수가 없어 끝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추격당할 수 밖에요. 특히나 귀도 형님이 싸울 수 없는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에서 가까운 적신당(積信堂)으로 가야 하지요."
"적신당?"
"유신소, 낭인회 여러 가지로 불리는 장소입니다. 낭인들의 회합지로, 다른 낭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지요. 귀도 형님을 회복시키는 것도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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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약속 드렸는데, 만 하루가 넘어가 버렸습니다.
어젯 밤에 일이 좀 생겨서.....미처 올릴 수가 없었네요.
그래도 아랫 글 2월 2일자였으니, 2월 3일 오늘 올린 것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추워진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