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과 귀도 일행은 형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를 빠르게 타 넘어갔다. 귀도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나는 듯, 몸놀림이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산야로 내려와 들판을 지났다.
목적지는 형양(衡陽).
석선산(石船山) 자락을 접하고 있는 큰 도시였다.
“시간이 애매하군요.”
형양에 도착한 것은 깊은 밤이었다.
도시를 둘러친 성벽에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을 지키는 관군들은 꽤나 삼엄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나름대로 관아의 힘이 상당한 지역이었던 모양,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통행증이 있더라도 이 시간엔 쉬이 통과할 수 없을 듯한 분위기였다.
“이쪽으로 가야겠습니다. 이 도시의 성문은 꽤나 튼튼한 편이니까요.”
귀장낭인의 안내에 따라 산자락과 맞닿아 있는 외진 곳에 이르렀다.
어찌 찾았을지, 잘 드러나지도 않는 곳.
성벽이 낮고 허술하다.
경공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타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성벽. 뿌리 없이 떠도는 낭인들이 드나드는 특별한 출입로 같았다.
청풍과 귀도 일행은 어두컴컴한 변두리를 지나, 밤까지도 불을 밝히고 있는 도심지로 향했다. 여러 번 와 본 곳인 듯, 귀장낭인의 발걸음이 익숙하다. 눈에 띄는 일행의 모습 때문인 듯, 골목길을 따라 도는 데에도 귀장낭인의 행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 왔군요. 저기가 형양 적신당의 뒷문입니다.”
구불구불 한참을 걸어 온 그들이다.
흥청거리는 불빛과 취객들의 목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리고 있는 한 구석.
믿을 신(信) 한 글자 깃발이 걸려있는, 평범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우리는 보통 저렇게 각 도시에 위치한 적신당에서 의뢰를 받습니다. 이 형양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어서, 잘 알지요. 장(張) 노인이 이곳의 신주(信主)인데, 꽤나 좋은 사람입니다.”
귀장낭인이 건물 후면에 있는 조그만 쪽문을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잠깐.”
귀도를 짊어진 채, 귀장낭인을 따라가던 귀호.
그가 킁킁 하늘을 향해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두 눈에 요사스러운 빛을 머금었다. 그가 진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 피 냄새다.”
귀장낭인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적신당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귀장낭인.
그가 무엇인가를 느낀 듯, 신음과도 같은 침음성을 내뱉었다.
“설마.......!”
골목 끝에 보이는 건물, 청풍으로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이들은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감각 이상의 무엇.
상단전이다.
이들은 상단전을 쓰고 있다. 청풍은 직감으로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군요. 생기(生氣)가 없습니다. 다 죽은 모양입니다.”
“버릴까?”
귀호가 물었다.
청풍을 슬쩍 돌아보는 귀장낭인.
그가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를 빛냈다.
“물론 아니지요. 뭐가 있는지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치명적인 부상자를 어깨에 들쳐 멘 상태임에도, 알 수 없는 위협을 개의치 않는다.
귀도의 안위는 개의치 않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이 그들의 방식일 뿐이다.
다시금 발을 옮긴다 싶더니, 어느 새 문 앞까지 왔다.
끼이이익.
열리는 문 안 쪽으로 새어나오는 공기가 불길했다. 확 열어젖히며 들어간 귀장낭인의 입에서 또 한번의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역시........!”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 온 청풍이다.
귀장낭인이 말 한 것처럼.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죽었다. 이곳 저곳에 쓰러진 시체들이 이십 구가 넘었다.
싸늘한 느낌이 감돌고 있는 내부.
또 하나 배웠다.
이 안에 있자니, 귀장낭인과 귀호가 무엇을 느낀 것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다가오는 감각이 곧 상단전의 효용이다.
불길하다, 불안하다는 기분을 구체화 시켜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 오감을 넘어 선 여섯 번째 감각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 상단전을 연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병장기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군요. 불시에 당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알려주는 정보는 꽤 된다.
굴러다니는 무기, 입고 있는 옷차림 하나 같이 제각각이라는 것.
낭인들이란 이야기다.
한 낭인은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까지도 아무런 살기조차 느끼지 못했던 듯, 차를 마시던 자세 그대로 탁자에 널부러져 있었다.
“장 노인. 장 노인까지도.”
가장 안 쪽 방.
이제 시체가 되어 더욱 초라해 보이는 한 노인이 죽어 있었다. 귀장낭인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몸을 숙여 부릅뜬 장노인의 두 눈을 감겨 준다. 굳어서 제대로 감기지도 않는 눈. 귀장낭인은 그 눈을 억지로 눌러 놓고 몸을 일으켰다.
“대담한 놈들이군요. 이런 짓을 할 놈들. 게다가 우리 행보와도 겹친다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앞에 닫혀져 있는 정문만 밀고 나가더라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낭인들의 거점. 그런 것이 위치할만한 장소라면, 주점들과 도박장, 홍루와 청루가 얽혀있는 유흥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밤이면 괜한 소란을 피하기 위하여 정문을 잠가 놓기는 한다지만, 적신당의 뒷문은 그들이 들어올 때처럼 항상 열려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밖에서 이 안의 참상을 모른다는 이야기는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흉수들의 손속이 은밀하고도 신속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굳이 그런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놈들이 맞다. 냄새가 나. 이 냄새, 그 놈이 왔다 갔다.”
“그 놈이라면.......냉심마유(冷心魔儒)?”
“그래, 그 놈에겐 특유의 먹물 냄새가 있어.”
냄새로 흉수를 알아 맞춘다?
진기한 경험이다.
이들은 어디까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기이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냉심마유라면 귀도 형님 없이는 어려울 텐데요.”
“그렇겠지. 놈에겐 마환선(魔幻煽)이 있으니까.”
“서둘러야겠군요.”
냉심마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반응만으로도 그 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자, 그것도 대단한 강자이리라.
얼굴을 굳힌 귀장낭인이 귀호의 어깨에 올려진 귀도를 한 번 살펴 보고는 한 쪽에 세워진 목궤(木机)로 향했다.
“송 의원까지 죽이다니. 비록 돌팔이였기는 해도, 더불어 사귀어 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는데.”
목궤 앞, 백포마의를 입고 죽어 있는 시체 하나가 있었다.
귀장낭인이 그 품을 뒤져 한 다발의 붕대를 챙기고는 목궤를 열고 금창약(金瘡藥)이라 새겨진 목갑을 꺼내들었다.
“이 쪽에 귀도 형님을........”
땅바닥에 반듯이 눕힌 귀도.
귀호의 어깨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그냥 모로 눕혀 놓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귀도의 얼굴이다.
강인한 인상에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탄탄한 근육질 몸을 지니고 있었다.
청풍의 시선이 귀도의 차림새와 병장기에 닿았다.
기껏 무릎까지만 덮은 바지엔 검고 붉은 줄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으며, 양 쪽 허리에는 네 자루의 곡도(曲刀)가 매달려 있다. 한 쪽 허벅지에는 십여 개의 표창도 장비된 상태다. 병장기만으로도 상당한 무게일진데, 그 몸을 아무렇게나 들고 다닌 귀호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군요. 역시나 회복이 느려요. 이런 적은 처음인데.”
가슴의 붕대를 찢어내고 상처를 들여다 본 귀장낭인이 고개를 저었다.
깊은 검상, 늑골이 열 개는 부서져 있는 것 같다.
그 뿐이 아니다. 이곳저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상처는 가슴의 검상에 비하여 경미할 뿐이지, 하나 하나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회복이 더디다고 말한다.
귀도의 평상시 회복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북풍단주라던 놈. 그 놈이 가지고 있던 검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것은 처음 보았어. 나로서도.”
귀호의 말에 귀장낭인도 동의한다는 기색이다.
청풍 역시도 북풍단주가 지니고 있던 마검(魔劍)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신검 못지 않아 보였던 검. 그것에 당하고 이 정도라면, 도리어 귀도 쪽을 대단하다 해야할지 몰랐다.
“다 되었습니다.”
귀장낭인이 재빨리 금창약을 뿌리고 상처마다 깨끗한 붕대를 감아 놓았다.
여전히 응급처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 몸을 돌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귀장낭인은 귀호가 귀도를 다시 들어올리는 것을 보며 곧바로 말했다.
“갑시다. 여기 더 있으면 안 되요.”
다음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든 일단 이곳을 뜨려는 의도다.
다시 뒷문으로 향하는 귀장낭인.
그 때였다.
잠자코 있던 청풍이 두 눈을 빛내며 그들에게 말했다.
“잠깐. 누가 오고 있소. 여러 명이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
이번에는 청풍이 가장 빨랐다. 그를 돌아 본 귀장낭인이 그제서야 같은 것을 느낀 듯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군요. 숫자가 많습니다. 속도도 빠르군요.”
“앞문도 마찬가지다. 포위당했어.”
급변하는 상황이다.
귀장낭인이 한 쪽 계단을 가리켰다.
“위층으로 올라갑시다. 곧 들이 닥치겠어요.”
날듯이 올라와 창문 쪽으로 몸을 붙었다.
이 층에도 죽어 있는 낭인이 세 명, 피가 튀어 있는 창틀을 밀어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관군.......!”
단심맹이라 하기엔 조금 이상하다 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 뜻밖이다. 건물 밑으로 몰려드는 것은 제복을 입고 있는 형양 관군들이었던 것이다.
관군들은 물밀듯한 기세로 들이 닥쳤다.
유흥가를 오가는 행인들을 몰아내면서 삽시간에 적신당 건물을 둘러친다.
어찌해야 하는가.
관군들을 내려 본 청풍.
그의 눈이 관군들 가운데에 있는 한 남자에 머물렀다.
‘고수.......!’
커다란 체격이나 선하게 생긴 인상이다.
무공을 모르는 관인들 사이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강호의 어떤 곳에 두어도 눈에 띌 만한 남자다.
돋보이는 기도.
귀장낭인과 귀호도 그 쪽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동시에 침음성을 내 뱉었다.
“저 놈이 왜 여기에!”
“저 놈까지.....!”
안면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귀장낭인이 이마를 짚고, 귀호가 이를 갈았다. 낭패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곱게 넘어가긴 글렀군요. 누군가 이 적신당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귀장낭인의 말은 정확했다.
아무리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청풍과 귀도 일행이라지만, 건물 몇 개 떨어진 어딘가 높은 곳에서 적신당 뒷문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확인해 주는 목소리.
바깥에서 들려오는 웅혼한 외침이 있었다.
“안 쪽에 있는 자들은 들으라! 이 안에서 사람들이 죽는 흉악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흉수들이 아직 안에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대명율을 어지럽히는 이들은 내려와 포박을 받으라!”
순후한 내력이 담긴 일갈이다.
내다보지 않아도 방금 전에 본 그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을 찌푸린 귀장낭인.
뭔가 생각을 짜내기도 전에 아래층으로부터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정문이 부서지는 소리, 관군의 진입이다. 이어지는 어지러운 발소리에, 귀장낭인의 고개가 청풍 쪽으로 돌려졌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어쩌겠냐니, 무슨 소리인가.
눈빛으로 말하는 청풍의 반문에 귀장낭인이 창문 쪽을 가리켰다.
“바깥에 있는 놈은 강남제일포쾌, 궁왕(弓王) 원연(源淵)입니다. 고수이기도 하거니와, 놈의 뒤에는 영덕부(英德府), 황실(皇室)이 있지요. 잘못하면 죽습니다. 그래도 함께 행동하겠습니까?”
단심맹에 이어, 관군에게까지 쫓길 수 있다.
역시나 이들은 순탄치 못한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다.
주작검.
귀장낭인을 제압하고 가져가면 그만이다?
그럴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이 귀장낭인은 주작검에 휩쓸리지 않은 채, 그것을 제대로 보관하고 있다. 기억을 상실했다고는 해도, 주작검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주작검을 다룰 수 있는 능력,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거기에 혹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청풍은 그것이 궁금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청풍은 이들이 싫지 않았다. 황량하고 거친 성정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은 악인들이 아니다. 특별한 자들이다. 쫓기고 쫓고. 청풍과 비슷하게, 또는 다르게 천하를 달려가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어려움에 처했고, 청풍에게 함께 할 것인지를 묻는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협(俠)이다?
그것만은 아니다. 협은 그런 것으로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다.
가슴이 끄는 대로.
마음에 들면 함께하는 것 또한 협이지 않던가.
짧은 시간 동안의 긴 생각이다.
청풍의 마음에 일어난 파문은 그의 전신을 타고 흘러 강렬한 기도로 화했다.
동방의 고묘에서 무공을 닦고, 백호와 청룡을 합일시켜 어느 샌가 그저 고요함만으로 닫혀 있던 그의 정심(瀞心)에도 마침내 한 줄기 붉은 색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다.
“괜한 것을 묻는군.”
무엇인가 잠에서 깨어난 듯.
낭랑하게 발해지는 목소리다.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했던 듯, 귀장낭인과 귀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당연히 함께 갈 것이오.”
젊은 범. 젊은 용.
화산파 산동지부에서도, 매가장에서도.
노회한 노고수처럼 조용한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그의 본 모습이 나온다.
거칠게 달려가는 백호와 침착하게 생동하는 청룡이 하나 된 경지. 그로 인해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약시켜 더 강하게 비상하는 바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갑시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지붕 쪽으로 몸을 날리는 귀장낭인의 뒤로.
어두운 밤, 달빛 머금은 바람으로 창틀을 박차는 청풍의 의지는 새로운 암천을 향하여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대붕(大鵬)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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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 쾅쾅 쳐 놓고, 어제는 제 몸이 안 좋아서 도저히 글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2005년은 시작부터 아주 작살이군요.
작년 한 해 보내면서 그렇게 복을 빌었건만.
구정이야말로 진정한 새해의 시작이니, 아직 구정을 안 보내서 2005년도 안 온 것이라 생각하고, 새롭게 새해 복을 빌어 봅니다.
여러분도 한 해동안 행복하시길 다시 한번 기원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