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호보 진각의 진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삼장의 거리를 압축하며 나아간다. 우왕좌왕하던 관군들 세 명이 창을 휘둘러 왔지만 청풍은 검조차 뽑지 않은 채 그 사이를 빠져나와 버렸다.
목신(木身)뒤에 운형(雲形)이었다. 바람에 실린 구름이었다.
터텅! 따아앙!
구름이 이른 곳은 귀장낭인의 바로 앞이었다.
달려든 청풍과 원공권 원태의 사이에서 경쾌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청룡검 용갑, 그리고 원태의 벽권이 부딪친 충돌음이었다. 원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목을 꺾었다. 다시금 자세를 취하며 버텨서는 모습, 호걸형 인상이다. 두 눈에 정대함이 깃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있겠소?”
청풍은 귀장낭인부터 부축했다. 귀호가 말한 것처럼 탈진해 버린 귀장낭인이다. 청풍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뿐 아니라 제 몸까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으니 옆에서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출수를 거둔 이유가 무엇이오?”
귀장낭인을 버텨 세우고, 이번에는 원태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
귀장낭인과 원태는 박투를 벌이고 있었던 중, 서로가 튕겨나가 그 사이가 아무리 벌어졌다 해도 청풍이 끼어들기엔 너무나 가까운 거리다. 금강호보가 빠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원태에겐 귀장낭인을 가격할만한 시간이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럼에도 청풍이 막아서도록 허용했다는 것은 원태가 의도적으로 출수를 늦추었다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다 쓰러진 것, 구차하게 때릴 필요가 있나?”
당연히 있다.
귀장낭인까지 부상을 입으면, 그들로서는 움직이기가 배로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질문을 한다.
청풍은 원태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솔직한 눈이었다. 이 자는 진심인 것이다. 뒷일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천성적인 무인이었다. 금의위라는 관복을 입고 있지만, 관인으로서의 의무보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더 중하게 보는 자였다.
“하,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텐가. 하던 것은 마저 해야지.”
원태가 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귀장낭인과의 박투로 인해 온 몸이 정상이 아닐 텐데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자나 위연이나.
적으로 삼기에는 하나같이 아까운 자들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귀장낭인을 수습하기 위해서다.
고개를 끄덕이는 원태.
그럴 줄 알았다. 보통의 관군이라면 이런 식으로 사정을 봐 줄 리가 없다. 금의위로의 자격을 따진다면 실격이다. 그러나 강호의 무인이라면 찬사를 받아야 마땅했다.
청풍은 서둘렀다.
부축하고 있던 귀장낭인을 옆으로 세우고, 그 등 뒤에 매달린 붉은 목갑을 풀어낸 후, 귀호처럼 귀장낭인의 몸을 어깨에 둘러맸다.
목갑을 등에 걸칠 때는 잠시 멈칫 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목갑.
그 안에 다름 아닌 주작검이 있었다.
청풍이 가져가야 하는 검. 현재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청풍은 바로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물건을 받으러 온 사람의 도리가 아닌 까닭이다.
제 아무리 주작검이 화산파의 물건이고, 청풍이 그것을 찾으러 온 사람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
귀도 일행.
그들은 성혈교와 싸워서 이 검을 빼앗아 온 자들이다. 즉, 청풍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준 사람들인 것이다.
청룡검. 그렇다면 청룡검을 얻었던 석대붕은 어떤가.
석대붕과 이들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석대붕은 그것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대 참사를 일으켰다. 석대붕이 제 정신을 지닌 선인(善人)이었었다면, 그런 식으로 청룡검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리라. 청룡검을 받아 오는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주작검을 받아 가려면, 결국 그 일을 진행했던 귀도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주작검을 가져간다면 그것은 귀도 일행의 위기를 틈타서 보물을 탈취해간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낭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도 말이다.
“이봐, 지금 그 친구를 들쳐 업고 싸우겠다는 건가?”
“그래야지 어쩌겠소.”
“너무 얕보는데 그래.”
“당신도 지쳤으니 마찬가지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청풍이다.
원태는 웃었다. 멋진 놈이었다. 몇 년 전 어전무도회에서 보았던 벽안의 검사를 보았을 때의 느낌이다. 오랜만에 더불어 싸워볼만한 상대를 만났으니, 어찌 기껍지 않을까. 그것도 귀장낭인에 이어 둘이나.
하지만, 불공평하면서도 공평한 그들의 싸움을 실현되지 못했다.
또 다시 급전되는 정황 때문이다.
북쪽에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
백의금사, 금의위 위사 하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건가!!”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끌었던 모양이다.
적신당에서부터 뛰어 온 관군들도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다.
“저 인간........”
원태가 얼굴을 찌푸렸다.
같은 금의위가 오고 있는 데에도 전혀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그 이유는 금새 드러났다. 말 위에서 발하는 외침,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기분을 절로 나쁘게 만드는 울림이 담겨 있었다.
“위연! 자네 지금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어서 나서지 않고 거기서 뭐하고 있나!”
반백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윤곽을 지녔다.
음성을 무척이나 컸지만 거기에 담긴 내력은 그다지 정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각궁을 늘어뜨린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위연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발을 내딛었다.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얼굴, 새로 나타난 금의위의 직책이 의외로 상당한 모양이었다.
“지휘자! 지휘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겐가!”
타고 있는 기마만큼은 상당한 준마인 듯, 금세 지척까지 달려온다.
몰려든 관군들 중 정식 갑옷을 입고 있는 관병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원 위사님께서 싸우고 계셔서.......”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관군이 이렇게 많이 있었으면 다 덤벼서 잡았어야지. 지금 제 정신인가!!”
미친 듯 몰아치는 호통 소리다.
그가 이번에는 원태를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내 자네 같은 금의위는 처음 보았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이들을 포박하라!”
손을 휘저으며 직접 관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원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신 대인........금의위 내에서도 마귀(魔鬼)라 불리는 신철(伸哲)이네.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게.”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음에도 이해해 달라 말하는 것 보면, 원태도 청풍에게 어지간히 큰 호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 마음을 보여주려는 듯, 원태는 달려들지 않았다. 도리어 한발 물러서며 달려드는 관군들 사이로 섞여버린다.
이런 식으로는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어차피 이들은 청풍을 계속 추격해 올 터, 둘의 싸움은 그 추격전으로 미루자는 의도인 것 같았다.
처척.
몰려드는 관군들 사이에서.
청풍이 그를 보며 짧게 포권을 취했다.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급박한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으나, 또한 그가 거기에 있기에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창칼들 한 가운데, 대담한 영웅이 있다.
청풍이 까마득히 닥쳐오는 관군들을 향하여 땅을 박찼다.
터어엉!
다수를 맞이하는 싸움으로 따지자면 청풍만큼 경험이 많은 사람도 드물다.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선두에 달려오는 관군의 어깨를 밟고 높이 몸을 띄웠다. 밑에서 올라오는 창날들을 타넘으며 청룡검을 휘두른다. 백야와 용뢰가 도도하게 풀려나오며 십여 개의 창봉들을 단숨에 밀어냈다.
텅! 차차차창!
강맹한 위력을 감당치 못한 관군들이 마구 넘어지기 시작했다. 좁은 길, 밀집된 지역에 창봉들이 서로 얽히고 부러진다. 이 곳이 전쟁터도 아니요, 죽고 죽이겠다는 살벌함이 없는 싸움임에야 청풍을 막을 수 있는 관병들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었다.
파아앙!
땅에 내려서 두 발 더 내딛고는 갑옷을 입은 지휘관 한 명과 맞닥뜨렸다. 제법 매섭게 창을 휘둘러 왔지만 강호인의 출수는 아니다. 청룡검을 용갑 째로 올려치니, 그의 육중한 몸이 이(二)장이나 튕겨나가 그 쪽에 서 있던 관병들 대여섯 명을 넘어뜨려 버렸다.
텅! 터텅!
한 사람을 들고 움직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몸놀림이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그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흠검단주, 그와 도주할 때에도 사람을 업은 채, 달리던 기억이 있었다.
“잡아라, 잡아! 위연! 자네는 그 활을 장식으로 가지고 있나! 안 쏘고 뭐하나!”
신철이라는 자.
그 전까지의 호통들은 어디까지나 호통일 뿐이었지만, 이번 것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관군들이 달려드는 것과 위연이 화살을 쏘는 것은 무척이나 다르다. 백명 군인의 창봉보다, 궁왕 위연의 화살 한발이 더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위연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쏘지 못합니다.”
얼굴을 굳힌 신철이다. 이내, 말안장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겐가!”
신철이 타고 있는 기마는 그런 갑작스런 행동들이 익숙한 듯, 별반 요동을 치지 않았다. 그것을 보는 위연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쏘면 관군들이 다치지 않겠습니까.”
신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자도 있고 저런 자도 있는 것이 세상사 합당한 이치라지만, 이 남자는 심했다. 삼보태감의 남해원정에 참가하여 서역 땅을 밟은 후, 인맥을 따라 눌러앉은 곳이 금의위다. 그런 자의 수준이라는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인 것이다.
“병사들을 물려! 성벽 위의 궁수들도 쏠 준비를 해라!”
그래도 원정을 다녀왔다는 것인지, 병법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용케 성벽 위까지 생각한 그가 내력을 담은 고함을 내질렀다.
처처처처척!
귀호는 이미 진즉에 관군들을 뿌리친 후 성벽 밑에까지 이르고 있었고, 청풍 역시도 파죽지세로 움직이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신철의 군령에 빽빽하게 들어찬 군사들이 흩어지니, 운신이 자유로워진 청풍은 더욱 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화살이 온다! 대비해!”
저 앞에서 외치는 귀호다.
귀호의 시선은 귀장낭인에 맞추어져 있다. 청풍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귀장낭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경고였다.
아무래도 좋다. 궁사(弓謝)의 시야를 열리면 화살이 날아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저 청룡검 검자루를 잡고 내력을 모으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청풍의 눈이 성벽 위를 향했다.
“제길!”
관군들의 철수는 신속했다. 이제 성벽 밑에 움직이는 것은 둘 뿐, 귀호가 한 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쪽이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군사용 돌계단이 보였다. 각각 한 사람씩을 짊어진 채, 뛰어가는 그들의 발밑에서 진한 흙먼지가 일었다.
파아아! 우우우웅!
계단 쪽으로 거의 당도했을 때였다. 위에서보다 먼저, 뒤 쪽에서 끼쳐드는 파공음이 있었다.
콰쾅!
계단 옆에 솟아 있는 난간이 터져 나갔다.
돌가루가 비산하는 가운데, 다시 후방으로부터 또다시 파공음이 울려온다. 위연이 쏘아내는 철시였다.
콰아앙!
박살난 난간에 돌계단마저 부셔버리고 있다.
계단으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일격이었다. 그나마 사람에게 직접 쏘지 않는 것은 청풍에게 패한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지.
멈칫 신형을 멈춘 그들 위로 이번에는 하늘에서의 화살비가 내리꽂힌다.
우우웅, 수십 발 화살들이 내는 소리가 벌떼의 날개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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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한 해.
독자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하루 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음력 설(게시판 어디선가, 구정이란 용어를 쓰지 말자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을 맞이하여, 또 한 번의 이벤트를 할까 합니다.
며칠 전 이벤트는 돌발적인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해 보려는 것이지요.
2004년 하반기, 화산질풍검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할 때 쯔음에, 초우님께서 권왕무적 댓글 1000개 이벤트를 하신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지요.
1000개를 훌쩍 넘어서 그 이후에도 한참동안이나 댓글이 달렸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도 그 때의 댓글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첫 목표는 1000개로, 로그인 하신 댓글이나, 안 하신 댓글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기한은 이번 주 일요일까지로 하지요.
또한 이벤트의 특수성이 특수성인만큼, 한 사람이 중복으로 댓글 다는 것도 가능합니다.(물론 연속된 도배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1000번째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께, 화산질풍검 1~3권이 날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만약에 댓글이 2005년 기념, 2005번까지 달리게 되면, 2005번째 댓글 다신 분께는 화산질풍검 1~3권과 더불어 앞으로 나오게 될 4,5,6권까지 전질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 댓글의 내용 유무가 문제가 될 수 있겠죠.
숫자 한 두개를 댓글로 치기엔 곤란하니까요.
그래서 댓글 주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댓글 주제는 "새해 인사", 또는 "새해 덕담" 입니다.(물론 고정은 아닙니다. '되도록'이면요. 평소 같은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를 향한 것' 보다, 다 같이 화산질풍검을 봐 주시는 '다른 독자분들'께 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그 동안 혼자 받기에는 너무도 과분한 새해 덕담들을 받았으니까요.
"서로 서로 몇 백개 덕담을 나누면, 새해의 복도 몇 백배 늘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저런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보면, 서로 좋은 이야기 하기에도 모자란 이 때에, 나쁜 말 오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새롭게 민족 명절, 설을 맞이하는 고무판에서는 항상 서로서로 행복한 이야기가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설 연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