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56)

파라락.

곧바로 짓쳐드는 냉심마유의 옷깃에서 격한 파공음이 울려나왔다.

도리를 져 버린 채, 기회를 놓칠 새라 잔인한 손속을 흩뿌리니, 귀장낭인의 신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도저히 그대로 둘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 때였다.

“크으.......”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한 줄기 신음 소리가 있었다.

“?!”

귀호는 아니다.

다른 낭인들의 것도 아니었다.

덮쳐오던 단봉을 쳐 내고, 한 자루 소검을 밀어내며 눈을 돌렸다.

귀호의 뒤.

오른 팔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 

귀도(鬼刀).

그다. 그가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

깊고도 깊은 두 눈이 청풍의 맑은 눈과 마주치며 천도의 인연, 천연(天緣)의 불길을 일으켰다. 먼저 입을 연 자는 귀도, 귀도의 입에서 굵고도 탁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넌.......누구냐.”

청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 느낌.

청풍은 알고 있다. 북풍단주 명경, 그리고 장강에서 본 백무한. 그들과 같은 느낌이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들 사이에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청풍은 길고 긴 인연의 끈을 감지할 수 있었다.  “청풍. 청풍이오.”

차창! 쩌어어엉!

고개를 돌려 귀도를 보고 있으면서도.

휘몰아치는 청룡검이 낭인들의 병장기를 부셔 버린다. 

귀도의 시선이 청룡검에 머물렀다가, 그 저편 귀장낭인에게 이르렀다.

귀도의 입에서 신음성과 같은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냉심마유.......!”

그제서야 고통을 떨쳐낸 듯, 어렵사리 몸을 일으키는 귀호가 그 옆에 있었다. 낭인들이 휘두르는 병장기가 살벌한 궤적을 그려내고, 천장 위 이층과 이어지는 구멍에서 흑의 무인들이 내려오고 있는 지금, 귀도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단숨에 깨닫는다. 

위급하고도 위급한 때.

귀도의 시선이 다시금 청풍에게로 옮겨졌다.

낭인들에 더하여 이제 하나 씩 달려들고 있는 단심맹 무리들까지.

청풍의 검격은 눈부시고도 또 눈부셔, 그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는 철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동작이 컸었던 금강탄과 백야참은 이 좁은 공간 안에서도 마치 딱 맞춘 것처럼 완벽한 움직임을 발하고 있었고, 간간히 발해지는 청룡검 용뢰섬의 일격은 간간히 비집고 들어오는 예상 못할 공격들을 확실하게 차단해 내고 있었다.

“네놈. 강하군.” 

귀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진심이 어려 있는 감탄이었다.

한 자루 청룡검이 빗어내는 동천과 서천의 절기들을 보며, 귀도가 말을 이었다.

“부탁이 있다.........”

상체를 일으켜 앉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흔들리고 있는 눈빛에, 겨우 회복했던 의식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위태했다. 귀도가 미간을 좁히며 한 손을 들더니 귀도를 가리켰다.

“저 놈을 도와줘.”

툭.

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의식을 잃지 않았음에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팔을 들어올리고 있을 힘조차 없는 것이었다.  

차아앙!

검 한자루를 튕겨낸 청풍이 한 발 물러나며 귀도와 귀호를 돌아보았다.

도와달란 이야기. 

도와준다는 것이야 이미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다만, 귀도와 귀호의 안위가 문제였을 뿐. 청풍이 막 일어나고 있는 귀호를 향해 물었다.

“버틸 수 있겠소?”

일그러졌던 얼굴도 제 표정으로 돌아왔고, 하얀 털이 돋아나던 팔도 제 색깔을 찾은 상태다. 귀호가 청풍의 질문에 도리어 화가 난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음껏 싸워볼 수 있다. 

답답하게 여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간다. 청풍의 발이 금강호보 진각을 밟아냈다.

꽈앙!

목판 바닥에 금이 갈 만큼 강렬한 일보였다. 빽빽하게 가로막은 병장기들 속으로 몸을 던지면서도, 또한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느낌. 

좁디 좁은 건물 안이나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곳은 산야에 넓게 펼쳐진 질주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백야를 달리는 백호(白虎)의 위용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빠악! 빠아악! 쩌정!

청룡검 검날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감싼 용갑은 이미 절세신병이나 다름이 없었다. 순식간에 세 명의 낭인이 나뒹굴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고, 이어서 짓쳐오는 단심맹 흑의 무인의 검날도 단숨에 부서지며 파편을 튕겼다.   

퍼엉! 꽈아앙!

후려치는 일격.

튕겨나간 낭인이 나무 벽을 부수고 곤두박질 쳤다. 의자와 탁상 기물들이 아수라장으로 부서져 나가니, 나아가는 일보에 몇 명의 적이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잔잔할 때는 그저 그곳에 머물러 있을 뿐이나, 휘몰아치면 곧이어 질풍이라. 그것이 바로 청풍의 진가였다.

쩌엉!

귀장낭인을 몰아치던 냉심마유도, 그 질풍과도 같은 쇄도에는 펼쳐내던 손속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귀장낭인에게 마환필을 겨눈 자세 그대로.

그가 청풍을 돌아보며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그래.” 

천천히 말을 이어가려는 기색이다. 

그러나, 역시 그는 상리(常理)를 벗어난 자.

갑작스레 몸을 돌리더니, 다시금 귀장낭인에게 짓쳐 들었다. 

촤아악.

주의를 돌리면서 기습을 가하는 것이 특기다.

유령과도 같은 신법과 변칙적인 출수.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무공이었다. 측면으로 피하는 귀장낭인의 옆구리에서 선혈이 번져 나왔다. 

빠아악! 우직!

휘돌아 찍어내는 마환필의 궤도에 귀장낭인의 팔이 걸려들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힘을 잃은 손목이다. 주작검이 귀장낭인의 손에서 벗어나 공중을 날았다.

콰악!

부적에 덮여 있음에도 날카로움은 없어지지 않는가.

주작검이 목판을 꿰뚫으며 건물 바닥에 비스듬히 박혀 버렸다. 

주작검. 

그리고 귀장낭인.

청풍은 주작검을 향해 몸을 날리지 않았다. 

귀장낭인을 향해서다.

끝을 볼 생각으로 마환필을 찔러가는 냉심마유의 일격에, 청풍의 오른손이 용갑을 잡았고, 이어 그의 왼손이 청룡검 검자루를 뽑아 냈다.

치리리링! 퀴유우우웅!

귀장낭인의 가슴에 마환필이 박혀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뻗어가는 금강탄에는 백호의 용맹무비함과, 청룡의 신출귀몰함이 함께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피를 볼 것 같던 마환필의 궤도를 일순간에 꺾어 버린다. 무서운 속도, 유려한 몸놀림, 발군의 검격이었다.

  “거기까지다.”

청풍의 목소리에는 이제 비상하는 질풍의 격렬함이 담겨 있었다.

왼손의 청룡검을 냉심마유를 향해 겨누고, 오른손의 용갑은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시작된다.

알 수 없는 이끌림.

심장에 흐르는 뜨거운 피가 청풍의 손을 움직였다.

오른 쪽, 바닥에 박혀 있는 주작검을 향하여.

청풍의 오른손이 쫙 펴졌다. 

우우웅.

살아 있는 듯, 주작검이 저절로 움직여 비스듬히 박힌 그 방향 그대로 뽑혀 나왔다. 공명하는 상단전, 청풍은 비로소, 열려진 상단전의 진정한 효용을 깨닫는다. 

청풍의 손으로 날아오는 주작검이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냉심마유조차도 움직임 생각을 잊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귀장낭인만이 땅을 짚으며 일어나 다급한 외침을 발했다.

“그것을 잡으면 안 됩니다!”

광기를 경고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청풍은 다르다.

부적을 다루지 못해도, 주문이 없어도 광기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천도에 합당한 남자다. 신검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청풍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움직여 마침내, 주작검의 검자루를 쥐었다.

화르륵! 파파파파파!

믿기 힘든 순간은 그 검이 주인을 만나는 이 때에 또 한번 있었다. 

주작검, 검신을 온통 둘러친 주박(呪縛)의 부적들이 일렁이는 불길과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귀장낭인의 눈이 불신과 경악으로 인해 크게 뜨여지고.

재로 변해 흩어지는 그 종이 조각 가운데에서 마침내 완만하게 휘어져 있는 찬연한 검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백의 날개, 주작신도(朱雀神刀), 주작검이었다.

‘이것이 주작검!’

불어난 강물에 둑이 무너진 것처럼, 흘러드는 진기가 있었다. 오른팔을 타고 들어와, 심장을 달구는 진기는 주작검이 지닌 화기(火氣)였다. 오랫동안 주술을 이용하여 막아 두었었기에 억눌려 넘쳐가던 신기(神氣)는 실로 막대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백호기와 청룡기를 합일시켜 상단전과 중단전을 다져 놓지 않았더라면, 그조차도 휩쓸려 버렸을지 모를 만큼 거세고도 강력한 힘이었다. 

“이 놈.......! 그 쪽에 있는 것은 설마........!”

이를 악문 냉심마유의 시선이 주작검을 거쳐 청풍의 왼손에 들린 청룡검에 닿았다. 

청룡검을 알아보는 눈빛.

“네 놈이 바로 그 놈이었군. 성혈교 오사도의 팔을 잘라낸 놈!”

살기(殺氣)는 여전했지만, 이제 당혹감이 함께하고 있다.

냉심마유가 마환필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모두, 모두 이놈을 쳐라!”

유령과도 같은 신법을 펼치며 그 스스로 먼저 달려드는 냉심마유다.

이번에는 다른 술수를 부리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 

다른 수작 따위 통하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게다. 청풍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그것은 주작기(朱雀氣), 화신(火神)의 불길이다.

더불어 청룡기(靑龍氣), 목생화(木生火).

청풍의 기(氣) 이 때에 이르러 또 한번의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싸아아악! 마환필 일격을 맞이하여 처음 휘둘러 보는 주작검은 무척이나 날렵하고 가벼웠다.

백호검보다도 긴 장병이었지만, 무게가 없는 것처럼 날랬다. 그야말로 대붕의 날개, 구만리 장천(蒼天)을 하루에 날아간다는 전설이 그 손안에 있는 것 같았다.

“크읏!”

먼저 출수한 것은 냉심마유였으나, 주작검이 뻗어오는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거리를 두고 비껴냈음에도, 공기를 가르는 검압이 냉심마유의 어깨 어림을 쫙 찢어 놓았다. 일격에 승패를 가를 듯한 검격이다.  냉심마유가 그러할진데, 다른 자들이야 어떨까.

휘둘러지는 일검을 감당하지 못한다.

병장기가 조각나고 팔 다리에 핏줄기가 솟구쳤다. 삽시간에 쓰러지는 자가 열 명을 헤아린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낭인들, 냉심마유가 이를 악물었다.

“진(陣)을 펴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심맹 흑의무인들 네 명이 청풍의 사방을 둘러쳤다. 절도있는 동작들이 관군들을 연상케 한다. 합격을 시도하려는 모양, 냉심마유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서렸다.

“살(殺)!”

냉심마유 본인까지, 다섯 줄기의 살의가 쏘아져왔다.  

움직이는 청풍.

청풍의 발이 땅을 휩쓸고, 그 발끝에 금강호보의 탄력이 머물렀다.

째애앵!

첫 번째 일격.

파공음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뻗어나간 주작검이다.

단심맹 흑의무인의 검을 갈라놓는 기세가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 검날에 담긴 공격성이 상상을 불허했다.

쩌정! 쩌어엉!

좌측 일보.

부드러운 가운데 거센 내력이 있다. 청룡검이 용뢰의 일섬을 뿜어냈다.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격이다. 두 개의 검날을 한꺼번에 박살내며 연환되는 공격들을 무위로 되돌렸다.

터어엉!

청풍의 발이 땅을 박찼다.

백호검이 공격에 칠할을 썼었다면, 이 주작검은 십할이 모두 다 공격이다. 만들어진 용도가 벌써 살상을 위한 것임이 절로 느껴졌다. 그토록 정제하여 다듬어 놓았던 금강탄이 예전의 흉폭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뻗어나가고 있었다. 검날의 부수고 어깨까지 꿰뚫어 놓는 데, 미처 회수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의 청풍에 이르러서도 제어가 쉽지 않은 병기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네요.

보내 드리려 했던 화산질풍검 1~6권 전질은 어찌 될련지요.

직접 그린 청풍이나 다른 등장인물 그림들도 동봉할 계획인데.....꼭 주인이 찾아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