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56)

[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제 16 장 

 장강. 

 수로채 양대 무투 파벌 중 하나인 백해(白海).

 장강에서 만난 백해의 채주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거한으로 통칭 ‘흰 고래’라 불리고 있었다. 

 “그 싸움은 정말 치열했지. 주유도 주유지만 육손이 없었다면 정말 다 죽었을걸.”

 장강주유. 수로육손. 

 대강(大江)을 가로지르며 희대의 지략을 보이던 모사(謀士)들이다. 어디서 그런 이들을, 그것도 그처럼 젊은 인재들을 찾아냈는지, 수로맹주의 인복과 안목은 실로 대단하다 아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글쟁이 양반.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은 그들에 관한 것이 아니겠지. 질풍대협에 대하여 묻고 있다 하더만.”

 방문한 수채가 고작 두 개였는데, 이미 찾아온 목적을 알고 있다. 수로채의 힘은 강하다. 대 문파의 힘이 부럽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것은 사실 진 싸움이었어. 이쪽도 충분히 준비했다 생각했었지만, 그 쪽이 더 강했거든. 그런 괴물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비검맹, 비검맹은 팔황의 한 축, 그 진정한 힘은 그때까지 드러난 것과 판이하게 달랐으리라. 제아무리 장강주유, 수로육손이었다고 한들, 거기까지 가늠하기엔 팔황의 이름이 지닌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가 마침 거기에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것으로 끝장이었겠지.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   

 흰 고래, 백경(白鯨)의 회상은 그것으로 시작이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풍부한 언어를 지녔지만. 원래부터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기에 듣는 것만으로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기가 쉽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그때 그 자리에 직접 있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었다.    

   

 한백무림서 초안. 

 한백의 일기 중에서.

 청풍과 귀도 일행은 영양 땅을 벗어났다. 

 관군들은 추격해 오지 않았다. 

 청풍의 무위에 겁을 먹었거나, 단심맹을 표적 삼은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한 숨 돌릴 기회였으니까.

 석양이 지고 밤의 어둠이 내려왔다.

 조심스러운 이동과, 이어지는 질주. 

 청풍의 손에서는 검집 없는 주작검이 홍백의 달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귀장낭인은 주작검을 돌려 달라 말하지 않았다. 귀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청풍에게 주작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언급을 피하려 했거나, 그대로 청풍에게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청풍은 도리를 지키려 했다.

 되돌려 주려는 것.

 관군도 단심맹도, 적들의 추격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는 한 낮의 벌판에서, 청풍은 귀장낭인을 향하여 주작검을 내밀었던 것이다.

 “받으시오.”

 완만하게 휘어진 주작검 검날에서 태양이 부서지고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검광(劍光)을 보는 귀장낭인과 귀호.

 그들이 지은 표정은 경악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대로 청풍이 주작검을 차지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까닭이다. 청풍이 없었다면 녕양 땅을 벗어날 수 없었을 터, 청풍은 귀도 일행에게 생명의 은인(恩人)이나 진배없었다. 그 대가로서 주작검을 요구한다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놀라움이 불러온 정적 끝에 귀장낭인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것은.........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귀장낭인의 목소리에는 침중함이 가득했다.

 청풍의 두 눈에 담긴 순수함을, 낭인들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대함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은 것일까. 

 귀장낭인이 받을 수 없다 말하는 데에도 청풍은 주작검을 거두지 않았다.

 “아니오. 이것을 이렇게 얻을 수는 없소. 법도에 맞지 않아.”

청풍의 대답에 귀장낭인이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법도를 논한다면 도리어 틀린 말이지요. 은원은 분명해야 하는 법, 그것이라도 가져가는 것이 옳습니다.” 

 귀장낭인의 말은 단호했다. 

 검을 내밀고 있는 자와, 그것을 받지 않으려는 자.

 귀장낭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분명히 하겠습니다. 주작검은 되돌려 받을 수 없습니다.”

 확고한 한마디였다.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청풍에게, 귀장낭인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지요. 그것을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받을 수 없다?”

 약간은 다른 의미가 전해지는 말이었다. 청풍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것을 되돌려 받아도 들고 다닐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

 청풍의 얼굴에 떠오른 의혹이 더 짙어졌다. 주작검을 들고 다니던 이가 누구였던가. 녕양 땅, 적신당에서는 주작검으로 신비한 불꽃의 술수까지 부렸으면서 다룰 능력이 없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것을 함부로 잡을 수 없다는 것.”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놀랐던 일이지 않던가. 주작검을 휘두르며 술법을 펼치던 귀장낭인의 모습은 확실히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헌데 이제 와서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하지만.......”

 “잡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잘 다루는 것 같았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그저 그렇게 보였을 따름입니다.”

 귀장낭인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가 주작검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그런 강력한 무구는 아무나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되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쓰려면 최소한 두 가지 중 하나가 갖추어져야 하지요.”

 “두 가지?”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주작검을 쓸 수 있는 방법, 감추어져 있던 비밀 한 구석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두 가지. 두 가지 중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술법입니다. 주작검이 지닌 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이 같은 부적 칠십 이 장이 필요했지요.”

 귀장낭인이 품속에서 한 장의 부적을 꺼내 들었다. 주작검을 온통 감싸고 있던 부적들과 같은 부적이었다.

 “주작검을 들고 다니려면 또 다시 봉인(封印)의 술(術)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공력이 지나치게 소모될 뿐더러, 그것을 펼치기 위한 충분한 부적도 없는 상황이지요. 지금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귀장낭인이 주작검을 쓸 수 있었던 까닭. 수수께끼가 풀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하나. 

 청풍은 남아있는 의문도 마저 풀기로 했다.

 “두 가지를 방법을 말했지. 그렇다면 다른 한 가지 방법도 말해 줄 수 있겠소?”

 청풍이 주작검을 다룰 수 있는 이유가 술법 때문이 아닌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백호검이나 청룡검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그와 같은 신검들을 다루고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지 못한 청풍이다.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귀장낭인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의외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간단합니다. 내력. 바로 내공이지요.”

 ‘내공.......?’

 청풍의 눈에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 챈 듯, 귀장낭인이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술법도 내공도 아니라는 표정이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와 같은 신병이란 무릇 천명으로 정해진 주인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 조건이 어떤 것이 될지는 범인(凡人)들의 역량으로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그 정도로 주작검을 다룬다는 것은 필시 내공이나 술법 정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터, 저로서도 알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요.”  

 귀장낭인의 이야기에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까지는 알겠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

 내공에 관한 것이다. 뭔가 뇌리를 자극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내공으로 다룰 수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입니다. 주작검의 힘을 직접 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공력이 있다면, 그리고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확고한 정심(貞心)이 있다면.......그것에 휩쓸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가 있겠지요.”  

 청풍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강력한 공력과 완전한 정심! 만검지련자!’

 그렇다.

 그 말이다.

 만검의 사랑을 받는 자. 

 그런 자라면. 그처럼 강한 자라면, 아마도 검이 주는 광기에 휩쓸리지 않을 테다. 을지백이 만검지련자를 말하면서 이야기 했던 자가 바로 북풍단주 명경일진저, 그와 같은 자라면 백호검이나 청룡검을 쥔다 해도 광기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여하튼, 그 검은 일단 받아 두시지요. 게다가 이쪽에는 예상치 못한 수확도 있었으니, 구명의 은을 차치하고서라도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수확.

 귀장낭인이 들고 있던 부적을 집어넣으며 품속에서 하나의 길쭉한 물건을 꺼냈다. 익숙한 물건, 바로 녕양 땅에서 맞섰던 물건이었다.       

 “마환필. 냉심마유가 쓰러진 곳에서 챙겨 두었지요. 관군 손에 맡기기엔 아까운 물건이니까요.” 

 그 난장판 속에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었던가. 

 주작검과 마환필.

 각각 새로운 주인들을 찾아가는 기병들이다.

 그 힘을 진정으로 뽐낼 수 있는 손을 향하여.

 강호에 남겨질 이름이 되는 필연이자, 무림에서 벌어지는 인연의 법칙이 거기에 있었다.   

       *                   *                     *

 “들려오는 이야기가 만만치 않던데.”  

 걸신(乞神) 개방 용두방주의 늙은 등은 작았다.

 구주 사해를 위진 시키는 명성에 비하자면 초라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작은 체구다. 촌로(村老)와 같이 소탈한 기운, 하지만 용두방주는 장현걸을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지만, 자꾸만 좁혀오니 사면초가라. 곤란하기도 곤란하겠어.”

 흔적도 없이 고아로 떠돌던 장현걸에게 성을 주고 이름을 주신 분이셨다.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장현걸로서는 차라리 그렇게 못난 제자를 보지 않는 사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면목이 없다는 말이란 바로 이런 때를 위하여 있는 것. 장현걸은 고개를 푹 떨굴 수밖에 없었다.

 “밀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집이 있었지. 그 집 식구들은 그 밀을 빻아다가 떡을 만들어 먹으며 살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그 떡 한 움큼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했단 말야. 누가 들어와서 훔쳐 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들어와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뭔가 아는 놈이긴 아는 놈인데, 그렇게 범인을 찾으려면 같이 살던 한 식구를 의심해야 하고........”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용두방주의 이야기다. 아래로 쳐진 장현걸의 눈에서 번뜩이는 빛이 떠올랐다.

 ‘역시........!’

 일선에서 손을 놓다 시피 했다고 알려졌던 용두방주다.

 물러난 용두방주.

 실제로도 방파의 일은 장로들의 손에 맡겨둔 채, 어린 거지들과 소일거리나 하면서 지내고 있던 바다. 그러나 용두방주는 역시나 용두방주였다.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개방의 자금과 관련된 사건을 말하는 것. 용두방주는 방파 내의 일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두방주의 용안(龍眼)은 역시나 천리(千里)에 닿아 있는 것이다.

 “뭔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한 식구를 추궁하면서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겠지. 뒷감당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단 말야. 그래서 집 지키던 놈은 다른 집의 밀가루를 가져오기로 결정했어. 그걸로 떡을 해 먹으려 했지.”  

 장현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것은.........!’

 용두방주의 이야기는 개방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한 것. 다름 아닌 장현걸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부님, 천리에 닿아 있는 눈은 어디까지 알아보고 계신 것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장현걸의 눈빛이 정처 없는 발치를 맴돌았다.

 “가져오려 한 것 까지는 좋았지. 원체가 잘 얻어먹으며 다니던 집안이었거든. 그런데 웬걸, 다른 집에 가 봤더니, 그 집 지키는 개가 만만치 않았단 말이야. 그것도 미쳐버린 광견(狂犬)이었지.”

 ‘다른 집........석가장. 광견이라 함은 석가장주........!’

 “밀가루를 얻으러 간 놈은 되도록이면 광견을 건들지 않고 일을 꾸며보려 했었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지. 그 집에 갔다가 얻어먹은 떡에서 자기 집 밀가루 냄새가 났던 거야. 골치 아픈 일이었어. 게다가 그 집에서는 그 밀가루로 끝내주는 떡을 새롭게 만들어 내 놓고 있었지.”

 장현걸의 얼굴이 굳어졌다.

 끝내주는 떡이란 보검들, 청룡검과 적사검을 빗대어 하는 말일 게다. 거기에 집에서 다른 집으로 들어간 밀가루란 곧, 자금의 흐름을 말하는 것. 석가장으로 흘러간 개방의 자금을 이미 파악하고 계셨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것은 곧, 천품신개 풍대해와 석가장주의 연결 고리까지 알고 계신다는 뜻이리라.

 “그 떡에 대한 소문이 보통 빨리 퍼진 것이 아닌지라, 그 집 근처는 삽시간에 사방천지의 잡것들로 들끓게 되었어. 벼라 별 놈들이 다 있었지. 광견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정신 나간 늑대도 있었고, 광견보다 빠르고 강한 표범도 있었어. 그러다가 꽃을 달고 온 바보 두 명을 만났고, 그 바보 둘을 어떻게 이용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지.”

 성혈교 오사도.

 숭무련 흠검단주.

 그리고 매화검수 두 사람, 연선하와 매한옥. 

 “좋았어. 거기까진 아주 좋았단 말야. 광견이 숨겨놓은 밀가루도 보았고, 제 집에서 밀가루를 가져다 바친 범인까지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더 욕심을 부린 것이 잘못이었지. 밀가루도 떡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범인을 자극하는 일이 되고 말았고, 더욱이 꽃 달고 온 바보들 중 한명에게 마음까지 빼앗겨 버리고 말았어.”

 장현걸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디까지 알고 계실지 궁금해 했었다? 

 잘못된 생각이다. 

 어디까지가 아니라 전부 다다. 그러하기에 대 개방의 정점,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이셨다.

 “가장 큰 문제가 뭐였는지 아나? 바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바보와 함께 있다가 제 자신도 바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야. 밀가루도 떡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으면 재빨리 물러 나왔어야 되는데, 밀가루도 되찾고, 떡은 덤으로 얻으면서 범인도 잡겠다는 마음을 먹어버렸지.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이 지나쳤단 말이다.”

 바로 거기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 이미 장현걸도 알고 있는 바다. 그것을 사부님께, 다른 누구도 아닌 사부님께 듣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질책보다 강하게 그의 마음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 뿐이 아니야. 떡의 주인은 따로 있었지. 슬그머니 나타난 꼬맹이가 바로 그거야. 하찮은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꼬맹이가 아니었던 것이지. 꽃도 안 달고 있었는데 바보들보다 강했고, 늑대와 표범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단 말이야. 그런데도 알아보지 못했어.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욕심 많은 돼지들과 영민한 까마귀들이 몰려들은 데다가 이래저래 다급해진 관계로 최악의 선택을 해 버렸지.”

 ‘욕심 많은 돼지들.........황보세가. 까마귀들은 모산파...........!’

 장현걸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 때의 실수로 이렇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부의 말이 이어졌다.

 “영웅과 효웅은 한 끝 차이야. 누군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뒤탈이 없어야 하는 바, 다른 사람의 힘을 제 뜻대로 잘 사용하면 용인술(庸人術)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협도 도의도 무시한 채 발하는 술책이라면 잡배들의 칼질만도 못한 법이지. 그 꼬맹이에 관한 것이 바로 그래. 무척이나 고약한 결과를 낳고 말았어. 이렇게 될 바엔 차라리 확실하게 죽이는 편이 좋았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지? 개방 방주로서 영웅 대신 효웅이라........그것도 사실 나쁘지는 않겠어.”

 붉어지고 굳어졌던 장현걸의 얼굴.

 그의 안색은 이제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번보다 무서운 질책은 없었던 까닭이다. 

 심중에 무엇이 있는지 범인으로서는 측량할 길이 없지만, 단 하나만큼은 분명한 분이지 않던가. 살아 숨쉬는 협의지도, 협의(俠義)의 화신으로서 제자의 행동을 얼마나 탐탁찮게 보셨을 텐가.

 “눈과 귀도 막혀가고 있을 텐데, 어지간해서는 빠져나오기 힘들거야. 화산의 처자야 처음부터 바보는 바보였던지라 네 놈의 힘이 되어 주고 있다지만, 천검(天劍)은 결코 바보가 아니지. 천검이야말로 희대의 효웅, 활용가치가 사라지면 주저 없이 그 끈을 끊어낼 것이다. 그 전에 돌파구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대세가 그런 모양이니, 풍대해에게 붙는 수밖에.........”

 ‘사부.......!’

 장현걸은 목구멍을 타고 무엇인가 울컥 넘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사부의 진심.

 그토록 엄한 질책을 하고 계시면서도, 그의 처지를 염려해 주시고 있다. 화산파, 연선하의 도움으로 작게나마 숨통을 트여놓고 있었지만, 그것에 기대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현 시점에서 이보다 소중한 충고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그 뿐인가. 정 안되겠으면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라고 말씀하신다. 방의 문규를 잠식하고 있는 풍대해의 손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넓게 뻗쳐 있으니, 결코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사부님도 움직이시지 못하는 게야.’

 혼란과 자책을 넘어 평상심을 되찾는 장현걸이다. 

 그의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풍 장로가 손잡은 곳은 단심맹이다. 개방의 실권은 이미 대부분 풍 장로에게 넘어가고 있는 중. 이대로라면........’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천품신개 풍대해라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천품신개의 인망은 개방 내에서도 독보적이고, 그를 따르는 방도들은 모래알처럼 많다. 그런 자가 단심맹과 얽혀 개방을 잠식하고 있으니 도무지 손쓸 도리가 없다. 천품신개는 그 인망도 인망이지만 지략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 그는 결코 서둘지 않으리라. 외부의 모습은 개방 그대로지만, 내부로부터 추구하는 것이 달라질 것이고 서서히 변질되어 갈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풍대해에 관한 진실을 밝힌다?

 그것도 한 방법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뿐, 결코 좋은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개방의 방도의 개방의 절대다수는 단심맹이 어떤 곳인지도 모를뿐더러 장로들조차도 단심맹의 위험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팔황을 알고 단심맹을 알고 있는 장로들일지라도, 풍대해 장로가 거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믿어 줄 사람들을 모으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준비를 했다고 해도 끝을 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풍 장로를 따르는 자들과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 개방을 둘로 나누는 싸움이 벌어지겠지.’

 처음부터 우려했던 것.  

 일의 전모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사부님이건만, 여태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리라. 

 차라리 일찍 터뜨렸으면 수습하기도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늦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그 늦어지게 된 원인에는 장현걸 본인의 실책이 무엇보다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후개의 명성은 천품신개의 이름값에 크게 뒤지지 않았으니 암중에 풍대해를 견제하는 것이 가능했건만, 현재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아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까닭이다.

 전면에 나서서 일을 벌인 석가장 건은 수많은 인명피해만을 남긴 채 소득 없이 끝나 버렸고, 청풍의 추격에 크나 큰 인력을 동원했지만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후개의 명성을 대폭 깎아먹기에 충분했던 일. 무능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동안 풍대해는 마음껏 원하는 일을 꾸며나갈 수 있었고, 더불어 후개인 장현걸의 입지를 좁히는 것에도 성공했다. 장현걸로서는 벗어나기 힘든 올가미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풍대해에게 붙든, 아니면 죽을 길을 가든, 그것은 네가 알아서 할 문제겠지. 행여나 죽을 길을 택해야겠다 싶거든 여기 이 놈을 만나 봐라. 단심맹을 캐고 있다 들었으니까.”

 용두방주는 여전히 장현걸을 돌아보지 않은 채, 조그만 어깨 너머로 다 꾸겨진 종이 쪼가리 하나를 던져 주었다. 받아 든 종이 한 켠. 생소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암행(暗行) 북중랑장(北中郞將) 조홍(曺泓).......? 관인(官人)인가........’

 “효웅의 길로 들어섰다 해도 잘못된 길로만 볼 수는 없지.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더 알려주마.”

용두방주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만남을 끝내려는 것이다. 장현걸은 끝까지 한 마디 말조차 걸어보지 못한 채, 사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꼬맹이가 다시 강호로 나왔다. 주작검까지 휘두르고 있었다더군. 이번에는 어떻게 써먹을 건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야. 내가 너라면 백배 사죄부터 하겠지만.”

 ‘주작검을.......!’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제서야 고개를 드는 장현걸이다. 허리춤 녹죽장을 흔들며 휘적휘적 사라지는 사부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처자는 아주 괜찮더구나. 정신이 빠질 만도 해. 후후후.”

 한참이나 멀리서 들려오는 마지막 웃음소리.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결코 여유롭게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의 뒤를 향하여 구배지례를 드리는 장현걸의 모습, 일 배(拜)를 더할 때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앞일에 대한 고민이 짙어지고 있었다.   

  

  *                                    *                           *

 청풍과 귀도 일행은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동을 계속했다. 

 모처럼의 여유로운 행보였다. 쫓아오는 관군도 없었고, 길을 막는 세력도 없었다. 인적 드문 길을 따라가면서 호남성과 강서성의 경계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당도한 이름 없는 야산(野山)에서.   

 마침내 귀도가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텄다.

 “이거야..........꼴이 말이 아니군.”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잠겨 있었다. 한참동안 목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귀도의 몰골은 무척이나 피폐해져 있었다. 심각한 부상과 오랜 여정에 시달린 까닭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는 거칠게 일어나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제 멋대로 돋아난 수염과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산 도적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후욱.”

 귀도가 바위에 기대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숨을 들이키며 수척한 얼굴을 온통 찡그렸다. 단순한 동작에도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귀장낭인과 귀호를 훑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놈, 강하더군. 구파 출신 같지 않았어.”

 “.........”

 “이겼지만 이긴 것이 아니야. 마지막에 네놈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내가 당했을 거다.”

 귀도가 귀장낭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북풍단주 명경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 귀장낭인은 귀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백중세라는 것은 곧,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싸움을 말하는 법이다. 마지막 순간 북풍단주가 제 역량을 다 발했더라면 귀도의 말마따나 결과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놈이 쓰러진 데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나 역시 곧바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지? 그 다음이 기억나지 않아.”

 “많은 일이 있었지요.”

 귀장낭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귀호와 청풍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귀도의 눈이 청풍에게 이른다. 그가 청풍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좁히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청풍.

 그의 손에 들린 주작검을 본 귀도가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혼잣말과도 같은 몇 마디를 읊조렸다.

 “그랬지.......그랬어.”

 청풍에게 도움을 청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하다. 

 몸은 망가졌지만 하나도 생생하게 살아난 눈빛, 귀도의 눈을 마주한 청풍이 그에게 다가와 주작검을 치켜 들었다.

 가볍게 흐르는 광채, 주작검이 땅에 꽂혔다. 직접 건내는 것이 아니라 귀도의 발치에 박아 놓는다. 내리쬐는 양광에 선홍빛 광채를 흘려내는 주작검. 귀도가 주작검을 보더니, 이내 눈을 돌려 청풍을 직시했다.  

 뚫어버릴 듯한 눈빛, 청풍의 진면목을 가늠하는 귀도다.

 천천히.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가져가.”

 청풍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이렇게 간단히 가져가라고 말하는 것. 확실히 의외다. 이 정도 기보(奇寶), 이 정도 신검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포기하지 못할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부요?”

 청풍이 되물었다.

 이제까지 따라 온 이유도 결국 스스로 납득할만한 명분을 찾기 위해서였지 않던가.

 청풍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 한 손을 목에 대고 이리 저리 고개를 젖히는 귀도다. 오랫동안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해서인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우둑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의뢰지. 의뢰란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뜻한다. 난 그 대가로 그 검을 넘기겠다.”

 귀도의 말투는 단호했다. 낭인의 법도를 말하는 모습, 이 자는 뼛속까지 낭인이다. 어딘지 모르게 이방인의 느낌을 흘리고 있는 귀장낭인이나 귀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느낌이었다. 

 “그 정도 대가로는 과하오.”

 “대가가 과하고 말고는 의뢰인이 정하는 법이다.” 

 석가장의 격전에 비하자면 확실히 가벼운 싸움들이었다. 그다지 많은 일을 한 것 같지 않는데도 주작검을 얻어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보상으로 생각되었다. 귀장낭인에게 주작검을 되돌려 주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다. 때문에, 청풍은 말했다. 언젠가가 될지 모르는 인연, 청풍은 하나의 약속을 남긴다.

 “어떤 대가라도 받는 사람이 사양하면 그만이오. 대신, 한 가지 약속하지. 또 다시 당신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그 때 내가 당신의 힘이 되어 주겠소. 이렇게 주작검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까.”

 두 눈에 담긴 진심.

 귀도가 미간을 좁혔다. 순정하고 정대한 성정이 그의 눈앞에 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쓴 웃음으로 변했다. 그가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군. 하지만 그럴 일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가지고 사라지도록 해.”

 허공에서 부딪친 눈빛 아래, 청풍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쓰디쓴 웃음과 대조되는 밝은 웃음이다. 또 한번 교차되는 천명에, 청풍의 손이 주작검의 검자루를 잡았다.

 그가 검을 비껴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청풍이오. 주작검은 잘 받겠소. 다시 만날 때 까지 무운이 함께하길.” 

 청풍은 몸을 돌렸다. 

 만남은 끝났고, 그의 손엔 주작검이 남았다.

 귀도 일행을 뒤로 한 채, 큰 발걸음을 내 딛는 청풍.

 그의 위로 중천의 태양이 밝고도 밝은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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