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56)

 “상황은 어때?”

 “사결 제자들은 거의 다 빠져 나갔습니다. 더 이상 후개의 이름이 먹히질 않아요. 그나마 오결 제자들 몇 몇은 아직 돌아서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들도 결국은 시간 문제겠지요.”

 “그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일 할이 제대로 못 되는군.”

 “예, 정확히 보셨습니다.”

 고봉산의 어조는 심드렁하게 들렸지만, 그것은 초조함을 가장한 여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개가 동원할 수 있는 개방의 인력이 일할도 안 된다니. 그것 참........”

 허탈할 지경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것이기에 한숨으로 넘기는 것이지 상황 자체는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후개는 예로부터 차기 용두방주의 상징 아니었던가. 그것이 무너지고 있는데 속수무책이라니, 백 번 한숨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런데, 봉산. 자네는 대체 왜 붙어 있지? 더 있다간 정말 피를 볼 거야.”

 “뭐 어쩔 수 있나요. 후구당이라도 제대로 서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후구당 당주인줄 알겠군.”

 “부당주 시켜줄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다가 당주도 하게 되겠죠.”

 “..........”

 점입가경의 농짓거리였다.

 그러나 장현걸은 그의 농담을 받아 줄 여력이 없었다. 농담으로 넘겨버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장현걸 뿐 아니라 고봉산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장현걸이 고봉산에게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때가 탄 종이, 용두방주가 쥐어줬던 바로 그 종이였다.

 “이게 누군지 조사해 줘.”

 받아드는 고봉산의 손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제 시작이다.

 장현걸은 뭔가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종이를 받아 일을 벌리게 되면 고봉산은 다시는 발을 빼지 못한다.

 힘 있게 받아든 종이를 고봉산은 지체 없이 펼쳤다. 하지만 기세 좋게 펼쳐본 것과 달리 금세 찌푸려지는 얼굴이다. 그가 물었다. 

 “암행 북중랑장 조홍? 이게 누굽니까?”

 “모르니까 조사해 달라는 것 아냐.”

 “관가에 이런 직책은 없는데요.”

 “있어. 있으니까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접선 통로를 마련해.”

 “접선까지요?”

 “그래.”

 장현걸의 단호한 대답. 

 고봉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는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 더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고봉산의 변심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 서운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반가워  해야 할 일이다. 행여나 적들에게 사로잡혀 자백을 강요받을 수도 있으니 만전을 기한다는 의도일진데 섭섭하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또 뭡니까?”

 “청룡검이 세상에 나왔어. 게다가 주작검까지 얻었다고 하더군. 놈의 행보를 파악해 놔. 이쪽을 목표로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

 하지만 고봉산은 말이 없었다.

 장현걸은 순식간에 알아챘다. 그 침묵의 이유를. 

 고봉산을 보는 장현걸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군. 그렇지?”

 고봉산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만큼 제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지만 정보 제일당 개방 후구당은 괜히 개방 후구당이 아니다.

 청룡검이 세상에 나오고, 관군과 부딪치면서 그만한 소란을 일으켰는데에도 개방이 감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없을 어불성설이다. 장현걸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고봉산이 일부러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뜻, 장현걸의 눈초리에 고봉산이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그 놈의 행보는 개방과 상관이 없어 보여서........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겠지.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 그 놈에 관한 사항이라면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고 있었으니까.” 

 “아,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괜찮아. 상관없어. 가끔은 윗사람의 결정을 못 믿는 수하도 필요한 법이야. 확실히 그 놈에게선 손을 떼야 할지 모르지. 그렇다 해도 살피는 눈은 그대로 두도록 해. 언제고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거야.”

 “예........”

 장현걸은 고봉산의 독단을 가볍게 넘겨 버렸다.

 청풍에 관한 것은 중대하다면 중대한 안건일 수 있다. 그런데도 임의로 걸러서 보고한다는 것.  어떻게 질책 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냈다. 믿는다는 이야기다. 고봉산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뜻이었다. 

 “철혈련 쪽은 어때?”

 장현걸은 가벼운 어조로 화제를 바꾸었다. 고봉산도 금새 표정을 풀고, 어투를 가볍게 했다. 잊을 것을 빨리 잊어라. 언제나 세상은 다음 일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한창 치고 받는 중이지요. 아마도 이 며칠 새가 가장 시끄럽고, 이 삼일을 기점으로 하여 꼬리를 내리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가. 확실히 그렇겠군. 무림맹이 발동되었으면 무인들이 엄청나게 몰려들 테고, 그러면 도리어 무당이나 화산은 자유로운 기동이 어려워질테니까. 관아의 눈치도 봐야 할 테고 말이야.”

 “그렇죠. 대신......”

 “대신......?”

 “철혈련 쪽 보다 다른 곳들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다른 곳들?”

 “북풍단주가 실종 된 후, 남궁세가로 시집 간 절강일미가 남궁가를 뛰쳐나왔다는 전언입니다.”

 “남궁가를? 어떻게?”

 “그게 신기합니다. 패왕 사중비가 나섰고, 더불어 십보단혼객이 움직였다는 말이 있지요.”

 “십보단혼객? 동창의 반나한이?”

 “예.”

 장현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대 낭인들의 정점에 서 있다 알려진 패왕 사중비. 그리고 동창 흑살대주 반나한이라면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가 없다. 기억을 더듬는 장현걸, 그가 일순간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십보단혼객........그렇군. 북경에서 있었던 황제 암살시도.......북풍단주는 거기에도 관여했었지. 그 때 어전 무술대회에 나타났던 것이 백검천마와 탈명마군이야. 백검천마는 잘 모르겠지만, 탈명마군은 단심맹과 연관이 있어. 조홍.......조홍. 그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기억에 있어.”

 그의 이야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후구당이 반나절에 걸쳐 뽑아낼 정보를 단숨에 추려낸다. 비상한 기억력, 고봉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잘 찾아 봐. 조홍에 대한 정보는 그 근처에서부터 따라가는 것이 좋겠어.”

 “예.”

 “다음은 뭐야. 또 무슨 변화가 있었지?”

 “아, 먼저는 절강일미에 관한 일의 연속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당찬 여자인지, 북풍단주에 대한 복수를 선언하고 나섰더군요. 철혈련으로 직행하고 있답니다.”

 “철혈련으로? 절강일미의 무공은 그 정도가 안 될 텐데?”

 “그것도 작년까지의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북풍단주의 무공에, 패왕 사중비의 사자기를 구사한다 하더군요.” 

 “놀랍군.”

 이것이야말로 예측하지 못할 사건이다. 너무나 사건의 발생이 빠르고 혼돈스럽다. 이것이 개방에 있어 호재로 작용할지 악재로 작용할지 지금 시점에서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더 큰 변화가 있습니다.”

 “또 있어?”

 “예. 천하의 이목이 철혈련에 집중되고 있지만, 그것도 조만간 결판이 날 겁니다. 지금 주시해야  할 곳은 따로 있어요. 철혈련의 발호만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지요.”

 “그것은 또 무슨?”

 “장강. 장강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                   *                  *

 “백호, 청룡. 두 가지 기운을 얻었군요. 금강호보와 풍운용보. 호보는 무겁고, 용보는 가볍습니다. 두 보법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느려요. 화천작보(火天雀步)는 빠르지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남강홍의 말은 단정적이었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도 전혀 어색함을 보이지 않는다. 신법(身法)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엿보였다.

 “형(形)은 이렇습니다. 탄법 자체는 호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러나 작보는 발의 움직임 그 이상을 중시합니다. 화천작보든 공명결(共鳴結)이든 염화인(炎火刃)이든 결국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 홀로 익히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나는 을지형님이나 천노인과는 다릅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아요.”

 남강홍은 화천작보의 투로를 보여주며 작보 이외에도 공명결과 염격포를 이야기했다.

 주작검의 다른 무공을 말하는 게다. 

 새로운 무공.

 새로운 방식.

 남강홍은 을지백 이상으로 전투적인 성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공이란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에 그 의미가 있지요. 거기에 다른 것을 아무리 붙여 보았자 탁상공론일 뿐입니다. 친우였던 만춘이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압도 당할만한 숫자나 감당 못할 기세를 보고서 패배를 시인하는 자는 겁쟁이에 불과하다고요. 살아 남고 쓰러지지 않는 자가 진리입니다.”

 남강홍의 말은 무공광(武功狂)의 궤변처럼 들렸다.

 무공의 목적을 싸움의 승리에 두는 것.   

 우(愚)다.

 무(武)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실수다.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남강홍은 달랐다.

 이 남강홍은 어설픈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백전(白戰)을 겪어보고 스스로 체득한 진심(眞心)이 묻어 나온다. 마치 전쟁터의 한 가운데 있는 이가 하는 소리 같았다. 

 “이제부터 나와 하는 수련은 전부 대련(對鍊)으로 이루어집니다. 무리(武理)를 완전히 익힐 때까지는 쉴 생각 마십시오.”  

 청풍은 남강홍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산동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멀다.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무공을 연련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대련은 바로 시작되었다.

 “발이 먼저 나가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보법을 발로만 펼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금강호보는 전개하는 검에 힘을 실어주고, 풍운용보는 회피하는 신법에 유려함을 더해준다. 싸움을 하는데 유리한 위치와 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펼치는 것이 보법이란 말이다.

 화천작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불처럼 화려하고, 빛살처럼 빠르다. 그 자체만으로 위압이요, 그것만으로 공격이다.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그런 만큼 품어내는 살기도 대단하다. 방어나 회피 따위는 처음부터 전혀 생각지 않는 보법이었다.

 “팔을 쓰는 겁니다. 실전에서는 팔이 아니라 검(劍)이 되겠지요. 상대를 구속하고 내 자유를 찾는 것에 묘리(妙理)가 있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잡히지요.”

 대련의 요령은 간단했다.

 먼저 상대방의 등을 가격하는 쪽이 이긴다. 방어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파앙!

 청풍의 옆을 가볍게 파고 든 남강홍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내력을 쓰지 않고 있는지 아무런 충격이 없다. 그렇지만 마음에 받는 타격은 상당했다. 검을 쓸 수 없고 방어를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기는 해도, 이렇게 쉽게 등을 내주고 있다는 것은 충격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느려요. 용보나 호보로는 안 됩니다. 작보의 구결을 빨리 깨우치는 편이 빠를 겁니다.”

 남강홍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용보나 호보나 모자람이 없는 절세의 무공이지만 각 무공에는 각자의 쓰임이 있는 법이다.

 속도에 있어 다른 보법으로 작보를 상대하려 한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빠르게 접근하여 상대를 살상하는 것,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만들어진 보법이니 다른 보법으로는 근본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파아앙!

 벌써 오일 째.

 산동성으로의 북상(北上)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매일처럼 이루어지는 대련이었다. 그러나 청풍은 단 한번도 남강홍을 이겨본 적이 없다. 

 남강홍은 빨랐다.

 깃털처럼 가볍다. 아니, 아예 무게가 없는 것 같다. 

 화천(火天)이라더니, 무거움을 측량할 수 없는 불꽃처럼 움직임에 어떤 제약도 받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그렇게 빠를 수가........”

 기어코 청풍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의문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내공과, 보기 드문 실전 경험들을 쌓았다. 굳이 주작검의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겁나지 않는다. 

 그만큼 강해진 청풍이다. 그런데도, 남강홍을 따라잡지 못했다. 

 을지백은 금강호보를 익히는데 삼일을 이야기했었다. 

 무리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도 삼일 만의 연공은 불가능했었지만, 적어도 실마리만큼은 잡을 수 있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강해진 청풍의 눈에도, 수많은 고수들의 움직임을 보아온 그의 눈에도 마땅한 비책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모르는군요. 눈으로 보고 잡는 것이 아닙니다. 쫓는 것 보다 앞지르는 것이 먼저지요. 쫓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영원히 쫓다가 끝나는 겁니다.”

 그릇을 키워라. 

 청풍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청풍에게 모자란 것은. 남강홍은 거기에 더하여 문제의 진정한 근본을 짚어 주었다.

 “목숨을 거십시오. 당신에겐 그것이 없습니다. 무공이란 치열해야 하는 법이지요. 내게 등을 내맡길 때마다 목숨 하나를 잃는다고 생각해요. 죽기 싫다면 앞질러서 베는 겁니다.”

 남강홍의 말은 또 하나의 무리(武理)였다.

 싸우는 자, 목숨을 걸어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자, 내 목숨부터 내 놓아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그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말할 수 있는 자는 흔치 않다. 첨봉 의 싸움터에서만 얻을 수 있는 심득(心得)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청풍은 남강홍의 심득을 빠르게 체득할 수가 없었다. 

 지닌바 성정에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해는 가는 말이되,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싸움에 살기(殺氣)가 필요하다는 사실이야 얼마든지 알고 있지만, 타고난 마음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공의 목적에 관한 것도 그렇다.

 무(武)라 함은 본디 싸움과 폭력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그 반대의 뜻을 품고 있는 글자다.

 창 과(戈)와 그칠 지(止). 두 글자가 합쳐서 무(武)다.

 무공이란 싸움을 그치기 위한 도리(道理)라는 것. 싸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오직 죽일 살(殺)로 해석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청풍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렇지만 남강홍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살상을 이야기한다.

 베기 위하여 뛰어 들고, 죽이기 위해 다가가는 것이다. 

 화천작보는 그런 무공이었다. 그러하니 청풍의 진전이 빠르지 못한 것은 결국,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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