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아아아아!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든 무공일지라도, 청풍에겐 대해와 같은 내공과 무공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함께하고 있다. 서서히 남강홍의 속도를 따라잡는 청풍이다. 남강홍이 청풍의 등을 확보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따라오는군요. 슬슬 한 가지 더 해봐야겠습니다.”
남강홍의 말에 청풍은 다른 무공을 예상했다.
그러나 남강홍이 제시한 것은 화천작보의 연장이었다. 화천작보가 가진 접근성에 더하여 지구력과 내력의 활용을 기른다.
남강홍은 단 한 가지를 주문했다.
“목적지가 어딥니까.”
“산동성.”
“그럼 따라오십시오.”
남강홍은 달렸다. 중원 천하를 한 달음에 가로지를 것처럼 빠른 신법이었다.
쒜에에에엑!
청풍은 남강홍의 속도가 부담스러웠다. 화천작보는 같은 화천작보인데, 전혀 다른 무공인 것 같다.
경신술로도 사용할 수 있는 보법.
좁은 공간 안에서 작보를 내 딛는 것이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지만, 이렇게 넓게 쓰려고 하니 무척이나 어색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 같았으나 남강홍의 등은 청풍의 깊은 내력이 무색하게도 점차 멀어지기만 한다. 근접거리 안에서는 숙련의 차이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질 수밖에 없었다지만 장거리에 있어서는 내력의 고강함으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을지백이나 천태세가 그랬듯이 남강홍 역시도 청풍을 가르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고수인 것이다. 그 연배 그 얼굴에 어떤 방식으로 그정도의 무공을 연성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파아아아아.
남강홍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청풍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아무리 안 맞고,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배워낸다. 배움에 있어서 인색하지 않는 것, 청풍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었다.
‘신법의 보강은 확실히 필요하다. 궁왕 위연 때도 그랬어. 작보가 있었더라면 훨씬 더 쉽게 이겼을 것이다.’
강남제일포쾌 위연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위력적이었던 궁사(弓射)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신법이 더 뛰어났던 위연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청풍을 가볍게 따라붙던 경공은 지금 생각해도 경탄이 절로 나왔다.
청풍은 작보를 꾸준히 전개하며 예전의 싸움들과 남강홍의 경공을 한꺼번에 되짚어 나갔다. 화천작보로 싸웠다면 더 좋았을 순간들, 화천작보로 움직였으면 더 쉬웠을 상대들을 가늠하면서 앞으로 응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했다. 동방의 고묘에서 무공을 키우던 방식 그대로, 과거의 경험들과 새로 배우는 무공들 사이에 덧붙임의 사슬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파아아아.
“이제 옵니까. 너무 느립니다. 조금 더 분발해야겠어요.”
남강홍을 다시 만난 것은 두 시진을 더 달린 후였다.
한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남강홍이다. 청풍은 쉬지도 않은 채, 재 대결을 청했다.
“다시 해 보겠소.”
“얼마든지.”
청풍은 이번에도 졌다.
질 것을 알면서도 달렸다. 그리고 배운다. 극한의 속도 안에서 내력을 유지하는 법과 힘을 비축 하는 법을.
질주와 대련의 반복이다.
그 속에서 청풍의 무공은 전에 없던 새로운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청풍의 이동속도는 엄청났다.
난데없는 경공대련 덕분이다. 귀도를 쫓아 남하할 때도 전력을 다했지만 지금 북상하는 속도는 그때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스스로도 놀랄만한 진보였다.
“따라가고 있기는 한데.......무엇인가 모자라다고 느끼오. 구결 문제 같지만 화천작보의 구결 자체에는 허점이 없는 것 같고........”
장거리를 달릴 때도, 근거리에서 투로를 짚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한 없이 뒤쳐지던 처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앞지르지는 못해도 비슷한 정도까진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청풍과 남강홍 사이에는 아직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보법의 깨달음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차이, 청풍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벌써 깨닫다니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요. 작보의 연성은 더딘 편이었는데, 의외입니다.”
남강홍은 웃었다.
청풍이 잡아낸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구결의 차이가 맞습니다. 화천작보가 아니라는 것도 맞지요. 화천작보가 아니라 이것의 차이입니다.”
남강홍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
머리의 차이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능(知能)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뇌, 뇌력(腦力)이다. 상단전을 뜻하는 몸짓이었다.
“상단전을 이야기함이오?”
“오호라. 잘 알고 있군요. 이야기가 빠르겠어요.”
남강홍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안에 품은 섬찟함은 그대로이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순수함이 전해진다. 가르치는 것을 빨리 받아들일 때, 스승 된 입장으로서 가지는 기꺼움이 거기에 있었다.
“당신이 날 잡을 수 없는 것은 내가 더 빨라서라기보다는 당신이 느려서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느려져서’ 이지요.”
“느려......진다.......?”
이것은 또 의외였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해답이다.
상단전을 이용한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청풍이 느려진다니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공명결입니다. 공명결이란 본디, 사물과 공명하여 그 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심법이지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남강홍이 청풍을, 청풍의 허리에 매달린 주작검을 가리켰다.
위이이잉.
신비로운 울림과 움직임.
놀라운 일이었다. 주작검이 절로 검집에서 뽑혀 나오더니 공중에서 방향을 틀고 남강홍의 손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그렇지요. 상단전의 힘입니다. 공명결의 힘이지요. 달리 말하면 어검(御劍)의 비술이기도 합니다. 을지 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어검(御劍).
분명히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 한번,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던 것일 뿐이다. 그 실체가 이런 것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공명결은 이처럼 검을 다루기 위한 심법입니다. 그러나 이 공명결은 다른 효용이 있기도 하지요. 공명결의 힘이 미치는 것은 단순히 사물에게 뿐이 아니어서 맞서 싸우는 상대에게까지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의 몸이 느려진 것이 바로 그런 경우지요. 공명결에 감응하여 움직임의 자유를 박탈당한 겁니다.”
감응이란 말을 듣자 또 한가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감응. 감응사.
청풍은 이러한 광경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심귀도에서 만났던 당문의 젊은 천재를 말함이다.
손대지 않고도 사물을 움직이던 능력, 상단전을 타고 흘러나오던 신비로운 기(氣)가 생각났다. 그러한 것을, 공중에서 암기(暗器)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비술을 검(劍)으로 펼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어검(御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계, 또 다른 무공지로(武功之路)였다.
“공명결의 연성은 쉽지 않습니다. 구결 또한 글자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심어(心語)를 통한 깨달음으로 익혀내야 하지요. 얼마나 연성 할 수 있을지는 오직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남강홍의 손 언저리에 떠올라 있던 주작검이 그의 몸 앞으로 움직였다. 검 하나를 마주하고 반대편에 서 있는 남강홍과 청풍, 남강홍의 입에서 중원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귀를 열고, 머리로 들어온다.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분명한 뜻을 지닌, 알아들을 수 이는 울림이 되어 청풍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글자라기보다는 도형이다. 상단으로 도인(導引)하는 내력의 경로와 그것을 운용하는 힘의 흐름이 거짓말처럼 각인되고 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청풍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공명결, 심어(心語)라고 했던가. 마치 남강홍의 상단전과 청풍의 상단전이 직접 공명하고 있는 느낌이다.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와 많은 것은 남기고 사라진다.
길은 확실히 새겨졌지만 그 길은 너무도 복잡하고 너무나 어렵다.
그것을 얼마나 활용하는가는 청풍 자신에게 달린 것. 청풍은 그제서야 본인에게 달렸다는 남강홍의 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명결의 성취는 따로 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염화인(炎火刃)의 완성은 서둘러야겠지요. 염화인은 화마(火魔) 칼날, 사방신검의 무공 중 가장 위험하고 가장 난폭한 무공입니다. 염화인 연공을 위한 대련,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 *
“이야기 들었소?”
“무슨 이야기 말이지요?”
“다시 강호로 나왔다 하오.”
“누가......?”
“청룡검과 적사검, 강의검을 지니고, 더하여 주작검까지 얻었다고 하더군.”
“.......청풍........말인가요?”
연선하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는 장현걸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소.”
“그는 괜찮나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연선하의 질문은 빨랐다.
청풍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장현걸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가 없었다.
“모르오. 정확한 소재를 아직 잡지 못하고 있소.”
장현걸의 대답은 그러했다. 그의 대답에 연선하의 고개가 가로로 움직였다.
개방이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하냐는 듯한 눈빛이다. 그 눈빛을 직시하는 장현걸의 두 눈에도 짙은 어둠이 깃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로군. 나는 들은 대로 말했을 뿐이오.”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잘 알고 있지 않소! 내게는 그의 행적까지 쫓을 여유가 없소. 나는 다만 당신이 궁금해 할 것 같아 말해주러 온 것뿐이오.”
갑작스레 격앙되어버린 장현걸의 목소리다.
놀란 얼굴의 연선하.
그녀의 표정을 보는 장현걸이 도리어 한숨을 내 쉰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한 몸짓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고는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대체, 그는.......당신에게 무엇이오?”
흘러나오기 시작한 말은 이미 멈출 수가 없다. 감추어 두고 막아 두었던 감정이, 무너진 마음의 벽을 따라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그처럼 걱정을 하는 것이오!”
장현걸의 말에 연선하는 더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얼굴, 연선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는.......제 사제에요. 동문이죠........걱정하는 것이.........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연하지! 하지만 달라! 당신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히 다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하!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멈추어 있던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연선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붉어지는 얼굴이다. 그녀의 목소리도 이제는 높게 올라가 있었다.
“매한옥! 그도 당신의 사제요. 하지만 그에게 하는 것과는 분명하게 달라! 감정의 깊이가 다르오!”
“물론 다르죠! 매 사제는 매화검수에요. 내가 그처럼 걱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그것이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유가 되죠. 당연한 것 아닌가요! 매 사제는 소요관을 통과했고, 문파의 명예를 짊어졌어요. 매화검수와 보무제자의 차이만큼, 걱정하는 깊이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하! 재미있군. 매화검수와 보무제자의 차이라니!”
장현걸의 감정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그 놈은 매화검수의 수준을 예전에 넘어섰어! 그걸 모르는 것이오? 이미 석가장에서 그는 나나 당신보다 위에 있었소! 그건 이미 보무제자가 아니지.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
장현걸의 말은 결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
보무제자를 예전에 넘어서버린 청풍을 말한다.
연선하가 염려하지 않아도 그 혼자서 이 강호를 질주할 수 있는 무인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걱정한다.
그럼에도 불안해한다.
장현걸의 말처럼, 매화검수이고 아니고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볍게 떠올려 말한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설득력도 깃들어 있지 못했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요. 그래서, 그렇게 걱정하는 이유를 내가 당신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연선하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 나왔다.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대답하는 장현걸. 그의 목소리는 그저 단호하기만 했다.
워낙에나 단정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연선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알고 싶으니까.”
장현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을 멈추고, 연선하의 눈을 바라 보았다.
“당신의 생각을 원하니까. 그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은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기 때문에.”
거기에 담겨있는 의미는 너무도 뚜렷했다.
장현걸은 연선하에게 끌려가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뚜렷하기에 도리어 연선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런.......말을 한대도.......”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다.
마주보는 두 사람.
결국 마음속에 있는 말을 토해냈다는 사실에 시원함을 느끼는 듯, 장현걸의 얼굴은 점차 평온함을 되찾고 있다. 그의 얼굴이 편해지면 질수록 연선하의 얼굴은 점점 더 혼란으로 가득 찬다. 얽히고 설킨 인연의 끈이 다시 한번 꼬이는 순간이었다.
* * *
청풍은 산동성에 도착했다.
굉장한 속도였다.
강서성에서 산동성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십일 남짓이다. 기마를 타고 온종일 달린다 해도 산 넘고 물 건너다보면 순식간에 넘겨버릴 시간이었다.
“공명결은 아직 멀었고.......하지만 염화인은 괜찮군요.”
청풍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가지가 성치 않아 너덜너덜해진 것은 물론이요, 이곳저곳에 베인 상처까지 생겨 있다. 인정사정 봐 주지 않던 남강홍 때문이다. 하루에 한 시진, 주작검을 빼앗아 들고서 거칠 것 없이 쳐 들어오는데,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지 모른다. 수련이라 했는데,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였다.
맞서서 살아나려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화천작보의 대련 때와는 다르게 청룡검으로 방어를 할 수 있었으니 버텼지, 방어가 허용되지 않고 피하라고만 했다면 일찌감치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게다.
생사의 경계에서 배우는 무공이다.
방어는 청룡검으로, 눈으로는 염화인의 투로를 살피며, 초식의 응용을 깨우쳤다.
반격은 오로지 같은 염화인으로만 해 냈다.
염화인.
염화인은 연환검, 염화인은 그 이름처럼 검날의 불꽃이었다.
격렬하고 드센 검격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나아간다. 일타 일격이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무공보다도 살벌했다.
“일단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공명결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주작살(朱雀殺)은 나오지 않아요. 염화인도 그렇습니다. 백 명 쯤은 더 죽여 봐야 쓸만해 지겠지요.”
남강홍은 웃으며 사라졌다.
헤어지는 뒷모습.
청풍은 또 하나 깨닫는다.
을지백, 천태세, 남강홍.
이들은 청풍 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없다.
청풍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되면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다. 왜 아직까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예외도 있기는 했다. 단 한번, 청풍이 육극신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다. 하지만 그 이후, 을지백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어떻게 청풍을 찾아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알고자 캐물은 적도 없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이해 못할 신기한 일들을 잘도 받아들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풍은 상념을 털어내며 마을로 돌아가 옷부터 장만했다. 얇은 백삼 도복에 장삼은 걸치지 않았다. 간편한 복장, 새로운 기분으로 화산파 산동지부로 향했다.
“일이 잘 된 모양이군.”
이지정은 청풍을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정작 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가 못했다.
화산과 무당, 철혈련의 싸움 때문일 것이다.
난전으로 얽히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화산의 이름이 무당에 눌리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렇게 되면 싸워서 이겨도 얻을 것이 없다. 인력 손실과 자금 손실이 지대한 지금, 끝난 후 남는 것이 무당파보다 아래라는 평가라면, 차라리 싸움을 안 하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투입한 무인들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전전긍긍(戰戰兢兢)이다.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상황이 매우 안 좋아. 전력 상으로는 철기맹을 압도하고 있지만, 대부분 무당파의 주도하에서야. 지략에서도 무공에서도, 분하지만 이쪽에서는 무당파에 내세울만한 사람이 없어.”
같은 구파다.
어차피 한 목표를 향하여 돕고 있으면, 어느 쪽이 주도하고 있든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야 청풍 생각이다. 같은 구파일방이라도 앞서가고 싶은 자존심이 있으며, 뽐내고 싶은 명예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화산은 문파의 기강 자체가 그러하다. 천화관이 그렇고 소요관이 그렇듯, 어릴 때부터 제자들 사이에 경쟁심을 부추기고 커서는 최고를 지향하게 만든다. 승패와 우열에 연연하는 것이 당연한 문풍, 지금 같은 상태은 화산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허면.......”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 그렇다면 청풍 자신의 힘이라도 보태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읽은 이지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그럴 것까지는 없네. 자네가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야. 불행하게도......아니, 불행이라고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여하튼 지금 철혈련과의 싸움은 굉장히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네. 무당이기(武當二奇)라 불리는 두 사람 덕분이지. 그들의 활약이 눈부셔. 달리 손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야. 지금 자네가 가 보았자, 어차피 그들의 지시대로 움직이게 되겠지. 그럴 바에는 도리어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걸세.”
이지정의 생각은 오로지 화산파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청풍에게 크나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 어지러워진 흙탕물에서 명성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미 무당파 쪽로 기울어진 대세, 청풍이 가서 역전시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만 그러기엔 너무 늦은 까닭이었다.
“........”
“사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인데.......문파의 싸움이고 무림맹의 싸움이라면 응당 달려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 그렇지만 그것이 또 이 강호의 이치인 것을.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철혈련과의 싸움은 자네가 낄 곳이 아니라네. 본산에서는 이미 화산파 전력의 보존을 검토하고 있는 눈치지. 장문인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는 것도 그래서고.”
전력의 보존이라 한다면, 무인들을 물리지는 않되 더 이상 위험한 싸움에는 참가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가장 선봉에서 자발적으로 용맹을 떨치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그대로 둔다. 문파의 명예를 위해 죽어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장기판의 졸.
커다란 싸움이란 항상 그렇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청풍은 그 같은 싸움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면서 천하무림 비정강호의 생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 그리고 부탁한 것에 대해서 말인데......”
이지정이 탁자에 쌓여진 수많은 문서들에 손을 뻗어 몇 장의 종이를 추려냈다. 청풍의 부탁, 서천각의 힘을 빌려달라는 이야기. 청풍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먼저 현무검.......현무검은 정확한 위치가 파악이 안 되고 있다네. 성혈교 총단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알아보니 그게 아냐. 성혈교가 지니고 있되, 성혈교가 위치해 있는 귀주성에는 없다고 추정되네.”
“귀주성에 없다면.......”
“인접한 사천성이 유력하지. 현무검을 사천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직접........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대체 누가......”
“이름은 몰라. 술사(術士)들 사이에서는 최근 들어 환신(幻神)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더군. 천하의 기물(器物)들을 쫓고 있다고 알려졌네. 그런 그가 현무검을 말한다면, 믿을 만 하다고 사료되지.”
“결국 정확한 위치는......”
“그래. 안 좋은 소식이네. 거기까지가 현재 서천각의 한계란 것이지.”
현무검의 위치는 파악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어떨까.
“다음으로.......흠검단주. 숭무련 흠검단주의 행방을 물었었지?”
사라져버린 흠검단주에 관한 사항이다.
입을 여는 이지정의 얼굴, 청풍은 거기서 이 부탁의 성과 역시 부정적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흠검단주에 관한 사항, 팔황에 관한 사항은 접근 자체가 극비라네. 따라서 거기에 대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운용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도 어찌어찌 하여 한 가지 사실은 알아 낼 수가 있었지.”
“.......?!”
“장강이네. 흠검단주는 장강 어딘가에 있어. 심귀도로 흘러간 후, 흠검단주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네. 한 사람이, 그것도 흠검단주같은 자가 마음먹고 사라지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을 추적하기란 불가능의 가깝겠지. 하지만, 거기엔 다른 자들도 있었다네.”
“심귀도......”
“그렇지. 심귀도에 있던 사람들 말이네. 그들은 흠검단주와 함께 없어졌고, 그 일대부터 멀리까지 심귀도의 인물로 짐작되는 사람들은 육지의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어. 그 말은 곧, 수로를 따라 움직였다는 말이 되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모든 선착장을 다 뒤지는 것이야 불가능하겠지만, 서천각의 능력이라면 전부는 아니라도 그에 근접할 정도까지는 가능하다.
그러한 정보력에 걸려들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수로 어딘가를 통해 움직였다는 말이 된다. 강의 지류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했거나, 아니면 그 일대 다른 섬에 숨어들었거나. 둘 중의 하나란 말이었다.
“그렇게 수로를 거슬러 가다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아낸 것이 있었네. 그것이야말 내가 자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낭보(朗報)라 할 수 있겠지. 현무검도, 흠검단주도 찾지 못했지만, 다른 것이 걸려 들었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지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유일하다는 말처럼 처음으로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호검. 백호검에 관한 정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