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으로 나와 석양을 받는 청풍은 주작검과 청룡검을 내려다 보았다.
‘백호검.........!’
되뇌이는 그 이름이다.
마음 속에 묘한 여운을 남기는 이름, 백호검.
백호검은 사방신검 중, 최초로 그와 인연을 맺었던 검이다.
운명처럼 만나 검자루를 쥐던 순간과 을지백에게 무공을 사사하던 순간들, 백호검주로 육극신을 찾아가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아련하게 떠올라 흩어졌다.
이지정은 말했다.
장강에 백호검이 있다고.
육극신과의 싸움에서 잃게 된 백호검이니 당연히 장강의 비검맹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는 해도, 막상 그곳에 있다 이야기를 들으니 부동심을 유지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게다가 이지정은 이야기하기 않았던가.
백호검은 새로운 주인을 만난 모양이라고.
‘한참 전부터 백호검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확실하게 백호검이라 생각되고 있다네. 광혼검마(狂魂劍魔)라 불리는 검귀가 그 주인이지. 비검맹 소속이고 육극신의 최측근이라 알려져 있네.’
육극신이 아니라 다른 자다.
누굴까.
설마하니. 설마하니, 광혼검마라는 자는 을지백이 아닐까.
그래서 청풍은 물었다. 그 광혼검마가 어떤 자냐고.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자라네. 중년 남자인데 굉장한 발검술을 구사한다고 하지. 성정이 폭급할 뿐 아니라 맞서는 자에게 자비가 없고, 무공도 엄청나게 고강하여 비검맹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네.’
을지백.
모르는 일이다.
성정이 폭급하고 자비가 없는 무인이 한 둘이던가.
청풍은 들끓는 마음을 어렵사리 억제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픈 마음을 누르기 위하여 운기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은 장강이란 결론이 나오지. 하지만 장강이 어디 몇 십리 강이던가. 확실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싶네. 어디 점쟁이라도 있어서 기점을 찍어주면 좋으련만.’
이지정의 말을 되짚어 떠올리던 청풍은 여기까지 이르러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장강은 넓다.
찾는 것이 어디 있는지 명확치 않다.
이지정은 점쟁이를 말했다. 점술사(占術士).
청풍은 집무실로 달려가 다시 이지정을 찾았다.
“만불통지.......만통자(萬通者)라고 아십니까.”
“만통자라면.......천하에 달통치 못한 것이 없다 자처하는 그 강호 기인을 말함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알고 있지. 무공이 강한 것은 둘째치고, 천하의 고인(高人), 고수들과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네. 복자(卜者)로서의 경지도 대단하다더군.”
“그래서........한 가지 부탁을 더 드려야겠습니다.”
“부탁이라면.......만통자에 관한 일인가?”
“예. 만통자, 그 분을 뵙고 싶습니다.”
“그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네. 정해진 거처는 없지만 행적을 숨기면서 다니는 자가 아니니까. 헌데 어인 일로......?”
“점쟁이를 말씀하셨지요. 하여, 그 분께 여쭈어 볼 생각입니다.”
“점술(占術)로?”
“예.”
태연하게 답하는 청풍에 꽤나 당황해 하는 얼굴이다. 아니, 어이가 없는 표정이라는 편이 옳겠다.
“아니, 그렇다면 만통자와는 본래 친분이 있는가?”
“친분이라고 하기까지는 어렵지만 안면은 있습니다.”
“안면이라......”
이지정이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이런 것은 또 처음이다. 서천각에서 파악하지 못한 것을 알기 위해 복자(卜者)를 찾는다라.......전례없는 일인 것은 분명했다.
“후우........일단은 알았네. 최대한 빨리 찾아보지. 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할거야. 서천각으로서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만통자에게 듣는다.
청풍에겐 예감과도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는 청풍이 원하는 것이 있다. 이전까지는 만통자가 청풍을 찾아 왔지만, 이제는 그가 찾아간다. 분명히 얻는 바가 있을 것이리라.
“아, 그리고 말인데........”
청풍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 할 때다.
이지정이 탁자 위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며 청풍을 불러 세웠다.
“그.......육극신과 백호검에 대한 것 말이네.”
“.......예. 말씀하십시오.”
“백호검이 육극신 곁에 있다면.......솔직히 역부족이지 않을까 하네만.”
이지정의 지적은 잔잔한 가운데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육극신은 초절정고수다. 백호검을 지니고 있다는 광혼검마가 어떤 자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시점에서 육극신과도 부딪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할 뿐이었다.
“역부족, 그렇겠지요.”
청풍은 무공의 부족을 시인했다.
일신의 무공이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육극신과의 차이를 더욱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아직도, 아직도 그를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러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달리 방도가 있을 겁니다.”
이지정의 안색은 곱지 못했다. 그가 꺼냈던 종이들 중 한 장을 펼쳐들며 말했다.
“직접 부딪칠 생각이군.”
청풍은 부인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주쳐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이번이든 언제든 그저 미룰 수만은 없다. 백호검만이 그 이유가 아니라, 사부님의 과거도 얽혀있는 까닭이었다.
“자네가 지금 가서 육극신과 겨룰 생각이라면........나는 반대네. 장강으로 가는 것 자체를 막고 싶을 정도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심이았다.
이지정의 눈빛과 청풍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걱정어린 눈빛, 청풍은 어찌 받아내야 할지 곤란함을 느꼈다.
그 때였다.
단영검객 송현이 안으로 들어오며 같은 말을 했다.
“장강으로 가겠다고? 나 역시 이 사제의 생각과 같다네. 나 역시 함부로 가라고 이야기를 못 하겠어. 육극신은 위험한 자야.”
송현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이지정의 옆으로 다가와 그 앞에 펼쳐진 종이를 받아 든다.
오래된 종이. 서천각 장서고 한 구석에서 꺼내온 과거가 그 종이 안에 있었다.
“백호검에 관한 것은 이 사제에게 이미 들었네. 하지만 자네가 그곳에 가려는 것은 그 이유뿐이 아니겠지?”
청풍은 송현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이들은 알고 있다. 청풍의 사연을, 청풍의 사부 선현진인과 관계된 사건들을,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자네 사부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면 아직은 이르지 않나 싶네. 육극신의 무공이라면 이미 한번 겪어 보았다고 들었네만.”
“........예. 겪어 보았었지요.”
“저번에는 어찌 어찌 살아 왔다지만 이번에 또 싸운다면 다시는 돌아올 기회가 없을 걸세.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게야. 그런 자에게는 한번이고 두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청풍의 눈이 번쩍 기광을 발했다.
송현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이번에 다시 덤빈다면, 그 때처럼 검 하나 잃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라.
저번 같은 요행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청풍의 신경을 자극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송현의 어조에 담긴 묘한 느낌, 무엇인가 더 있다. 사부님과 육극신에 관한 것은 단순한 비무와 복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장현걸이 남겼던 여운처럼, 감추어져 있는 것이 더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래도 가야 합니다.”
청풍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의문에 대해서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이들은 청풍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연선하 이후 처음으로 사문(師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에게 괜한 의심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행여나 그 의심이 감당 못할 진실을 품고 있다 해도, 함부로 입 밖에 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후우........그런건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대신 육극신과는 되도록이면 싸우지 말도록 하게. 나도 달리 준비를 해 놓겠어.”
무엇을 준비하겠다는 것인지는 모른다.
청풍은 그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백호검과 육극신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할 뿐이다. 송현과 이지정도 청풍의 심경을 알아챈 듯,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포권을 하고 물러나는 청풍, 그의 눈에 강한 결심이 반짝이고 있었다.
* * *
연선하는 놀랐다.
장현걸의 이야기를 듣고 청풍에 대해 알아본 결과, 서천각 일각에서 청풍과 관계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점은 산동지부였다.
단영검객 송현과 지운검객 이지정이 관여한 일이다. 두 사람 모두, 화산파에서 손꼽히는 실력파이며, 인망도 두텁다. 산동성, 본산과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화산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리던 분들이었다.
‘지원해 주고 있어. 대체 어떤 인연으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서천각의 힘이 청풍을 지원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산동성에서 호광성으로 이어지는 관도에 떨어진 명령이다. 형산까지의 서천각 지부 전체가 청풍으로 짐작되는 청년에게 무적낭인 귀도(鬼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상당히 큰 명령임에도 워낙에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데다가, 일처리가 굉장히 깔끔하게 이루어졌기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었다. 실무(實務)와 지모(智謀)에 있어 서천각 최고를 논한다는 지운검객 이지정의 능력이 거기에 있었다.
‘산동성. 사제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곳이 바로 산동성이었다. 그렇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던 것도 그 분들 덕분인가?’
연선하는 산동지부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산동성이 청풍과 관계된 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올해 봄부터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다. 청풍의 흔적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사제가 강호로 나온 것은 결국 이번 봄부터가 되겠어. 그렇다면 나오자마자 산동지부로 찾아간 것인가?’
틀림없다.
청풍은 어딘가에 숨어서 무엇인가를 준비했고, 준비가 끝난 후 강호로 나왔다. 돌아보면 항상 그랬다. 사라져 있었던 동안에는 무공이든 정신이든 굉장한 성장이 있었고, 그런 후에는 어김없이 굉장한 일을 벌려 놓았다. 이번에는 주작검. 호남 지역과 강서성 남부 지역에서는 벌써부터 청홍무적검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상태였다.
‘산동지부를 찾아서, 서천각을 동원했다. 그래서 정보를 얻었고 주작검을 손에 넣었어. 세상에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렸다.
청풍은 강하다. 제 멋대로 커져서 날개를 펴고, 붉은 구름을 따라 멀어진다. 연선하는 창밖으로 비쳐드는 노을에서 붉은 영웅의 환상을 보았다.
‘주작검........중간이 빈다. 보름에서 한 달, 어딘가로 움직였어. 귀도의 정보가 산동지부에 들어간 것은 사제가 산동지부를 찾아간 지 한참 후다. 그 사이에는........’
연선하의 손과 손이 책상에 가득 쌓여있는 문서 위를 누볐다.
장거리 이동을 위한 죽간이 치워지고, 겹겹이 접혀있는 종이들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한 곳, 서초(瑞草) 매가장(梅家莊)의 이름에 이르렀고, 그 어지러운 손놀림이 딱 멈추었다.
‘매가장. 매한옥!’
최근에 들어온 정보다.
매가장에 관한 문서, 거기에는 현 매가장의 근황에 덧붙여 ‘매가장의 매한옥, 회복 가능성.’ 이라는 짧은 어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이것이다. 다녀갔어!’
연선하의 추측은 직감에 가까웠다. 즉흥적인 연상이 근거를 찾고,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녀의 눈이 대외비밀 문서 중, 서천각 산동지부의 명령목록을 훑어냈다.
‘매가장에 관한 정보. 특기(特記) 매한옥.’
특별히 매한옥에 관한 정보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산동지부, 매가장, 주작검.
청풍의 행보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 사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겠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과연 옛 모습을 되찾았는지.’
연선하는 앞으로 할 일에 매한옥에 관한 사항을 추가했다.
철혈련과의 싸움이 한창인 이때, 이런 일을 할 때가 아니었지만 저절로 손이 간다.
청풍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선하는 이 일이 어쩌면 훗날 문파의 대사(大事)가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청풍에 관한 다른 사항을 찾아보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철혈련과의 싸움 때문에 서천각의 기능이 편중된 까닭이다. 게다가 호광성에서도 호남지역, 그리고 강서성 남부지역이라면 화산파의 영향력이 가장 작은 지역이기도 했다. 달려들어서 수소문하지 않고서야 특별한 정보가 있을 리 없었다.
‘잠깐........이것은.......?’
다시 대외비밀문서 쪽으로 돌아가 서천각의 명령목록을 살피던 중, 연선하는 예상치 못했던 것 하나를 발견했다. 전혀 생각치도 않았던 것. 한참 동안 떠올린 적도 없었던 이름이다. 이 이름이 왜 서천각 명령 목록에 들어 있는지 절로 의문이 들었다.
‘하운(夏雲)........이 이름이 왜........?’
마치 그 이름만 종이 위로 돌출된 것처럼, 그녀의 눈에 새겨지듯 비쳐들고 있었다.
화산제자 하운과 접촉 요망, 그것도 산동지부 명령이 아니라, 하남지부에서 떨어진 명령이다. 하지만 하남성은 산동성의 바로 옆, 연선하는 두 곳의 이름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명령의 출처는 하남성이지만, 그 뒤에 산동성이 있을 것 같다. 지운검객 이지정과 단영검객 송현의 주도면밀함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하운.........하운........’
재능으로는 하나 같이 남부러울 것 없는 매화검수들 중에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남자다. 철기맹과의 첫 번째 싸움에서 단 한번 불행한 실책으로 매화검수 자격을 박탈당한 비운의 검사. 그 이후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던 이가 여기 이 목록에 있다.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이유로.
‘하운. 그의 자격박탈은........그 녀석과도 관련이 있었지.’
거기에도 청풍의 존재가 있다.
하운, 매한옥, 그리고 청풍.
세 사람 모두 화산파에서, 적어도 장문인께는 버림받은 이들이나 다름없다. 그런 세 사람의 이름들이 있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느끼지 못한다면 바보다.
무엇인가 돌아가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단영검객 송현. 그리고 지운검객 이지정.
허튼 짓을 하실 분들이 아니지만, 그냥 모른 채 넘어가기에는 사안이 가볍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몰라도, 연선하에게는 그 이름들이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의미였던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