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제 17 장
백무한(白無限).
법명(法名) 무한(無恨). 초절정고수(超絶貞高手).
나찰신(羅刹神), 수로맹주(水路盟主), 권신(拳神).
장강수로채 백해(白海) 출신. 부(父) 백해채주(白海寨主) 백정영(白正英), 비검맹(比劍盟) 혈사(血事) 시(時) 사망(死亡). 모(母) 비검맹(比劍盟) 혈사(血事) 시(時) 사망(死亡).
무한승(無恨僧). 소림사(少林寺) 초유(初有)의 십할살인집단(十割殺人集團) 나찰사(羅刹娑)의 수좌(首座).
비검맹(比劍盟) 혈사(血事) 시(時) 고립(孤立), 전륜회주(轉輪會主)와의 연(連)으로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 소림절기(少林絶技) 사사(師事).......중략(中略).......
나찰승 수좌로 소림(少林) 적대(敵對) 세력(勢力) 진압(鎭壓) 및 괴멸(壞滅) 임무.
남왜토벌대(南倭討伐隊) 용린단(龍鱗團) 지원.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 재건(再建)......중략(中略).......
한백무림서 인물편 제 일 장
소림사 중에서.
장강으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마음껏 화천작보를 펼치면서, 마음껏 염화인을 연마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이 인적 드문 길을 찾는 것, 그 정도가 전부였을 만큼 순탄하기 짝이 없는 행보였다.
첫 번째 난관에 봉착한 것은 장강에 도착해서였다.
바다처럼 넓은 강.
강의 저편이 보이지 않는 대강(大江)의 전경은 다시 봐도 새로울 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수로맹이 모여들고 있다던데, 어디인지 아십니까?”
수소문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얼음장과도 같은 냉대뿐이었다.
한 여름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있건만, 장강 어민(漁民)들의 태도는 한 겨울 추위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아예 대꾸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며, 부정이 탄다는 듯 침까지 뱉는 자들도 있었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 사람, 함부로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네.”
“허튼 소리 할 것이면 일 방해하지 말고 꺼지는 편이 좋을 거야.”
수로의 장한들은 입담도 거칠었다.
뭔가를 알아내는 것이 이렇게 곤혹스러운 적은 없었다. 객잔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엿들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비검맹과 수로맹에 관한 내용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온 종일 물어보고 다녀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청풍은 궁금증만을 가득 안은 채, 그 날을 마무리하고는, 다음 날 할 수 없이 화산파 지부를 찾았다. 서천각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청풍은 거기서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보무제자라면 지원해 드릴 수 없소. 이름이 청풍이라 했소? 미안하지만 그런 지시는 받은 바가 없소. 다시 알아보고 오시겠소?”
업무를 보는 제자는 보무제자라는 신분에도 공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지위에 대한 인식이야 어쩔 수 없는지 은연 중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 청풍의 기도가 보무제자답지 않게 출중한지라 함부로 하지 못할 뿐, 그렇지 않았더라면 애초부터 공손함을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야 사실, 그냥 넘겨버리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이지정의 지시가 전해져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추측하기엔 어렵지 않았다.
강소와 안휘의 경계, 화현(和峴)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화산지부.
현재 화산파의 연락망은 철혈련과의 전투 지역 이외에 다른 모든 곳에서 그 기동성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화현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역이 워낙에 궁벽한 곳이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연락망이 느려졌다 해도 하루 이틀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청풍의 남하속도가 연락 속도보다 훨씬 빠른 것이 그 진정한 이유였다. 너무도 빠르기에 이지정의 지시가 미처 청풍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했다. 화천작보의 보이지 않는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할 수 없군.’
청풍은 어쩔 수 없이 백매화 은패를 꺼냈다.
화산도문의 상징, 서천각의 지원을 한시라도 빨리 받으려는 생각이었다.
헌데, 지부의 제자가 보인 반응은 뜻밖의 것이었다. 도리어 무엇인지 물어보는 모습, 백매화 은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원로원 명을 나타내는 영패요.”
“원로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소. 이런 것은 어디서 구한 것이오?”
심지어 의심하는 눈초리까지 보낸다.
대 놓고 추궁하지는 못해도, 태도만큼은 추궁과 다를 바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이지정과 처음 만남 때도 그랬다. 오행진인께 백매화 은패를 받을 당시, 오행진인께선 매화기(梅花旗) 휘날리는 그 어떤 화산 지부에서도 서천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이지정은 백매화 은패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었다. 서천각 업무를 보는 분인데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되었소. 필요하다면 다시 찾아오겠소.”
아무런 소득 없이 지부를 나왔다.
청풍은 고심했다.
백매화 은패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무척이나 한정되어 있다. 이지정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백매화 은패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원로원의 영향력.......’
그렇다.
원로원으로 대변되는 화산 도문의 영향력이 그만큼 작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시 말해, 화산 검문, 현 장문인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법원을 통하여 청풍을 추격하던 장문인.
장문인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송현과 이지정, 두 사숙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청풍으로서는 서서히 화산파 내에서의 자신의 입장도 생각해 놓아야 할 시점이었다.
장강이 보이는 언덕에 이르러 청풍은 상념을 멈추었다.
장문인과의 관계, 사문에서의 행보는 아직까지 먼 훗날의 일이다. 저번에도 생각했듯이 지금은 사방신검의 회수가 먼저였다. 청풍의 강호행은 거기서 시작했고, 그것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 길 너머의 것은 그 길의 끝에 이른 뒤에 고려하기로 했다.
‘일단......’
청풍은 언덕을 가로질러 장강으로 향했다.
화산파 지부에서도 정보를 얻지 못하니, 다시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풍은 무작정 강으로 나와 배를 탔다. 이 수로에 흐르는 기운이 무엇인지, 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확실히 공기가 심상치 않아.’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 아래, 배들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띄고 있었다. 하지만 청풍은 그 안에서 분명한 위화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선주의 얼굴에는 긴장된 기색이 가득하다. 이 배 뿐이 아니다. 선착장에서 보았던 모든 배들에, 이 강 전체에 같은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전장(戰場)의 공기다. 이것은.’
청풍은 한참 만에 깨달았다.
수로맹과 비검맹.
대규모 싸움이다. 일찍이 겪어 본적 없는 거대한 싸움이었다. 문파 하나가 불타는 정도가 아니라, 장강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전쟁(戰爭)이었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청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 물러나서야 제대로 보인다. 이 커다란 강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느냐 아니냐의 길목에 서 있다. 수로맹이 아니라 비검맹에 대해서 물었어도 똑같을 게다. 하루 하루를 벌어먹는 민초들로서는 이 무지막지한 싸움에 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죽는다는 말, 그것은 청풍에게 뿐이 아니라 그 자신들을 향하여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서 수로맹을 응원하든, 비검맹을 응원하든, 무슨 말을 해도 위험한 것이 지금의 장강이었다.
‘일촉즉발, 그 정도까지 와 있었던 것이로군.’
예상 밖의 일이다.
두 세력이 적대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싸움이 이 정도까지 임박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바깥에서는 알 수가 없다.
철혈련의 대란(大亂)에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니, 그와 같은 일이 장강에서 또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청풍은 그제서야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질문을 잘못 택했다.
그렇게 물어서야 아무런 정보를 못 얻는 것이 당연했다.
모두가 조심스러워하고,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는 지금, 수로맹이 어디에 있냐고 직접 물어보았던 것은 우둔한 짓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돌려서 물어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떠 보든 그런 식이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질문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수로맹을 묻기보다 먼저, 어민들의 입장을 이해해야 했다.
바람을 맞으며 갑판으로 나갔다.
사방에 가득한 장강의 물소리.
청풍은 갑판 위의 사람들과 배 주위에 펼쳐진 강수(江水)를 둘러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늦었다.
하루 반 나절 뿐이었지만, 청풍은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수로맹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화약고 앞에서 횃불을 들고 돌아다닌 것에 진배없는 일인 바, 청풍은 이미 놈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타고 있는 평범한 여객선, 그 주위로 험악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세 척의 쾌속정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바람을 타고 움직이던 범선(帆船)이 물소리를 따라 멈추었다. 쾌속정 세 척의 선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선주 역시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선두(船頭)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검맹의 어르신들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선주는 건장한 체격에 험상궂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지만, 쾌속정을 내려 보며 몸을 숙이는 모습에는 비굴함만이 가득했다.
선민(船民)의 숙명이었다.
수로에 목을 맨 자들은 수로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촤아아악!
쾌속정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빠르게 다가와 양 옆으로 배를 붙이고 밧줄을 걸 뿐이다. 이제는 선원들만이 아니라 갑판 위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휘익! 휘이익!
‘빠르다.’
쾌속정으로부터 십 여 명의 무인들이 뛰어 올라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상당한 자들, 강바람을 뚫고 움직이는 몸놀림이 무척이나 날렵했다.
휘잉, 쿵.
열 두 명의 무인들에 이어, 놈들의 수좌로 보이는 거한 하나가 뛰어 올라왔다. 육중한 몸체에 커다란 철검(鐵劍)을 들었다. 위협적인 눈빛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신경질적인 인상을 준다. 세상 누가 보아도 악당(惡黨)이라 부를 만한 얼굴이었다.
“아.......아니, 항(項) 대인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선주는 숫제 몸 전체를 벌벌 떨고 있었다.
항 대인, 항회(項匯).
함산철검(含山鐵劍)이라 불리며 달리 함산마두(含山魔頭)라고도 불린다.
안휘성 함산 출신으로 지닌바 성정이 포악하고 흉맹해 감당이 안 되는 마두(魔頭)로 알려져 왔다. 그의 악행을 보지 못한 무림 협사들이 그를 징계하기 위해 수차례 함산으로 찾아들었지만 도리어 그의 철검에 피를 보고 물러나니, 어지간한 무공으로는 통하지 않는 고수(高手)다.
도당을 결성하고 함산 주변을 어지럽힌 것이 몇 년 째.
언젠가 부터인가 한풀 꺾였다 싶더니, 갑작스레 비검맹의 밑으로 들어가 장강을 터전으로 더 큰 악행을 일삼는다. 그의 비위를 거슬려서 죽은 어민들이 수십을 헤아리는 바, 그를 아는 선원들은 누구라도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굴러먹는 배라고 아무나 태워서야 되겠나.”
악한의 눈빛은 그 자체만으로도 더럽다.
선주의 몸이 뱀 앞의 개구리마냥 움츠러들었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일단 위축된 모습부터 보인다. 장강 물길에 언제나 자부심을 가지던 대강장한(大江壯漢)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로맹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놈이 아직도 있다던데.........그런 놈을 배 위에 올렸으면, 죽을 각오를 했다는 말이렷다.”
함산마두가 큰 소리로 외치며 철검을 치켜들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선주를 내리칠 기세다.
자포자기한 듯 눈을 감는 선주, 함산마두의 철검이 희롱하듯 휘둘러진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함산마두의 행태는 갈수록 가관이었다.
“눈을 감으면, 덜 고통스러울 줄 아느냐! 일단 네 놈부터 죽이고 봐야겠다. 아니, 그냥 이 배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군.”
갑판 위에 올라와 있던 무고한 민초들이 제각각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무의미한 뒷걸음질. 이곳은 장강의 한복판이었다. 주위에 도망칠 곳은 없었다.
“죽이고서 수로맹의 짓이라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자, 함산검대(含山劍隊)는 검을 들어라!”
함산검대.
함산에서부터 끌어 모은 무리들 그대로 비검맹 한 자리를 꿰찬 모양이다.
그 밑에 있는 놈들도 제 두목의 성정 그대로 흉악한 놈들, 민초들을 상대로 검을 뽑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나를 찾아왔으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이들을.......!’
아무리 봐도 이놈들은 미쳤다.
수로맹을 묻고 다닌 청풍을 구실로 살행이나 한 번 더 하려는 살인광(殺人狂)들 같다. 두고 볼 수 없음이 당연했다.
“검을 거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풍이 앞으로 나섰다.
갑판을 가로질러 함산마두의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한적한 들판을 걷는 것처럼 태연하기만 하다. 함산마두의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네 놈은 뭐냐!”
“네가 찾는 사람이다.”
청풍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거한인 함산마두를 올려 보고 있지만, 마치 몇 장 높이 위에서 내려 보는 것 같다. 체격의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남에도 전혀 작아 보이지를 않았다.
“수로맹을 떠들고 다닌 놈이 네 놈이란 말이냐?”
살기를 뿜으며 내뱉는 말이지만, 함산마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함산마두는 변변찮은 하수(下手)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릇된 방법으로 무공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다. 그렇기에 함산마두는 아는 것이다. 청풍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이제까지의 상대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임을 알아챈 것이었다.
“내가 수로맹에 대해 알고자 했다. 뭐 잘못 된 것 있나?”
청풍의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함산마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잘못된 것 있나? 이 놈이 비검맹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비검맹이면,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여도 되는 것인가?”
“이 놈!”
기어코 휘둘러지는 검이다.
함산마두의 철검이 청풍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쩌어엉!
역발산의 힘을 품고서 내려오던 철검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청룡검이다.
뽑지도 않은 청룡검이 용갑 채로 철검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익!”
함산마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있는 힘껏 내리친 철검을 손목 힘 하나만으로 막아낸내는 청풍이다. 내력의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크합!”
함산마두가 철검을 다시 치켜들며 험악한 기합성을 터뜨렸다. 주변에 무엇이 있든 상관치 않는다. 휘두르는 철검에, 물러나 있던 선주(船主)까지도 피를 뿌리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텅!
청풍의 발이 움직였다.
그리고 검이 뽑혔다.
치리리링!
금강탄이 뛰쳐나오는 소리는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땅을 박찬 발에, 일직선으로 이루어지는 발검이다. 청룡검, 청백색 검신이 철검에 부딪쳤다. 무지막지한 충돌음이 터져나왔다.
쩌저정!
철검이 뒤로 밀려나는데 그 기세가 휘두르는 것 보다 더 하다. 검에는 길다란 균열도 생겼다. 상대할 수 없는 힘이었다. 함산마두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파아아!
청풍은 멈추지 않았다.
반보 앞으로 나아가며 선주의 앞을 가로 막고, 재차 청룡검을 휘둘렀다. 이번에 나아가는 것은 백야참, 금강탄에 이어 연환검격으로 투로를 만든 백호의 검결이었다.
함산마두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아니, 방어할 수가 없었다.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얕지 않은 정도’의 무공으로는 절정에 이른 검공을 결코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촤아악! 쿵! 우지끈!
철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리다가 청풍의 검압에 넘어지고 마는 함산마두다.
육중한 몸이 제멋대로 쳐 박히니, 뱃머리 쪽 목판 장식까지 함께 부서진다. 부서진 목재 사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청풍은 이미 함산마두의 눈앞에 와 있었다. 청룡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함산마두를 내려보며 내리치는 검이다. 함산마두가 다급히 철검을 들어 머리 위를 방어했다.
쩡!
정련된 철검이 두 동강 나는데, 강철이 아닌 것처럼 가볍다.
내려가는 검격, 함산마두의 머리가 거기에 있다.
‘죽여라!’
함산마두의 머리가 조각나기 직전.
마음속에서 어딘가에서 발해진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남강홍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청풍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살기(殺氣)를 무한정으로 부추키는 목소리다. 그 진득함과 살벌함에 놀라 내려치던 손을 딱 멈추었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함산마두의 머리 위에서 멈춘 청룡검.
검의 예기를 버텨내지 못한 함산마두의 머리 가죽이 길게 베어진다. 붉은 선혈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 뚝.
핏물이 턱 선을 타고 바닥까지 떨어졌다.
두피(頭皮)의 출혈은 언제나 급격하기 마련.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륙의 상처일 뿐이었다.
함산마두는 정신을 잃지도 않았고, 내상을 입지도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철을 조각내던 힘으로 떨어지던 검인데, 살을 벤 상처로 끝났다.
내력의 수급이 자유자재라는 이야기였다. 찰나 간에 그만한 내력을 갈무리하고도 전혀 무리를 느끼지 않을 만큼, 청풍이 지닌 내력이 바다처럼 넓다는 이야기였다.
“이 놈.......! 죽이지 않는군.”
함산마두는 서늘한 검날을 머리 위에 그대로 느끼는 와중에도 별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피를 철철 흘리는 그의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이 그려진다. 그가 이를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놈 같은 부류를 알지.......살인을 망설이는 놈들 말이다.”
그래도 한 지역을 풍미하던 악당이다. 어떤 일에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위기를 비굴함으로 넘기려는 놈들보다는 그릇이 크다. 악당의 그릇이라고 해 보았자 크면 클수록 천리(天理)에는 해를 미치는 것이겠지만.
“깨끗한 척 해 보았자, 결국 똑같다. 약자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 실컷 후회해라.”
죽음을 생각하기는 하는지, 함산마두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무엇을 후회하라는 것인가.
함산마두가 비웃음을 흘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함산검대는 검을 들어라! 이곳으로 오지 말고 선원들을 죽여! 이놈에게 죽음의 후회를 맛보여라!”
청풍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순간이었다.
채채챙!
함산마두와 함께 온 무인들. 비검맹의 졸개들이 검을 치켜든다. 사람들이 난장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느려졌다.
세상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은 공간 속에서 청풍의 눈이 주변을 둘러 움직였다.
비명 소리와 달려드는 무인들이 보인다.
청풍의 눈이 다시 함산마두에 이르렀다.
죽음을 각오한 듯, 눈을 감은 함산마두다. 피에 젖은 얼굴 위로는 비틀린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몰랐다. 멈추라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죽음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부리는 수작.
막아야 한다.
의지가 일어난 순간, 몸은 곧바로 반응한다.
청풍의 신형이 빛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공기가 갈라진다. 화천작보, 전혀 다른 속도의 영역이다.
바람 줄기 하나 하나가 물속을 헤엄칠 때 부딪치는 물살처럼 온 몸을 감싸고는 뒤로 멀어졌다.
치링! 파라라락!
검을 휘두르는 비검맹 무인이 눈앞으로 가까워 왔다. 청풍의 오른손이 검자루를 잡았고, 잡았다 싶은 순간 움직이고 있었다.
드러나는 적백색 검인(劍刃)이 먼저다. 파공음은 한참 후였다.
사선으로 일검, 휘돌아 원을 그리고 불처럼 일어났다.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염화인의 검격이었다. 비검맹 무인의 전면을 휩쓸고 지나간 그 겁화의 검인(劍刃)에 검 한 자루가 동강나 날아갔다.
팔뚝 째로 잘려진 손목이 날아가는 검날을 따라 하늘로 치솟는다. 핏줄기가 뿜어 나올 때, 청풍은 이미 다음을 향하여 작보를 펼치고 있었다.
쐐애애액! 파라락!
상상을 초월하는 빠르기였다.
바람을 품고, 육신을 태운다.
염화인 검날이 두 번째 검날을 부수고, 그 주인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크악!”
비명소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속이 붙은 청풍은 네 명, 다섯 명의 비검맹 무인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배 안의 선원들 앞을 막아선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일순간의 정적이 선상을 맴돌았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함산마두였다. 그가 비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피를 튀며 고함을 질렀다.
“둘로 갈라져! 놈의 몸은 하나다! 양쪽으로 나뉘어서 죽여라!”
놈이 말한 후회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악인은 망설임 없이 죽였어야 했다. 무고한 민초들을 간단히 죽인다고 했을 때부터 진즉에 죽일 마음을 품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 일을 그르쳤다.
함산마두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무리로 갈라지는 비검맹 무인들이다.
두 방향으로 내쳐 달려가는데, 청풍으로서는 도리가 없다.
가까운 쪽부터 무작정 발을 박찼다.
쐐애애액!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느려지고, 오직 홀로만 빠르게 움직인다. 격전이 극치에 이를 때에만 진입할 수 있었던 상승의 영역이 거기에 있었다.
쩡! 스거걱! 쩌정!
급하고 저돌적일수록 염화인은 제 위력을 발한다. 붉은 피가 갑판을 수놓으며 섬찟한 빛을 발했다.
화르르르륵!
완만하게 휘어진 검날이 사선으로 휘둘러지고 역회전을 반복했다. 공작새의 깃털이 펼쳐지는 것처럼 적백의 빛살이 무리지어 피어났다.
네 명의 비검맹 무인들이 쓰러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청풍이 날아든 쪽에서는 비검맹 무인들이 단 한명의 선원도 해치지 못했다.
문제는 반대편이었다.
네 번째 비검맹 무인의 허리를 갈라낸 직후, 내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면서 땅을 박차지만 시간과 거리가 모자랐다.
청풍의 눈에 겁을 먹고 주저앉은 여인 한 명과 그 여인에게 달려들고 있는 비검맹 무인 한 명이 비쳐 들었다.
‘안 돼!’
비검맹 무인이 든 검날은 벌써부터 휘둘러지기 시작했고, 청풍에게는 그것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갑판이지만, 또한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몇 장 안 되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그 때였다.
피를 뿜고 쓰러질 것 같던 여인의 앞으로 한 줄기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채애앵!
비검맹 무인의 검이 단숨에 튕겨졌다.
표홀한 신법으로 비검맹 무인을 막아 선 남자. 죽립을 눌러 써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남자였다.
‘저 신법은!’
청풍은 놀랐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신법이기 때문이다.
채챙!
그의 놀람과는 별개로, 죽립인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가드는 청풍을 뒤로 한 채, 다음 비검맹 무인을 향하여 발을 옮긴다. 쳐내는 검이 가볍고 절묘했다. 청풍의 검처럼 격렬하지도, 막강하지도 않았지만, 맥을 끊는 검첨(劍尖)이 극도로 정교했다.
싸아악!
피륙을 가르는 소리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속에 자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발에 깃든 암향(暗香), 검에 깃든 검향(劍香), 군더더기 없는 솜씨였다.
“커억........!”
육검(六劍).
세 명의 무인들을 제압하는데 쓰인 것은 여섯 초식의 검격이 전부였다.
뿌려지는 검들을 막는데 일초 씩, 허점을 잡아 내치는데 일초 씩.
한 명에 이(二) 검(劍)으로 족했다.
싸움을 알고, 투로를 깨우친 남자이기에 그렇다. 고수였다.
“아직 미숙해. 이 정도는 예측하고 미리 대비를 했어야지. 악인(惡人)들은 항상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니까.”
이 목소리.
청풍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잘 알고 있는 목소리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죽립인의 정체를 알아채고 놀라워할 때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비명소리가 두 남자의 고개를 한 쪽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악! 사, 살려주시오!”
뱃머리 쪽이다.
선주의 목소리였다. 겁을 먹고 내지르는 그의 외침 뒤로 함산마두의 고함이 뒤따랐다.
“다가오지 마! 이 놈을 죽이겠다!”
선주의 목을 잡고, 당장이라도 부러뜨릴 기세다. 피를 철철 흘리는 얼굴이 흉신악살과 같았다. 자신의 마지막 수작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각오했던 죽음을 살고자 하는 발악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이것도 매찬가지다. 저 놈 말은 틀리지 않았어. 죽일 것이었으면 바로 죽였어야 했다.”
죽립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틈을 본다. 그런 죽립인의 모습에 함산마두의 두 눈이 잔 떨림을 보였다.
“멈춰! 한 발작만 움직여도 죽이겠어!”
외침과 함께 선주의 목을 비튼다.
숨이 막힌 선주가 만면에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던 죽립인이 흠칫 몸을 굳혔다.
이런 경우가 가장 만만치 않은 경우다.
인의도 법도도 지키지 않는 악인이란 이래서 무섭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으나, 관계없는 사람까지도 다칠 수 있는 것이다.
죽립인이 청풍에게 고개를 돌렸다.
죽립 밑으로 드러나는 턱선이 가볍게 움직였다. 내가 주의를 끌겠다. 그 사이에 손을 써라.
이심전심(以心傳心)있었다. 청풍은 죽립인의 의도를 단숨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스르릉.
죽립인이 갑작스레 들고 있던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그러더니 품을 뒤져 길쭉한 물건 하나를 꺼낸다.
길쭉한 물건.
그것은 하나의 옥소(玉簫)였다.
이 인질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한 자루 옥(玉) 피리다. 느닷없는 행동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함산마두가 얼굴을 굳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수작을 하는 것이냐! 엉뚱한 짓거리를 하면 끝이야!”
끝이라고 엄포를 놓지만, 함산마두는 잘 알고 있다.
선주를 죽이는 즉시,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인질을 잡고 있는 지금, 최대한 거리를 벌려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함산마두가 선주를 끌고 뒷걸음치며 쾌속정이 대어져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삐이이이이.
청아한 피리소리가 뱃전을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죽립 아래 옥소를 입에 물고 한 줄기 맑은 음을 내뿜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짓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급해하는 함산마두도 예외는 아니라서 일순 죽립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찰라의 순간이었다.
죽립인의 옥소에서 내력의 충격파가 퍼져 나온 것은.
한 점을 목표로 뻗어나간 음파(音波)가 함산마두의 귓속을 파고들어 그의 심혼을 뒤흔든다. 청풍의 몸이 한 줄기 백선(白線)으로 화한 것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쐐애애액!
머리에 충격을 받은 직후다.
짧은 시간, 함산마두는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다. 청풍의 몸은 그 시간과 시간의 사이를 꿰뚫고 함산마두의 눈앞에 이르렀다.
파라락! 스걱!
사태를 깨달은 함산마두가 선주의 목을 부러뜨리기 위하여 팔을 움직였지만, 그 시도를 가능케 할 손이 그에게는 없었다. 사선으로 올려친 주작검이 이미 그의 손목을 끊어 놓은 후였던 까닭이다.
“크아아악!”
손목이 달아난 팔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선주 하나만큼은 길동무로 삼겠다는 양, 남겨진 손 하나가 선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청풍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했다.
사선의 격검과 회선의 반검(反劍), 함산마두의 나머지 한 팔이 잘려나가고 그의 가슴에서 피가 튀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로(死路)다. 비틀대며 난간에 걸리고 그 밑에 대어진 쾌속정으로 떨어져 버렸다.
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머리부터 떨어진 쾌속정 바닥이다. 육중한 신체, 낙하하는 무게를 그대로 받았으니 그 목이 성할 리가 없다. 등을 향해 끔찍한 각도로 꺾여진 머리가 보인다. 가슴을 갈라놓은 염화인으로 인하여 어차피 끊어질 숨이었지만, 함산마두의 최후는 그 자신이 저질러 왔던 악행처럼 그보다 더 비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