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싸움도 쉽지는 않았지만, 선상에 가득 찬 공포를 수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체를 치우고 살아 움직이는 비검맹 무인들을 쾌속정으로 몰아냈다. 선주와 선원들을 독려하여 항행(航行)을 계속하도록 하고, 갑판 위의 여객(旅客)들에겐 아래 쪽 선실로 내려갈 것을 권유했다. 그들에게 있어 바닥에 얼룩진 핏물과 혈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두려움인 까닭이었다.
“여기엔 어떻게.......아니,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후, 청풍은 죽립인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벗어내는 죽립.
벗어내는 죽립 아래, 드러난 턱선은 수려하기만 하다.
정갈한 도복에는고급스러운 느낌마저 흐른다.
광기를 제어하려 애 쓰던 절박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매화검이 없어도 사라지지 않는 매화향기다.
매한옥.
죽립으로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매화옥검, 매한옥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몰랐다니 뜻밖이군.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매한옥의 몸짓에서는 여유로움이 배어 나왔다.
강해졌다. 청풍은 알 수 있었다.
청풍이 석가장 때와 전혀 다른 무위를 가지게 되었다면, 이 매한옥도 그와 같았다. 석가장에서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락까지 떨어졌던 사람이 재기하면서 얻는 성취였다. 끊임없는 보완(補完)과 연마(鍊磨)로 만들어진 새로운 무인(武人)이 여기에 있었다.
“잊었나? 오용(五勇) 사현(四賢), 오용에는 암행과 추적이 있었지. 화현에서부터 따라 왔는데 이상하게 알아채지 못하는 기색이더군. 그만큼 강한 무공을 연성하고도 기본을 간과해서야 곤란해.”
가볍게 말하는 매한옥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청풍은 당혹감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화현에서부터 따라왔다면, 이 배에 오를 때부터 같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까마득히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긴장이 풀어졌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매한옥이 마음먹고 자신을 감추려 했었다면 청풍이 알아채지 못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매한옥은 그럴 능력이 충분한 고수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기본을 간과했다는 것은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다.
육력과 오용 사현.
그것을 떠올리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어릴 때부터 매달렸던 가르침인데, 이제는 도리어 생소하게 들릴 정도다. 어느 새 스스로 화산과는 멀어지고 있었음을 확연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놈의 마지막 행동도 그와 같다. 사현(四賢)의 지략(智略)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어야지. 무공만으로 해결하려 하면 어려워.”
옥소를 꺼내 들고 음공(音功)으로 대응한 것.
전적으로 매한옥의 기지(奇智)에서 나온 방편이다.
청풍의 압도적인 속도를 계산에 넣고 순식간에 사고를 전환했다. 강호 경험의 차이라고 할까. 생각의 기민함이 달랐다.
“명심하겠습니다.”
청풍은 고개를 숙였다.
매한옥의 지적은 구구절절 옳다.
폭 넓은 사고와 시야, 천태세의 가르침과 상응하는 부분이다. 청룡검을 얻었던 그 당시엔 청풍도 잊지 않았던 내용인데, 최근 들어 급격히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장강에 도착하여 무작정 수로맹의 위치를 물었던 것도 그렇다. 성격이 급해졌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주작검…….’
그 뿐이 아니다.
성격이 급해졌다는 것.
예전과 달라졌다는 뜻이다.
함산마두를 죽일 기회를 잡았을 때, 머리 속 어딘가에서 들린 목소리가 생생했다.
죽이라는 말, 죽이라는 충동이다.
청풍은 살인을 즐기지는 않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살인을 할 수 있는 남자다. 수많은 격전을 헤쳐왔고, 많은 고난을 겪으며 죽인 사람의 숫자가 적지 않다. 함산마두가 말한 것처럼, 또는 매한옥이 말하는 것처럼 어설프거나 미숙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청풍이 손을 멈추고 치명적인 실수를 했던 것은 마음속에서 솟아난 충동이 놀라워서였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스스로 그 정도의 진득한 살의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은 무공이 지닌바 성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그랬어.’
그렇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었다.
확실하다. 그 전에도 그랬다.
청풍은 닮아간다.
각각의 검을.
을지백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 청풍은 그의 용맹함을 닮아갔고, 천태세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엔 그의 신중함을 따랐었다.
헌데 지금은 마치 천태세에게 배우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남강홍.
닮지 않으려 해도 닮게 만드는 마력(魔力)이다. 어느새 청풍은 그와 같은 성정을 지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혹스러운 일, 그 본능적인 위화감이 그와 같은 목소리를 불렀고, 그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불렀다. 그런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 들일 것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매한옥의 목소리가 청풍의 상념을 깼다. 청풍은 고개를 들고 매한옥을 보았다. 고민이 드러나는 청풍의 모습에 되려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저 이 만큼이 아쉬워서 그럴 뿐이다. 네 성취는 발군이야. 무공에 있어서는 네 나이에서 따라갈 자가 드물것이다.”
이 만큼이 아쉽다.
엄지와 검지로 ‘이 만큼’을 표현한다.
이 사람은 달랐다.
모자란 것을 말하고,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을지맥이나 천태세, 남강홍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장 다른 것은 사람 냄새다.
한 자루 서늘하게 갈린 매화검이었던 남자.
멀기만 했던 사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석가장에서 보았던 그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느껴지는 매한옥은 그 때보다 덜 날카로웠지만 훨씬 더 강하게 생각된다. 무공은 강하지 않아도, 그들 못지않은 스승처럼 느껴졌다.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 책임. 매 사형께서 안 계셨으면 큰 일을 겪었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청풍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매한옥이 어깨를 한번 들썩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 도와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청풍은 진심을 담으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높은 무공을 연성했으면 대부분 건방져지기 마련인데, 이 청풍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함산마두를 상대하면서 보였던 것과도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사형제끼리는 그런 식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아니야.”
매한옥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사형제란 말을 해 놓고 보니, 그 자신도 어색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매화검수와 보무제자는 보통 사형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나 강호에 나가면 상명하복의 수직체계에 가깝지 형제의 의로서 친근하게 대하는 일이 드물었다. 사형제라 함은 특별한 친분이 없는 한 같은 매화검수끼리나, 같은 평검수끼리 쓰는 단어였던 것이다.
‘그것이 화산의 문제인 것을……’
매한옥도 그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다.
매화검수 자격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위의 격차, 끝 갈 줄 모르는 경쟁체계. 그것이야말로 화산 문하의 가장 큰 폐단이자, 냉혹한 비정(非情)의 표상인 것을, 끝까지 겪어 본 후에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 방향은 아니야. 배에서 내리고 다시 시작해야 돼. 게다가 여기서 내리면 즉시 할 일이 있어. 화산지부에 연락을 취하는 것. 이 배의 선주와 선원들에게 닥칠 후환을 막으려면 말이다.”
어두웠던 선원들의 얼굴이 다소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크게 밝아진 것은 선주의 얼굴이다.
청풍은 생각하지 못했던 대목이었다.
이 배에서 비검맹의 무인들이, 그것도 한 검대(劍隊)가 박살 났으니, 비검맹의 해코지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
간단하면서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들을 매한옥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큰 그림을 그려가는 것에서는 청풍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겠지만, 세세한 것에 이르면 이처럼 허점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공에 편중된 강호행 때문이었다. 너무도 빨리 성장했다. 단계를 밟으며 하나 하나 짚고 온 이와는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면……함께 가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송 사숙께서 이야기 하시지 않았나? 뒤를 봐 주는 사형 하나 더 생긴 것이라 생각하라는 것이 그 분의 전언이다. 사제는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송 사숙.
준비를 한다고 했던가.
그 준비, 산동성 단영검객, 지운검객의 안배가 여기에 있다.
단순한 지원도 아니고, 매화검수 하나를 붙여주었다. 매화검이 없으니 매화검수가 아니다?
다를 바가 없다.
무공과 경험은 매화검수, 그 이상이다.
천군만마의 조력자일 따름이었다.
* * *
"요즘 물길은 어떻습니까?"
"뭐 그냥 그렇소."
"시절이 하수상해서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장강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모르지요. 바람 잘 날이나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무인들도요."
거기까지가 끝이다. 매한옥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며 청풍에게 속삭였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아무 것도 못 얻어. 어떤 것도 말하지 않지. 정보를 얻으려면 사람을 잘 가려야 돼."
한 마디로 사람을 파악한 후,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시작은 언제나 일상적인 대화로, 알고자 하는 것을 묻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절묘했다.
"우리 무인들도 갈피를 못 잡겠소. 장강은 생각보다 무서운 곳인가 보오."
"물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법이오. 허튼 마음이야 안 갖는 게 좋겠지."
"쭉 봐도 그렇더이다. 장강 사나이들은 확실히 탁 트여서 무인들 이상으로 호방한 것 같소. 그나저나 예까지 왔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기도 그렇고……어디 가면 진짜 사내들을 만날 수 있소? 한 수 배워 보고 싶소."
"이 사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장강의 물이 무섭다고 말한 것은 당신 아니었소?"
"무서워도 달려드는 것이 또한 사나이 아니요? 장강 사나이들은 다들 그리 살고 있지 않소. 하나 하나가 다 절세 무인들이오. 대강을 제 땅으로 넘나드니까."
"허, 이 사람, 말은 좋소. 정 그렇다면, 무호(蕪湖)쪽으로 가 보시오. 백해(白海)에는 진짜들이 가득하지."
"아니, 그런 식으로 막 이야기 해도 되오? 다들 목을 움츠리고 있어서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호탕한 분은 처음 보았소."
"허허. 객쩍은 소릴랑 그만두고, 어서 가 보시오. 비검(比劍)의 칼이 무섭기는 제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오."
전형적인 호한(豪悍)이다.
매한옥은 사람을 정확히 보았고, 말 몇 마디로 중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오용 사현을 완벽하게 체득한 결과다. 소요관을 통과한 매화검수라는 것은 무엇이 어떻다 해도 역시나 허울뿐인 지위가 아닌 것이었다.
“무호(蕪湖)라면 그렇게 멀지 않아. 그런 곳에 거점을 삼았다니 의외로군. 병법을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병법에 도가 튼 자들이겠지.”
매한옥은 청풍이 보지 못한 것까지 보고 있었다.
병법을 말한다면, 청풍으로서는 제대로 알 길이 없다. 홀로 싸우는 것이야 상대가 몇이든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이 싸우는 격전이라면 아직 파악이 안 된다. 경험이 적
기 때문이었다.
“서둘러야겠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이대로라면 조만간 엄청난 일이 터질 느낌이다. 바깥에서는 어찌 이렇게 모르고 있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그것만큼은 청풍이 받은 느낌과 같았다.
이제 곧 벌어지는 것이다. 장강을 통째로 건 엄청난 싸움이.
장강에 부는 바람을 달리 장풍(長風)이라 했던가.
전란의 장풍이 그들 바로 곁에 와 있는 것이었다.
* * *
“혼자라고 들었는데. 아니었군. 예상 밖이야.”
“........”
“그래……아가씨는 어떻소. 마음의 정리는 되었소?”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멀고 먼 청풍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조신량은 그녀의 침묵을 나무라지 않았다.
흠검단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청풍이 그를 해쳤다는 추측은 이제 기정사실처럼 되어버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청풍은 무적진가의 비호까지 받고 있다.
화산파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길을 걷고 있는데, 팔황의 숙적인 진가까지 얽혔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숭무련을 버린다면 모를까. 두 사람, 애초부터 이어갈 수 없는 인연이었다.
“보는 순간 저절로 검이 나갈 것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 이유를 모르겠소. 불공대천의 원수일 텐데 이상하게도 분노가 일지 않는군.”
조신량의 표정은 차분했다.
목덜미에는 전에 없던 흉터가 새겨져 있어 석가장 때와는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변하는 법, 그때와 달라진 사람이 여기에 또 있는 것이다.
“저 놈 말마따나 저 놈이 아무런 짓을 안 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오. 만일 그렇다면 단주님께서 건재하실 수도 있는 것이고……하지만 그 괜한 기대가 망설임을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다.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조신량이 눈을 뜨며 그녀에게 물었다.
“만에 하나, 놈이 단주님을 해한 것이 아니라면, 아가씨는 어찌 할 것이오?”
이번에도 대답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신량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동문서답.
질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었지만.
“살아 있었군요.”
“그럼 살아 있었지. 대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무엇으로 들은 것이오?”
서영령.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던 서영령의 두 눈이다.
처음으로 한 줄기 감정이 깃들고 있었다.
“살아……있었어요.”
마무리를 지을 것이라면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고 따라 나선 서영령이었다.
삶의 의욕을 상실했던 그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보인 의지다. 서자강으로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의지는 강했고, 절박했다. 궁지에 몰려있는 딸의 심경을 서자강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서영령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청풍이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무적진가의 가주가 나타나 청풍을 살려갔다 했지만, 서영령은 그 말을 결코 믿지 않았다. 오히려 궁색한 변명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라면 무슨 말을 못하겠냐 싶었다.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때는 믿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그 벌판에서.
청풍은 그녀를 밀어내고 서자강 앞에 섰었다.
서자강은 숭무련을 이야기했고, 청풍은 화산의 제자를 말했다. 청풍 스스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살아서 만나는 것이 더 무서웠다.
만나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다를 바가 없는 무서움인 것이다.
그러나 또 마음 속 한편에서는 말한다.
그래도 살아서.
그래도 살아 있어서.
중원무림 중천의 태양으로 날개를 펼치게 된다면,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또한 기쁨일 텐데.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기만 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한 죽음과도 같은 슬픔일 텐데……
어느 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사랑이다.
그녀는 다시 만난 청풍이, 이제 다시는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타인으로 되어버렸을 까봐,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을 까봐, 두려울 따름이었다.
“질문을 바꾸어 보지. 놈이 단주님을 해한 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아가씨는 어찌할 것이오? 그래도 마음의 정리를 하지 못할 것 같소?”
서영령은 고개를 들어 청풍이 있던 곳을 바라 보았다.
이미 청풍은 사람들 속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를 않는다.
‘풍랑이 갈 숙부를 해한 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끝내야 한다.
갈 숙부는 가족이다. 아무리 청풍일지라도 가족을 해한 사람에게 연정을 품을 수야 없다. 그런 것은 천도(天道)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서영령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천도에 맞지 않는 일일지라도 서영령은 온전히 청풍을 떨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패륜(悖倫)이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도의(道義)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더라도, 그죄책감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사랑은 깊었다.
그뿐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청풍은 분명히 갈염을 해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해하지 않았다면 않은 것이다. 청풍은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도 말하지 않았던가. 평생 거짓말은 안 하고 살 것이라고. 장난처럼 했던 말이지만, 청풍은 그럴 남자다. 자신이 했던 말은 지킬 남자라고 믿었다.
“대답하지 않는군. 그래서야 나로선 아가씨의 마음을 알 길이 없소. 어찌 되었든 결론을 지으려면 만나야 하겠지. 아가씨나 나나.”
서영령의 침묵.
조신량이 말하며 돌아섰다.
“가야겠습니다. 전(錢) 회주님.”
"바로 치는 것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조신량과 서영령의 뒤에는 흠검단 검사 열 명 이외에도 주단(朱丹) 장포를 걸친 초로(初老)의 노인 하나가 더 있었다.
“예. 죽이든 죽이지 않든, 일단 강의검은 받아와야 하니까요.”
“놈은 강하다. 내 입에서 강하다는 말이 나왔어. 그 의미는 알고 있겠지?”
오만한 말투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오만하다 말하지 못한다.
노인은 그럴 만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숭무련이란 무(武)를 숭상하는 여러 지파의 연합을 의미한다.
숭무련 일(一) 파(派) 참도회(斬刀會)의 회주, 전운록(錢雲麓)이 바로 그다. 지위로 따지자면 흠검단주와 동급, 무공에 있어서도 흠검단주와 같은 수준이거나 그 이상인 초절정고수였다.
“물론입니다.”
“여차하면 내가 나서겠다. 서운케 생각하지 말아라. 흠검에 은(恩)을 입은 것은 너 하나가 아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조신량의 대답에 초로의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휘날리는 주단 장포 뒤로, 폭 넓은 기형도(奇形刀) 도갑이 드러난다. 흑철갑, 금속성 묵색이 진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럼 가자꾸나.”
참도회주 전운록.
서영령의 두 눈에 아련한 슬픔이 감돌았다.
서자강이 보낸 고수.
청풍을 해칠지도 모르는, 아니, 해치기 위하여 찾아 온 참도회주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뒤로 떨 어지지 않는 발을 옮긴다.
그런 그녀, 서영령의 마음속에는 끝 모를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