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끄응........!”
“정신이 드셨습니까.”
장강의 붉은 상어, 적사(赤沙)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눈을 떴다.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다. 물에 빠졌으니, 죽었으면 용궁(龍宮)일 텐데, 눈에 비치는 천정은 객잔의 그것이다. 설마하니 용궁이 그렇게 소박할 리도 없을 터,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가.......”
“무호요.”
들리는 목소리는 맑은 가운데 힘이 있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무호.......!”
적사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번쩍 뜨이는 미청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용궁이 있는 곳이 무호였던가. 용신용왕의 신하는 되어야 될 것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적사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다시 물었다.
“난 죽은 거요, 산 거요?”
용궁이냐는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농담이라면 모르되, 농담을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앞의 남자가 사람이란 것 쯤, 모른다면 바보일 게다. 그런 농담은 동분어(?盆漁) 놈도 잘 안 하는 농담이었다.
“물론 살아 있소. 여기는 무호에 있는 객잔이오.”
청풍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부터 얼굴을 가로지른 두 줄기 검상까지, 적사의 인상은 과히 좋지 않다. 그런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죽었냐 살았냐를 물으니,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호라........끄으응.”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오.”
만류하는 청풍을 뿌리치고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다. 강인한 사내였다. 온 몸이 뒤틀리고 아플 것이 뻔한데, 억누르는 신음만으로 참아내고 있었다.
“일어나야 하오. 두목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으니까.”
기어코 적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른 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한번 두드리며 청풍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장강 동수(東水) 수로맹의 붉은 상어, 적사요. 구명의 은혜라면 주종의 예를 갖춰야 되겠지만, 내게는 이미 모신 두목이 있소. 대신 내 이 은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갚겠소.”
“괜찮소.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만 하는 일이었소.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치 않아.”
“아니오. 그럴 수는 없소. 내 지금은 시일이 급하여 어쩔 수가 없지만, 훗날 반드시 은을 갚을 것이오. 이 붉은 상어는 결코 은원을 잊지 않소.”
고집이 세고, 한번 생각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더불어 지낼만한 남자, 강한 남자였다. 투박한 말투 안에 진한 감사의 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소?”
“강에서 발견한 것이 어제 낮이오. 하루 정도 지났을 것이오.”
“하루! 이럴 수가!”
하루면 빨리 깬 것이다. 그럼에도 적사는 크게 늦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침상을 박차고 나오려고 했으나 이내 휘청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 숙인 몸을 지탱했다. 그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 다급함이 드러나는 혼잣말을 뱉어 놓았다.
“하루.......하루면 늦어. 그런 괴물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 텐데. 아니, 이미 알고 있을 테지.......백언(伯言)이 놈, 빠르면 숙포(淑浦)는 지났을 것이고 이제 곧 동릉에까지 이를 것이다. 어떻게 따라잡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러나 적사는 지금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억지로 내력을 운기하며 몸을 가누려고 하지만, 내상의 여파가 너무 크다. 몸 전체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무엇을 어디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오?”
보다 못한 청풍이 묻는다. 적사가 고개를 들어 청풍을 올려보는데, 그 눈빛이 어지러웠다. 힘겨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디에........당신.........설마하니, 비검맹의 첩자는 아니겠지.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거야.......그럼 그렇고 말고.”
침상 위로 주저앉더니 몸을 한번 비틀고 가부좌를 틀었다. 자연스럽게 운공을 하면서 몸을 회복하려는 모습이었다. 청풍이 그를 붙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에, 어떤 것을 알린다는 말인지 가르쳐 주시오. 우리가 전하겠소.”
적사가 두 눈을 반개하며 청풍을 바라보았다.
혼미한 시선 중에 탐색의 빛이 감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적사가 깊이 숨을 들이 쉬며 뚝뚝 끊어지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놈들에게는........괴물들이........더 있었다.......봉두난발의 괴인, 청동괴장(靑銅怪杖)을.......쓰고 있었지. 드러나 있던 오검존(五劍尊)........칠검마(七劍魔).......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면 예측이 틀어져.......위험해.........”
잦아들다가 완전히 멈추는 적사의 목소리다.
산만한 말이었지만,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고수들이 튀어 나왔기 때문에 전력 계산이 어긋났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것을 수로맹에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뜻, 그러나 어디에 전해야 할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었다.
‘동릉.......동릉이라면.....!’
청풍은 적사가 앞에서 말한 동릉을 떠올렸다.
서영령과 함께 백호검과 철선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장강을 따라 내려갔던 그곳이다.
삼교채를 박살내며 얻었던 정보, 당시 비검맹의 근거지라 들었던 동릉.
청풍에게는 아픈 기억이 얽힌 곳이다.
동릉으로 가는 길목, 대천진에서 육극신을 만났고 결국 뼈아픈 패배를 당하면서 굴욕의 도주를 감행하지 않았던가.
‘동릉은 서쪽이다. 동릉을 지나쳤다는 이야기........’
청풍은 동릉의 기억을 털어내고, 수로맹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릉을 지나치고 있다는 것.
수로맹 본대가 이동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그것은 곧, 동릉 방향으로 쫓아가면 수로맹 본대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확인할 방법도 시간도 없는 마당이었다. 방향이 나왔으니 곧바로 움직여야 했다.
“밤사이 몇 번의 싸움이 더 있었다더군. 싸움의 진행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빨라. 서둘러 야겠어.”
정보를 구하러 나갔던 매한옥이 돌아 온 것은 적사가 운공에 들어간지 일 다경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청풍은 적사가 말했던 것부터 이야기한 후, 곧바로 동릉으로 움직여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남자 정도의 무공이라면 수로맹에서도 상당한 직책을 맡고 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전투에 관련된 사항을 급하게 알려야 한다면 그 대상은 수로맹의 수뇌가 틀림없겠지요.”
매한옥은 청풍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일단은 동릉 방면으로 가 본다. 그곳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중에 생각한다. 지금은 느긋하게 다음 정보를 얻어 볼만한 시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풍과 매한옥은 적사를 객잔에 남겨 둔 채, 곧바로 동릉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적사 정도 되는 이라면 더 보살펴 주지 않아도 제 몸을 추스릴 수 있을 터, 그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기마 없이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보다 경공이 훨씬 더 편하다. 더 빠른 것도 물론이다.
청풍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경공을 택했다. 매한옥으로서도 그 편이 더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인적 없는 길을 찾아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리는 강행군이었다.
휴식 따위는 취하지 않았다.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매한옥이 화천작보를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그러나 매한옥은 생각 이상으로 잘 따라붙고 있었다.
물론 작보의 속도를 최대로 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쳐서 멈추는 일은 없었다. 매화검수, 육합구소신공의 정심함일까. 적어도 발목을 잡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천진이다. 조용하군........이 쪽이 동릉일 텐데.”
일 년 만에 다시 온 대천진은 예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십 년 만에 온 것 같이 생소하기만 했다.
거대한 전선에서 내려와 물 위를 걸어오던 육극신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럴수록 인적이 드문 대천진은 낯선 곳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청풍을 노리던 무인들이 들끓던 곳, 그가 기억하는 대천진은 지금처럼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싸움이 돌아가는 상황부터 알아봐야겠어요.”
청풍과 매한옥은 지체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싸움이다. 조심스럽게 물어볼 것도 없다. 전황에 대한 풍문들은 닥치는 대로 모았다.
“처음에는 수로맹이 비검맹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죠. 비검맹 전선들과 무인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몰라요.”
“수로맹의 진격은 정말 대단했답니다. 오검존 중 하나인 금검존(金劍尊)이 이끄는 황금전선(黃金戰船) 금합(金蛤)이 대파되고, 태검존(太劍尊) 태산함(泰山戰艦) 괴암(怪岩)이 침몰 직전까지 몰렸다고 했지요.”
“개전(開戰) 삼일 째 아침까지만 해도 수로맹의 우위가 확실했다고 합니다. 헌데, 이틀 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하더군요. 수로맹의 영웅인 붉은 상어가 실종된 것을 필두로, 붉은 상어의 전함인 홍아(紅牙)가 박살 나고, 이어 흰 고래와 푸른 돔도 비검맹의 반격에 밀려 도망쳤다 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어민(漁民)들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이야기를 못해서 안달 난 느낌이었다.
싸움 직전,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는 말을 아꼈지만, 싸움이 시작되고 나니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댄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싸움, 누가 이기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 마음들이다. 조변석개하는 민초들이 거기에 있었다.
“푸른 돔처럼 강인한 사내가 죽을 지경에 빠졌다니, 미치겠다 미치겠어.”
“정말 돌아버리겠군요. 수로맹의 백언마저 배신을 때렸다 그럽디다.”
“나는 말이여. 누가 뭐래도 수로맹 편이여. 그 배신자 놈, 이 개새끼는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여.”
하루 하루 다른 마음을 먹는 민초들이 있다면, 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민초들도 있었다. 수로맹의 편을 드는 사람들이 많다. 수로맹이 밀리고 있다는 소문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민심(民心)은 수로맹에 있어.’
그러나.
민심이라 함은 싸움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 되지는 못한다.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을지라도, 무력(武力)에서 밀린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공산이 크다. 이미 얻었던 민심까지 깎아먹을 가능성이 있었다.
“밀리고 있다는 것이로군........거기에 배신자라........ 타격이 엄청날 거야.”
매한옥의 말에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언이라는 이름.
적사에게서 들었던 이름이다.
수뇌부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배반을 했다니.
이런 대규모 싸움에 대해서는 잘 모를지라도, 그런 배반이 가져올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수뇌부가 무너진다는 인상, 아래까지 내려올 파급효과는 매한옥의 말처럼 엄청나리라. 그리고 그 조짐은 이미 소문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비어구(飛魚灸) 맹원들이 대폭 빠져나가고 있다고 하죠. 이미 진 싸움이라던데요?”
“흑어(黑魚)와 비목어(比目魚)도 개판이라대요. 완전히 난리입니다.”
“이를 어쩐다요. 도어(?魚)에 껴 있던 우리 조카 놈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던데.”
비어구, 흑어, 비목어.
모두 다 수로맹의 분대(分隊)들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어느 하나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크게 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청풍과 매한옥은 그런 소문들을 들으며 대천진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싸움의 진행 방향을 따라서였다.
안휘성 동쪽 끝, 마안에서 시작된 싸움은 이제 안휘성의 서쪽 끝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움직이는 수로맹의 세(勢)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고, 하루 하루 들려오는 것은 패퇴와 후퇴의 소식밖에 없다. 수로맹의 패배는 이제 기정사실이 된 것일까. 싸움이 남긴 풍문들을 모으면서 다급한 행보를 밟았다.
“저기다! 이제야 따라 잡은 것인가?”
이틀을 더 달려서 도착한 곳은 안경(安慶) 근처의 연사진(緣絲津)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수많은 배들이다.
군함에 가까운 거대한 전함(戰船)들이 두 척이나 보였다.
중대형 전선들도 세 척이나 된다. 전투에 쓰이는 조그만 쾌속정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근처에 이만한 배.
수로맹이나 비검맹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어느 쪽이지? 수로맹 같기는 한데 말이다.”
이상한 것은 돗대 끝에 맹(盟)의 깃발이 올려 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전선의 선체에 그려진 문양이나 글자들은 수로맹의 그것이었지만, 수로맹의 깃발은 도통 보이지를 않는다. 배의 소속을 나타내는 절대적인 기준이 선기(船旗)임을 생각한다면 수로맹의 배가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적들에게 나포된 배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었다.
“일단은 가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해답은 하나였다.
직접 부딪치는 것. 청풍과 매한옥은 곧바로 연사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처 없이 쫓는 것은 그만이다. 여기서 어떻게든 이어가야 했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여야 할 때였다.
“이쪽이다! 의원! 이쪽으로 와!”
“배를 그렇게 대 놓으면 어떻게 하나! 어서 치워!”
“비검맹의 시선이 안 닿는 지금이 기회다!”
“어서 이곳을 떠야 해! 움직여! 빨리!”
연사진은 밖에서 본 풍경과 무척이나 달랐다.
밖에서는 수많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평범한 포구로 보였지만, 내부는 그것이 아니다. 아수라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청풍과 매한옥이 연사진의 대로로 접어들었을 때다.
두 사람을 본 사내들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청풍의 검, 매한옥의 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이유 있는 반응, 청풍과 매한옥은 금새 그 반응의 원인을 알 수가 있었다.
“검(劍)이다! 비검맹인가!”
“못 보던 놈들이 왔다! 류(柳) 형님께 알려! 고수들이다!”
병기를 보고 비검맹의 무인들이라 착각한 그들이었다. 청풍과 매한옥이 풍기는 강력한 기도도 그 착각에 한 몫 했으리라. 뒤 쪽으로 달려가는 자들, 물러나며 싸움의 대형을 짜는 자들, 그리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는 자들까지.
수로맹의 남자들이 여기에 있다. 부활한 장강의 사내들이 눈앞에 있었다.
“어디에서 온 놈들이냐!”
강단이 있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가슴에는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비검맹은 아니오.”
청풍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낭랑했다.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이제 보니 모두가 격전을 치른 모습들이었다. 피곤함이 내려앉은 눈빛에 이곳 저곳 상처를 입은 자들이 많다. 사로(死路)를 뚫고 온 이들이었다.
“이 쪽에서 묻겠소. 그 쪽은 수로맹이 맞소?”
청풍의 질문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수로맹의 군웅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맹(盟)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에도.
일순 대답하지는 못하는 그들, 매한옥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매한옥이 청풍의 어깨 너머로 낮게 속삭였다.
“이 놈들. 그 놈들이다. 수로맹에서 등을 돌린 무리들.”
그렇다.
이들은 수로맹이되 수로맹이 아니다.
수로맹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텐데도 출전 준비가 아니라 후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수뇌부에도 배신자가 있다더니, 이들 모두도 그 배신자처럼 수로맹에서 발을 빼려는 것이다.
단 시간에 부활한 수로맹, 그 얕은 인력의 결과가 그렇게 드러나고 있었다.
“수로맹의 깃발을 내렸다는 것. 수로맹이 아닌 것이로군.”
청풍의 말에 장강 사내들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형세가 불리하다고 하여 한번 몸담은 곳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은 싸우는 자에 있어 크나큰 수치라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전장의 탈주자들이다. 제 목숨 챙기자는 것을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비난을 면치 못한다. 이렇게 싸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은 누구라도 못 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요.”
불편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다.
터벅, 터벅, 땅을 밟는 청풍의 발걸음에 질책의 기운이 감돌았다. 발을 내딛는 청풍의 앞으로 그 질책을 직접 받기라도 하는 듯 장강의 사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불의를 앞에 두고 그것을 깨뜨린다.
어느 새 갈라져 드러나는 길이었다. 치솟아 일어나는 대협(大俠)의 기도에 호탕한 장강 사내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이 녀석은 확실히........!’
청풍은 사내들이 터놓은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매한옥은 생각했다.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라고.
성급함에서 비롯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무공은 그 실수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하다.
소소한 인간관계에서 익숙하지 못한 얼굴을 보이다가도 거칠기 짝이 없는 군웅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기세를 일으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가지 선한 얼굴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한 가지 얼굴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어느 것 하나 감탄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쏴아아아아.
거대한 전함이 지척으로 보이는 곳. 강바람에 물러나는 물결 소리가 시원했다.
“형님, 저 놈입니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길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움직인다.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보고를 받고 있는 젊은이는 진즉부터 청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력한 기파다. 그런 남자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면 말이 안 된다. 지용(智勇)을 겸비하여 수로맹주 백무한의 군사(謀士) 직책을 맡고 있었던 류백언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젊은이, 류백언.
청풍을 바라보는 두 눈에 복잡한 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사람들을 물리고 앞으로 나서는 류백언에게는 청풍의 기도에도 압도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청풍 정도의 연배나 되었을까. 윤곽이 뚜렷한 미남(美男)이었지만 날카로운 두 눈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 이름은 청풍이오. 당신이 이들을 이끄는 사람이오?”
“그렇소. 내 이름은 류백언, 이들을 지휘하는 이요.”
태연하게 답하는 류백언이었다.
서로의 이름을 듣는 두 사람의 눈에 똑같은 기광이 번뜩였다.
들어 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이 무리는 어떤 이들이오? 수로맹과 비검맹은 싸움 중이 아니었소?”
“싸움 중인 것이 맞소. 우리로 말하자면 그 싸움에서 빠져 나온 이들이오. 이미 진 싸움,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소.”
너무나 당연한 듯이 말하니, 도리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배신(背信).
배반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수치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 거침없는 언사에 같은 편들마저 놀란 듯, 장강 사내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번져갔다.
“원래 그런 것이오? 장강의 싸움은?”
“당신에게 그런 투의 질문을 들어야 할 까닭이 없소. 그 싸움에 더 끼어봤자 개죽음일 뿐이오.”
뻔뻔한 남자였다.
장강을 품고, 대강을 가로질러, 장강의 바람을 되찾겠다는 꿈.
그 꿈을 꾸고 있던 사내들에게 있어 이보다 실망스러운 말이 있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개죽음을 당할 바에는 모두가 도망치는 것이 낫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면 한 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리라.
“.........한 가지만 묻겠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소. 얼마든지 물으시오.”
차라리 비협조적이었다면 도리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꼬박꼬박 답하는 류백언의 모습은 청풍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수로맹은, 수로맹주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것은 알아서 무얼 하시게?”
화아아아아악!
참았던 힘.
기어코 드러나고 만다.
청풍의 진신진력이다.
사람들로 길을 만들며 걸어오던 것보다 열 배는 강한 기파였다.
이글이글 끌어 오르는 격노(激怒)가 청풍의 전신에 기(氣)의 열풍(熱風)을 만들었다. 한 발 물러나는 류백언의 이마에 식은땀이 돋고, 뒤에서 지켜보는 매한옥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말하라. 수로맹주는 어디에 있나.”
류백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할 수 없다. 직접 찾아 봐.”
류백언과 청풍의 시선이 격하게 충돌했다.
무서운 공방이었다.
몸을 먼저 돌린 것은 청풍.
그가 한 마디를 남겼다.
“실망스럽군. 이곳에서 얻을 것은 없겠어.”
청풍의 말에 류백언의 비틀린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가면 같은 웃음, 어떤 마음을 감추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청풍은 류백언에게 실망스러움을 느꼈고, 그와 같은 자와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이 자에게서는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얻는다 해도, 배반자 무리들에게 얻은 정보일 수밖에 없다. 류백언 같은 자와 왈가왈부하면서 구차하게 정보를 얻어내고 싶지는 않았을 따름이었다.
터벅. 터벅.
이미 열려진 사람들을 길을 그대로 돌아 나왔다.
“때로는 휘어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뒤따라 온 매한옥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옳기는 옳은 충고다.
정보가 있는데도 이렇게 돌아 나온 것은 바보짓이다. 이곳에서 확실히 엮어 가기로 하지 않았던 가. 그런데.......못 참고 나왔다.
한 때의 혈기(血氣)다?
혈기가 아니라 협기(俠氣)다.
협이라는 말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존심.
그러나, 그렇다 해도 지혜로운 처사는 되지 못한다. 조금 더 약았다면, 조금 더 머리를 굴렸다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또한 그렇기에 청풍은 오로지 청풍일 수 있는 것이다.
“하기사, 그런 놈과 계속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웠겠지.”
류백언.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랬다.
청풍은 진심으로 실망했다.
첫 인상이 위험해 보이기는 했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뿐인가.
청풍의 압도적인 기파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물러나지 않던 그 기백은 누구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류백언의 두 눈에 있던 것은 될 대로 되라는 객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들끓는 의기(義氣)가 보이고 있었다.
헌데, 어찌하여 배신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실망을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의기를 감추고 스스로를 외면하는 자. 비겁한 자로 보일 뿐이다. 능력이 있음에도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를 앞에 두고, 어떤 것을 구하기에는 청풍이 지닌 협의가 너무나도 정대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