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56)

 *                         *                         *

 연사진에 밤이 내렸다.

 선착장의 배들은 피워 놓은 횃불로 인하여 대낮과도 같은 밝음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밤공기에 휩싸인 물길은 오직 지독한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준비는 끝났나?”

 “끝났습니다. 전함은 숨겨 두겠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비검맹에 넘길 것이면 차라리 관군에 넘기는 것이 좋을 텐데 말이다. 큭큭큭.”

 류백언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휘날린다.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무섭도록 일렁거렸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가장 먼저는 비검맹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관군들의 추격을 조심해야 한다. 괜한 위험을 자초하지 마라.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너희들은 수로맹이 아니야!”

 아무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수로맹이 아니라는 말.

 꿈의 깃발이 내려진 그들에게 우렁찬 목소리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어서 도망쳐라.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백무한은 이제 글렀어! 덤비지 말아야 할 곳에 덤볐을 뿐이다! 네 놈들도 어서 정신 차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산 속에 들어가든 농사를 짓든 장풍(長風)이 불지 않는 곳에 가서 살아라!”

 류백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수로맹을 호령하던 군사(軍師)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이젠 정말로 끝난 것이다.

 실망이 절망이 되어 장강의 사내들을 휘몰아쳤다. 그들의 마음은 밤공기 물길처럼 지독한 어둠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해산(解散)이다! 수로맹의 맹(盟) 자도 꺼내지 마! 어서 꺼져!”

 류백언이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갈라지는 외침에 휘적 휘적 옆으로 걸어가 술병을 잡아 쥔다. 

 목구멍에 콸콸 들이 붓는 그의 모습, 장강 사내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흐트러진 모습에 결국 뒤에서부터 하나씩 몸을 돌린다.

 영웅의 몰락이었다.

 짧은 시간, 수로맹 십이 대 지파를 규합하고, 수로십팔채의 명성을 되살려가던 역전의 군사(軍師)는 그렇게 망가져버리고 만 것이다.

 젊은 사내들, 장강에 부는 바람, 장풍에 몸을 맡긴 사내들은 그 무너지는 영웅의 모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류백언의 말처럼 떠날 수밖에 없다.

 백무한은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사지(死地)에 들어섰고, 이틀 후 동이 틀 무렵에는 죽는다.

 배신자 류백언.

 배반의 굴레를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그는 앉아서 장강 만리를 굽어보던 천재다. 그런 그의 예상이니 백무한의 죽음도 틀림이 없을 게다.

 백무한이 없으면 수로맹도 없다. 

 수로맹이 없으면 장강의 사내들도 없다. 

 백무한은 말했다. 

 어떤 싸움에서도 목숨을 먼저 생각하라고.

 장강 만리수(萬里水)는 생명수(生命水)니,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고.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이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으면 거기에는 수로도 없고 십팔채도 없는 것이라고. 

 백무한은 장강의 물을 튼 용왕(龍王)이다. 

 두 주먹으로 장강의 물을 새로 흐르게 만든 권신(拳神)이다.

 사내들은 용왕의 말을 믿었고, 신(神)의 말을 숭상했다. 류백언의 말, 아니 백무한의 말처럼 그들은 살아야 했다.

 살아서 꿈을 이야기하고, 한때 꾼 꿈을 꾸며 늙어가리라.

 그것이 백무한의 부탁이었다.  

 류백언의 말 때문이 아니라 백무한의 부탁이기에 떠난다. 류백언의 병법에 반한 자들도, 백무한의 힘에 반한 자들도 각자의 배를 챙겨 떠나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하나씩 잦아드는 불빛이다. 술을 마시는 류백언의 주위에는 어느 새 누구도 남질 않았고, 단 하나 꺼져가는 횃불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큭큭큭........”

 비틀린 웃음이 다시 한번 암천을 향하여 울려 나왔다.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밤이었다. 구름 사이로 어스름한 달빛이 새어 나와 류백언의 머리 위를 비춘다.

 쨍그랑!

 술병을 땅에 던져 깨 버린 그가 일어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류백언이다. 한 순간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운이 솟아 나왔다. 짙게 흩어지는 술 냄새, 술기운인 주정(酒精)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지금 쯤.......일원포(一元浦)를 지나고 있겠군.’

 전륜회 제 사(四) 호법, 독각투왕(獨脚鬪王) 엽영보(葉英步)의 내공심법인 강량신기(鋼亮神氣)는 신기라는 이름대로 굉장한 신공이었다.  

 순식간에 취기가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된다. 류백언의 신산(神算)이 별빛 없는 천기(天璣)를 짚고 두 사람의 행보를 쫓았다.

 ‘세 시진이면 따라 잡을 수 있다. 아슬아슬하겠어.’

 류백언이 강가로 움직였다.

 독각투왕의 강량신법이다. 바위와 바위를 날듯이 뛰어넘어 겹겹이 가려진 어둠으로 나아간다. 숨겨진 곳, 그가 어스름한 월광(月光)에 묵직한 묵광(墨光)을 뿜는 날렵한 흑선(黑船)에 이르렀다.

 ‘무풍(無風)아. 무풍아. 여기서 그들이 온 것은 또한 운명의 엮임이렸다. 그들이 있기에 활로가 보인다. 이제 네 주인을 구하러 달려보자꾸나.’

 쇠사슬에 덮인 쾌속정, 검게 빛나는 그 이름이 바로 무풍(無風)이다.

 장강에 둘도 없는 기선(奇船)으로 장강 수로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촤아악!

 류백언이 묵철의 노(櫓)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류백언, 수로맹주 백무한의 최측근이니 배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도 장강 수로 정점을 논한다. 순식간에 바위 사이를 빠져 나와 장강 강심으로 달려 나갔다.

 쏴아아아아아아!

 바람이 없어도 그 속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무풍이다. 

 줄기줄기 스쳐오는 어둠을 뚫고, 장강의 거센 물살을 가른다.

 적재 인원 열 명의 소선(小船)이나, 물을 헤치는 속도는 그 어떤 쾌속정보다 빨랐다.

 지치지도 않고 노를 움직이는 류백언의 몸놀림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물길을 찾으며 서쪽 강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청풍이 보았던 그 들끓는 의기가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 시진. 

 류백언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오로지 배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만날 때가 지났는데.’

 한참을 더 와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계산이 틀렸는가. 아니다. 류백언은 그들의 능력을 완전히 꿰뚫지 못했다.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의 그릇을 가늠하는 것은 제아무리 신산의 지혜를 갖추었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야. 더 간다. 더 빠르면 빨랐지, 나보다 느릴 리는 없다.’

 류백언의 생각은 정확했다.

 청풍의 경공은 빠르다. 거기에 자극 받은 매한옥의 경공 역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해 있다. 

 일반적인 절정고수들의 속도라 보았다면 오산이랄 수밖에 없다. 류백언은 자신의 실수를 금새 인정했고, 최고조에 이른 무풍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한 시진이 더 지났을 때.

 류백언은 발견했다.

 그의 예상을 훨씬 더 벗어난 속도, 강변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청풍과 매한옥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 속도! 살수 있는 확률이 이 할은 더 높아졌다. 맹주! 내가 갈 때까지 절대로 죽으면 아니 되오!’

 그렇다.

 류백언은 배신자가 아니다.

 배신자의 오명을 뒤집어썼을 뿐, 그는 처음부터 백무한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자다.

 어차피 진 싸움. 

 진 싸움이라는 결과는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백무한이 죽느냐 사느냐다.

 만일 이 싸움에서 백무한이 살아난다면?

 그 다음 문제는 그가 권토중래를 노릴 때, 그 때 수로맹의 사내들이 얼마나 살아있느냐가 된다.

 류백언은 싸움의 결과를 일찍부터 직감했고, 그것은 결코 뒤엎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수로맹의 패배가 확실시 된 순간, 류백언은 배신을 선언했다.

 수로맹의 수뇌, 그것도 군사쯤이나 되는 자가 배반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싸움에 가망이 없다는 말이 된다. 흩어지고 탈주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신념이다.

 백무한이 죽을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보내서 미련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 꿈을 나누었던 이들이 후환을 생각지 않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백무한이 죽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의 배신은 곧,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쳤던 이들이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언젠가 다시 한번 같은 꿈을 꾸기 위해, 그러기 위해 류백언은 오욕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런 류백언이다.

 그런 그가 이제 백무한을 구하러 간다.

 도망자의 무리를 연사진에 모았을 때는 모두를 흩어 놓고 홀로 가서 백무한과 함께 죽을 마음을 품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청풍이 있다면, 그가 심심찮게 들리던 중원 풍문의 주인공이라면.

 비검맹주 휘하 세 명의 검존, 그리고 네 명의 검마가 포진한 그 절대사지(絶代死地)에서도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는 것이다.

 ‘빠져 나오지 못한다면 어쩌랴. 내 목숨은 이미 오래 전 맹주에게 바쳤던 것을.’

 류백언이 빠르게 선수를 틀어 강변으로 향했다.

 물살을 가르는 거센 소리를 듣고, 청풍과 매한옥이 경공을 멈춘다.

 손을 흔드는 류백언이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더 이상 비틀린 웃음이 아니라, 의리와 협이 살아 있는 미소였다. 그가 다가 온 청풍과 매한옥의 앞에서 가슴을 두드리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만났소. 아까의 무례는 진심으로 사죄 드리오.”

 털썩. 

 류백언은 무릎까지 꿇었다.

 무례를 사죄하고 생명의 부탁을 청하기 위해서다.

 그가 청풍을 올려보며 말했다.

 맹주를 도와달라고.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진심이 담겨있으니, 그것은 종전의 그와 정 반대의 모습이다.

 배신자. 

 헛소리다.

 주군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친다. 영광스런 이름도, 빛나는 명예도 모두 소용없다.

 지저분한 흙 밭이라도 무릎을 꿇고 걸어간다. 

 육손(陸遜) 백언(伯言).

 백언은 곧, 삼국시대 손오(孫吳)의 명장, 육손의 자(字). 

 그 시대를 초월한 이름의 일치 끝에, 수로육손의 명성을 얻은 남자가 여기 있었다. 청풍이란 또 한 영웅의 얼굴을 마주하는 수로육손 류백언은 이곳 장강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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