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일전함 아라한이 요동치는 동안, 만혼군도의 모도(母島)인 만혼도에서 벌어지던 최후의 결전은 결국 종국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겹겹이 에워싼 비검맹의 포위망 속에서 분투를 거듭하고 있는 수로맹이다.
끝까지 버티고 있는 수로맹 무인들은 불과 십여 명인 것에 반해, 비검맹 무인들의 숫자는 백 명을 훌쩍 넘어가고 있는 상왕이었으니,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무인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고수의 숫자에 있어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현재 수로맹에서 제대로 싸우고 있는 고수들은 단 세 명, 하지만 비검맹에서는 검존을 둘이나 투입했을 뿐 아니라 비외사마존이라 불리는 새로운 고수들을 세 명이나 동원했다. 거기에 더해 칠검마 중 두 명이 여기에 있었으며 다른 검존들과 나머지 칠검마들도 이 만혼도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억!"
"맹주! 부디 살아나가 주시오!"
하나 둘씩 죽어가는 수로맹 무인들이다.
쓰러지고 쓰러져 남은 것은 결국 세 사람뿐이었다. 그 세 사람. 비검맹이 그처럼 엄청난 병력을 만혼도에 집중한 것은 그 세 사람을 잡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셋이 죽으면 수로맹도 끝난다.
맹주를 비롯한 수로맹의 최고 전력들, 수로맹 무력의 핵(核)이 이 만혼도에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크흡!"
흰 고래 장백경은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성을 입 안으로 삼켜냈다. 물러나는 한 발 한 발이 천 근의 압력으로 느껴진다. 발목이 부서져 버릴 듯 흔들렸고, 발 뒤꿈치는 터져 나가 버릴 듯 아프다. 일격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쩌어엉!
늘 함께 해 온 병기, 강철로 만든 작살을 휘둘러 막아보았지만, 온몸이 찌릿찌릿 울려와 견디기 힘들었다.
봉두난발을 한 괴인.
괴인이 휘두르는 철장은 믿을 수 없이 강했다.
철장마존이라 불리는 비외사마존의 하나.
그가 바로 장백경의 상대였다. 오랫동안 비검맹과 싸움을 계속해 왔으면서도 바로 며칠 전까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자였다.
'이런 괴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수였다.
비외사마존.
비외(比外)란 곧, 비검맹의 바깥.
비검명의 밖에서 움직이며 드러나지 않았던 마두들이다.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장강의 대회전(大會戰)을 일시에 뒤틀어 버린 자들이 그들이었다.
쩌엉! 콰앙!
장백경의 장대한 체구가 단숨에 몰아쳐 오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땅을 짚고 어렵사리 균형을 잡는다. 근근이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도무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칠검마와는 달라! 이놈은 검존의 무공을 지녔다. 붉은 상어 놈이 당한 것도 이해가 돼.'
실종되어 버린 붉은 상어, 적상이 떠올랐다.
붉은 상어가 이끌던 적사환도대가 무너진 것도 이 철장마존의 출현 직후에 벌어진 일이다. 살아남은 적사환도대 대원들의 말에 의하면 적상이 당한 것도 이 철장마존에 의한 것이라 했다. 실제로 붙어보니 과연 엄청난 고수, 검존 수준의 무인이 나타났다면 적사환도대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위이이잉! 퍼어억!
무력으로 안 되는데 패배의 예감까지 들었으니, 싸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철장이 장백경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둔탁한 타격음을 터트렸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러 내력을 진탕시켰다.
쩌어엉! 뻐어억!
작살과 부딪쳐 슬쩍 틀어진 철장이 장백경의 오른쪽 어깨를 내려쳤다. 흐려지는 정신에도 본능적으로 올려낸 작살이 아니었다면 머리가 통째로 나갔으리라. 땅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작살을 휘둘러 보았지만 이미 그의 의식은 그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허우적거림에 불과한 몸놀림에 이어 흰 고래는 만혼도의 백사장 모래 위에 그 큰 체구를 누이고 말았다,
쿠우웅!
"고래 녀석아!"
그 바로 옆에서 싸우고 있던 자.
수로맹의 수석호법 황천어옹(黃天漁翁)의 외침이 강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구하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 역시도 다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무공이 측량키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여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생사가 갈릴 지경이었다.
따아앙! 따앙! 쩌저정!
황색으로 빛나는 낚싯대가 다가오는 희뿌연 방천화극을 막아내며 요란한 금속성을 울렸다.
황룡조간(黃龍釣竿), 조간(釣竿)이라 함은 곧 낚싯대.
황색의 비룡이 멋지게 새겨진 조간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현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장강에 은거한 숱한 기인들 중에서도 최고의 무인이라던 황천어옹의 상징, 황천어옹의 성명병기였다.
따당! 쐐애액!
황룡의 꿈틀거림을 희롱하기라도 하듯, 세차게 치고 들어오는 방천화극이 있다. 황룡조간도 인세에 보기 드문 기병이었지만, 희뿌옇게 움직이는 방천화극 역시 그에 못지않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운무화극(雲霧畵戟)이 그 이름이다. 천하 장인들 중 도철에 유일하게 근접해 있었다고 전해지는 병왕(兵王) 염 노사가 만든 신병이었다.
"대단하군. 그 정도 무공을 쌓았으면 한적한 호수에서 낚시질이나 하고 살았어야지, 왜 기어 나왔나? 그것도 수로맹 같은 곳에."
운무화극을 휘돌리며 말한다.
젊은 목소리, 청년에 가까운 얼굴이다. 비외사마존의 하나, 백극마존(白戟魔尊)은 그 장중한 무공과 어울리지 않게도 무척이나 젊어 보였다.
"어린 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그 얼굴에 마존(魔尊)이라는 칭호라니, 헤엄치던 잉어가 배를 까뒤집을 일이로다."
여유롭게 말을 받았지만 황천어옹의 심기는 극도로 불편한 상태였다. 아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이다. 철장마존에게 쓰러진 장백경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일어날 줄을 몰랐고,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백극마존 역시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칠검마 중 망산검마(亡山劍魔)를 쓰러뜨리고 맞이한 상대다.
황천어옹의 무력이 수로맹 최고를 논한다고는 하지만, 칠검마와 비외사마존의 차륜전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백극마존을 이긴다 해도 문제였다. 위쪽 언덕에서 분투하고 있는 백무한은 사검존(死劍尊) 회의사신(灰衣死神)과 혈검존(血劍尊) 귀왕혈존(鬼王血尊), 두 명의 검존(劍尊)을 맞아 경천동지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비검맹 무인들이 당장이라도 검을 들이댈 기세로 늘어서 있는 중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비외사마존 중 풍도마존(風刀魔尊)은 처음부터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채 벌어지고 있는 격전들은 구경하고 있었고, 가장 나중에 이곳에 당도한 칠검마 암연검마는 백사장의 퇴로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뚫고 나가기는 글렀음이다. 젊은 맹주여, 잠 못 이루고 뛰쳐나온 장강임에........ 그저 좋은 꿈을 꾸었으니 고마울 따름이구나.'
"하아압!"
황천어옹의 황룡조간이 강렬한 용틀임을 보였다.
이십이 수는 황룡조법의 초식들이 연환을 거듭하며 백극마존의 운무화극을 휩쓸었다. 굳건하게 버텨선 백극마존이 운무화극의 장봉(長棒)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황천어옹의 탄력 넘치는 공격들을 하나하나 차단했다.
휘류륙! 따다다다당!
백사장의 모래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번쩍이는 불꽃이 튕겨 나온다. 근접을 불허하는 사투, 상승 경지의 싸움이었다.
꽈쾅! 투웅!
황천어옹과 백극마존의 싸움이 상승 경지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면 백무한과 두 검존의 싸움은 상승의 경지를 넘어 초절정의 영역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언덕 위에 가득 찬 힘의 역장(力場)에는 모래 입자가 흩날릴 틈조차 없었다. 일타 일타에 막대한 공력이 깃들고, 부딪치는 충돌에 팔방의 공기가 요동친다. 십 장 안팎으로 누구 하나 다가들지를 못한다.
천하를 논하는 무공들의 겨룸, 만혼도 격전들의 백미였다.
터엉! 파라라라락!
삿갓을 눌러쓴 백무한이다.
그의 진각이 땅을 울리고 그의 손목이 이끄는 반선수가 하늘을 덮는다. 혈검존 귀왕혈존의 병기, 요검(妖劍) 천인혈(千人血)이 반선수의 소맷자락에 부딪치며 공력의 폭발을 일으켰다.
물러나지 않는 백무한의 신법은 소림신기 금강부동(金剛不動)이었다.
회의사신의 사령검(死靈劍)이 뒤따랐다.
회색 장포를 휘날리면서 날아드는 사신(死神)의 검은 무섭도록 빨랐다. 백무한이 두 손을 활짝 펴고 대력금강장을 내뿜었다.
쩌어엉!
사령검 검날과 손바닥이 마주치는데 강렬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신기였다.
백무한이 나한십팔수를 준비했다. 두 검존의 막강한 무공을 상대하면서 반격까지 시도한다. 귀왕혈존의 요악스러운 두 눈에 살기가 깃들고 회의사신의 무표정한 두 눈에 기광이 감돌았다.
위이잉! 파라락!
호쾌하게 땅을 밟으며 나한십팔수 좌조천답지(左朝天踏池) 일 초식을 펼쳐냈다. 소림사 입산 제자부터 배우는 나한십팔수지만 백무한이 펼치니 그것도 중원 정점의 신공이 되고 있었다. 사납게 날뛰던 귀왕혈존의 천인혈이 좌측으로 크게 비껴나며 그의 중단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다.
'지금!'
백무한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위도강, 엄청난 기세로 거리를 좁히고는 나한십팔장 전배산운(前排山雲) 일 초를 올려쳤다.
우웅! 쐐애애액!
아무리 크게 들어났던 허점이라도 귀왕혈존과 같은 고수에겐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검의 수급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전광석화와 같이 빠른 까닭이다.
쐐애애액!
벗어났던 천인혈이 되돌아오는 데에는 찰나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백무한은 소림의 실전무공을 권신의 아성으로 일궈낸 인물이었다. 방어로 돌아오는 찰나간의 시간보다 손을 뒤집어 관음청강수를 쳐내는 것이 더 빨랐다.
퍼어엉! 쿵, 쿵, 쿵!
혈검존의 몸이 세 걸음이나 밀려 나가며 깊디깊은 족적을 남겼다.
일 초식에 천 근의 힘이 실려 있는 격전이니, 그 정도 단타에도 내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상대가 혈검존 하나였으면 승부의 추가 백무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을 상황이었지만, 불행히도 백무한의 상대는 하나가 아니었다. 옆으로 짓쳐 든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완전한 사각을 노리고 찔러왔다. 방어가 불가능한 시점, 백무한의 옆구리를 내주고 무상대능력을 끌어올리며 그 스스로 창안한 비전절기인 십보무적을 전개했다.
촤아악! 꽈아앙!
영웅들의 승부에는 천운(天運)이 따라야만 한다고 했던가.
백무한의 옆구리가 길게 베어지며 진한 핏물이 쏟아졌지만 백무한의 십보무적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 애꿏은 강바람만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반 치, 아니 반의 반 치만 오른쪽으로 내쳤더라면 승부를 낼 수가 있었으리라.
'이것은 도리어 손해다. 위험해.'
일검을 전개하고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쇄도하는 회의사신이다.
회의사신, 역시나 검존들은 엄청나게 강하다.
검이 흐르는 궤도가 법식을 확고하게 갖추고 있으면서도 위급한 순간에는 본능이 살아 숨 쉰다. 백무한이 십보무적을 잘못 겨눴다기 보다는 회의사신의 회피속도가 눈부셨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파라라락! 파파파파!
소맷자락이 넓게 퍼지며 사령검을 막아낼 방어막을 만들었다.
소림절기 반선수다.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반선수에 얽히며 공력과 공력이 부딪치는 충격파를 내뿜었다. 연대구품 신법을 펼쳐 충격의 여파를 흩어내고 반격을 위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라한신권을 뻗어낼 의도였다.
'내력이 흩어진다. 기문혈이 손상됐군.'
옆구리를 베이면서 얻은 내상이다.
백무한은 아라한신권의 구결을 집어가면서 십보무적이 빗나간 또 하나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문혈 주변, 내력에 흐름에 느껴지는 미세한 장애가 그것이다. 회의사신의 반응속도도 속도지만 이 기문혈의 상세가 권력의 발출점을 흘려놓았던 것이었다.
'그것이 천운, 이 싸움의 천명이 내게는 없다는 것인가.'
한순간에 찾아온 망설임이다.
그 때문에 백무한은 아라한신권을 뻗어낼 기회를 놓쳤고 그것은 곧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순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선수가 있으니 사령검까지는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사이 관음청강수의 공력을 흩어내고 짓쳐 든 혈검존의 공격에는 완벽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챙! 촤아아아악!
아라한신권으로 사령검을 튕겨낼 수 있었더라면 혈검존의 천인혈 역시도 여유롭게 막을 수 있었으리라. 그것이 안 되니 연대구품의 신묘함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혈검존의 검술은 분산된 내력으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연대구품으로 삼 보 물러나는 백무한에게 이 보 더 치고 들어와 왼쪽 허벅지를 베어냈다. 위로 올라갔던 반선수 소맷자락이 방어를 위해 내려오는 찰나간의 틈새로 얻은 상처다. 혈검존에게 관음청강수를 격중시켰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돌려받은 것이다.
'부상만큼은 피했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로 나가야 한다.'
상승의 격전에서 부상이란 것은 가벼운 것이 되지 못한다.
사검존이나 혈검존 같은 고수들의 일격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격은 단순히 피륙을 다치게 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내력이 검날을 타고 들어오니, 상처 주변의 경혈을 파괴하며 진기의 흐름을 혼탁하게 만든다. 종이 한 장 차이로도 승부가 갈리는 싸움일진대 그 정도면 절재적인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입은 것과 같이 출혈을 일으키는 상처라면 더 더욱 말할 필요가 없었다.
터어엉! 콰콰콰!
힘을 다해 대력금강장 일격을 내쳤다. 싸움을 길게 끌면 불리하다. 문제는 검존들도 그것을 안다는 사실이었다.
대력금강장 경력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옆으로 빠지면서 세밀한 검격들을 뻗어온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력을 다한다고 했을진대 하물며 장강의 한 마리 신룡임에야 어쩔 수가 없는 법이었다.
쐐애액! 파각!
승부를 서두르던 백무한이다. 다급함이 허점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 옆을 치고 들어온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백무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눌러쓴 삿갓을 반으로 갈라냈다.
머리가 쪼개질 뻔한 일격. 조각나 덜어지는 삿갓 사이로 짧게 자란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이마에는 육 계인(六契印), 가려졌던 얼굴에는 가로세로로 길게 새겨진 흉터가 세 개나 있었다.
'죽는다, 이러다가는!'
머리 부근에 검공을 허용했다.
집중력의 저하다. 죽음의 문턱에 한발 들여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대로는 정말로 죽는다. 무상대능력을 있는대로 끌어올리고 상단전과 중단전을 최대로 열었다.
우우우우웅!
상단과 중단을 거친 진기가 하단전의 막대한 공력을 이끌고 두 손에 모여들었다.
전륜법광(轉輪法光)이다. 미완성인 십보무적이 언젠가 제 모습을 찾게 된다면 모를까, 지금까지 그가 지닌 무공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절기였다.
쒜에엑! 스각! 촤아악!
상승의 절기를 준비하면서 공력을 모으는데 그것을 가만히 둔다면 바보다. 금강부동신법을 펼치면서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사검존과 혈검존의 검공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결국 금강부동의 진결을 파고들어 와 보법의 투로를 차단해 버렸고, 기회를 잡은 귀왕혈존의 천인혈이 두 줄기 검상을 입혀놓았다.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펼쳤다. 합장하는 두 손, 이어 왼손으로 상반원, 오른손으로 하반원을 그려냈다.
위이이잉!
세상을 태우고 밝힐 전륜법왕의 광륜이었다.
유형화되어 몰아치는 내력의 톱니바퀴, 그러나 그 전개가 완벽하지 못했던 전륜법광은 제 위력을 안전하게 발휘하지 못했다. 위험을 직감한 회의사신과 귀왕혈존이 각각의 무상절기인 사령만천세(邪靈滿天勢)와 천인마혈(千人魔血)을 먼저 발동했던 까닭이었다.
버언쩍! 쩌저저정! 콰아아앙!
가라앉아 있던 모래밭이 일순간에 터져 나갔다.
구름같은 모래먼지를 일으킨다. 일 장은 족히 솟아나는 먼지구름이었다. 이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세 사람의 그림자.
놀랍게도 한 곳에 멈추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벌써부터 다시금 격렬한 경풍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꽈앙! 촤아악!
모험이었다.
그리고 그 모험은 실수였다.
어차피 돌파구가 없어서 한 모험이었지만 그 결과가 너무 나빴다. 백무한은 그 동안 계속되었던 고수들과의 싸움으로 인하여 그 절대적이었던 내공이 대폭 깎여 있었던 상태, 그런 와중에 전륜법광까지 전개했으니 무리수도 그런 무리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나마 비슷하게 유지했던 싸움의 균형이 완전하게 깨어져 버렸고, 여섯 군데나 검상을 입은 백무한에게는 더 이상 반격을 시도할 여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연대구품의 보법으로 활로를 찾으며 반격을 시도해 보지만 역전의 기회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맹주! 포기하지 마시오!"
아득한 정신으로 몸에 밴 무공만을 어렵사리 펼치고 있었다.
황천어옹의 걱정 어린 외침이 바람을 타고서 들려오는 중이었지만 거기에 화답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황천어옹 본인도 백극마존과 싸우고 있느라 손속이 어지러울 터, 그럼에도 백무한을 독려하기 위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마음에 분하여 이들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소림을 떠나온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힘의 열세(劣勢)가 아프도록 백무한의 가슴을 찔러대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보오. 황천어옹.'
질 싸움을 시작한 것 자체가 잘못이다. 후회하는 마음은 없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게다.
백무한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황천어옹을 만났을 때, 고집 쎈 노인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억지로 수로맹 호법에 세웠던 기억이 백무한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 동안 고마웠소.'
격전 중, 그 먼 곳에서 백무한의 웃음을 본 것인가.
아니다.
웃음을 보지 않았더라도 백무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무한의 죽음을 느낀 황천어옹이다.
황천어옹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쳐가는 황룡조간, 황룡조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파공성을 발했다.
쐐애애액! 따아아앙!
백극마존의 운무화극이 크게 튕겨 나갔다.
꿈을 지키려는 자.
가슴을 채우는 격동에 괴력을 발휘하는 것은 노인이나 젊은이나 다를 바가 없는 법이다. 일순간 타오르는 천명에 모든 것을 건다. 황천어옹의 몸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움직이며 백극마존의 전면으로 쇄도했다. 다급하게 운무화극을 되돌리는 백극마존이지만, 황천어옹의 공력은 이미 하늘의 뜻 그 자체를 품고 있었다. 회수하며 찔러오는 운무화극이 황천어옹의 어깻죽지를 길게 갈라놓고 있었지만, 황천어옹의 정신은 그 고통을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를 않았다.
빠악! 우직! 빠아아악!
황룡조간의 단타가 백극마존의 쇄골을 박살냈다. 그대로 내려오며 늑골을 부수고, 허벅지 뼈까지 부러뜨린다.
지금까지 비등한 싸움이었다?
천의(天意)가 함께하는 싸움에서는 누구든 일순간에 모든 것을 얻을 수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휘청 꺾여 앞으로 꼬꾸라지는 백극마존이다. 그의 몸을 타 넘은 황천어옹이 백무한을 향해 탕을 박찼다.
파아아아! 쐐애액!
황천어옹. 그 신법의 날렵함은 물 위를 달릴 정도라 전해진다. 순간의 도약으로 백무한과 두 검존의 전권에 진입했다.
따당! 카라라랑!
빛살처럼 파고든 황룡조간이 백무한의 가슴을 찔러가던 천인혈을 가로막았다. 혈검존이 두 눈에 새로운 살기를 떠올렸다. 천인혈과 얽혀 드는 황룡조간이 무서운 경력을 흩뿌렸다.
'괴물들......!'
혈검존이라면 백무한과 싸우면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텐데, 그런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전해오는 공력이 아직까지도 엄청났다. 건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검맹의 정점, 오검존의 공력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도 되는지, 그 밑바닥을 측량할 수가 없다. 혈검존 뿐이 아니다. 사검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사검존 회의사신은 혈검존보다 더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급변하는 전황에, 잠자코 있던 자들도 움직임을 시작한다. 팔짱을 끼고 있던 풍도마존이 허리춤의 도갑을 끌러내고 있었고, 장백경을 땅에 눕힌 봉두난발, 철장마존도 성큼성큼 황천어옹 쪽을 향하여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것은 애초부터 글렀구나. 이렇게 된 이상, 한바탕하고 기분 좋게 끝내도록 하자.'
"맹주, 기운 좀 내는 것이 좋겠소이다."
"기운이라....... 내 옆엔 대체 왜 왔소? 그 놈을 쓰러뜨렸으면 도망이나 칠 것이지."
"같이 죽으러 왔지 별수 있나. 늙은 자라가 꿈을 꾸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마당이오. 이렇게 맹주 옆에서 죽으려고 그토록 힘이 났었나 보외다."
초인적인 힘으로 백극마존을 쓰러뜨렸으면서, 그것을 오직 그의 곁에서 죽기 위함이라 말한다. 그것이 장강의 황천어옹이다. 모두가 한 물결 위에서 그치지 않는 꿈을 꾸고 있으니, 대해로 나가는 용왕의 자식들이다. 거기에는 무공의 고하도 연배의 차이도 부질없다. 몰려드는 고수들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려는 열혈의 남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장강 위의 남자들이되, 붉은 노을 가득했던 하늘은 결코 그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만혼도를 향하여 길을 여는 한 척의 쾌속선이 있었으니.
그 위에 탄 것은 청홍의 바람이라. 백사장으로 도약하는 그의 발길 밑으로 마침내 질풍의 신화가 열린다. 백무한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하는 자, 청홍무적검 청풍이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